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 개비리 길 소개
경남 창녕군 남지읍 '개비리길'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 몸을 섞는 기강(岐江) 유역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 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까지 길이 약 2.4㎞, 높이 수십 m의
수직 벼랑의 중간에 나 있다.
너비가 1m 안팎으로 매우 좁지만 푸른 강물과 그 위로 우뚝 솟은 거무스름한 빛깔의 단애
(斷崖), 그리고 만추의 풍광이 어우러져 보기 드문 절경을 연출한다.
'기강단애'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곳 경치는 '남지 8경'의 하나다.
'비리'는 벼랑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개비리길은 '개가 다니는 벼랑길'을 뜻한다.
여기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영아지 마을의 한 노인이 키우던 누렁이가 새끼를 11마리나낳았다.
그중 한 마리가 유독 작은 탓에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어미 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노인은 강아지들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따돌림 당한 놈은 남겨 놓았다.
마침 이웃마을로 시집간 딸이 친정에 다니러 왔다가 그 강아지를 보고는 키우겠다며 가져갔다.
그 다음 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어미 누렁이가 딸의 집에 나타나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게 아닌가.
신기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어느 눈 내린 겨울날 누렁이를 뒤따라 가 보니 폭이
좁고 가팔라 눈이 쌓이지 않는 벼랑길로 왕래하고 있었다.
그 후로 이 길에 '개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라는 말에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도 있다.
이를 미루어 바다와 멀지 않은 이곳에 원래 벼랑길이 나 있었는데 좁고 위험해 잘 다니지
않다가 누렁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용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개비리길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격전이 벌어졌던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1592년 임란이 발발하자마자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장군은 개비리길이 있는 마분산(馬墳山)에 토성을 쌓고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당시 망우당은 왜적의 총탄에 맞아 죽은 자신의 애마를 토성 안에 묻었는데,
'마분(말무덤)'이란 산 이름은 거기서 유래됐다.
6·25 때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창녕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맞서 아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운 끝에 가까스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강이 피로 물들 정도로 큰 희생을 치렀다.
'사자성어 8경'은 남지수변공원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 있다.
♣ '낙강칠리(洛江七里)'. 시남리의 오여정(吾與亭)에서부터 개비리 벼랑을 거쳐 창암까지
약 2.8㎞에 이르는 남지 낙동강변의 절경을 말한다.
'남지 8경'을 소개하는 사자성어가 눈길을 끈다.
'율림청풍(栗林淸風)'은 해방 전후 지금의 상남·대신동 일대에 조성돼 있던
밤나무밭의 여름철 그늘과 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묘사한 글이다.
저물녘 물고기와 각종 상품을 가득 싣고 우강 쪽에서 올라오는 돛배를 뜻하는
'상포귀범(上포(땅이름 포)歸帆)'에는 수묵화적인 정취가 스며 있다.
백사장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의 군무(백사낙홍·白沙落鴻),
도초산의 저녁 노을(도초모운·道草暮雲), 옛 동보호에 휘영청 뜬
보름달(동보만월· 東步滿月) 같은 사자성어에도 묘미가 깃들어 있다.
여기에다 기름진 남지 들판을 의미하는 '영남옥토(嶺南沃土)'와 위의 산행기사에서
언급한 '기강단애'를 합쳐 '남지 사자성어 8경'을 이룬다.
남지철교
남지철교는 창녕 남지읍과 함안 칠서면을 잇는 철근 콘크리트 T형교로서, 등록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제작양식이 같으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철제의 신축을 조절하는
이음장치로 연결하는 등 당시의 최신 기술이 사용된 교량이라고 하며,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도하 방지를 위해 1950년 9월 8일 미군이 중앙부 25m를 폭파하였으나 1953년
복구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보수 및 보강공사를 거쳐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3년 7월 정밀안전진단 결과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고 현재는 도보교로만 활용되고 있으며,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남지철교로 차량이 통행하고 있습니다.남지읍민의 애환이 서린 이 남지철교에는 유채 축제 기간을 맞아, 추억의 남지철교와 관련된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제법 장구한 세월 동안
경남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한 교통로로 그 소임을 다했던 남지철교와 그 속에 담긴 애환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