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문(宣義問)
[방목정보]
[오류신고]
[무과]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壯元]위(1/31)
이명(異名) 선의문(宣義門)【補】(주1)
이명(異名) 선의문(宣義文)【補】(주2)
자(字) 여회(汝晦)
생년 무신(戊申) 1548년 (명종 3)
합격연령 38세
본인본관 보성(寶城)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1명 [甲3‧乙5‧丙23]
전력 정(定)(주3)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선적(宣迪)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강령현감(行康翎縣監)
[처부(妻父)]
성명 : 김석남(金錫男)【補】(주4)
본관 : 광산(光山)【補】
[주 1] 이명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내의 급제 기록과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내의 급제 기록에는 무과 장원명이 "선의문(宣義門)"으로 나오는데, 오류임. 『보성선씨일이파상계(寶城宣氏一二派上系)』를 참고.
[주 2] 이명2 :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내의 급제 기록에는 무과 장원명이 "선의문(宣義門)"(門一作文)으로 나오는데, 오류임. 『보성선씨일이파상계(寶城宣氏一二派上系)』를 참고.
[주 3] 전력 : "정로위(定虜衛)"를 간략하게 표현. 정로위:1512년(중종 7)에 처음 설치되어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병종(兵種). 지방의 한량을 선발‧조직하였고, 내금위(內禁衛)의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필요에 의해 설치되었음.(『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 4] 처부 : 『보성선씨5현행적(寶城宣氏五賢行蹟)』(국립중앙도서관[古2510-118]) [수사공행장(水使公行狀)]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만력13년을유추식년문무과방목(萬曆十三年乙酉秋式年文武科榜目)』(전의이씨(全義李氏) 전산군파(全山君派) 이왕섭(李旺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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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선조 29년 병신(1596) 4월 9일(을사)
29-04-09[02] 사간원에서 낙안 군수 선의문이 용맹이 없는 겁장이이므로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낙안 군수(樂安郡守) 선의문(宣義問)은 임진란이 일어난 초기에 공주 판관(公州判官)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영로(嶺路)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적이 이르기도 전에 풍문을 듣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가 용맹이 없는 겁장이임을 알 수 있으니, 연해의 중요한 지대를 다시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역)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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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선조 32년 기해(1599) 윤 4월 6일(갑신)
32-윤04-06[01] 유격 이천상을 접견하다
유격 이천상(李天常)이 왔다. 【수병(水兵)의 유격이다. 이덕형(李德馨)의 장계 내용에 탐욕스러워 일로에서 작폐한 자라고 한 인물이다. 사사로이 남방 백성을 시켜 자기 공을 칭송하게 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상이 시어소에 나아가 접견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
“귀국이 8년 동안 침략을 당해 피해가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조(天朝)의 힘을 의지하여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외다.”
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
“조선은 대국의 속방이니 군대를 출동시켜 와서 구원한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지금은 동방의 일이 완료되었기에 속히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고금도(古今島)에 있을 때 군민이 다 유임을 원했으므로 이제야 올라왔습니다.”
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의문(宣義問)의 정장(呈狀) 1통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저는 털끝만치도 피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뒤처리를 맡은 수병의 장수로 저와 계 유격(季遊擊)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계 유격은 부모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만야(萬爺)에게 간청하여 이미 철수를 허락받았고, 제가 해상의 일을 전담하여 거제도와 남해도 사이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라올 때 보니 일로에 인기척이 하나도 없고 고을의 수령들이 다 산으로 도망가 버려 저도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으니,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일을 이루겠습니까? 【천상이 이르는 곳마다 침해와 포학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버렸다.】 수병의 양식이 떨어진 지도 이미 오랩니다. 속히 군량을 발송하여 구제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변방 신하로 하여금 독촉하여 운송하게 했소이다.”
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
“귀국의 풍토가 절강(浙江)보다 아름답고 농사짓는 풍습도 절강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국의 풍토가 어찌 절강과 비교나 되겠소이까.”
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
“제가 지난해 왜적과 싸울 때 죽을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니, 어찌 오늘 다시 대왕을 뵐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초 군문이 여러 장수의 말을 들어 순천(順川)에 일개 부대를 파송했더라면 행장(行長) 또한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석만자(石蔓子)는 저의 군영에서 사로잡은 것으로 다른 장수는 공이 없습니다. 천조에서도 가정(嘉靖) 35년에 귀국에 한 것과 다를 바 없이 왜적이 절강 변방을 침범하여 분탕질하고 살륙을 자행하였습니다. 제가 영남과 호남의 토지를 보니 매우 비옥하였는데 몇 해만 경작하게 되면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백성들을 유념하여 부흥을 도모하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가르쳐 주시니 과인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하였다. 주례가 끝나고 상이 예물 단자를 증정하니, 받았다.
사신은 논한다. 난리 이후로 기강이 무너져 접대하는 즈음에 입시한 신하들이 권태로운 표정을 지은 자가 많았으며 용안을 지척에 대하고서 태연히 웃고 떠들어대었다. 우리 나라를 예의지국이라고 칭송하였던 것이 이에 이르러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니 한심하다고 할 만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윤수 (역)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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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7년 갑진(1604) 4월 2일(임오)
37-04-02[03] 허성 이하 16명을 임명하다
허성(許筬)을 예조 참판으로, 이집(李㙫)을 군기시 정으로, 박지진(朴知進)을 군기시 부정으로, 권진(權縉)을 홍문관 교리로, 유시행(柳時行)을 사간원 정언으로, 유순익(柳舜翼)을 병조 좌랑으로, 이진언(李眞彦)을 사헌부 감찰로,
이정표(李廷彪)를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원사립(元士立)을 김해 부사로, 강수곤(姜秀崑)을 괴산 군수로, 이진선(李振先)을 전라도 도사로, 여대로(呂大老)를 대구 판관으로, 이욱(李郁)을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유정립(柳挺立)을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조색(趙穡)을 수성 찰방(輸城察訪)으로, 김극제(金克悌)를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삼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역)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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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선조 37년 갑진(1604) 7월 15일(갑자)
37-07-15[02] 적선과 싸워 공을 세운 이정표 등에게 가자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정표(李廷彪)가 장수들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원근의 섬들을 두루 순찰하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는데, 군율(軍律)을 엄하게 하고 외양으로 이동해 싸워서 한 배에 탔던 적을 죄다 죽여 34급(級)을 헌괵(獻馘)했고 중국인과 우리 나라 사람 및 왜노도 사로잡았으니, 공적이 가상합니다. 장수들 가운데에 발포 만호(鉢浦萬戶) 김성옥(金成玉),
전 부사(府使) 선의문(宣義問)은 한마음으로 일을 함께 하여 목숨을 걸고 힘껏 싸웠으니, 그 공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또한 가상합니다. 그밖에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도 모두 해조로 하여금 급속히 상고하여 규례에 비추어 논상(論賞)하게 하고,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모두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도록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소서. 군사에게 음식을 먹여 위로하는 일은 통영(統營)과 마찬가지로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만 은전(恩典)에 관계되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위에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이정표는 가자(加資)하라. 또 근신(近臣)을 보내어 군사에게 음식을 먹여 위로함으써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고, 김성옥ㆍ
선의문에게도 모두 가자할 것인지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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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 / [丁酉]十一月
初一日戊子。雨雨。夕。北風大吹。達夜搖舟。人不能自定。
初二日己丑。陰。下坐船滄監造橋。因上新家造處。乘昏下船。
初三日庚寅。晴。早上新家造處。宣傳官李吉元。以裵楔處斷事入來。裵楔已至星州本家。而不往于彼。直來于此。其循私之罪極矣。
初四日辛卯。晴。早上新家造立處。珍島郡守宣義卿來。
初五日壬辰。晴。暖如春日。早上新家造處。靈巖郡守李宗誠來。炊飯三十斗。饋役軍。且言軍粮米二百石,租七百石備之云。○是日。使寶城,興陽。看造軍粮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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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 / [戊戌]十月
初一日癸丑。晴。都督曉到劉提督處。暫時相話。
初二日甲寅。晴。卯時進兵。我舟師先登。至午相戰。多致殺賊。蛇渡僉使逢丸戰亡。李淸一亦爲致死。薺浦萬戶朱義壽,蛇梁萬戶金聲玉,海南縣監柳珩,珍島郡守宣義卿,康津縣監宋尙甫。中丸不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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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9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맑음
01-09-10[27]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절의를 위해 죽는 사람에 대해 포상(褒賞)하여 높이고 권장한 것은 비단 충성스러운 혼과 꿋꿋한 넋을 위로하여 답할 뿐만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니, 실은 나라를 위하여 풍교를 세우고 강상을 부지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을 당하여 충성을 바치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 한두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지마는 열성조에서 훈공을 기록하고 충성을 포상하고 시호를 내려 주고 작위를 증직해 주는 은전도 갖추어 주었으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공적은 서로 비슷하나 포상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나라에서 베푸는 은전에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이며 공의(公議)가 얼마나 애석해하고 탄식할 일이겠습니까.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열읍(列邑)이 와해될 즈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선비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는데, 만약 그중 가장 이름난 이를 말한다면 증(贈) 영의정 김천일(金千鎰), 증 좌찬성 고경명(高敬命), 증 좌찬성 최경회(崔慶會)가 이들입니다. 세 신하는 모두 백수(白手)로 의병을 일으켜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 후일에 수복하는 기초가 되었으니, 그 공과 그 절개가 어찌 참으로 우뚝하고 빛나지 않겠습니까. 선묘(宣廟)께서 즉시 훈공을 기록하라 맹부(盟府)에 명하시고 또 사원(祠院)에 편액을 반사하라 명하시어 높이고 장려하는 은전을 일체 균등하게 시행하였으니, 증시(贈諡)하는 은전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세 사람이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고(聖考)께서 임어하시던 날에 김천일과 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의 은전을 받았는데 유독 최경회만 고르게 은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경회의 후손이 영체하여 김천일이나 고경명 두 신하와 같이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여서 성상께서 두루 살펴 주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신들이 삼가 엎드려 생각해 보니, 최경회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성품은 충과 효를 온전히 지키고 학문은 밝은 스승의 질정을 받았으며 한 번 벼슬길에 나온 후에는 문무의 재주를 온전히 해서 명성과 덕망을 쌓았습니다. 왜구가 처음 쳐들어왔을 때 이광(李洸)의 군대가 공주(公州)에서 무너지고 황영(黃永)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 왔는데 김천일은 멀리 기보(畿輔)를 향하고 있고 고경명은 금산에서 죽었으니 호남 백성의 목숨이 거의 어육이 되었습니다. 최경회는 그때 어미의 상중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추대하니 상복을 입고 시의를 좇아 변통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싸움에 임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구구한 사정과 예는 돌아볼 것이 없다.’라고 하며 궤연(几筵)에 절하고 동남으로 격문을 전하니, 달포 안에 갑자기 큰 진을 이루게 되어 밤낮으로 군사를 움직여 장수(長水)에 나아가 주둔하니 왜노(倭奴)가 듣고 영남으로 물러나 의거하였습니다. 최경회가 의병들과 힘을 합쳐 싸워서 개령(開寧)의 적을 막아 냈습니다. 선묘(宣廟)께서 전교하시기를 ‘영남의 우계(右界)와 호남 한 도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이 사람의 공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고 특별히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하였습니다. 적병이 진주(晉州)를 포위하자 어떤 이가 그 형세를 보고 진퇴하여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기를 권하였는데, 최경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성이 보존되면 내가 존재하고 성이 없어지면 나도 죽는다. 참으로 이렇게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에 9일 밤낮을 적과 대항하며 적병을 여러 번 물리쳤는데 외부에서 구원병이 끊어지고 내부에서는 병기와 군량이 다하여 일이 이미 글러지자 북쪽으로 향하여 재배하고 이르기를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한 번 죽음으로 보답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의연히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개 의병을 일으킨 이래 도처에서 이겨서 우리 군사에게 사기를 더해주고 적을 좌절하게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주(茂州)의 전투에서 한 적장이 등에는 족자 한 개를 짊어지고 손에는 8척의 언월도(偃月刀)를 잡고 앞길을 막고 있자 최경회가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을 쏘자마자 거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등에 지고 있던 것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손수 제하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위에 시를 쓴 것으로 바로 그 왜노가 우리나라에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최경회가 죽을 때에 신임하던 막료에게 그 칼과 그림을 손수 주며 그 형인 최경장(崔慶長)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으로 표지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칼과 그림은 지금까지도 최경장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으니 그 한결같은 충성과 장한 공렬은 혁혁하여 마치 어제의 일과 같아서 천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할 것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에 천장(天將) 오종도(吳宗道)가 전쟁에서 죽은 장사들을 위해 지은 제문에 ‘최공이 군사를 벌이고 병기를 빛내 위엄을 보이니 왜노들이 더욱 어렵게 여기고 꺼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선묘께서 듣고서 전교하시기를 ‘천장이 칭찬하고 왜노가 어렵게 여기고 꺼리었으니 이름이 삼국을 진동시킬 만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또 문려(門閭)를 정표해 주셨으며 관리를 보내 치제하고 그 사당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셨고,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좌찬성을 더 증직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셨습니다.
아, 최경회의 충절이 이미 저와 같고 열성조에서 높이 포창하신 것이 또 이와 같은데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신들이 때에 맞춰 아뢰어 청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충성을 포상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은전을 더욱 급선무로 하시니 신들이 이에 서로의 기쁨을 이야기하며 발을 싸매고 천리 길을 와서 대궐 아래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 신하의 충성은 일체 공이 같다는 것을 믿어 살펴 주시고 또 신들의 말이 공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채택하시어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은혜로운 시호를 특별히 내려 주시어 포상하고 높이는 은전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신들은 여기에서 강개해 마지않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계의병장(繼義兵將) 최경장은 바로 최경회의 형입니다. 7세에 능히 ‘까마귀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라는 시를 지어 향당에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연이어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명성과 공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마침 상중이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몸에 상복을 입고 있어 임금의 행차를 호위할 수 없다.’라고 하며 곧 아우 최경회와 함께 뜻을 합쳐 향읍에 효유하여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조카인 지평 최홍재(崔弘載)를 시켜 고경명의 군대가 있는 금산으로 달려가게 하려고 했는데, 금산의 병사가 패하자 최경회는 슬픔을 참고 대장이 되고 최경장은 머물러 궤연을 지켰으니 그들이 책려하고 계획을 세워 적을 막고 저지하려는 계획은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습니다.
계사년(1593) 6월에 최경회가 진주에서 의롭게 죽자,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슬픔을 둘 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근력이 쇠진하지만 오히려 분연히 동생을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에 최경회의 남은 무리를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들과 맹세하며 영남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대로 행조(行朝)에 글을 올리고 도내에 격문을 전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주군(州郡)에서 향응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고 비변사에서 그 뜻을 아뢰기를 ‘아우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이 또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키니 옛사람에게서도 그 짝을 찾기 드문 경우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며 그날로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고 계의병장의 인수를 겸하여 주며 면려하셨습니다. 또 본도의 감사에게 전교하시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으며 또 해당 관사에 전교하시어 관문을 만들어 감영과 본진(本陣)에 나누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 신하의 충성과 의로움은 본디 성패(成敗)와 사생(死生)을 가지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그 당시에 의에 맞게 처신했느냐와 마음씀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지금 이 최경장이 동생이 죽은 뒤에 이어 떨쳐 일어나 노년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킨 것이 어찌 늠름하게 대의를 우뚝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처음에는 조카를 시켜 금산으로 달려가 구원하게 하려 하고, 중간에는 동생을 진주에서 의롭게 죽게 했으며, 결국에는 자신도 이어서 일어나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충용장이 쓸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 당당한 충의의 기개는 마땅히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차등을 두어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최경장에게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워 충성을 다하게 두었더라면 그 성패와 이둔(利鈍)을 비록 미리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가 장차 최경회가 죽은 자리로 달려 나가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또 삼가 들으니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 본도의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에게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베푸시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에 같이 향사하라고 하셨다 합니다. 대개 박광옥은 창의하는 병사를 처음 일으켰으며 청을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의병에게 준 공이 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가 죽은 절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성고(聖考)께서 오랜 뒤에 추가로 장려하여 포상하신 것이 오히려 저렇게 더욱 융숭합니다. 하물며 최경장이 전후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고 모은 군사를 위촉하여 최경회와 김덕령의 공적과 절개를 이루게 한 것이 어찌 박광옥보다 못하겠습니까. 포장하는 은전이 유독 미치지 않은 것을 신들이 강개하고 분통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최경회에 대해 올린 상소에 부득불 나란히 충성을 바친 형제의 아름다운 일을 진술하여 작질을 증직하고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기대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굽어살피시고 모두 윤허하여 후생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이 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두 신하의 충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문정공(文靖公) :
원문은 ‘文正公’인데, 《목은고(牧隱藁)》 〈조선목은선생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에 근거하여 ‘正’을 ‘靖’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 본진(本陣) :
원문은 ‘本陳’인데, 전사하는 과정의 오류로 보아 ‘陳’을 ‘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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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집(錦溪集) 노인(魯認)생년1566년(명종 21)몰년1622년(광해군 14)자공식(公識)호금계(錦溪), 금리(錦里)본관함평(咸平)
선조 | 37 | 1604 | 갑진 | 萬曆 | 32 | 39 | 6월, 統相 李慶濬, 副正 魯鴻 등과 唐浦에서 倭船을 격파하다. 〈勝戰圖〉를 하사받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40 | 全羅道 呂島 萬戶로 재직하면서 軍政을 잘 다스려 按問使 閔汝任이 칭찬하는 장계를 올리다. ○ 겨울, 倭賊이 講和를 청하자 〈沼吳策〉을 올려 반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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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19년 을묘 > 9월 14일 > 최종정보
정조 19년 을묘(1795) 9월 14일(임술)
19-09-14[05] 내각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서(全書)를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명하고, 이어 전서를 인쇄할 비용을 하사하였다.
○ 이에 앞서 내각의 신하에게 명하여 이순신의 전고(典故)와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을 완성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가 되어 편찬하여 올렸다. 전교하기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8책을 교정하여 편찬해서 올렸으니, 내각에서 40건을 인쇄하여 들이게 한 뒤에 10건은 서고(西庫)에 보관하고, 또 각 1건씩을 5곳의 사고(史庫), 홍문관, 성균관, 순천(順天) 충민사(忠愍祠), 해남(海南) 충무사(忠武祠),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 강진(康津) 유사(遺祠), 거제(巨濟) 유묘(遺廟), 함평(咸平) 월산사(月山祠), 정읍(井邑) 유애사(遺愛祠), 온양(溫陽) 충효당(忠孝堂), 착량(鑿梁) 초묘(草廟)에 나누어 보관하고, 나누어 줄 것은 32건을 인쇄하라. 이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편찬할 때에 누차 부지런히 자문(諮問)하였으니, 이것을 인쇄할 때에도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한다. 지금 내탕고(內帑庫)의 전(錢) 500민(緡)과 어영청의 전 500민을 내려 주니, 전서를 인쇄하는 비용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주-D001]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서(全書) : 정식 서명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로, 1795년(정조19)에 정조의 명으로 이순신의 행적과 유고를 모아 간행하였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2] 순천(順天) 충민사(忠愍祠) : 순천부(順天府)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 동쪽에 있다. 처음에 본영(本營)의 교리(校吏) 박대복(朴大福)이 조그마한 사옥(祠屋)을 지었다가 1601년(선조34)에 이항복(李恒福)이 통제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보성 군수(寶城郡守) 안홍국(安弘國)이 배향(配享)되어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3] 해남(海南) 충무사(忠武祠) : 해남현 용정리(龍井里)에 있으며, 1652년(효종2) 호남 유지들이 세웠다. 통제사 유형(柳珩), 영유 현감(永柔縣監) 이유길(李有吉)ㆍ이계년(李桂年) 등이 배향되어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4]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 통제영(統制營) 세병관(洗兵館)의 서쪽에 있다. 1606년(선조39)에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운 것으로, 1663년(현종4)에 해남의 충렬사와 함께 같은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5]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 남해현(南海縣) 노량(露梁)에 있다. 1658년(효종9)에 통제사 정익(鄭榏)이 세운 것으로, 1663년에 사액을 받았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6]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 : 아산현(牙山縣) 동쪽에 충무공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있다. 1704년(숙종30)에 충청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사당을 세웠고, 1707년에 사액을 받았다. 이순신의 조카인 강민공(剛愍公) 이완(李浣)과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이 배향되어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7] 강진(康津) 유사(遺祠) : 강진현(康津縣)의 남쪽 고금도(古今島)에 있다. 이순신이 명(明)나라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1666년에 유비연(柳斐然)이 중수(重修)하고 두 사람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배향하였다. 이후 관왕묘의 뜰에 있어 사액을 받지 못하다가 정조가 1781년(정조5)에 어필(御筆)로 탄보묘(誕報廟)라는 액자를 내려 주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8] 거제(巨濟) 유묘(遺廟) : 거제부(巨濟府)에 있으며, 통제사 이운룡이 세운 이순신의 사당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09] 함평(咸平) 월산사(月山祠) : 함평읍(咸平邑) 동쪽에 있다. 1712년(숙종38)에 고을 사람들이 이덕일(李德一)의 사당을 세웠는데‚ 1731년(영조7)에 충무공과 이덕일의 옛 사적이 당포(唐浦)에 있으므로 당포에서 멀지 않은 월산(月山) 아래로 옮기고 충무공을 주향(主享)으로 삼았다. 배향된 인물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이덕일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10] 정읍(井邑) 유애사(遺愛祠) : 정읍현(井邑縣) 남쪽 진산리(辰山里)에 있는데, 1681년에 이순신이 정읍 현감을 지냈다고 하여 고을 사람들이 만든 사당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11] 온양(溫陽) 충효당(忠孝堂) : 정퇴서원(靜退書院)이 온양군(溫陽郡) 남쪽 설아산(雪峩山)에 있는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제사 지냈다. 이곳 왼쪽 편에 충효당이 있어 충무공 이순신을 충(忠)으로‚ 창암(牕岩) 강봉수(姜鳳壽)와 양심당(養心堂) 윤현(尹俔)을 효(孝)로 모셔 제사 지냈다. 후에 충효당이 무너져 정퇴서원에 합사(合祀)하였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주-D012] 착량(鑿梁) 초묘(草廟) : 거제부의 착량에 있다. 왜적(倭賊)이 물러간 뒤 해상의 군인과 백성들이 충무공의 충절에 감동하여 초가집을 짓고 공을 제사 지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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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김은정 (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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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집 제23권 / 행장(行狀) / 모헌 임공 행장〔慕軒林公行狀〕
공의 휘는 영립(英立)이고, 자는 사웅(士雄)이며, 호는 모헌(慕軒)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충간공(忠簡公) 성미(成味)의 후손이며, 성균 진사(成均進士) 욱(
)의 손자이다. 가정(嘉靖) 45년 병인년(1566, 명종21)에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질이 남다른 데가 있었고, 골상이 우뚝 빼어나 보는 사람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말을 배우자마자 문예에 남달리 뛰어나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절로 알고 있던 것 같았고,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인 10세쯤에 이르러서는 이미 신동(神童)이라는 칭찬이 있었다. 15세 무렵에는 근력을 겸비하여 고을에 알려졌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길 때면 얼굴빛을 기쁘게 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16세에 부모상을 당하자 예에 맞게 상례를 치렀으며 날마다 묘소에 가서 살피고 쓸면서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었는데,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춥거나 더워도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일가붙이들과 인근 사람들이 그 부지런함을 딱하게 여겨 여막을 짓고 지내기를 권하니 “나는 여막생활을 했다는 명성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사람들이 더욱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며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상복을 벗고 나서 관례(冠禮)를 치렀는데 우뚝하게 큰 장부의 풍모가 있어 단정하고 엄격하며 침착하여 결코 용력(勇力)만 있는 모습이 없었다. 마침내 글공부하는 틈틈이 무예를 익혀 말타며 활쏘는 것이 귀신처럼 민첩했고 병법서(兵法書)를 거의 두루 암송했으나 끝내 역시 무인(武人)의 기색은 없었다.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23) 가을, 홀연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 행장을 꾸리자 글공부를 같이하던 벗 모두 “그대는 글공부가 뛰어난데 어찌 이를 버리고 무과를 보려고 하는가. 비록 무과에 급제하더라도 문과에 합격한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사람은 각기 뜻이 있는데 그대들은 하필 이처럼 강요하는가.”라고 하자, 당시 사람들은 공이 세상일을 잘 모른다며 많이 기롱하였다.
다음 해 2월,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당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제 막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고 있었다. 공이 길에서 마주치자 말에서 내려 이야기를 나눴는데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매우 잘 맞아 그대로 함께 여관에 묵으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헤어질 때가 되자 충무공이 탄식하며 “남아(男兒)가 서로를 알아주는 데는 이르고 늦음이 없네. 앞으로도 서로 잊지 말도록 하세.”라고 말하니, 공이 작별 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무예를 더욱 부지런히 익히자 사람들은 또 물고기를 잡은 뒤 통발을 수리하는 꼴이라며 많이 기롱하였다.
당시 공은 26세였는데 다음 해인 임진년(1592)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급히 행장을 꾸려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과 함께 곧장 이공(李公)의 진영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길을 나서기 이틀 전 이공이 마침 사람을 보내왔는데, 서로 맞이하여 명령을 전하면서 그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자 고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며 물었다. 공이 그제야 작년에 길을 오던 중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니, 사람들은 비로소 이공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에 놀라며 탄복했고 또한 공이 이공에게 인정받은 것을 대단하게 여겼다. 이공이 훗날의 업적이 탁월하고 위급한 환난에 죽을힘을 다할 사람을 얻은 것은 본시 유래가 있었던 일이다.
공이 도착하자 이공이 매우 기뻐하며 항상 같이 잠을 자고 함께 작전 계획을 세웠다. 공이 자신을 지기(知己)로 대해 준 것에 깊이 감동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이공이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을 저버리지 않고자 하며 오히려 공명(功名)은 그다음 일로 여겼다. 그리하여 옥포(玉浦) 승전부터 노량(露梁)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11차례나 승리하면서도 계속 군막을 떠난 적이 없었다. 군진 안에서는 작전 계획에 참여하고 출전해서는 앞장서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여러 번 위태로운 지경을 당했어도 조금도 후퇴하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입으로 왜적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공로를 떠벌려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때문에 계속해서 소소(小少)한 관직에 제수됐는데 그때마다 사양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진영 안에서는 이 때문에 더욱 대단하게 여겼다.
이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바닷길에서 지휘할 때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군(魚君 어영담(魚泳潭))에게 힘입은 덕분이다. 진영에 임해 변화무쌍한 계책을 세우고 화살과 포를 무릅쓰며 사졸들의 선두가 되어 온 군사가 죽음을 잊게 한 것은 실로 임군(林君)에게 힘입은 덕분이다. 또 임군 같은 재능과 용기로 만약 큰 임무를 맡았다면 그가 이룰 공훈과 업적에 나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또한 이공의 겸양하는 미덕뿐만 아니라 공의 사람됨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공이 비로소 영남 지방을 구원하러 갈 적에 어공(魚公)을 선두로 큰 계책을 결정하여 가덕도(加德島) 앞바다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 뒤 기이한 공로와 뛰어난 공적은 하나가 아니라 매우 많았다. 마침내 이 공로로 상을 내리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켰으나 오히려 훈록(勳錄)에는 빠졌으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쪽 고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러니 임공같이 그저 한낱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녹훈(錄勳)됨으로써 변방을 지킨 공로에 보답한 은전 역시 괴이할 것 없으니, 또한 더러 홀로 큰 나무 아래로 물러나 겸양한 데서 말미암은 소치인가. 또한 뜻있는 선비들이 천추의 눈물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그 뒤 조정에서 남쪽의 왜적 침입을 매우 경계하고 또 일을 주관할 수 있는, 국량이 있으며 문무를 두루 갖춘 장사(壯士)를 선발하여 연안 진영(鎭營)에 배치해 둠으로써 순찰과 체포에 대비했는데, 공 또한 그 선발 명단에 들어갔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당포(唐浦) 앞바다에서 통제사(統制使) 이경준(李慶濬)을 따랐는데 갑자기 많은 적선(賊船)과 맞닥트리자, 공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뱃전에 서서 크게 호통 치며 “내가 지난날 노량의 거북선에서 선봉장을 섰던 임영립이다.”라고 하였고 왜선 수십 척을 크게 쳐부수었다. 승첩을 보고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기며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의 계축(契軸)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큰 공을 세운 40명에게 하사하였다. 공은 단지 벼슬의 서열이 낮아 제7등을 차지하고 함평(咸平)의 수령 정도로만 벼슬이 올랐으니, 아, 또한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이른바 첫 번째는 권세라는 경우가 어찌 아니겠는가.
또 공은 약관의 젊은 나이에 문필이 높은 경지에 올랐으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수 있는 날에 이를 부끄러워하여 남몰래 무예를 익혀 마침내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공을 만난 잠깐 사이에 이공이 자신을 진정 알아본 것에 감동하여 혼란한 국난에 목숨을 바치려고 하면서 따르는 바를 잃지 않고 초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홀로 7척의 몸으로 만 번 죽고 백 번 전쟁하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찍이 한 번도 머리를 돌려 물러난 적이 없어, 마침내 큰 공훈을 도와 이루었으며 나라의 명운을 되살렸다. 그야말로 집을 떠나기 전에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이 있었고, 집을 떠난 뒤에는 온 힘을 바쳤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당시 임금의 은혜를 온몸으로 받으며 공에게 의지하여 국난의 시기에 살아났으면서 일이 끝난 뒤 아름다운 포장(襃奬)을 과시한 자와 비교해 본다면 필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풀이 우거진 적막한 곳에 그저 〈승전도(勝戰圖)〉 한 축(軸)만이 먼지 쌓인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평소 뜻을 생각해 보면, 비록 어떤 분이었는지 모른다고 해서 돌아가신 뒤에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았겠지만, 공의 자손들이 쇠잔하여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현양할 수 없으니, 어찌 끝없는 유감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양성 이씨(陽城李氏)이고, 무덤은 해남(海南) 양하동(陽下洞) 서쪽 기슭 사좌(巳坐 서북북향)에 있는데 합장하였다. 후손 정악(禎岳) 보(甫)가 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 주었다. 나는 예전에 보았던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승전도〉가 실려 있는 노홍(魯鴻) 장군의 가장(家狀)을 증거로 삼으면서 더욱 그분의 훌륭함을 밝혀 마침내 행장을 지어 보낸다.
[주-D001] 어군(魚君) : 어영담을 가리킨다. 어영담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옥포 해전에서 공을 세워 159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기사를 보면 옥포 해전 당시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이 수로(水路)에 앞장서서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왜란 당시 어영담의 공로에 관한 내용은 조경남(趙慶男)이 저술한 《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임진년 상(壬辰年上)〉에 실려 있다.[주-D002] 큰 나무 …… 소치인가 : 이는 겸양의 미덕을 의미한다. 《후한서》 권17 〈풍이열전(馮異列傳)〉에 따르면, 후한 광무제 때의 장수 풍이(馮異)가 서로 공로를 자랑하는 여러 장수와는 달리 홀로 큰 나무 아래로 물러가 있곤 했으므로 군중(軍中)에서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주-D003] 임금이 …… 하사하였다 : 노인(魯認)의 《금계집(錦溪集)》 권8 〈당포승전도 제명(唐浦勝戰圖題名)〉에 따르면 임영립을 포함한 28명의 명단이 나오며, 위백규가 쓴 〈노 부정의 당포승전도 뒤에 부록한 서〔書魯副正唐浦勝戰圖後附錄〕〉가 있다.[주-D004] 노홍(魯鴻) : 1561~1619. 자는 여신(汝信)이며, 본관은 함풍(咸豐)이다. 노량해전 때 선봉장으로 크게 승리하여 2등에 녹훈됐으며 관직은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이르렀다. 심하(深河) 전투 당시 같은 장흥 사람 변덕일(卞德馹)과 함께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출정했다가 전사하였다. 《錦溪集 卷8 副正魯公墓表陰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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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3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175수
당포의 정자에서 임 상사와 이별하다〔唐浦亭上別林上舍〕
잔 들고 객 전송하매 혼은 녹으려고 하고 / 送客含杯魂欲消
정자 위에 올라 보니 가을 기운 쓸쓸하네 / 登臨秋氣正蕭條
내년 되어 삼춘 봄에 만나자는 그 약속이 / 休將來歲三春約
앞강 오는 조수만도 못하게는 하지 마소 / 不及前江一夜潮
[주-D001] 당포(唐浦)의 …… 이별하다 : 당포가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지금의 당진(唐津) 근처를 가리키는 듯하다. 임 상사(林上舍) 역시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혹 동명의 내형(內兄)인 임류(林溜, 1602~1680)를 가리키는 듯도 하다. 임류는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징(士澄)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끊고 충청도 신창(新昌)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은거하였다. 《藥泉集 卷15 生員林公墓誌銘》[주-D002] 내년 …… 마소 : 내년 봄에 만나자는 약속을 강으로 올라오는 조수가 제때에 올라오는 것처럼 반드시 지키라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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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게 밉보여 군수 그만두고 은거함, 미움받은 이유 -- 관아에 좋은 말이 있었는데 감사가 달라고 하자 왜구 대비용이라서 줄 수 없다고 하니 딴일로 엮으므로 즉시 그만두고 귀향함
6. 명량과 노량해전에 참전한 선의문조차도 <호남절의록>에 없다.고 했는데 선의문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참전한 기록은 제시되지 않았고, 왜교성전투부상, 상이군경국가유공자이긴 하나 <호남절의록>에 수록되고 않고는 편찬자의 역량문제이지 비난거리는 아님. 편찬자가 모를 수도 있고 자손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서로 관심밖이었을 수도 있고 누구 잘못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가지고 비난할 필요는 없음
7. 이규필 씨가 자료를 만든 각주가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되어버렸다.고 했는데 결과는 왜곡이지만 고의성은 없었고 오히려 문헌고증에 충실한 셈인데 잘하지 못한 흠결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암 송시열의 5대손이며 조정의 산림, 대학자로 막강한 권위자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에게 <南陽宋氏雙忠墓碑銘>을 받아냈으니 권위를 갖춘 셈이다. 이 비문에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에 임명되고 명량해전에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고 하였으니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누가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송환기가 귄위가 있는 대학자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는 없고 진도군선생안을 보지도 못했으니 문헌고증이 부실한 것을 어찌 책할 수 있겠는가.
송덕일이 정유재란 참전유공자이고 진도군수를 지낸 것도 사실인데 연대가 틀리고 과찬이 들어간 것일 뿐이다. 자손들이 제대로 기록을 갖추어 비문을 의뢰하지 못한 일차 책임이 있다. 진도군도 이 비문에 의거해 서술했으니, 근본이 틀린 것을 어찌 파악했으랴. 너무 힐난할 일이 아님
기록은 끊임없이 착오와 실수가 발생한다. 발견하여 바로잡고 보충하면 된다. 시정을 촉구했는데 외면하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잘 모르는 사람을 힐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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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문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닙니다.ㅎ 살아남았죠.
맞습니다.옳바른 지적입니다.
선의문은 1597.7월에 진도군수로 부임하여 1600.2.28에 임기만료로 돌아갑니다.
제가 글을 급히 쓰다가 제대로 확인 못한 실수가 있군요.
송덕일은 1605년 11월 10일에 진도군수로 제수되어 조정에서 1606년 12월 14일에 파직이 결정되었고,1607년 정월에 파직되어 떠났죠.
조정 또는 비변사의 군관이 진도 현지에 도달하여 명령을 전달한 것이 보름이상 걸렸죠.
송덕일은 정유재란때는 전라감사 황신의 별장을 했죠.진도군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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