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마음 제10차 백일릴레이명상 제87일 (0206 월)
정월대보름의 맛
며칠 전 정월대보름이 지났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매년 그러했듯이 올해도 나물과 찰밥을 만들었습니다. 올해 밥상 위에 오른 나물은 취나물, 고사리, 호박고지, 시금치, 그리고 무나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시장에 갔을 때 가지 나물을 권하시던 야채가게 아주머니의 호객 행위에 응하지 않으시더니, 올해는 가지나물이 빠졌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하셨지요.
찰밥은 어머니의 주 특기 음식 중 하나입니다. 팥을 충분히 불려 두었다가 찰밥을 두 가지 종류로 지으십니다. 하나는 팥과 찹쌀로만, 다른 하나는 여기에 밤과 대추를 넣지요. 기본에 추가 재료를 넣은 밥은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납니다. 두 가지 맛의 매력이 달라서, 어느 하나만 먹으라 한다면 이내 두 가지 모두 맛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저 역시 찰밥을 좋아합니다.
올해 어머니는 정월대보름 음식을 딸들과 같이 준비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어머니와 시장을 같이 봐 드리는 것까지는 제가 도왔는데, 그만 정월대보름이 정확히 언제인지 금세 까먹어버렸지요. 지난 토요일 오후,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나물과 오곡밥을 먹고 부럼을 깨 먹는 대보름 전날이 바로 그날인 것을 알았으니까요. 이미 모든 음식 준비를 마친 어머니는 조금 뾰루퉁한 기색이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받은 저는 절기나 명절은 곧잘 흘려듣는 무심한 딸이었지요.
나물과 찰밥을 가지러 들르시라는 말씀에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대체로 무심하고 항상 무언가에 바쁜 딸의 행동에 대한 어머니의 잔소리는 한참이나 길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혹시나 오나 하고 기다렸건만”하고 한탄하는 볼멘 한마디뿐이었지요. 어머니 기분을 살피니 실망이나 화가 한꺼풀 정도로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반복되는 실망의 패턴에 익숙해진 탓인지도요. 평소 어머니 성정을 알고 있는 저에게 어머니의 '체념'은 다행스럽고 긍정적인 사인으로 느껴졌습니다.
“엄마처럼 항상 때 맞춰 이렇게 정갈하고 먹음직하게 음식을 하는 사람이 참 드문데. 솜씨 좋은 엄마 덕분에 나는 매년 이런 호사를 누리네” 했지요. 옆을 지나가는 아버지 들으시라고 부러 크게 말했습니다. 그날은 왠일인지 아버지도 “그건 네 말이 맞다”라고 맞장구를 쳐주시더라고요. 뭐라 대꾸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 마음은 스르르 풀어진 것 같았습니다. 집에 가서 맛있게 먹으라며 반찬통에 넘치도록 담아 주신 어머니는 종종걸음을 하며 떠나는 큰 딸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셨습니다.
올해 정월대보름은 저의 무심함과 건망증에 묻혀 싱겁게 지나가 버렸지만, 그런 아쉬움의 경험 덕분에 작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친정 어머니의 베스트 레시피를 한달에 하나씩 정리해 가기로요. 올 한해 어머니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생긴 겁니다. 모녀가 마주앉아 내뱉는 두서없는 대화를 녹음하면 바로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어플의 기술도 빌려보려고요. 아, 생각만으로도 벌써 작은 기대감에 흥겨워집니다.
어머니의 오랜 실망과 체념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에너지원이 되도록, 이제부터 사브작사브작 행동으로 옮겨보겠습니다. 어머니, 같이 시작해 보아요! 어머니의 살림 경험은 저에게 끝없는 보물창고이자 귀한 선물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