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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THE APPLICATION OF THE SEVENTY YEARS OF SERVITUDE
G: 70년을 포로기간에 적용
From a close examination of the texts dealing with the seventy years, certain facts have been established that cannot be ignored in any attempt to find an application of the seventy-year period that is in harmony with both the Bible and historical facts: 70년이 언급되는 성경 본문들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성경과 역사적 사실 모두에 부합하는 해석을 내리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실들이 확립되었다: (1) The seventy years refer to many nations, not Judah only: Jeremiah 25:11. (2) The seventy years refer to a period of servitude for these nations, that is, vassalage to Babylon: Jeremiah 25:11. (3) The seventy years refer to the period of Babylonian supremacy, “seventy years for Babylon”: Jeremiah 29:10. (4) The seventy years were accomplished when the Babylonian king and his nation were punished, that is, in 539 B.C.E.: Jeremiah 25:12. (5) The seventy years of servitude began many years before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Jeremiah chapters 27, 28, and 35; Daniel 1:1–4; 2:1; 2 Kings 24:1–7; the Babylonian chronicles, and Berossus. (6) Zechariah 1:7–12 and 7:1–5 are not references to Jeremiah’s prophecy, but refer to the period from 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in the years 589–587 to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in the years 520–515 B.C.E. (1) 칠십 년은 유다만이 아니라 많은 민족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예레미야 25:11 (2) 70년은 바빌로니아에 속국이 된 나라들에 대해 종살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렘 25:11. (3) 70년은 바빌로니아의 패권 기간인 "바빌로니아(를 위한) 70년"을 가리킨다: 예레미야 29:10 (4) 바빌로니아 왕과 그의 나라가 벌을 받은 때인 기원전 539년에 70년이 차게 되었다: 예레미야 25:12. (5) 70년의 종살이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여러 해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예레미야 27장, 28장, 35장; 다니엘 1:1–4장, 왕하 24:1–7장; 바빌로니아 연대기, 베로수스의 기록 (6) 스가랴 1:7–12 및 7:1–5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589–587년 예루살렘 포위 및 파괴부터 기원전 520–515년 성전 재건까지를 가리킨다. The application given by the Watch Tower Society to the seventy-year prophecy, that it refers to Judah only, and to the period of complete desolation of the land, “without an inhabitant,” follow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d its temple, is seen to be in direct conflict with each of the above established Biblical and historical facts. 70년 예언에 대한 워치타워 협회의 해석은 오직 유다만을 언급하여,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된 후, 유다 땅이 "거민 없이" 완전히 황폐해진 시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확립된 각각의 성경적, 역사적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An application that is in clear conflict with both the Bible and such historical facts cannot have anything to do with reality. In a serious discussion of possible applications of the seventy years, this alternative is the first which must be rejected. It is held to by the Watch Tower Society, not because it can be supported by the Bible and historical facts, but because it is a necessary prerequisite for their calculation of the supposed 2,520 years of Gentile times, 607 B.C.E.–1914 C.E. 성경과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모두 상충되는 워치타워의 해석은 실제 사실과 아무 관련성을 지울 수 없다. 70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진지하게 논의함에 있에서, 워치타워의 이 해석은 로 거부 되어야 할 첫 번째 해석이다. 워치타워 협회가 이 해석을 고집하려는 것은 성경과 역사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기원전 607년-1914년이 2,520년의 이방인의 때를 충족시키는 계산이기 때문이다. If their application of the seventy years is dropped, the Gentile times calculation leading to 1914 C.E. immediately proves false, together with all the prophetic claims and speculations that are tied to it. 70년에 대한 해석이 바뀌면, 기원 1914년으로 이어지는 이방인의 때의 기간은 거짓으로 분명히 판명될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예언적 해석과 추측도 함께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
G-1: The use of “seventy” as a “round” number
G-1: 대략적 기간으로서의 70년
The conclusion arrived at in the above discussion is that Judah and a number of the surrounding nations became vassals to the king of Babylon soon after the battle of Carchemish in 605 B.C.E. Does this mean that the seventy-year period “for Babylon” must be applied to the period 605–539 B.C.E.? To this suggestion it may quite naturally be objected that the length of this period is not seventy, but a little more than sixty-six years, which is, of course, true. 위의 논의에서 도출된 결론은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 직후 유다와 주변 여러 나라가 바빌로니아 왕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빌로니아를 위한" 70년을 기원전 605년에서 539년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적용에 대해 기간이 70년이 아니라 66년이 조금 상회한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당연히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Many scholars argue, however, that the numeral “70” in the Bible often seems to be used as “a round number” It occurs fiftytwo times independently in the Old Testament, and is used with a variety of different meanings—for weights, lengths of measurements, numbers of people, periods of time, and so forth.50 In a discussion of the biblical use of the numeral “70,” which also includes extra-biblical occurrences, Dr. F. C. Fensham concludes: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숫자 '70'이 흔히 '대략적 숫자'로 쓰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52차례나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무게, 측정 길이, 사람 수, 기간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50 F. C. 풴샴 박사는, 성경 이외에 언급되는 것을 포함하여, 숫자 "70"의 용례에 대한 성서적 논의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It is quite probably used as a kind of symbolic figure, just like seven. With the usage of seven and seventy the ancient Semites tried to make a difference between a smaller symbolic figure and a larger one.51 그것은 아마도 7가지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상징적인 숫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대 셈인들은 7과 70을 사용하면서 보다 작은 수치와 보다 큰 수치 사이의 차이를 상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1 When used of periods of time it might have been used as an appropriate period of punishment. In a building inscription of the Assyrian king Esarhaddon (680–667 B.C.E.), it is stated that the desolation of Babylon after its destruction by Sennacherib in 689 B.C.E. should have lasted seventy years, but the god Marduk in his mercy changed the period to eleven years.52 A few decades earlier Isaiah predicted that “Tyre must be forgotten seventy years, the same as the days of one king.” (Isaiah 23:15) The explanation that the seventy years should be understood as “the same as the days of one king” is often interpreted to mean a normal life-span of a king, or “the full span of human life,” in accordance with Psalm 90:10, where the number seventy clearly is not meant to be viewed as a precise figure. 기간을 나타내는 수치로 사용될 때 적절한 형벌의 기간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아시리아 왕 에살하돈(기원전 680년~667년)의 비문에는 기원전 689년 센나케리브(산헤립)에 의해 파괴된 바빌로니아의 황폐화가 70년 동안 지속됐어야 한다고 쓰여 있지만 마르둨 신은 자비롭게 그 기간을 11년으로 줄였다.52 몇십년 전, 이사야는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이사야 23:15) 70년을 '한 왕의 연한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은 시편 90:10에 따라 흔히 왕의 정상적인 수명, 즉 ' 한 인간의 평생 수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숫자 70은 수치로서의 정확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Thus it is quite possible and perhaps probable that the seventy years of servitude predicted by Jeremiah were used as a round number. Such an understanding could also be supported by the fact that not all the nations surrounding Judah (some of which are obviously enumerated in Jeremiah 25:19–26) seem to have been made vassals to the king of Babylon at the same time, in 605 B.C.E. Some of them seem to have been brought into subjection somewhat later. The period of servitude, therefore, was not of exactly the same duration for all these nations. Yet the prophet said that all of them were to serve the king of Babylon “seventy years.”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의 포로 기간이 대략적인 숫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유다를 둘러싼 모든 나라들 (그들 중 일부는 분명히 예레미아 25:19–26에 열거되어 있음)이 기원전 605년에 바빌로니아의 왕에게 동시에 신하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도 뒷받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국가들에 대한 종살이 기간이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들 모두가 "70년"간 바빌로니아의 왕을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
G-2: The seventy years ‘for Babylon”: 609–539 B.C.E.
G-2: "바빌론을 위한" 70년: 기원전 609년-539년
Although it is true that the servitude of a number of nations turned out to be somewhat less than seventy years, the prophecy does not clearly imply that the seventy years “for Babylon” should be reckoned from 605 B.C.E. It must be remembered that all nations were predicted to become servants of Babylon: “all the nations must serve him and his son and his grandson.”53 (Jeremiah 27:7, NW) Some nations had become subject to Babylon even prior to the battle of Carchemish in 605 B.C.E. If the seventy years “for Babylon” are counted from the time when Babylon crushed the Assyrian empire, thus beginning to step forward as the dominant political power itself, even a more exact application of the seventy years is possible. A short review of the last years of Assyria will make this clear. 비록 여러 나라에 대한 종살이 기간이 70년이 채 안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예언은 기원전 605년부터 '바빌론을 위한' 70년을 계수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암시하지는 않는다. 모든 민족이 바빌론의 종이 될 것을 예언하였음을 기억하라. "모든 민족은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를 섬겨야 한다."53 (예레미야 27:7, NW)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 이전에 이미 바빌론의 지배를 받게 된 민족이 있다. 만약 바빌론을 위한 70년을 앗시리아 제국을 쳐부수고 지배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로부터 70년이라는 세월을 계수한다면, 더욱 정확하게 기간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리아가 패망하기 직전의 마지막 몇년 동안을 간략히 검토해 봄으로써 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Up to 627 B.C.E. Assyria held hegemony over many countries, including Babylonia and the Hattu-area. But on the death of Ashurbanipal in that year, Assyria’s power began to wane. Nabopolassar, the governor of southern Babylonia, drove the Assyrians from Babylon in 626 and occupied the throne. In the following years he successfully established Babylonian independence. 기원전 627년에 이르기까지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와 하투 지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 대해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해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아시리아의 세력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남부 총독인 나보폴라사르는 626년 바빌로니아에서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했다. 다음 해에 그는 바빌로니아를 독립시키는데 성공했다. The most important source for the history of the final years of the Assyrian empire is the Babylonian chronicle B.M. 21901, which describes the events from the tenth year of Nabopolassar until the beginning of his eighteenth regnal year, that is, from 616 to 608 B.C.E.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료는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1901이다. B.M. 21901은 나보폴라사르의 10번째 해부터 그의 18번째 통치 연도, 즉 기원전 616년부터 608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In 616, Nabopolassar attacked the Assyrians and defeated them, but an Egyptian army led by Psammetichus I came up to assist the Assyrian king (Sin-shar-ishkun), and Nabopolassar chose to withdraw to Babylon. 616년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인들을 공격하여 무찔렀지만, 프사메티쿠스 1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아시리아 왕(신샤르이슈쿤)을 돕기 위해 올라왔고,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By this time the Medes, too, began to attack Assyria, and in 614 they took Ashur, the ancient Assyrian capital. After the city had fallen, Nabopolassar, whose army arrived too late to help the Medes, made a treaty with the Median ruler, Cyaxares. 이때까지 메데인들도 아시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614년에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인 아슈르를 점령했다. 도시가 함락된 후 너무 늦게 도착해서 메데를 도울 수 없는 처지에 이른 나보폴라사르는 메데아의 통치자 키악사레스와 협정을 맺었다. In 612, the two allies attacked the Assyrian capital, Nineveh, captured it and destroyed it. The Assyrian king, Sin-shar-ishkun, perished in the flames. His successor, Ashur-uballit II, fled to the provincial capital of Harran, where he established his government, still claiming sovereignty over Assyria. 612년, 두 동맹국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느네웨)를 공격하여 점령하여 함락시켰다. 아시리아의 왕인 신-샤르-이쉬쿤은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지방 수도인 하란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여전히 아시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During the subsequent years Nabopolassar successfully campaigned in Assyria, and by the end of 610, he marched against Harran, joined by Median forces.54 Ashur-uballit fled, and the city was captured and plundered either late in 610 or early in 609 B.C.E.55 Late in the summer of 609 Ashur-uballit, supported by a large Egyptian force headed by Pharaoh Necho, made a last attempt to recapture Harran, but failed. This definitely put an end to the Assyrian empire. 그 후 몇 년 동안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와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였고, 610년 말에는 하란을 향해 진군했다.54 아슈르-우발리트는 도망쳤고, 도시는 610년 말이나 609년 초에 함락되었다.55 609년 여름에 아슈르-우발리트는 이집트 파라오 느고가 지휘하는 이집트 병력의 도움으로 하란을 탈환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That 609 B.C.E. marked the definite end of the Assyrian empire is the prevailing view among leading authorities today. Some typical statements are quoted in the following box: 기원전 609년에 아시리아 제국이 확실한 종말을 고했다는 견해가 오늘날 주요 권위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 대표적인 진술의 일부가 다음 박스(회색 부분) 안에 인용되어 있다: |
THE FALL OF ASSYRIA — 609 B.C.E. ”In 610 the Babylonians and their allies took Harran, and Ashur-uballit with the wreckage of his forces fell back across the Euphrates into the arms of the Egyptians. An attempt (in 609) to retake Harran failed miserably. Assyria was finished.”— Professor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3r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p. 316. In 609 B.C.E. “Assyria ceased to exist and her territory was taken over by the Babylonians.”— Professor D. J. Wiseman in The New Bible Dictionary, J. D. Douglas (ed.), 2nd ed.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2), p. 101. ”In 609, the Babylonians finally routed the Assyrians and began the establishment of their control over Phoenicia, Syria and Palestine.”—The Russian Assyriologist M. A. Dandamaev in History of Humanity, Vol. III, ed. by J. Herrman & E. Zürcher (Paris, London, New York: UNESCO, 1996), p. 117. ”In 609 Assyria was mentioned for the last time as a still existing but marginal formation in northwestern Mesopotamia. After that year Assyria ceased to exist.”—Stefan Zawadzki in The Fall of Assyria (Poznan: Adam Mickiewicz University Press, 1988), p. 16. 아시리아의 몰락 - 기원전 609년" 610년에 바빌로니아인들과 동맹국들이 하란을 점령했고, 아슈르-우발리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이집트인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609년 하란을 탈환하려는 시도는 비참하게 실패했다. 아시리아는 종말을 고했다."—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3판.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81년), 316면. 기원전 609년에 "아시리아는 사라졌고 그 영토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넘겨졌다."— J. 와이즈만 새 성경 사전의 교수 더글러스, 2판 (영국 레스터: 인터바스티 출판부, 1982년), 101면. 바빌로니아인들은 609년에 마침내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페니키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인류사 3권에 나오는 러시아의 아시리학자 M. A. 단다메프, J. Herman & E. Zürcher(파리, 런던, 뉴욕: 유네스코, 1996년), 117면. "609년에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서 약소국의 형태로 존재한 것이 마지막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해 이후 아시리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아시리아 함락의 스테판 자와츠키(포즈난: 아담 미키에비치 대학 출판부, 1988년), 16면. |
Thus, the seventy years “for Babylon” may also be reckoned from 609 B.C.E. From that year the Babylonian king regarded himself as the legitimate successor of the king of Assyria, and in the following years he gradually took over the control of the latter’s territories, beginning with a series of campaigns in the Armenian mountains north of Assyria. 이렇게 해서, 기원전 609년부터 "바빌론을 위한" 70년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해 부터 바빌론 왕은 자신을 아시리아 왕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여겼고, 그 다음 해부터 아시리아 북쪽의 아르메니아 산맥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다른 민족의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The Egyptian Pharaoh, Necho, after the failed attempt to recapture Harran in 609, succeeded in taking over the areas in the west, including Palestine, for about four years, although his control of these areas seems to have been rather general and loose. 56 But the battle at Carchemish in 605 B.C.E. put an end to this brief Egyptian presence in the west. (Jeremiah 46:2) After a series of successful campaigns to “Hattu,” Nebuchadnezzar made it clear to Necho that he was the real heir to the Assyrian Empire, and “never again did the king of Egypt come out from his land, for the king of Babylon had taken all that happened to belong to the king of Egypt up to the river of Euphrates.”―2 Kings 24:7, NW.57 이집트 파라오 느고는 609년 하란을 탈환하려다 실패한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서부의 지역을 약 4년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다소 일반적이고 느슨했던 것으로 보인다.56 하지만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에서 벌어진 전투로 이집트인들의 서쪽 주둔은 짧은 기간만에 종식되었다. (예레미야 46:2) 느부갓네살은 '하투'에 대한 일련의 성공적인 캠페인이 있은 후, 느고에게 자신이 아시리아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분명히 하고, "바빌로니아 왕이 이집트 왕에게 속한 모든 것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다시는 이집트 왕이 자기 영토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왕하 24:7, NW.57 If the Babylonian supremacy is reckoned from 609 B.C.E., the year that marked the definite end of the Assyrian Empire, exactly seventy years elapsed up to the fall of Babylon in 539 B .C.E. This period may be counted as the “seventy years for Babylon.” (Jeremiah 29:10)58 만약 바빌로니아의 패권을, 아시리아 제국이 확실한 종말을 고한 기원전 609년부터 계수한다면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 함락까지는 정확히 70년이 흘렀다. 이 기간을 "바빌론을 위한 70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 29:10)58 As not all the nations previously ruled by Assyria were brought under the Babylonian yoke in that same year, the “seventy years” of servitude in reality came to mean a round number for individual nations.59 그러나 이전에 아시리아가 통치했던 모든 나라들이 동시적으로 같은 해에 바빌로니아의 지배아래 놓이지 않았기 때문에, "70년"의 종살이가 실제적으로는 개별 국가들에게 대략적인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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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Some examples are: 70 years (Gen. 5:12; 11:26; Ps. 90:10); 70 days (Gen. 50:3); 70 descendants of Jacob (Gen. 46; Ex. 1:5; Deut. 10:22); 70 palm trees (Ex. 15:27); 70 elders (Ex. 24:1; Num. 11:16; Ezek. 8:11); 70 submissive Canaanite kings (Judg. 1:7); 70 sons (Judg. 8:30; 12:14; 2 Kings 10:1).
50 몇 가지 예들: 70년(창 5:12; 11:26; 시편 90:10); 70일(창 50:3); 야곱의 후손 70명(창 46; 출 1:5; 신 10:22); 70그루의 종려나무(출:15:27), 70명의 장로(출:24:1; 11:16; 겔 8:11), 복종한 70명의 가나안 왕들(삿 1:7); 70명의 아들(삿 8:30, 12:14, 왕하 10:1).
51 F. C. Fensham, “The Numeral Seventy in the Old Testament and the Family of Jerubbaal, Ahab, Panammuwa and Athirat,”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July– December 1977, pp. 113–115. Cf. also Eric Burrows, “The Number Seventy in Semitic” Orientalia, Vol. V,1936, pp. 389–92.
51 F. C. 풴샴저 <구약성서의 숫자 70과 예루바알, 아합, 파나무와, 아티라트 가족>, 1977년 7월-12월 팔레스타인 탐험 분기, 113-115면. CF. 에릭 버로우스저 <셈족의 70이라는 수> 오리엔탈리아, 제5권, 1936, 389-92면.
52 The inscription says: “Seventy years as the period of its desolation he wrote (down in the Book of Fate). But the merciful Marduk—his anger 1asted but a moment— turned (the Book of Fate) upside down and ordered its restoration in the eleventh year.” — D. D. Luekenbill, Ancient Records of Assyria and Babylonia, Vol.I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27), p. 243. As pointed out by Luckenbill, “the Babylonian numeral 70,’ turned upside down or reversed, becomes ‘11,’ just as our printed ‘9,’ turned upside down, becomes ‘6.e “ (Ibid., p. 242. Cf. also R. Borger in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Vol. XVII, 1958, p.74.) In this way Esarhaddon “explained” his decision to restore Babylon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Sennacherib in 681 B.C.E.
52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가 (운명의 서에 기록한) 황량한 시기로서 70년. 그러나 자비로운 마르둑은ㅡ그의 분노는 잠시였으며ㅡ 11년 만에 (운명의 서) 뒤집혀 복구 명령을 내렸다." — D. 루켄빌,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고대 기록, II권(시카고: 시카고 대학 출판부, 1927년), 243면. Luckenbill이 지적한 바와 같이, "바빌로니아 숫자 70"은 뒤집히거나 뒤집혀 '11'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숫자 '9'가 거꾸로 인쇄되면, '6.'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근동 연구 저널의 Borger, XVII권, 1958년, 74권). 이와 같이 엣살하돈은 기원전 681년 그의 아버지 센나케립이 사망한 후 바빌론을 회복시키기로 한 결정을 "설명"했다.
53 Nebuchanezzar’s son and successor was Evil-Merodach. His grandson was evidently Belshazzar, the son of Nabonidus who, according to R. P. Dougherty was married to Nitocris, a daughter of Nebuchadnezzar.—R. P. Dougherty, Nabonidus and Belshazza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29), pp. 30–32, 79. See also the comments by D. J. Wiseman, Nebuchadrezzar and Babyl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pp. 11–12.
53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자 후계자는 에블 메로닼이었다. 그의 손자는 분명히 나보니더스의 아들인 벨샤살로, R. P. 도허티는 느부갓네살의 딸인 니토크리스와 결혼했다고 한다.—R. P. Dougherty저 <나보니더스와 벨사살> (뉴 헤이븐: 예일 대학 출판부, 1929년), 30–32면, 79면. D. J. 와이즈만저 <느부갓네살과 바빌론> (옥스포드: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85년), 11-12면.
54 The term used for the Medes in the chronicle, “Umman-manda,” has often been taken to refer to, or at least include, the Scythian. This hypothesis appears to be untenable in the light of recent research. See the extensive discussion by Stefan Zawadzki in The Fall of Assyria and Median-Babylonian Relations in Light of the Nabopolassar Chronicle (Poznan: Adam Mickiewicz University Press, 1988), pp. 64– 98.
54 연대기에서 메데인으로 사용된 용어인 "Umman-manda"는 종종 스키타이인을 지칭하거나 적어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가설은 최근의 연구에 비추어 볼 때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Stefan Zawadzki의 "아시리아 함락과 나보폴라사 연대기에 비추어 중앙-바빌로니아 관계"(Poznan: Pospolassar Chronicle)에서 자세한 내용을 참조하라. 아담 미키에비치 대학 출판부, 1988년), 64-98 면.
55 According to the Babylonian chronicle BM 21901 the two armies set out against Harran in Arahsamnu, the eighth month, which in 610 B.C.E. roughly corresponded to November in the Julian calendar. After the capture of the city they returned home in Addaru, the twelfth month, which roughly corresponded to March in the following year, 609 B.C.E. Most probably, therefore, the city was captured early in 609 B.C.E.—A.K. Grayson,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Locust Valley, N.Y.: JJ. Augustin Publisher, 1975), pp. 95–96.
55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1901에 따르면, 두 군대는 기원전 610년 율리우스력으로 대략 11월에 해당되는 8번째 달인 아라삼누 월에 하란과 대항하여 싸웠다. 도시를 점령한 후, 그들은 다음해인 기원전 609년 3월에 대략 해당하는 12번째 달인 아다루 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609년 초에, 도시는 점령되었을 것이다.ㅡA.K. 그레이슨저<앗시리아와 바빌론 연대기> (뉴욕, 메뚜기 골짜기: JJ. 오거스틴 출판사, 1975년), 95–96 면.
56 Compare 2 Kings 23:29–34; 2 Chronicles 35:20–36:4. On Necho’s “general, but 1oose” control of the areas in the west, see the comments by T. G. H. James in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II:2 (see note 23 above), p. 716.
56 왕하 23:29–34 비교, 역대하 35:20–36:4 서쪽 지역에 대한 느고의 "일반적이고 느슨한" 통제에 대해, 케임브리지 고대사, III권에서 T. G. H. 제임스의 해설을 참조하라. (위의 각주 23 참조), 716면.
57 Ross E. Winkle, too, concludes that “the defeat of Assyria is the obvious choice for the actua1 beginning of the seventy years. This is because of the fact that with Assyria out of the way, Babylon was truly the dominant power in the North.”—R. E. Winkle, ”Jeremiah’s seventy years for Babylon: a re-assessment,”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AUSS),Vol.25:3 (1987), p. 296. Winkle’s discussion of the texts dealing with the seventy years (in AUSS 25:2, pp. 201–213, and 25:3, pp. 289–299) is remarkably similar to that published already in the first edition of the present work in 1983. Winkle does not refer to it, however, and it is quite possible that it was not known to him.
57 로스 E 윙클도 "아시리아의 패배는 70년의 실제적인 시작을 위한 명백한 선택이었다"라고 역시 결론지었다. 아시리아를 벗어나면서 바빌로니아가 북부의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 E. 윙클저 <예레미야의 바빌론을 위한 70년의 재평가>, 앤드류스 대학교 신학 연구 (AUSS), 25권:3 (1987년), 296 면. 윙클이 70년을 다룬 성경 본문(AUSS 25권:2, 201–213면, 25권:3, 289–299면)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1983년에 발표된 본 연구의 첫 판에 이미 발표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윙클은 이를 언급하지 않으며, 그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58 Several historians and biblical scholars have been amazed at the exactness with which Jeremiah’s prediction was fulfilled. Some scholars have tried to explain this by suggesting that the passages in Jer. 25:11 and 29:10 were added to the book of Jeremiah after the Jewish exile. There is no evidence in support of this theory, however. Professor John Bright, for example, commenting on Jer. 29:10, says: “One cannot explain rationally why it was that Jeremiah was assured that Babylon’s rule would be so relatively brief. But there is no reason to regard the verse as a vaticinium ex eventu [a ‘prophecy’ made after the event]; we can only record the fact that the prediction turned out to be approximately correct (which may be why later writers made so much of it). From the fall of Nineveh (612) to the fall of Babylon (539) was seventy-three years; from Nebuchadnezzar’s accession (605) to the fall of Babylon was sixty-six years.” —John Bright, The Anchor Bible: Jeremiah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Inc., 2nd. ed. 1986), pp. 208–09.
58 몇몇 역사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실현된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부 학자들은 유대인들의 유배 후, 예레미야 25: 11과 29: 10의 구절이 추가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예를 들어 죤 브라이트 교수는 예레미야가 바빌론의 통치가 비교적 짧을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을 사후 예언[사건이 일어난 후 이루어진 예언]으로 여길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단지 예측이 대략적으로 옳았다는 사실만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이 때문에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구절을 그렇게 과장했을 수도 있다. 니네베 함락(612년)에서 바빌로니아 함락(539년)까지는 73년, 느부갓네살 즉위(605년)에서 바빌로니아 함락까지는 66 년이었다. —죤 브라이트저 <앵커 바이블>: 예레미야(뉴욕 가든 시티: Doubleday and Company, Inc., 1986년 2판), 208–09 면.
59 Interestingly, the Watch Tower writers, too, seem finally to have realized this. Commenting on the 70 years that Tyre would be forgotten according to Isaiah 23:15–17—a period they equate with the 70 years for Babylon—their recent commentary on Isaiah says: “True, the island-city of Tyre is not subject to Babylon for a full 70 years, since the Babylonian Empire falls in 539 B.C.E. Evidently, the 70 years represent the period of Babylonia’s greatest domination . . . Different nations come under that domination at different times. But at the end of 70 years, that domination will crumble.” (Isaiah’s Prophecy. Light for All Mankind, Vol 1, 2000, p. 253) These remarkable statements are more or less a reversal of earlier views.
59 흥미롭게도, 파수대 집필진들도 결국 이 사실을 인정한 것 같다. 이사야 23:15–17, 즉 이사야 23:15–17ㅡ바빌론을 위한 70년과 동일한 기간ㅡ에 따라 두로가 잊혀질 것이라는 예언을 다루면서, 이사야에 대한 그들의 최근 해설을 보면, "사실, 두로 섬 도시는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온전한 70년의 기간 동안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명백하게, 70년은 바빌론의 전체 지배 기간을 나타낸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민족들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70년이 지나면서, 그 지배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 모든 인류를 위한 빛> 1권, 2000년, 253면) 이러한 주목할 만한 진술은 이전의 견해를 다소 번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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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내용에서 매우 공감이 가는 것은, 70년이 정확한 수치가 아니고, 오랜 기간을 의미하는 수로서 예레미야가 제시하였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에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여태껏 워치타워가 견지해 온 성서해석의 기본적 입장입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반드시 현재에 의해서 결정되며, 미래를 안다는 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고, 나아가 현재도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우리의 삶이나 하나님의 창조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포로로 잡혀갔던 예레미야의 편지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예언자 하나냐는 곧 바벨론이 몰락하여 그들이 바벨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예레미야는 70년이라는 기간을 제시함으로써 그보다 긴 기간을 예상해야 함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제시한 70년은 수자로서의 70이라기 보다 하나냐가 생각한 짧은 기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긴 기간으로서 제시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고, 다니엘도 그런 의미로 70년을 받아들였다면, 그 역시 그가 예언에서 제시한 70주나 2300일은 수치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수치를 자처럼 사용하여 미래를 예언하는 행위는 점치는 것과 다름없는 영매술이라는 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