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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과 이건 그리고 학령인구 감소로 끝내 격랑의 현대사를 극복하지 못한 채 폐교가 된 도산국민학교.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산골 학당에서 우리는 농암 선생과 퇴계 선생과 육사 선생의 고매한 얼과 혼과 기상을 흠모하며 아름다운 정신문화를 유산처럼 물려받았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잃어버린 구 교가를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찾아내어 10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단장시켜 다시 바라보니 그 감회 감개무량하도다. 아! 잊혀진 백 년사의 도산골 학당, 그리운 도산국민학교 교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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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국민학교 교가의 변천 역사
[개교 이래 1918.3.3~1969 : 구 교가 1절 가사]
※ 작사ㆍ작곡 : 원래 미상은 아닌데 알 길이 없다.
"동방에 추로향과 남방에 산수경을
원근이 흠모하는 유래 깊은 우리 학교
그 이름이 도산이라네 아아 빛나는 도산"
[1970~1993.3.1(이후 폐교) : 신 교가 1절 가사]
※ 이원주 작사ㆍ오동열 작곡
"영지산 푸른 꿈 가슴에 심고
낙독강 유유한 힘을 받는다
아아 도산 성스럽고 거룩한 이 땅
높으신 뜻 기리 이어 역사 빛내리
올바르고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 도산 착한 어린이 나라의 꽃들"
이상 기술한 것은 도산국민학교의 구 교가와 신 교가의 노래 가사이다. 교가의 가사가 이렇게 바뀌게 된 연유는 아마 옛 교가의 노랫말이 너무 난해하고 부르기가 어려운 관계로 시대 상황에 맞는 경쾌한 4/4박자 형태의 신 교가를 새롭게 작사ㆍ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개교 이래 1918.3.3~1969년까지 부른 구 교가의 1절 가사에 얽힌 내력을 소상히 고찰해 보기로 한다.
안타까운 것은 작사ㆍ작곡을 한 분이 원래는 있었겠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작고하신 듯하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토계에 있던 구교정이 수몰되어 단천으로 교사를 급히 지어 신교정을 만들었지만 이 또한 파란의 현대사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93년 결국 폐교된지라 구 교가는 이제 영원히 알 수가 없는 미상으로만 남았었다. 하지만 60년대 초에 졸업한 도산골 선배님 가운데 필자의 문학산책(♧도산국민학교의 개교기념일을 기리다)을 읽으시고 용하게도 구 교가를 기억하신다며 연락을 보내주신 참으로 고마운 인연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이 선배님께서 육성으로 부르시는 구 교가를 어렵겠지만 조만간 녹음해와서 아내와 함께 음률을 다듬어서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선배님은 구 교가의 1절만 기억할 수 있다고 하셨다. 기억에는 2절도 있었다고 했다). 그 작업이 성공리에 매듭지어진다면 우리는 머잖아 70여 년 전에 사라진 구 교가를 다시 듣게 되는 큰 기쁨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개교 이래(1918.3.3)~1969년까지 불렀던 구 교가의 1절 가사를 해석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가사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위에 구 교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선배님께서 필자에게 건넨 말씀을 되짚어 보면 "구 교가가 왜 바뀌게 되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그 당시 우리가 교가 가사를 외워서 따라 부르기는 했지만 원체 노랫말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불렀다네." 구 교가는 이러한 속사정을 안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 지금부터는 반세기 훨씬 이전에 사라진 구 교가의 가사를 상세히 파헤쳐 보기로 한다.
"동방에 추로향과 남방에 산수경을 원근이 흠모하는 유래 깊은 우리 학교 그 이름이 도산이라네 아아 빛나는 도산"
구 교가에서 등장하는 동방에 "추로향 즉, 추로지향(鄒魯之鄕)"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추로향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와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를 함께 가르키는 말이다. 다시말해 "예절을 높이 받들고 학문을 숭상하는 지역"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추로지향을 뜻하는 곳은 바로 우리들의 고향인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골과 퇴계 선생의 제자들인 일곱 군자(君子)들이 살았던 동네인 와룡의 오천마을 그리고 고려 말 때 성리학을 중국에서 처음 도입한 안향 선생의 고향인 영주 순흥 마을이다. 순흥에는 주세붕 선생이 1543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있다. 백운동서원은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1543(중종38)년에 세운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이다.
백운동서원은 당시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 선생이 조정에 건의하여 1550(명종5년)년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현판과 더불어 중앙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는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개칭했다. "소수(紹修)"라는 명칭은 '허술해진 교육과 학문을 다시 새롭게 이어서 닦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퇴계는 제자들과 함께 와룡 오천마을("군자리"라는 이름이 붙은 외내마을) 앞 강변의 운암사에서 노닐기도 했다. 운암사가 있는 운암곡은 도산구곡(陶山九曲) 가운데 일곡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퇴계의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ㆍ1543~1620)가 안동부사일 때 "오천마을은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할만큼 추로지향의 동네였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을을 "군자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모두 수몰되었으며 후손들이 35번 국도변인 와룡 인근에 오천 "군자마을"을 조성하여 그 전설을 재현해 놓았다. 실제로 와룡면 군자리길 주변에는 "오천 유적지" 안내판과 함께 자연석에 "군자리"라고 쓴 표석이 있다고 한다.
도산골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산구곡은 현재 도산오곡까지는 완전히 수몰되어 만경창파가 되었다. 도산구곡은 운암(雲巖ㆍ군자마을), 월천(月川ㆍ월천서당), 오담(鰲潭ㆍ역동서원), 분천(汾川ㆍ분강서원), 탁영담(濯纓潭ㆍ도산서당), 천사(川砂ㆍ월란척촉지회), 단사(丹砂ㆍ갈선대), 고산(孤山ㆍ고산정), 청량(淸凉) 등을 일컬으며 와룡 오천마을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역행하며 순차적으로 형성된 비경 지대를 말한다. 도산구곡 가운데 추로지향과 연관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서당과 서원과 정자가 풍성하게 운집해 있다. 하지만 퇴계가 제자들과 거닐었던 운암사는 안동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 지역이 되어 터 조차도 찾아볼 수 없으니 그저 허망하고 무상할 따름이다.
도산구곡은 낙동강 상류를 중심으로 설정된 절경 지대를 말하고 퇴계구곡(退溪九曲)은 토계를 중심으로 퇴계의 흔적과 발자취가 서려 있는 지역이다. 토계는 청계와 온계가 합해지는 쌍계 지점인 합강에서부터 상계(웃토계)와 하계 지역 일대를 말한다. 쌍계부터 하계까지를 퇴계천이라고도 한다. 유년시절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도산골 사람들은 하계지역을 보통 토계라고 불렀다. 필자의 고향인 분강촌(부내 또는 분천동)은 수몰 전 도산구곡 가운데 사곡에 해당하는 분천 지역(농암 선생 후손들의 세거지)이며 본 문학산책의 주인공인 도산국민학교의 위치는 육곡 지대인 천사(내살미) 마을을 가기 전인 하계마을에 있었다. 퇴계의 후손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ㆍ1768∼1844)이 지은 "퇴계구곡" 가운데 도산국민학교가 위치했던 지역은 일곡인 사련진(絲練津ㆍ의인 앤떼이 여울 위 낙강이 적수되어 있던 지점)과 이곡인 양진암(養眞庵ㆍ퇴계 묘소 아랫 지대) 사이에 있었다.
도산구곡은 중국 남송 때 성리학의 창시자이자 집대성자인 주자(朱子ㆍ朱熹 : 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서 구곡이란 말은 "아홉 개의 골짜기에서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줄기"를 뜻한다. 도산구곡은 작자(作者)가 많아서 특정인이 명명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퇴계의 후손인 이이순(李頤淳ㆍ1754~1832)의 "후암집(後溪集)"에서 그 내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도산골(도산면)은 낙동강 상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산구곡 45리 가운데 비경과 명승지가 가장 많이 운집한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 물이 비로서 강다운 강이 되어 흐르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퇴계가 사색하며 걷던 퇴계의 오솔길이자 그가 친구인 벽오[碧梧ㆍ농암의 차남 이문량李文樑의 호이다. 퇴계와는 죽마고우이다. 부내 송티 좌측 산너머 수루뫼(수림뫼)에 묘소가 있다. 수몰 전 유년시절, 가을에 시사를 지내기 위해 종친 어른들을 따라 산소에 종종 간 기억이 있다. 그때 산소에서 받아먹은 음복의 맛은 비할 데가 없는 진미였다]에게 보낸 시에서 이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 외경의 길이기도 한 "예던길"은 칠곡인 단사(단천, 대사, 대세)에서부터 구곡인 청량까지의 십 리 길을 말한다. 이곳은 도산구곡 가운데서도 백미인 선경지대이다. 그리고 단사의 아랫 동네인 천사는 이른바 예던길로 들어가는 삽지껄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듯 도산구곡은 모든 지역이 추로지향의 향기가 가득히 배어 있는 성리학의 성지나 다름없는 동네였다.
다음은 교가에 나오는 "남방의 산수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남방은 동남아 지역을 가르킨다. 남방 불교의 근원은 석가세존이 태생한 남아시아인 인도 지역이다. 남방 셔츠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남방지방의 사람들이 입는 소매 없는 짧은 와이셔츠 옷을 우리는 어릴 때 남방이라고 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날씨가 무덥고 습해서 남방 같은 옷이 출현했을 것이다. 남방의 산수경이라는 말은 곧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즉,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인 산수경을 의미한다. 여기서 남방은 동남아지역을 말하지만 실제로 인도는 지도상에 남아시아에 속한다.
구 교가 노랫말 속에 "원근이 흠모한다"는 것은 '멀고 가깝고 친하고 친하지 아니하고를 떠나 모두가 공경한다'는 뜻이다. 즉, 원근친소(遠近親疏)와 관계없이 흠모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근간 정신이었으며 우리 도산골 퇴계 할배에 의해 만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 기반하여 도산국민학교의 옛날 구 교가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사람이 공경하는 동방(東方)의 추로지향(鄒魯之鄕) 정신과 남방(南方)의 산수경(山水經)의 정신을 추구하고 이어 받은 유서 깊은 빛나는 도산국민학교"라는 뜻이다. 실제로 도산서원에 가면 옛날 입장권을 받던 곳에서 30여 미터 들어간 지점의 모퉁이 오른쪽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큰 비석이 있다. 이는 지난 1980년12월8일,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원장으로 추대되면서 남긴 휘호이다.
1970년대 이전에 불리어졌든 도산국민학교의 구 교가는 극히 짧은 가사 속에 이렇듯 난해하고도 심오한 사상과 철학과 정신과 학문 등이 포괄적이고도 함축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거의 경구에 가까운 노래 가사였다. 국민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들 차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리학의 고매한 철학적 사상과 불세존의 지존한 경전이 깊이 흐르는 형이상학적인 노랫말이자 노랫가락이었다. 하지만 망망대해로 변한 전설 속으로 도산국민학교도 옛사람도 교가도 도산구곡의 절반도 한때 잠시 머물렀던 현세의 인연을 죄다 묻은 채 태초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 1909년 문을 연 도산국민학교의 전신인 진성이씨 문중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의 모습이다. 1918년 도산골 토계리 99번지에 지번을 정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서 개편, 편입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도산국민학교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75년에는 안동댐 수몰로 단천 신교정으로 이건한 후, 1993년 74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보문의숙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1918.3.3) 되기 직전인 1916년 10월경에 촬영한 사진이다(작가 미상).
♤ 도산국민학교 본관(1960년대ㆍ토계 구교정)
♤ 도산국민학교 별관(1972년ㆍ토계 구교정)
♤ 도산국민학교 운동장(1974년ㆍ토계 구교정)
♤ 도산국민학교 단천 신교정과 주변의 가을 풍광이다. 안동댐 준공으로 토계 구교정이 수몰된 관계로 1975년 단천 신교정으로 이건했으나 18년이 지난 1993년 3월1일 폐교되었다. 사진1~2, 중앙 파란 건물이 학교 전경이다. 사진은 폐교 후 2천년대 모습이다. 사진2~3, 오른쪽 강물 위 층암절벽(갈선대)의 정상이 한국 저항시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이육사의 "절정"의 시상이 잉태된 곳이다. 사진4는 갈선대만 확대한 전경(사진1~3, 출처 : 58회 졸업생 "이동운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4는 필자).
♤ 도산국민학교[1970~1993.3.1(이후 폐교) 신 교가 1절 가사 원본] : 2023년 10월21일,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이동채 선배님(54회 졸업생)께서 필자의 수필 "가을 깊은날 도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1972)"를 읽으시고 옛날 신 교가 가사가 적혀 있는 원본을 보내주셨다. 교가를 작사하고 작곡하신 분의 존함까지도 들어있는 완벽한 것이었다. 필자와 아내가 완성된 가사를 가지고 음률을 다듬어서 수몰로 폐교되어 잊혀진 신 교가를 35여 년 만에 재현해서 불러 보았다(제일 아래 영상물 탑재).
♤ 도산국민학교 로고(logo)
♤ 1981년 여름이 지나가는 어느날 도산국민학교 58회(1977) 졸업생들이 단천 신교정에서 가진 동창회 모습이다. 왼쪽 상단 "우리학급의 자랑"이라는 글씨 아래 도산국민학교 로고(logo)가 선명히 보이고 있다. 동창회를 가진지 12년 후인 1993년3월1일 도산국민학교는 안동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 환경의 여파와 저출산 및 이농현상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됐다. 앞줄 왼쪽 첫 번째부터 심용철, 김순희, 조선희, 필자... 두 번째줄 왼쪽부터는 권내영, 조영희...
♤ 도산국민학교 교화(무궁화)
♤ 한국인이 사랑하는 청포도 시인이자, 일제가 두려워했던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이원록ㆍ1904~1944)은 도산공립보통학교(도산국민학교 전신) 제1회 졸업생(1919년)이었다.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도산골 원촌마실에서 육사는 목가적이고도 웅혼한 시상을 떠올렸으리라. 그리고 청랭하고 강고한 갈선대 위에서는 광야를 달리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거친 꿈을 품었으리라. 아! 한국 저항시의 백미인 "절정"은 바로 이 갈선대 위에서 잉태되어졌던 것이다.
황량한 시대에 선각자의 삶은 고달프고 처연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1944.1.16. 새벽 5시 :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한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사진 설명 : 위 기사는 조선일보(2022.2.3.목.A22)에 나온 육사 선생 이야기이다. 지면 속에 아래 사진은 1934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모습이고 위 사진은 1941년 북경으로 가기 전 친척과 친구들에게 준 증명사진으로 알려지고 있다.]
♤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이신 이근필 교장 선생님과 필자의 58회 동창인 미영이 아버님인 임대호 교감 선생님의 모습(1972). 이근필 선생님은 국민학교 6년 동안 우리들의 교장 선생님이었다(2024.3.7 작고). 우리 동창 이경신제의 아버님이셨다. 두 분께서는 이제 모두 도산골의 별이 되었다.
♤ 도산국민학교 그리운 옛 은사님들(1960~1977)
♤ 도산국민학교 1977년 58회 졸업 사진(필자의 동창들과 은사님들. 단천으로 이건한 신교정에서 첫 졸업식을 가졌다. 수몰로 인해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이 단체 사진 한 장으로 졸업 앨범을 대신했다.)
♤ 수몰 전 도산국민학교 구교정이 자리했던 토계 번화가 스케치 맵 전경(2022.1.1 필자가 그렸다)
♤ 도산국민학교 교가 1절 가사
※ 1970~1993.3.1(이후 폐교) 까지의 교가
[이원주 작사ㆍ오동열 작곡]
"영지산 푸른 꿈 가슴에 심고
낙독강 유유한 힘을 받는다
아아 도산 성스럽고 거룩한 이 땅
높으신 뜻 기리 이어 역사 빛내리
올바르고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 도산 착한 어린이 나라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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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교 이후 잃어버린 교가를 우여곡절 끝에 찾아서 여러 번 부른 후 완성시킨 영상이다. 영상 속의 교가는 1970년 이후 우리들이 불렀던 노래였다. 하지만 30여 년 전 학교가 폐교되면서 음률도 가사도
모두 잊혀졌다. 필자가 10여 년 수소문 끝에 가사를
겨우 찾았다. 이어 수십 번 부른 후 아내 김영아 선생이 음률을 분석해서 완성했다.
개교 이래 1918년 3월 3일부터 1960년까지 불리워졌던 구 교가의 노래 가사도 현재 어렵게 찾아서 의미에 관한 고찰을 끝낸 상태이다. 조만간 육성으로 부른 노래를 건네받은 후 음률을 다시 분석해서 머잖아 복원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첫댓글
애교 애향하는 마음 정말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