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권상연
한국 최초의 순교자들
윤지충 : 1759〜1791, 세례명 바오로, 전주에서 참수
권상연 : 1751~1791, 세례명 야고보,전주에서 참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본관은 해남이고, 자(字)는 우용(禹用)이다.
그는 1759년 전주부 양양소면(陽良所而) 장구퇴 (지금의 충남 논산군 벌곡면 장구재, 혹은 장고치)에서 아버지 경(憬)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구퇴는 대둔산의 줄기와 연결되는 산 사이의 고개가 마치 장구 모양을 하고 있어 장구동(또는 장고동)이 라고도 불렸다. 그의 할아버지 윤덕렬은 장구퇴에 정착하여 살며 두 아들(윤경과 윤등)과 네 딸을 낳았는데, 윤지충의 아비지 윤경은 맏아들로 이곳에서 한의업에 종사하였고, 둘째 딸은 정재원에게 시집가 정약전, 약종, 약용을 낳았다.
▲ 전동 성당
명문 세족 가문에서 태어나 천주교에 입교
윤지충의 가문은 남인의 명문 세족이었다. 7대조는 조선 후기 국문학의 대가인 윤선도이고, 영. 정조 때 시. 글, 그림 3절(絶)에 뛰어나 삼재로 이름을 날린 유두서는 그의 증조부이다. 또 그의 증조모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 문화를 소개한 이수광의 증손녀였다. 이처럼 그의 조상들의 사상은 개방적이었고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러한 사상 경향은 가문의 전통으로 내려왔다.
권상연(權尙然,야고보)은 안동 권씨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1751년 윤지충파 같은 곳에서 아버지 권세학(權世櫸〉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권상연의 집안 역시 남인으로 권근의 후예였다.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공주 탄방에서 살다가 대사간을 지낸 고조부 권기가 당쟁에 휘말리면서 진산 땅으로 이사 온 듯하다. 그의 할아버지 권기징은 딸 다섯을 두었는데, 맏딸은. 윤지충의 아버지 윤경에게, 둘째 딸은 유항검의 아버지 유동근에게 시집보냈다.
그래서 권상연에게 윤지충과 유항검은 고종사촌이 된다.
윤지충은 가문의 전통대로 유학에 힘썼고, 과거 준비에 몰두하여 스물다섯 살이 되던 1783년 봄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런 그가 천주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던 인척들의 영향이 컸다.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는 고종사촌이고, 이승훈은 고종사촌 매형이며, 유항검은 그의 이종사촌이다. 또 이벽은 그의 누이가 정씨 형제들의 이복형인 정약현에게 시집갔으므로 윤지충과는 사돈 간이 된다.
정약전의 영향으로 1784년에 천주교에 입교한 윤지충은. 3년 동안《천주실의》(天主實義)와《칠극》(七克)을 공부하여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안 뒤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지헌에게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한, 윤지충은 개인 성화(聖化)에 힘쓰는 한편, 자기의 명성을 듣고 홍성, 고산, 고창, 무안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힘껏 교리를 가르쳤다.
한편 권상연은 이웃에 살던 윤지충과 친밀히 내왕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윤지충이 1784년 서울에 갔다 온 뒤《천주실의》와《칠극》을 탐독하자, 권상연도 그 책들을 빌려 보고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윤지충으로부터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신주를 불사르고 조상 제사를 폐하다.
윤지충은 1791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빈(草殯)을 했다가 8월에 가서야 장례를 치렀다. 그는 가정의 제사권을 가진 맏아들이었으므로 유교 의식에 따라 세사를 지내야 마땅하였으나 천주교는 이를 금하였다. 조선 교회가 이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790년 여름 북경에 파견된 윤유일을 통해서였다.
윤유일은 유항검과 절친한 사이여서 이 소식은 곧바로 전주에도 전해졌다. 윤지충은 유항검에게서 이를 전해 듣고 신주를 불살랐으며, 권상연도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조문을 왔던 친척과 친지들이 신주를 모시지 않고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는 까닭을 묻자. 윤지충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희들과 저희 어머님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참 하느님께 대한 공경을 조상신들에 대한 그릇된 공경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신자인 어머님께서는 저희에게 당신의 장례식에 미신적이거나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의 신주는 감춘 것이 아니고 불살랐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어머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천주교가 참되고, 나뭇조각이나 시체에 대한 공경이 불합리하고 무익함을 확신하고 있으며, 또 하느님께서 미워하시고 저주하시는 조상 신주를 세우거나 보존함으로써 하느님의 법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 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윤지충은 천주교로 개종한 이상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겼다.
한편 권상연이 천주교를 믿게 된 사실이 알려지자, 친척들은 그를 원수처럼 여기며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신주를 폐기한 사실을 목격한 일가의 형 권상희는 이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고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제일 먼저 공격하고 나선 사람은 같은 남인의 홍낙안이었다. 그
는 채제공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을 처단하도록 촉구하였고, 당파와 관계없이 모든 양반이 일제히 성토하고 나섰다.
좌의정 채제공은 두 사람의 행위를 패륜적인 역적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가택 수색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윤지충은
광천으로, 그리고 권상연은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숙부인 윤등을 볼모로 가두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10월 중순경 진산 군에 자수하였다.
윤지충과 같은 남인이었던 진산 군수는 두 사람이 지체 높은 양반의 후손임을 고려하여 이단인 천주교를 배교하도록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천주교는 이단이 아닌 바른길이라고 항변하였고, 특히 윤지충은 “도중에 마음을 바꿀 것이었다면 애당초 천주교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설득과 회유로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자, 군수는 어쩔 수 없이 10월 29일 두 사람에게 18근짜리 큰 칼을 씌우고, 목을 쇠사슬로 얽은 채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하였다.
전주로 이송된 이튿날 전라 감영의 감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을 짐승이나 할 짓이라고 꾸짖으며, 천주교를 전한 사람을 대라고 다그쳤다. 이에 윤지충은 신주를 폐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상 예절은 지켰다고 하면서 일러바칠 동료는 없다고 말하였다. 천주교는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일 뿐 애초부터 권하고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켜 간 것이다.
최초의 호교론인 공술기
문초는 11월 1일 새벽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윤지충은 전라 감사에게 말로는 다할 수 없으니, 아전 한 사람과 붓을 주면 모든 것을 자세하게 쓰겠다고 하였다. 아전을 불러 주자, 윤지충은 천주교에 입교한 과정, 자신이《천주실의》와《칠극》을 읽었다는 것,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며 창조주라는 것. 하느님은 중국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라는 것,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되었다는 것, 충과 효는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설명한 뒤 아전에게 ‘십계’ 와 '칠극' 을 받아쓰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신주를 폐기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이유를 천주교 신자의 입장에서 밝혔는데. 그의 진술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죽은 사람의 상징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뭇조각이므로 나의 혈육과 생명. 출생과 성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모의 영혼이 일단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혼이 물질적인 물건에 붙어 있을 수 없다. 십계명 가운데 제4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이다. 만일 진실로 우리 부모들이 그 신주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신주를 공경할 것이다.
둘째,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을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물질적인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므로 영혼의 음식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가 효성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술과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일 뿐이다. 참된 효성은 전심전력을 다 하여 덕행을 닦아 그 결과를 그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물질적 양식이 육신의 음식인 것처럼 영혼의 음식은 덕행이다.
윤지충은 제사의 근본정신이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하는 것' 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도 조상들의 영혼이 술과 양식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데. 죽은 후에는 더욱 그렇게 될 수 없으며, 부모에게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주무시는 동안에는 음식을 드리지 않는데, 하물며 죽음이라는 긴 잠을 드신 분들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라는 것이었다.
진술서는 아전을 통해 임피 현감에게 제출되었고, 이를 토대로 전라 감사의 신문이 시작되었다. 감사는 진술서의 내용을 확인한 후 윤지충과 권상연을 형틀에 앉혀 놓고 살이 터지도록 매질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정부에 보고하였다. "윤지충은 살이 헤어지고 피가 홀러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말끝마다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과 부모의 명은 어길 수 있어도, 하느님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
윤지충의 심문을 마친 전라 감사는 형조에 보고하였고, 11월 7일 정도는 전라 감사의 조사 보고서를 읽고 난 뒤 이 사건을 엄정하게 다룰 것을 강조하였다. 다음날 형조는 정조에게 두 사람에 대한 처벌을 상신하여 재가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죄목에는 마땅하게 벌줄 만한 법조문이 없었다. 그래서 신주를 불사른 것은 무덤을 파헤친 '발총조’ (發塚條)에 해당하는 죄로,요사스런 글과 사악한 술수로 몰래 천주교를 전하며 익힌 것은 무당의 사술과 같은 ‘사무사술(師巫邪術)에 해당하는 죄로 엮어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윤지충이 살던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시켰고, 진산 군수는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귀양보냈다,
1791년 11월 13일(양 12월 8일), 드디어 처형의 날이 왔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의연한 태도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마치 잔치에 나가듯 형장으로 걸어가 망나니의 단칼에 목이 잘렸다. 오후 3시였고 그때 윤지충의 나이는 서른셋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같은 시각과 같은 나이였다. 이로써 윤지충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된 권상연과 함께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한편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을 허락하고는 곧 후회하였다. 그래서 진주 감영에 급히 파발마를 내려보내 두 사람의 사형을 중지하고 귀양보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은 순교한 뒤였다. 정조는 그 소식을 듣고 "윤고산(윤선도)의 후손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 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윤지충의 친족들은 임금에게 윤지충의 이름 중에서 ‘지’(持) 자를 개명할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 집안은 본디 절의를 숭상하여 온 집안이다. 근래에 사악하고 더러운 인물이 나왔지만, 이미 법에 따라 처형되었고. 이는 역적과 다르므로 반드시 개명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두 순교자를 처형한 후 9일 만에 윤지충의 시체를 친척들이 거두어 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형장에 도착한 친척과 친지들뿐 아니라 신자들과 전주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보고 놀랐다. 때는 12월이어서 방안의 물그릇도 얼 정도였는데, 형구에 흐른 피는 조금 전에 흐른 듯 선혈이 촉촉하였다. 이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탄하여 재판관들의 오판에 항의하였고, 두 순교자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두 순교자가 절개를 지키다 죽은 것으로 여겨 특별한 존경을 나타내었다.
사형장에 모인 신자 가운데 어떤 이는 임종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형구에 묻은 순교자들의 피를 씻은 물을 마시고 살아났고, 어떤 이는 순교자의 피가 적셔진 수건을 만지기만 하였는데 즉시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러한 기적들은 신자들의 신심을 굳게 해주었고, 일반인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의 피가 신앙의 씨앗’ 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자들 사이에서 윤지충의 유해는 치유의 은사를 이루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윤지충이 남긴 ‘진술서' 는《죄인 지충일기》라는 이름으로 필사되어 신자들 사이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