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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87) 소패왕 손책의 활약상 <하편>
손책이 도망치는 자신을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유요는 말릉으로 가려던 방향을 틀어, 남은 병력으로 우저로 향했다.
손책이 추격전을 펼치느라고 우저는 방비가 소홀하리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요의 동태가 즉각 손책에게 보고되자 , 정보를 시켜 한편으론 유요를 추격하게 하고, 손책 자신은 주력군(主力軍)을 이끌고 우저로 향했다.
손책이 우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적장 우미(于靡)가 결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손책은 두세 합을 싸우다가, 도망치는 우미의 뒷덜미를 답싹 움켜잡았다.
그러자 우미의 몸이 말등을 떠나, 손책의 한 손에 대롱대롤 매달리며 질질 끌려온다.
그 모양을 보고 유요의 부장 번능(副將 樊能)이 쫓아나오며 소리쳤다.
"이놈, 손책아, 게 섯거라!"
그러나 손책이 말머리를 힐끗 돌리며 검을 후려치자, 달려오던 번능이 단칼에 목이 달아나며 말에서 고꾸라져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손책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유요의 군사들은 감히 싸울 생각을 못하고 뒤로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유요는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형주(荊州)를 바라보고 떠났다.
이제는 형주에 있는 유표(劉表)에게 의지하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손책은 곧 군사를 거두어, 말릉에 남은 유요의 잔당을 치러 갔다.
말릉에는 적장 설례를 비롯하여 장영, 전횡 등의 장수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책이 부근 일대의 패잔병을 소탕하며 말릉에 이르자, 성 위에서 장영이 손책을 발견하고,
"앗 , 저게 손책이 아니냐!"
하고,소리치며 손책을 향하여 활을 냅다 쏘아 갈겼다.
화살은 명중하였다. 화살이 손책의 다리에 꽂히는 바람에 손책은 말에서 떨어졌다.
"앗! 손 장군이 적의 화살에!"
손책의 수하 장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손책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손책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하들이 손책을 업고 진중으로 피신하였다.
그날 밤, 손책의 진중에는 조기(弔旗)가 높이 걸리고, 군사들은 슬픔에 싸여 울었다.
"손책 장군이 적의 화살에 어의없게 세상을 떠났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며, 군사들은 목을 놓아 울기까지 하였다.
장영은 척후병에게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럼 그렇지. 내 화살에 살아 남을 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도 확실을 기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에게 알아 보니, 손책의 진중에서는 오늘 아침부터 장례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거행 하기로 했다는 소리까지 듣고 보니,
"손책은 분명히 죽었다. 이제는 우리의 세상이 되었다!"
장영과 전횡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였다.
손책이 장영의 화살을 맞고 쓰러진지 삼일 째, 손책의 상여가 많은 군사들에 들려서 산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과 들에 숨어있던 장영, 전횡의 군사들이 일시에 상여 행렬을 기습하였다.
이번에야 말로, 손책의 군사를 전멸시킬 수가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쪽 군사들이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덤벼들자, 지금까지 장례 행렬인 줄만 알았던 손책의 부하들이 별안간 사방으로 흩어지며 공격 대열을 정연히 갖추면서,
"장영과 전횡을 붙잡아라!"
하고, 천지가 진동할 듯한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앗, 속았구나!"
장영은 기겁을 하며 놀라 군사를 되돌리려 하자, 손책이 숲속에서 달려나오며,
"네가 찾던 손책은 여기 있다. 장영, 네가 어디로 도망을 치려 하느냐! 내 창을 받아라!"
손책의 고함소리와 함께 장영은 몸에서 피를 뿜으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전횡도 황개가 휘두르는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두 장수를 잃은 군사들은 제각기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말릉성은 손책의 계교에 감쪽같이 넘어가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로써 유요의 세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손책의 머리에 인상깊게 남아 있는 사람은 적장 태사자였다.
그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손책이라도 안심되지 않았다.
더구나 태사자가 군사를 이천 명이나 거느리고 경현(涇縣)에 있다는소식을 듣고 나니 더욱 안심이 되지 않았다.
손책은 태사자를 제압하기 위해 경현에 도착한 뒤에, 얼른 공격하지 아니하고 주유를 불러 물었다.
"주유! 경현을 쳐서 태사자를 사로잡으려면 어떤 방법을 쓰면 좋겠나?"
"태사자를 사로잡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성안에 불을 지르고 우리가 동문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남,북,서문으로 공격을 한다면 적들은 필시 동문으로 달아날 터이니, 그때 성밖 멀찌감치에 복병을 매복하였다가 태사자를 함정에 빠뜨리면 생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손책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진무가 날쌘 부하 십여 명을 데리고 적병으로 가장하고 성안으로 잠입해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책군이 삼면으로 치열한 공격을 퍼붇자, 태사자는 훈련이 덜 된 군사를 데리고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태사자는 군사들을 이끌고 동문으로 급히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손책은 동문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서 도망치는 태사자의 뒤를 급히 추격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태사자가 필마단기로 쫒기는 동안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사람도 말도 지쳐갈 무렵, 태사자는 손책의 군사들이 미리 마련해 놓은 함정에 말과 함께 곤두박질하며 빠지고 말았다.
복병들은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어 그를 사로잡았다.
태사자는 마침내 결박을 당한 채 손책 앞으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손 장군! 빨리 나의 목을 잘라 주시오."
태사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눈을 무겁게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책은 태사자 곁으로 친히 다가가 결박을 끌러 주고 비단 옷을 입혀 주며,
" 태 장군은 왜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을 하시오."
하고 가장 친근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러자 태사자는 의외란 듯이 눈을 동그렇게 뜨며 묻는다.
"장군은 어찌하여 나를 죽이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시는게요?"
그러자 손책은 태사자의 어깨를 정답게 잡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지난 날 장군의 의협심과 무술 실력에 크게 놀란 사람이오. 그런 장군이 어리석은 유요의 휘하에서 지낸다는 것이 몹시도 안타까워 이러는 것이오. 장군은 혹시 오늘부터 나를 도와 주실 수는 없겠소? 나는 지난 날 이후로 장군이 내 편이 되어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소."
태사자는 자신을 알아 주는 손책의 말에 감동되었는지, 별안간 얼굴이 숙연해 지더니,
"장군이 나를 수하로 거두어 주시겠다구요? 그렇다면 삼가 견마의 수고를 사양치 않으리다."
하고 손책에게 귀순할 뜻을 전했다.
손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태사자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지난날 신정령에서 단둘이 맹렬하게 싸웠는데, 그때 만약 내가 붙잡혔다면 장군은 나를 살려 주셨겠소?"
"아마 나는 장군을 죽였을 것이오."
태사자도 웃으면서 솔직히 대답한다.
손책은 태사자와 함께 중(帳中)으로 들어와 친히 환영연을 열어 주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들을 테니, 이제부터는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그러자 태사자는 이렇게 말한다.
"유요가 싸움에서는 패하긴 하였지만, 그의 군사는 결코 약한 군사가 아니오. 이제 내가 가서 그들을 수습해 데리고 온다면 우리 편에 크게 도움이 되리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장군이 나를 믿고 보내 주실지 모르겠소이다."
손책은그 말을 듣고 태사자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았다.
"내가 어찌 장군을 의심하겠소. 그것은 내가 원하던 바이니, 부디 내일이라도 떠나시오."
"고마우신 말씀, 그러면 내일 정오에 떠났다가 사흘 후 정오에 꼭 돌아오겠소이다."
태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책에게 절하고 물러났다.
다음날, 손책의 부하 장수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놀라며,
"엣? 태사자를 놓아 보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모르긴 모르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손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태사자는 신의를 아는 사람이기에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만약 그만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면 돌아오지 않기로 아까울 것도 없습니다."
장수들은 손책의 대담성에 놀라면서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약속한 사흘째가 되었다.
그날 정오까지 태사자가 돌아 오겠노라고 약속한 바로 그날이었다.
장수들은 무슨 내기라도 하듯이 영문 앞에 기다란 막대기를 세워 놓고, 그림자의 길이를 쳐다보면서 정오까지 태사자가 돌아오는가 알아보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영문앞에 세워 놓은 막대기의 서쪽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점점 좁아든다.
바로 정오가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들판에서 태사자가 일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삐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손책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고, 부하 장수들도 태사자의 깊은 신의와 손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모두 놀랐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비롯하여 손책의 사람됨은 점점 인근에 널리퍼져, 영명을 듣고 모여드는 군사가 날마다 꼬리를 이었고, 손책 또한 점령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까닭에 손책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대해졌다.
그리하여 그의 위업은 단시일 내에 완성된 듯이 보였으며, 사실상 그는 선친의 영토였던 강동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됐다! 이제는 곡아(曲阿)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오자!"
손책은 신임하는 부하 장수를 보내어 노모를 강동의 본성인 선성(宣城)으로 모셔왔다.
"어머님!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이제는 안심하시고 여기서 편히 지내세요."
부군(夫君)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부쩍 늙어버린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지으며,
"너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느냐!"
하고 말했다.
며칠 후, 손책은 동생 손권(孫權)을 보고,
"나는 남쪽의 오군(吳郡)에 원정을 다녀올 것이니, 네가 대장 주태(大將 周泰)와 함께 선성을 지키면서,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어라."
하고 말한 뒤에 오군 원정길에 나섰다.
이때 강동 남족 오군에서는 엄백호(嚴白虎)라는 자가 동오의 덕왕(東吳 德王)을 자칭하며, 오성과 가흥이라는 곳에 성을 쌓고 강동을 노리고 있었기에 손책은 후환을 두지 않으려고 이를 정벌하러 떠나는 길이었다.
손책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펴면서 오군(吳郡)에 진군하였다.
동오의 덕왕으로 자칭하는 엄백호는 손책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아우 엄여(嚴與)를 시켜 풍교(楓橋)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다.
손책은 엄여를 대단치 않은 장수로 여기고 몸소 선봉에 나서서 싸우려 하였다.
그러자 모사 장굉(謨士 張紘)이 말한다.
"장군은 삼군의 목숨이요 대들보올시다. 장군께서 경솔히 나아가 적과 싸울 것이 아니오니 , 이제부터는 합당한 장수를 내보내시고 장군께서는 자중하십시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그리하여 손책은 한당(韓當)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였다.
한당은 정면에서 공격하고, 진무와 장흠은 풍교 뒤로 돌아가 협공하게 하니, 엄여는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 오성(烏城)으로 급히 달아난다.
그리곤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다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손책은 장수들과 함께 오성을 에워싸고 사흘 동안이나 싸움을 걸어보았지만,적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적장 하나가 성루(城樓)위에서 한 손으론 대들보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성아래 손책을 가리키면서 무엇인가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것을 본 태사자는 즉석에서 그자에게 활을 쏘아갈겼다.
그러자 시윗소리가 날카롭게 나더니만, 그 화살은 욕설을 하고 있던 장수의 손을 꿰뚤고 대들보에 깊숙히 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손책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아! 어쩌면 이렇게나!"
성중에 칩거해 있던 엄백호는 그 말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동생 엄여를 불러 묻는다.
"애야! 암만해도 우리가 손책군과 싸워서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저 역시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질없이 싸울 것이 아니라, 차라리 화평을 제의하는 것이 어떨까?"
"화평이라뇨? 항복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항복이 아니라 강화(講和)를 하잖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명분만 세워 주고 실리(實利)는 우리가 거두자는 말이지, 손책은 나이가 젊어서 싸움은 잘하지만 계교는 부족하거든, 그러니 강화를 맺어 위기를 벗어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이지."
"그렇다면 화평을 제의해 보시죠."
이리하여 엄여는 손책의 진중을 찾아가게 되었다.
손책은 엄여를 장중으로 불러들여 간단한 주연을 베풀며 물었다.
"그대의 형은 어떤 생각으로 당신을 나에게 보냈는가?"
"형님 말씀으론, 우리가 계속해 싸우는 것은 인명을 부질없이 희생시키는 것이니, 차제에 강화를 맺어 강동 땅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말씀입니다."
손책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발칵 내며,
"뭐? 강동 땅을 공평하게 나누자고? 아직도 그놈이 자기가 처한 형편을 몰라도 유만부동이지, 저와 내가 동격(同格)인 줄로 착각하고 있구나!"
하고 소리치자, 엄여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손책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엄여의 목을 한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엄여의 수행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걸 주워 가지고 돌아가라. 그리고 돌아가거든 너희들 괴수에게 전해라, 강화는 없다! 항복이 없다면 오로지 정벌만이 있을 뿐이다!"
엄백호는 돌아온 수행원에게서 보고를 받고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으로 오성을 버리고 회개(會稽)로 도망을 쳤으나, 이를 간파한 손책이 태사자와 황개를 보내, 도망치는 엄백호를 철저히 쳐부수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동오의 덕왕>으로 불리던 세도가 엄백호는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한 채로 회계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엄백호가 도망친 회계의 태수는 왕랑(王朗)이란 사람으로 엄백호와는 절친한 친구의 관계였다.
엄백호의 사정을 알게 된 왕랑은 엄백호를 도와 손책을 쳐부술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모사 우번(虞蕃)이 말한다.
"손책은 인의(仁義)로 군사를 쓰고 백성을 다스리며, 엄백호는 포악한 성질로 군사를 쓰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장군은 어찌하여 포악한 무리를 도와 인의의 군사를 치려 하십니까? 차리리 엄백호를 결박지워서 손책에게 보내는 것이 장래를 위해 이로울까 합니다."
"이놈아! 말 같지 않은 소리 작작 하거라! 엄백호는 나의 옛 친구요, 손책은 우리에게 쳐들어 오는데, 내 어찌 젖비린내 나는 손책에게 머리를 굽힐 수가 있느냐! 너같이 어리석은 놈은 당장 내 눈앞에서 없어지거라!"
우번은 한숨을 쉬며 왕랑 앞에서 물러나왔다. 그리하여 그날로 작은 봇짐을 하나 등에 짊어지고 표현히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랑은 그날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손책을 치러 나왔다. 그리하여 손책의 진지 앞까지 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놈! 젖비린내 나는 손책이란 놈, 빨리 나오너라!"
손책이 말을 마주 달려나오며 대답한다.
"손책은 여기 있다. 네가 바로 절강(浙江)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당, 왕랑이더냐?"
손책이 이렇게 소리치며 달려나가려고 하자, 뒤에서 태사자가 나는 듯이 달려 나가며,
"장군! 돼지를 베기에는 왕검(王劒)이 너무도 아깝소이다! 내가 나가 싸우렵니다!"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달려나간 태사자가 왕랑과 한바탕 어울려 싸우는데, 적장 주흔(周昕)이 칼을 높이 치켜들고 달려나와 싸움을 돕는다.
그러자 이편에서는 황개가 달려나갔고, 뒤이어 주유와 정보도 뒤를 따랐다.
그러자 왕랑은 싸움이 불리해질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돌려 도망을 치며 군사까지 되돌려 성안으로 황급히 돌아온 뒤에,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책이 군사를 나누어 사방에서 공격할 형세를 취하니 위급함을 여긴 왕랑이 다시 성밖으로 달려나가 싸울 태세를 하였다.
그러자 엄백호가 왕랑의 손을 잡고 말린다.
"지금 나가 싸우면 불리하니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합시다. 저들은 멀리서 온 관계로 얼마 못 가서 군량이 떨어질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쉽게 승기를 잡을 수가 있을 것이오."
왕랑은 그 말을 옳게 여겨 회계성을 굳게 지키고 싸우려하지 않았다.
엄백호의 예상대로 손책은 나날이 군량이 줄어들어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족한 군량을 주변의 백성들에게 빼앗아 민심을 잃게 할 수도 없어서,
" 부족한 군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소?"
하고 장수들에게 물었더니, 함께 따라왔던 숙부 손정(孫靜)이 말한다.
"여기서 수십 리 밖에 사독(渣瀆)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왕랑의 군량고(軍糧庫)가 있네. 그러니 그곳을 먼저 점령하면 적은 나와 싸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군량도 확보하고 적들도 불러낼 수가 있으리라, 허니, 지금 곧 사독으로 진군하는 것이 좋겠네."
손책은 숙부의 말대로 사독을 치기로 작정하고 이날 밤에는 횃불을 밝혀 금방이라도 성을 칠 듯한 기세를 보이면서, 주력군을 사독으로 돌렸다.
왕랑은 그것이 계교인 줄도 모르고 이날 밤은 방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도록 독려하였다.
이튼날, 왕랑은 사독에 있는 군량고가 손책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곧 성을 나와 사독으로 군사를 몰고 나왔다.
그러나 중간에 잠복해 있던 복병들의 기습을 받고 왕랑은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맹장 주혼도 무참히 전사해버렸다.
그러나 왕랑만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도망을 쳤지만, 엄백호는 여항으로 달아나는 도중에 동습이라는 자기 군사에게 목이 잘려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회계성도 손책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로써 강동 일대는 모두 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손책은 숙부 손정에게 회계성을 지키게 하고, 주치(周治)는 오군 태수(吳郡 太守)로 봉하여,
점령지 백성들을 선의로 통치하게 한 뒤에, 본성인 선성으로 군사를 돌렸다.
한편, 손책이 오군 정벌을 떠난 뒤에, 선성에 남아 형의 명령을 받고 대장 주태(周泰)와 함께 성을 지키고 있는 손권에게는 어느날 난데없는 산적떼들이 몰려들어 사방에서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해왔다.
때마침 심야의 기습을 막아내기가 어려운 형편이어서 주태는 손권을 말에 태우고, 자기는 갑옷도 입지 못한 채 칼 한자루만을 손에 쥐고 손권을 보호하며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산적떼가 고함을 치며 달려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주태는 칼을 들어 이놈치고 저놈 찌르며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워낙 여러놈들에게 공격을 당한지라, 위험을 모면했을 때에는 전신에 상처를 여러군데 심하게 입었다.
손책이 급보를 받고 산적떼를 물리치고 성에 돌아왔을 때에는, 주태는 이미 생명이 위태로웠다.
"주태 장군을 어떡하든지 살려내야겠는데, 누구 명의(名醫)를 아는 사람이 없느냐?"
손책이 안타깝게 말하자, 얼마전에 엄백호를 죽이고 귀순한 동습이 말한다.
"수 년 전에 제가 해적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고 죽을뻔 하였을 때, 회계에 사는 우번(虞蕃)이 명의를 천거해 주어서 보름 만에 완치된 일이 있습니다."
"우번이라니? 우중상(虞仲翔) 말인가?"
"그렇습니다."
손책은 강동의 현자(賢者)인 우중상에 이름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자 곧 동습에게 명하여 우번을 찾아내는 동시에, 명의도 함께 데려오게 하였다.
우번은 엄백호의 질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다가 손책의 부름을 받고 선성에 나타났다.
손책은 그를 곧 공조(功曹)로 삼은 뒤에, 그의 친구인 명의를 급히 불러오게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명의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화타>로서 패국(沛郡) 초군 태생으로 자는 원화(元化)라고 하였는데, 머리가 백발인데다가 얼굴이 불그레 한 것이 마치 신선과도 같았다.
"존당께서 어떡하든지 주태 장군을 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손책은 화타를 상빈으로 대접하며 간곡히 부탁하였다.
화타는 주태를 진찰하고 나더니,
"한 달은 걸려야 완치되겠소."
과연 그의 말대로 주태는 화타의 치료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깨끗이 나았다.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과연 명의이십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하고 묻자, 화타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는 아무런 보답도 필요치 않소. 다만 나의 친구인 우번을 긴하게 써주기를 바랄 뿐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이제 강남(江南), 강동(江東) 팔십여 주는 젊은 영웅 손책의 통치하에 들었다.
땅은 기름지고, 문화는 높은데다가 군사까지 강하여 손책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손책은 많은 장수들로 하여금 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논공행상을 적절히 베풀었으며, 각지에 숨어 있는 현인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손책이 원술에게 의탁하며 지내던 어려웠던 지난 시절은 꿈같이 지나가버리고, 이제는 당당히 강동의 맹주로써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명실공히, 강동의 소패왕(江東 小覇王)이 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