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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원갑의 역사와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평해거사
풍류인열전(26) 양녕대군
황원갑 <역사소설가>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왕좌와 자유를 맞바꾼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인물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왕위를 두고 부자간이나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은 비일비재했지만 임금 자리가 거추장스럽다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좌의 칭호가 제왕이 되었건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었건 권력 추구의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비정의 드라마는 예나 오늘이 다를 바 없다. 권력투쟁뿐 아니라 금력, 곧 부의 세습을 두고 재벌가 형제들의 다툼이 우리 시대에도 걸핏하면 벌어져 뜻 있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 않은가.
양녕대군은 부왕의 뜻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있음을 눈치 채고 일부러 미친 척하여 절대 권력이 보장된 만백성의 주상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자유와 풍류를 찾아 대궐의 높은 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런 까닭에 왕조사의 국외자로서 주유천하로 일관했건만 왕관과 자유를 맞바꾼 그의 삶은 후인들의 가슴에 풍류가의 매력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국보 제1호 남대문의 본래 이름은 숭례문이데, 편액의 ‘崇禮門’세 글자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 관악산맥이 뻗어 내린 국사봉 기슭의 장승백이 약수터에 그의 묘소와 사당인 지덕사(至德祠)가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 한글을 만들고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명군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있기에는 큰형님 양녕대군이 세자 위를 미련 없이 물려주었기에 가능했다.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가보면 대왕의 왕자 시절 독서도가 전시되어 있다. 옛 그림은 아니고 근래에 그린 것이지만 단정히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읽고 있는 소년이 뒷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이고, 열린 창 밖에서 산지니(매)를 데리고 노는 데에 열중하는 두 소년은 양녕대군과 둘째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이다. 화가의 의도가 왜 충녕대군이 두 형을 제치고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데에 있다는 점이 금세 드러난다. 산지니를 어르며 노는 양녕대군의 모습에서는 나중에 팔도강산을 주유천하하며 거칠 것이 없는 풍류 행각으로 여유롭게 한 삶을 보낸 호방한 성품의 조짐이 엿보인다.
양녕대군은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아버지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강맹한 기상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힘도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잘했다고 한다. 양위가 되었건 폐위가 되었건 조선 초기사에서 양녕대군의 존재는 태조와 태종의 정권투쟁기와 세종과 세조의 왕권 확립기를 연결시켜 준 고리였다고 볼 수 있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으로 1394년(태조 3)에 이방원의 맏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때 태조 이성계는 60세, 방원은 28세로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4년 전이었다. 양녕대군이 태어난 그 해 태조는 새 왕조의 수도를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는 새 대궐인 경복궁을 짓고 성곽을 쌓았으며 서울의 이름도 한성이라고 바꾸었다. 그 무렵 이방원은 실의와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태조가 세상을 떠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인 자기 형제들을 제치고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낳은 일곱째 왕자 방석(放碩)을 세자로 책봉했기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 함흥에서 당시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방우(方雨)· 방과(芳果)· 방의(芳懿)· 방간(芳幹)등 네 형이 있었다. 방원은 장수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당대의 명현 원천석(元天錫)의 제자로서 문관으로 첫발을 내디뎌 1383년(우왕 9) 17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역사의 분수령이 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 그는 22세로 지금의 외무부 과장쯤 되는 전리전랑이었다. 송도에 있다가 아버지의 회군 소식을 들은 그는 재빨리 도망쳐 전답이 있던 포천으로 달려가 어머니 한씨와 동복형제들을 데리고 함경도로 달아나 숨었다. 그동안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해 우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부총리 격인 수시중이 되었으며 맏아들인 방우는 비서실차장 격인 밀직부사, 방원은 수석비서관쯤 되는 좌대언 자리에 앉혀 권력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아버지 이성계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권력투쟁을 벌이는 데에 환멸을 느낀 맏형 방우가 처가가 있는 해주로 내려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은 반면 방원은 아버지의 유혈혁명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색(李穡)· 최영(崔瑩)· 정몽주(鄭夢周) 같은 마지막 남은 고려조의 충신들을 숙청한 이성계가 1392년 7월 마침내 고려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개국했을 때 이성계의 나이 58세, 방원은 26세였다.
그 다음 달인 8월에 태조는 새 왕조의 첫 번째 세자로 막내아들인 방석을 책봉했는데, 그때 방원은 조상들의 무덤을 왕릉으로 정비하는 공사를 맡아 함경도에 있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개국에 공로가 가장 큰 자신을 제쳐놓고, 그것도 먼 변방으로 보낸 사이에 계모의 자식인 막내를 왕세자로 책봉하다니! 방원은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렸다. 맏아들 양녕대군이 태어난 것은 2년 뒤, 다시 2년 뒤에는 둘째 효령대군 보(補)가, 그 다음해에는 충녕대군 도(祹)가 차례로 태어났다.
그러나 1396년(태조 5) 왕후가 돌아가자 태조는 급속도록 노쇠하고 2년 뒤에는 세자빈 심씨(沈氏)가 아들을 낳자 마음이 더욱 약해져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나이도 이미 64세였다. 이방원은 만일을 대비해 심복인 이숙번(李叔蕃), 처남인 민무구(閔舞咎)· 무질(無疾) 형제를 비롯해 사람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1398년 8월 부왕이 병상에 누워 위독한 기회를 타 방원은 드디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하여 둘째 형 방과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임금으로 내세운 둘째 형 정종은 전혀 무력(無力)했고 무력(武力)을 장악한 방원이 모든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태조 이성계는 왕조를 일으킨 영웅이었으나 늘그막에 아들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변을 당하자 병든 노구를 이끌고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하고 말았다. 방원은 1400년(정종 2) 1월 바로 위의 형인 방간과 무력투쟁을 벌여 그를 숙청하고 2월에 스스로 세자가 된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형마저 쫓아내고 마침내 임금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태종이다. 그때 태종은 34세, 맏아들 양녕은 7세였다.
양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것은 1404년(태종 4), 11세 때였다. 일곱 살이건 열한 살이건 그 무렵이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느끼고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겠는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맞서고, 아버지와 삼촌들이 죽이고 죽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그는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아들에게 쫓겨나 떠돌아다니던 할아버지 이성계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태조는 꿇어앉아 뉘우치는 태종의 손을 뿌리치고 손자인 양녕의 손을 찾아 잡은 채 숨을 거두었으니 그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순간 15세의 세자 양녕의 가슴속에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권력의 비정함, 인정사정없는 정치극의 소용돌이에 진한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태종은 왕비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4남 4녀를 두었으며, 또한 숱한 후궁을 거느리며 8남 13녀를 보았으니 자식이 모두 12남 17녀, 29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를 닮았는지 모르겠으나 양녕대군 또한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호탕해져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양녕대군의 세자폐출사건의 이유로는 똑똑하고 성실한 막내아우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양광(佯狂), 즉 일부러 미친 척했다는 설과 어리(於里)라는 미인 때문에 일어났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407년 7월 열네 살 때에 양녕대군은 김한로의 딸을 맞아 성혼을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몰래 대궐을 빠져나가 말 달리고 활 쏘고 술 마시며 신나게 노는 일에만 열중했다. 나중에는 정도가 지나쳐 시중의 건달패와 기생들까지 동궁으로 끌고 들어와 술판을 벌였으니 이 소문이 부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부왕과 중신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둘째 효령대군은 더욱 근신한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공부에 열심이었다. 혹시나 형이 쫓겨나면 세자 자리는 내 차지라고 생각해서 였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그런 효령대군의 속셈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면박을 주었다. 형의 말 뜻을 알아챈 효령대군이 마침내 미련을 버리고 그의 뒤를 따라 세자 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효령대군도 인간인지라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 길로 절에 찾아가 분을 못 이겨 온종일 북을 치니 북가죽이 찢어져 버렸다. 그래서 속말에 ‘효령대군 북치듯한다.’는 이야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어리라는 여자는 양녕대군이 소문만 듣고도 선물을 보낼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리는 그때 지중추부사 곽정의 소실이었다. 1417년(태종 17) 어리가 서울 친척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은 좋은 기회라고 여겨 그 친척을 통해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는 이미 남의 부인인지라 그 선물을 받을 수 없노라며 돌려보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달아오른 양녕은 말을 달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가 다짜고짜로 말에 태워 동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노발대발했다. 세자의 측근을 모조리 엄벌에 처하는 한편 어리도 직접 불러 문초를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죄가 없었다. 태종은 다시 세자와 만나지 말라고 한 뒤 그녀를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리에 대한 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양녕은 그 뒤에도 부왕 몰래 어리를 만나 마침내 아이까지 낳게 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듣고 대노한 태종은 양녕의 장인을 나주로, 세자를 두둔하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으며,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목을 쳤다.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양녕은 부왕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고, 또 여자들을 무시로 궁에 출입시키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을 막으십니까?’
태종이 그 편지를 받고 분기충전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세자를 바꿔 치워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도 그때였다. 곧 중신들을 불러 세자 폐출을 결의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니 1418년 6얼이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죄인이 되어 경기도 광주로, 이천으로 유배를 당했다. 어리를 데리고 가게 해달라는 청마저 거절당하자 양녕대군은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타넘어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해 8월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부왕 태종과 아우 세종은 걱정이 태산 같아서 ‘양녕대군을 찾아오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군졸들이 어리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어리는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양녕대군은 아차산 바위틈에서 발견되어 대궐로 끌려왔다. 1422년(세종 4) 부왕 태종이 56세로 세상을 뜸으로써 부자간의 갈등도 막을 내렸다. 그때 양녕대군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양녕대군 3형제의 우애는 매우 두터워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기회주의자와 아첨꾼들은 있게 마련이어서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허물까지 들춰내 귀양을 보내자느니 죽여야 한다느니 참소하는 무리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세종은 이런 말로 과잉충성자들의 입방아에 쐐기를 박았다.
“원래 이 자리는 양녕대군이 앉을 자리가 아닌가. 한갓 민간의 필부라도 형제간의 잘못을 감춰주고 좋은 점은 추어주는 것이 도리요, 불행히도 죄를 지으면 하다못해 애걸도 하고 뇌물이라도 써서 모면토록 하는 게 형제간의 의리며 인정이거늘, 하물며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민간의 필부만도 못하게 한 분 형님도 도와주지 말란 말인가?”
한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여 자주 절을 찾고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에서 돌아오던 양녕대군이 꿩 토끼 노루 따위를 잡아 효령대군이 머물고 있는 양주 회암사에서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였다.
“형님! 살생을 금하는 불전에서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걱정 없으니 가서 염불이나 외라구.”
“……?”
“안 그런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될 텐데 무엇이 두려우랴? 허허허!”
이처럼 양녕대군은 세상을 거리낌 없이 호탕하게 살았다. 술과 여자와 명승을 사랑한 그의 풍류 기행에서 평양기생 정향(丁香)과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양녕이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아우인 세종에게 인사를 하자 임금이 이렇게 당부했다.
“평양은 예부터 색향으로 이름난 곳이라 혹시 형님께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부디 이번 행차에는 주색을 조심하시고 편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어찌 성려를 어지럽힐 수 있으리오. 상감께서는 너무 진념하지 마소서.”
그리고 길을 떠났는데, 세종이 몰래 평안감사에게 파발마를 띄워 이런 밀지를 내렸다. 양녕대군이 평양에 이르거든 대접을 잘 하되 특히 잘 모신 기생에게는 큰 상을 주고 은밀히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평양에 다다른 양녕대군은 감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대동강· 모란봉이며 능라도· 연광정· 부벽루 같은 명승고적을 두루 구경하며 다녔다. 그런데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빈 듯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무슨 까닭인고. 아하, 그러면 그렇지. 천하의 양녕대군 가는 곳에 술과 미인이 없으니 명승유람만으로야 어찌 풍류행이라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임금과 한 약속이 있으니 드러내놓고 여자 타령을 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었다. 그때 나타난 절색이 있었으니 곧 평양 명기 정향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정향에게 빠져 명승고적이며 산천경개는 그만두고 양녕대군은 나날이 날살같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운우지락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밤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정표를 간청하는 정향의 치마폭에 양녕은 이별의 시를 써주었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필치였다.
-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초대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눈썹에 어린 수심 저 거울은 알리라.
달빛은 어이하여 비단베개 엿보며
새벽바람 무슨 일로 휘장을 흔드는고.
다행히도 뜰앞에 저 향나무 서 있기에
봄뜻에 이끌려 그 가지 하나 꺾었노라. -
그러고도 여백이 남아 스스로 흥취를 못이긴 양녕은 이런 시도 덧붙였는데, 일필휘지하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훔쳐보며 정향이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이별 길에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떠나는 정자 위엔 조각달만 걸렸구나.
가련하다 잠 못이뤄 뒹구는 밤에
누가 있어 그대 수심 달래어 주리. -
양녕대군이 떠나기가 무섭게 평안감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이 귀중한 증거품인 치마폭을 대궐로 급히 올려 보냈다. 유람에서 돌아온 양녕대군을 위해 위로연을 베푼 자리에서 임금이 물었다.
“형님, 이번 길에는 주색을 삼가셨다지요?”
“아암! 냄새도 못 맡고 구경도 못 했소이다.”
“참으로 적적하셨겠군요?”
세종이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속으론 뜨끔했지만 양녕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아, 뭐 별로……, 그랬지요.”
그때였다. 병풍 뒤에서 풍악에 맞춰 이런 노래가 들려왔다.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초대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눈썹에 어린 수심 저 거울은 알리라. -
아니 이럴 수가! 양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노래는 내가 평양에서 정향의 치마폭에 써준 바로 그 시가 아닌가. 그러자 세종이 웃으면서 감춰두었던 문제의 치마를 보여주며 물었다.
“형님, 이건 뭐지요?”
얼굴이 붉어진 양녕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 다음 이렇게 둘러댔다.
“아, 뭐 그런 게 다 있었구먼!”
그리고 두 형제는 마주보며 큰 소리로 한바탕 웃어댔다. 결국 세종의 배려로 정향은 양녕의 후실이 되었다.
그동안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놀기만 좋아하여 글공부를 게을리 했고 장성해서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내 폐위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는 사실 당대의 명필이요, 문장가였으며 학문이 깊은 천재였다. 단지 그런 사실을 가슴 속 깊숙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아서 아버지인 태종도 잘 몰랐을 뿐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세종이 성덕이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위에서도 그가 글을 잘 하는 줄 몰랐다. 늘그막에 양녕이 어떤 스님에게 써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 산허리에 들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 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
외로이 바위에 누워 잠자니 다만 한층 탑과 같구나. -
아무리 글 잘하는 문장이라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할 것이다.
양녕이 비록 덕을 잃어 폐세자가 되었으나 미친 척하고 자취를 감추어 호방하게 지낸 일은 실로 태백(泰伯:주문왕의삼촌)의 행동과 같다. 지금 남대문의 편액 숭례문 석 자는 그의 필적이니 굉위(宏偉)하고 뇌락(磊落)하여 그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해오는 양녕대군의 필적은 남대문의 편액‘崇禮門’ 석 자와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 8곡 병풍 목각판 두 가지 뿐이다. 그의 글씨는 마치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 웅휘롭기 그지없다.
1450년 세종이 재위 32년 만에 54세로 세상을 떴을 때 양녕대군은 57세였다. 이어서 즉위한 문종이 병약하여 2년 3개월 만인 1452년 5월에 39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뜨고 겨우 12세의 어린 단종이 뒤를 이었다. 조정에는 또 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453년 10월에 야심만만하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충신을 무참히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데에 이어, 다시 2년 뒤 6월에는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니 그가 세조이다.
이때 세조의 백부인 양녕대군은 62세로 왕실 종친 가운데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당시 양녕대군은 어린 단종을 외면하고 조카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다. 그가 무슨 심사로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세의 풍류남아 양녕대군은 1462년(세조 8) 음력 9월 6일 69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양녕대군은 정실에서 3남 4녀, 측실에서 7남 11녀, 모두 10남 15녀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임종 시 그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고 전한다.
“내가 죽거든 호화로운 예장(禮葬)을 받지 말고 묘비도 상석도 만들지 말며 검소하게 해라.”
꾸밈없는 천성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한세상을 살다 간 양녕대군은 지금 서울 동작구 상도 4동 221번지 장승백이 약수터로 알려진 국사봉 기슭에 잠들어있다.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과 한때는 세자빈이었던 수성부부인 김씨(隋城府夫人金氏)의 묘 앞에 있는 묘비는 1915년에 새로 세운 것이고, 본래의 비석은 1910년 8월 28일 경술국치 전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지는 바람에 두 동강으로 깨어졌다고 한다. 정부 수립 후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李承晩) 박사도 전주이씨 양녕대군파로서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다.
한편, 양녕대군에 이어 왕위의 미련을 버린 그의 아우 효령대군은 불도에 전념한 덕분인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다가 1486년(성종 17) 90세로 세상을 떴으며, 묘소는 서초구 방배동 청일사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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