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유섬이 묘
신유박해 유항검의 시복에 나타난 ‘유 처자’ 유 섬이
2014년 8월 광화문에서 시복식이 있었다. 특히 당시 시복 대상자들은 막막한 세상에서 주님을 알아챈 초기 순교자들이었다. 이때 가족들의 시복을 위해 선물처럼 나타난 여성이 있었다. 온 식구가 모두 천국으로 이사 간 것 같은 지경에서, 그 뒤 60여 년을 떳떳하게 살아낸 그 집안의 딸이었다. 우리는 그를 유항검의 딸 유 섬이라고 부른다.
칠십 평생 ‘유 처녀’로 불린 관비
1863년은 박해 기간 중 교회가 가장 활발했던 때였다. 이 무렵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도 부사로 파견된 하겸락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주교 때문에 관비가 되어 71세까지 ‘아이’를 지키고 살다가 죽은 ‘유씨 처녀’에 대해 들었고 이를 글로 남겼다. 그의 글들은 1906년 아들 하용재가 목판본 「사헌유집」으로 간행했다(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하겸락이 유씨 처녀가 관비였음에도 기억하여 문집에 남긴 것을 보면,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글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하성래가 2014년 이 글을 읽으며 유처자를 1801년 신유박해 때 거제도로 유배 간 ‘유섬이’로 추정했다.
이어 김진소 신부, 허철수 신부, 서종태 등이 ‘유처자묘’라고 쓴 묘표를 발견했다.
유섬이에 대해서는 「사학징의」에 “딸 유섬이(9세)는 거제부로 보내어 관비로 삼으라.”는 한 줄뿐이다.
순교, 천국으로의 이사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고 난 뒤 박해가 지방으로 뻗쳤다. 호남에서 엄청난 재력으로 열성을 다했던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동생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교우들의 이름을 실토한 뒤 불과 며칠 만에 200여 명이 옥에 갇혔을 만큼 그는 ‘교주, 호남의 두목’이었다.
그래서 온 친인척이 몽땅 천국으로 이사 가서 다시 초남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할 정도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
신유박해의 공식적인 마지막 사형도 전주 숲정이에서 벌어진 이순이 등이 집 식구들의 처형이었다. 달레 신부는 그의 책에서 “지금 그 집안의 후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라고 썼다. 유섬이는 그때 식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유배된 유항검의 어린 세 자녀 가운데 하나다.
‘호남 사도’ 집안의 기개를 드러내고
관비로 온 유처자는 일곱 살이었는데, 읍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기르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그는 성장하여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자기 자녀가 노비가 될까 봐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자 흙과 돌로 꽉 막힌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창문을 통해 음식과 바느질거리를 받으며 살았다.
그는 마흔이 넘어 그 집을 헐고 나왔고, 항상 몸을 지키려고 칼을 차고 다녔다. 고을 사람들이 그 장한 기지를 기려 ‘유처녀’라고 불렀다.
그는 부사 하겸락이 거제도를 떠날 무렵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사는 제대로 장사를 지내고 암석에 ‘칠십일세유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라고 쓴 묘표를 세우도록 했다.
부사는 아마도 나중에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이 글을 쓴 듯싶다.
몇 가지 어긋나는 대목이 있는데 그가 묘표에 쓰라고 한 글자가 ‘유처자묘’로 다른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글에는 다른 사람이 붙인 듯한 주도 있다. 예컨대, 유처자의 죽음이 부사에게 보고된 것은 그의 덕행 때문이지 관비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는 양인이 되었을 확률이 높고, 당시 관비의 의무는 50세에 끝났다. ‘국법에 역적죄를 범하여 노비가 된 사람이 죽으면….’이라는 주는 편찬 때 붙여진 것 같다.
관비 유처자의 삶 곳곳에는 그의 선택을 도왔던 보호의 손길이 보인다. 유섬이가 거제에 왔을 때 실제 나이가 아니라 일곱 살이라고 소개되었을 수도 있다.
노비의 사역 기간이 10여 세부터니까, 그를 양딸로 주어 기르게 하려면 어릴수록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동정의 삶도 평생을 유지했을 때 존경받는 것이지, 어려서 이런 삶을 시작할 때에 이미 주위의 인정이 필요하다. 물론 20여 년 흙집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읍노비에게는 더욱 힘들었던 ‘납공 노비’가 될 수 있었던 여건이 조성되어서라고 짐작된다.
한편, 40세 이후 흙집을 헐고 나온 사실도 몇 가지 이유를 상정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 나이가 넘으면 여자로서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그가 속량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신유박해를 일으킨 정순왕후는 바로 그해 공노비(내시 노비를 중심으로)를 해방시켰다.
조선에서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전쟁 뒤로는 몸값을 지불하고 양인이 되는 노비가 크게 증가했고 가격도 점점 낮아졌다. 관비인 유처자가 평생 부지런히 옷감을 만들었다면 그는 신공을 바치고 속량될 수도 있었다.
결국 유처자의 삶에는 이웃의 협조와 집안의 명망, 사회 환경 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살았기에 타인을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유섬이를 기다리며
유처자는 평생 갈망과 고뇌를 늠름하게 이겼고, 그 열매는 식구들의 시복을 빛냈다. 유처자는 칠십 평생을 처녀로 살았다.
그는 ‘동정녀’가 교회의 허락과 지도를 받으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동정’의 삶을 이어가며 평생 영적 도움을 갈구했을 것이다.
한편, 유처자는 1830년대 중반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때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선교사가 입국하던 때였다.
그 뒤 이십여 년 동안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거제도에는 병인박해 뒤 피신 온 윤봉문이 첫
신자였으니, 유처녀 당대에 신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렸을지 모른다. 기다림 자체가 그를 지탱했을 수 있다. 그는 인간적인 정(情)도 봉헌했을 것이다. 밑으로 두 남동생이 관노가 되어 각기 다른 섬으로 떠났다. 또 집안에는 증조모와 혼인한 언니 등이 풀려났으나 집이 적몰되어 헛간에서 머물고 있었다.
신유박해로 처형된 사람이 약 100명, 유배된 사람이 약 400명에 달했다.
실제로 「사학징의」에는 약 40명의 여성 유배자 명단이 나온다.
유처자는 우리가 이름을 찾지 않은 이 여성 유배자들의 외침을 달고 나타났다.
그는 순교자의 자손들이 어디선가 당당하게 살았다고, 또 그렇게 인간다움을 지켜서 일반인도 감동시켰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분명 더 많은 유섬이가 나올 것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