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3 사순2주일 다해 – 133위 087° 김화숙 베드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133위 087° ‘하느님의 종’ 김화숙 베드로
이름 : 김화숙 베드로
출생 : 1808년, 홍주 결성 머리실
순교 : 1867년 5월 12일, 교수, 공주
김화숙 베드로는 충청도 결성 머리실[0.1]의 중인 출신으로, 고향에서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전라도 산속으로 이주해 옹기점을 운영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충청도 지역으로 이주해 여러 해 동안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였다.
김화숙 베드로는 언제부터인가 공주 국실 옹기점(현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옹기점 마을은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교우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이었는데, 김화숙 베드로는 이곳에서도 회장 소임을 맡아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냉담자들을 권면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867년 5월 8일(음력 4월 5일)에 포교들이 국실로 들이닥쳐 신자 20여 명을 체포하였다.[1] 이때 포교들이 신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누구에게 천주학을 배웠느냐?”고 묻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화숙 베드로 회장에게 배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교들은 김화숙 베드로에게 “누구에게 천주학을 배웠고, 교회 서적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김화숙 베드로는 “나의 스승은 이미 사망했다.”고 하면서 “오랜 박해 때문에 책은 다 없어졌고, 내 속에 있는 경문으로 천주를 공경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2]
포교들은 체포한 신자들을 공주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이후 김화숙 베드로와 동료들은 영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언한 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김화숙 베드로 회장과 동료들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날마다 함께 기도를 바쳤다. 또 그들은 옥졸들이 돼지 밥통에서 술지게미를 가져다주자 그것도 감사하며 서로 나누어 먹었고,[3] 김군심 베드로[3.1]는 아내가 개를 잡아 몰래 옥으로 들여보내 주자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조금만 먹었다.[4]
그러던 중 순교하기 전날 저녁이 되자, 김화숙 베드로 회장은 동료들과 함께 저녁 기도를 바친 뒤,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이다. 당신들도 모두 임종 준비를 잘하여 나의 뒤를 따라와 함께 천당 복락을 누리도록 하자.”고 권면하였다.[5] 그런 다음 1867년 5월 12일(음력 4월 9일)에 동료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6] 당시 김화숙 베드로 회장의 나이 59세였다.
[註]__________
[0.1] 박해시대 결성현 관할지에서 ‘-머리’가 붙은 자연마을 이름이 몇 곳에서 발견된다. ①홍성군 결성면 성호리 ‘뱃머리’, ②홍성군 결성면 성남리 중리마을의 ‘누에머리’, ③홍성군 은하면 대천리에 지형이 누에 머리 닮았다 하여 불린 ‘자음실’이 있다. 자음동(自音洞) 또는 잠박실이라고 불렸다. ④홍성군 은하면 ‘큰 언덕의 머리쪽’이라는 뜻을 가진 ‘덕두’ 또는 ‘덕머리’.조선시대에 보령군과 결성군의 경계가 되어서 ‘보령덕머리’와 ‘결성덕머리(결덕)’로 나뉘었다.
[1] 이때 국실 교우촌에서 체포된 신자 수는 27명 또는 29명, 22명 등으로 나온다(『병인치명사적』, 1권, 78-79면; 6권, 83면; 24권, 2면). 한편 국실 교우촌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 시기를 1866년 4월(음력)로 증언한 기록도 있으나(『치명일기』, 정리 번호 547번, 김군심; 『병인치명사적』, 6권, 82-83면), 이는 1867년 4월의 잘못으로 보인다.
[2] 『병인치명사적』, 1권, 78면.
[3] 『병인치명사적』, 2권, 127-128면.
[3.1] 김군심 베드로 : 공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연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공주로 돌아가 살다가 김화숙 베드로와 함께 공주옥에 갇혔다가 김화숙 베드로를 따라서 1867년 4월(음) 교수치명하였다.
[4] 『병인치명사적』, 8권, 24면.
[5] 『병인치명사적』, 1권, 78-79면; 14권,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