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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
본 문 | 빌립보서 1장 1~11절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
일 시 | 2024 11 17 추수감사주일 |
저는 때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서귀포에도 그럴듯한 교회가 많이 있는데 이분들은 어찌해서 이 보잘 것 없는 교회를 섬기는 것일까? 그럴 때마다 저는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뭐 하나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사역에 전념하지 못하고 여러분처럼 생업에 종사하면서 목회를 하니 당연히 여러분들에게 그만큼 사랑을 전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집중하지도 못합니다. 죄송스럽고 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전에 사모가 주일 애찬을 준비할 때 아주 거나하게 차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밥 먹으러 온 것 아니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 교회에 뭐 볼 것이 있느냐? 그러니 먹는 거라도 잘 드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 사모의 지론이었습니다. 사모는 요즘 외식할 때도 가능하면 좋은 것을 많이 시킵니다. 좀 말리고 싶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그냥 둡니다.
먼저 저는 본문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잘 것 없는 종, 성 목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주드림교회를 섬기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가족들에게 감사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께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여러분이 이제까지 제주드림교회를 섬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처럼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왜냐하면 여러분이 제 마음에 있음이며, 복음을 전함에 여러분이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제 증인이십니다.
제가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게 하셔서 여러분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을 전함에 앞서 가난하고 작은 개척교회를 늘 사랑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합니다. 가난해서 불행하고, 감사할 줄 몰라서 불행합니다. 가난하기에 모자라고 불편하며 눌려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늘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기에 불행합니다. 결국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불행합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만족해하는 마음입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부자라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부자라도 불행합니다. 어쩌면 부자일수록 더 감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끝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제 친구 중 한 친구는 경기도 오산 근처에서 종이 박스 공장을 합니다. 수 백 명 직원에게 일 년에 한 번 추석이면 과일 한 상자씩 가정으로 택배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년 동안 해마다 이렇게 선물해 왔는데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는 과일 상자 선물하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요. 사장이 종업원에게 추석을 맞아 선물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적 관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 수고, 내 공로의 결과로 주어진 것인데,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인데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내 공로가 아니라 내 수고로 인함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은 공로를 거저 받음으로 구원을 입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저는 한 주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과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숱하게 던졌습니다. 불행히도 아니었습니다. 감사할 때보다는 불평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훨씬 많았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을 내 친구 회사의 종업원처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으시고, 제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길 정도로 착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습게 여기고 살아온 저입니다.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좀 더 좀 더 하고만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교만해도 예사 교만하지 않는 무뢰한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주시면 더 이상 안 주셔도 됩니까?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비 안 새고 아담한 예배당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당을 주시면 제가 만족할까요?
아니요! 그러면 좁은 강대상 대신 넓직한 강대상, 그리고 빵빵한 음향시설, 아마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저는 하나님께 늘 불평불만을 할 것이고 설령 주신다고 해도 만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도해도 안 주시니 안 주시는 것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성도가 많이 모여서 찬송을 드리면 그 찬송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신나는 찬송을 부를 때면 바닥과 천정이 쩡쩡 울리도록 뛰면서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한 백 분 정도 더 오시면 제가 만족할까요? 아니요.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찬송드립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감사가 없어요. 이상하게도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욕심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러니까 더 감사가 없지요. 은혜로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는 자신을 제어하는 자요, 가장 참된 자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자요, 가장 행복한 자는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함이 없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면 끝도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장미를 보고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가시나무에 장미꽃이 피었구나'하고 아름답게 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왜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내 신세는 이 모양이지?”라고 하면 행복할 수 없고 감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면 됩니다. 부자면 부자라서 감사하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감사하면 됩니다. 자식이 있으면 있어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면 됩니다.
자식이 있어서 다 좋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사는 삶도 지나치면 자신의 삶이 위축되고 불행해집니다. 논 팔고 밭을 팔아 자식 공부시킨 사람 중에 나중에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아는 친구 중에는 아예 자식 낳기 포기하고 자식 키우는 돈과 정성으로 세계여행도 정기적으로 다니고 누릴 것 누리며 사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누릴 수 있으면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누리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기에 깨달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은혜 안에 있는 나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런 상황에서 무슨 감사가 있겠냐 하겠지만, 우리는 인생살이 어떤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우리는 노래합니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바 그것을 철저하게 감사하고 보면 모든 것에, 주변의 모든 관계에, 모든 환경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오늘의 본문인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만도 기쁨이라는 말을 16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3,4절)"
이 말씀을 거꾸로 한번 뒤집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원망이고 기도할 때마다 불평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합니까? 무엇을 생각하든지 생각만 하면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생각해도, 가정을 생각해도, 교회를 생각해도, 자녀들을 생각해도, 모든 일에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시다.
교회가 비가 새도 감사합시다. 비가 새기에 우리 성도들이 한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당 없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요? 성도가 작은 것도 감사합시다. 성도가 만 명이면 시어머니도 만 명이랍니다. 저는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단 몇 분이지만 세상이 아무리 내 눈앞에서 뒤집히고 흔들린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믿음을 가진 분이니 제가 아쉬워할 이유가 없지요. 작으면 작은 대로 은혜가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괴로움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 멀리 빌립보교회를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 빌립보 교인들의 아름다운 지성과 헌신을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서 이대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빌립보 교인들이 성장하는 믿음을 보면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도 제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러분을 생각하면 기쁨과 감사함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납니다.
'생각할 때마다'라는 말은 '항상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어쩌다가’가 아닙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 이것을 생각해도 저것을 생각해도, 모든 일이 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또한 감사는 기쁨의 간구로 이어집니다. 감사하며 또 기도합니다. 아침마다 잠시 기도할 때 저는 여러분을 기쁜 마음으로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주님께 한 분 한 분 기도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작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어쩌다가’가 아니라 늘 말입니다. 해주시는 분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잘 안 하시는 분은 지금부터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 '감사함으로 기도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 기쁨, 축복, 은혜--사실 이 단어들의 어원은 다 같습니다.
감사하기에 기쁘고, 기쁨이 있기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니 축복 받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여건이 우리를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감사하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에서, 은혜는 다시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감사 그릇이 클수록 거기에 담기는 은혜도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야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매사에 불평이고 불만인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남도 불행하게 합니다.
내가 불평하고 불만으로 얼굴을 찡그리면 옆 사람도 화가 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됩니다.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은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습니까?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고맙다고 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보십시오. 감사하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쁨이 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올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쭈빗쭈빗하겠지만 큰맘 먹고 일부러 “고맙다”고 해보세요.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 익숙해집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나중에는 세 사람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됩니다. 이방인 그것도 포로가 바벨론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벨론 사람들이 이를 질투 시기하여 어떻게든지 다니엘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왕 이외 다른 어떤 것에 기도하든가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사자 굴에 던져 죽일 것이다. 우리는 왕만 섬기고 왕만 찬양한다'--충성을 빙자해서 이런 조서를 만들었습니다.
언뜻 보면 왕에게 충성서약을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다니엘을 곤경에 빠뜨리는 절묘하고 악독한 계략이었습니다. 왕이 아닌 하나님을 경배하고 절하며 기도하는 다니엘이 바벨론 왕을 거스르는 반역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사랑하는 바빌론 왕은 이 조서의 숨은 뜻도 모르고 옥새를 찍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다니엘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사형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6장 10절을 보세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보세요. 임금의 명령서에 임금의 도장, 옥새가 찍혔습니다. 내가 오늘 기도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슨 기도? 예 감사의 기도입니다.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감사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감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감사드립시다. 감사가 일상화하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에 조금 감사하는 듯하다가 좀 나쁜 일이 생기면 또 원망합니다.
이것 원망, 저것 원망, 하늘 원망, 땅을 원망, 자기 자신도 원망합니다. 이것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원망과 불평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감사기도 드리고, 외롭고 힘들 때마다 감사찬송을 드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감사할 줄 아는 이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도 하지도 못합니다. 감사하게 될 때 곧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 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 될 때 모든 원망과 불평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감사함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원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순간 나는 사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내 영혼이 감옥으로 떨어지는 시간입니다.
오직 감사함으로만 나를 괴롭히는 마귀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모든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게 될 때 그는 온전한 자유인으로 모든 일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주드림교회 여러분이 늘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