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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왼편 / 한백양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한백양/ 전남 여수시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일상적인 장면을 사유화 이미지로 벼리는 솜씨 탁월
심사위원 : 정호승 조강석
심사위원들이 ‘왼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문제적 현장으로 벼리어 내미는 솜씨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핍진하게 전개되는 사려 깊은 성찰이 마지막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시 분석>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른편(오른손)에 비해 열성인 왼편(왼손), 아파트에 비해 열성인 빌라. 빌라인데 또 오래되었으므로 세 열성이 겹쳐 있는 것이 이 시의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시적 화자도 이 빌라에 살고 있다)
(왼쪽이 아니라 왼편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소외된 사람들을 같은 편에서 사유하고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떠나지 못해 불만이 있는 곳)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떠나야 할 곳인데 못 떠나기 때문이다. 가장인 남편, 아버지를 탓한다.)
(내 집까지 들렸으니까 크게 싸운 것이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서로 의견이 안 맞아 싸운다)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말의 흔들림이 시적 화자의 현관에 쌓인다는 표현이 재치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나의 불면증은 같이 인접해 있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지형적인 질병이다. 재치있는 표현이다)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오른손은 잘 처리하는 손이라면 왼손은 좀 부족한 손이다.)
(서술어를 생략해 내재율적인 리듬을 만든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메시지를 던진다. 신춘문예가 좋아하는 메시지다. 희망, 기쁨 등)
(승구)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빌라를 새로 비유한 것도 신선한 비유다. 오래된 빌라이므로 늙은 새로 비유하였다. 현대시에서는 거의 모든 시들이 어떤 이유로든 새를 시에 끌어들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한층 의미가 승화된다. 부족하고 서투르지만 서로 편들어준다)
(많은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내 왼편의 빌라의 편이 된다고 한다. 매우 따뜻한 표현이다. 희망을 주는 표현이다)
(전구)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나에게로 심상이 옮겨서 내면화하고 있다)
(나도 오래된 빌라에 살고 있는데 나의 편이 될 가족을 꿈꾼다)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한층 의미가 높아진다. 오래된 미래는 뭔가 꿈, 가치있는 것이 있다. 희망 대신 미래란 말을 사용한다. 내편은 미래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서로 편이 되어주는 것은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이 기반이 되어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앞에서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를 이어받아 나는 한 번씩 그렇지가 반복되면서 긍정으로 승화)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고양이가 부수었거나 일하다 집안의 가족이 실수로 파손한 화분. 새 것으로 사기 아까워서 테이프를 발라둔 것이다. 돈이 없기 때문에 싸우는 원인이다)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이 평범한 모습이 희망이 될 수 있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화분을 깬 고양이, 돔물에게도 밥을 주는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다)
(이웃과 더불어 순응하며 따뜻한 화합이 있는 빌라다)
(시적 회자의 시선도 따뜻하므로 빌라의 사람들과 같은 편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진리와 사유를 깨달은 아포리즘이다. )
(일상을 가볍게 터지하면서 그 속에서 사유를 건져올린다. 메시지가 정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내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우아하게 마무리한다)
1. 메시지
그러나, 그래, 그렇지의 미학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은 왼쪽의 오래된 빌라냐 부유하지만 인정이 없는 고급의 아파트냐
ㅇ 이 시에서 떠오르는 것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의 에네르게이아의 개념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에서 지금, 여기는 가난한 오래된 빌라이지만 마음은 따뜻하므로 그 자체로 완전한 가치를 지닌다.또 다른 희망을 꿈꾸는 과정은 또 그 자체로 또 다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키네시스(Kinesis)와 에네르게이아적 삶
1. 키네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인생"을 말한다.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사물이 목적을 완전히 실현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정해진 목적을 향해 가는길 !!
2. 에네르게이아란 무엇을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실현해가는 상태, 과정의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실행되고 있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 완전한 가치를 가진다.
ㅇ (책) 오래된 미래:라다크에서 배우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인간 중심의 삶, 관계의
중요성을 소중히 여기는 삶 등등. 이제야 사람들
은 이런 가치들 앞에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
이고 있지만 사실 이 모두는 라다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증명해 보여준 평범하고 오래된 현재(일
상)인데 이것이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ㅇ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론을 연상할 수 있다. 부버는 인간 관계를 '나-그것' 관계와 '나-너' 관계로 나누고, 진정한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나-너'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ㅇ 갈등과 화해, 일상의 소소한 따스함이 공존하는 모습을 통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존재론적 개념인 '타자의 시선'이 떠오를 수도 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2. 이미지
ㅇ 빌라의 이미지, 싸움의 이미지, 오래됨의 이미지, 편의 이미지, 자연의 이미지(새, 바람, 날과 밤), 희망(희망, 따뜻, 그렇지)의 이미지를 연쇄하고 교차시킴
3. 리듬
ㅇ 왼과 편의 반복
ㅇ 그러나, 그래, 그렇지의 반복
ㅇ ㅁ, ㄴ, ㅂ, ㄹ 자음운 반복
ㅇ ㅗ, ㅏ 모음운의 반복
왼편/한백양〔2024동아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감상 홍정식)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어떤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어요. 아파트도 아니고 어느 골목의 오래된 빌라예요.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이라고 하니까, 빌라를 떠나고는 싶은데, 아파트로 이사 갈 형편은 안 되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가 되겠네요.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으로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살다 보면 서로 오해가 생기기도 하죠. 내가 옳니, 네가 옳니 하다 보면 큰 소리가 현관 밖으로 나오곤 합니다. 오해로 다툰 날은 불면증이 생기고, 지형적인 질병도 생겨요. 지형은 땅의 생긴 모양이죠. 아마도 아파트로 인해 햇볕이 들지 않는 주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연에서는 서술어가 없어요. '질병으로, 서투른 것으로' 어떻다,라고 해야 하는데 어떻다는 것이 없지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다음 연을 읽어야 하는데, 다음 연에서는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라고 하니까, '질병과 서투른 어떤 것으로 인해'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희망이 있는 이유는 집의 왼편에 있는 늙은 빌라가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날이 많다는 겁니다. 아하, 이제 집의 왼편에 있는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걱정하고 있어요. 나는 이 시대의 청년일 테지요.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아직 잠들어 있는 내 편은 나의 미래가 되겠지요. 미래도 지금 현재의 청년을 보면서 걱정하고 있군요. 미래는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왼편에는 힘든 과거, 오른편에는 아직 모르는 미래가 지금 현재 시점에서 바라 보아 집니다. 부모님도 바라는 대로 살지는 못했어요. 그런 오래된 빌라와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는 미래를 생각합니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둔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나 아버지겠지요. 부모님이 티격태격 싸우지만, 그건 일상의 편안함이기도 합니다. 그런 부모님이나 빌라의 사람들도 길고양이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아요. 먹이를 놓아주는 따뜻한 사람들이지요.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길고양이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존재지요. 길고양이조차도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준다는 사실을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 악할 리가 없겠지요.
왼편은 약한 쪽입니다.(물론 왼손잡이에게는 오른손이겠지만요.) 왼편의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가 더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그런 부모를 보면서 꿈을 가질 겁니다. 오른편에 있는 미래가 왼편을 돌아봐주기를 바랍니다. 집을 기준으로 우리는 오른편에 있을까요? 왼편에 있을까요? 아니면 그 집에 살고 있을까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요? 깊은 사유가 있는 시입니다.그래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물론 제 해석이고 감상입니다. 제멋대로 생각한 것이죠. 읽으시는 분에 따라 시는 다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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