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1534∼1582
청년기에는 그의 기이한 행동으로 눈에 띄어 「うつけ者(우리말로는 멍청이)」라고 불려지지만, 아버지 · 노부히데의 사후, 동생 · 노부유키(信行)와의 상속자 분쟁에서부터 급속히 무인으로써의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와리 통일 후인 1560년, 2만 5천을 헤아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 3천의 군사로 기습, 요시모토를 죽였다. 1567년에는 미노공략을 완수해 거성을 기후로 옮기는 것과 동시에「天下布武(천하포무)」의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568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받들어 상경에 성공하지만, 곧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토벌의 칙서를 각지에 보내, 노부나가 포위망을 구축한다. 1570년의 아사쿠라(朝倉)씨 공략 시에는 맹우 ·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의 생각하지 않았던 배반에 어쩔 수 없이 퇴각을 해야 했지만, 3년 후에는 기어이 아사쿠라와 아사이가를 멸하고야 말았다. 1575년에 나가시노의 전투(長篠の合戰)에서는 철포대의 효율적인 사용으로 타케다군을 격파, 다음해에는 거성을 아즈치성(安土城)으로 옮겨 천하 통일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582년, 중신 ·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 혼노사(本能寺)에서 자해함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 오다 노부타다 (織田信忠)
1557~1582
노부나가의 장자. 1576년에 노부나가로부터 오와리 · 미노와 기후성 및 그곳의 모든 자원을 물려 받았다. 노부나가는 오직 천하포무의 야망만으로 아즈치성을 쌓아 올렸고, 그 후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정벌, 이시야마 혼간지 등을 공격해 하리마(播磨) 계략, 고우슈 타케다 정벌 등 각지에 출진했다. 훌륭한 가신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였다고 자주 말해지기도 하지만, 가신을 다루는 능력은 충분히 있어 2 대째로서는 일단 합격이었다. 괴상한 아버지와는 달리 가신들로부터도 어느정도 친밀감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에서 아버지가 급사. 니죠성의 고쇼(二條御所)에 있던 노부타다는 아버지를 구원하려 하지만 구원에 실패하고, 마지막에는 사네히토(誠仁) 친왕과 기찌보시만을 탈출시키고 죽임을 당했다.
☞ 오다 노부카츠 (織田信雄)
1558~1630
노부나가의 삼남으로서 태어나지만, 차남이어야할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의 생모의 신분이 낮았기에 차남으로서 인정이 되었다.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는 동복형제간이다. 노부나가의 모략에 의해 기타바타케가에 양자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후 마음대로 이가에 쳐들어갔다가 게릴라 작전에 지고(덴쇼 이가의 란) 아버지의 질책을 받지만 다음 해 결국 토벌하고야 말았다. 그 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단독으로는 아케치를 칠 수 있을 힘도 없었고, 야마자키 전투 후의 1582년 6월 15일, 아케치의 잔당을 쫓아 아즈치성 천주를 불태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른다 . 계속되는 기요스 회의에서는 조카 · 오다 기찌보시를 지지하고, 그 후에 후견인이 되어, 오와리 · 이세 양국을 얻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戰)에서는 히데요시의 편에서 히데요시의 예측대로 동생 · 오다 노부타카를 죽였다. 그 후에는 히데요시의 공격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맞받아 싸우게 되는데, 고마키 · 나가쿠테의 전투(小牧 · 長久手の合戰)에서 이에야스에게 진 히데요시가 노부카츠에게 지위와 영토를 주고 단독강화를 결행해 버리자, 이에야스가 「도련님은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며 탄식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의 오오사카의 진에서는 오오사카성에서부터 곧바로 해산. 이에야스에게 정보를 가져와, 결국 노부카츠의 가계가 노부나가의 혈통으로서 메이지 시대까지 남게 되었다.
☞ 오다 노부타카 (織田信孝)
1558~1583
오다 노부나가의 삼남. 이세의 간베 도모모리(神戶具盛)의 양자로 들어가 가독을 계승. 혼간지 변후에는 시바다 가쓰이에와 결탁.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대항하나 형 · 오다 노부카츠에게 패해 자해로서 생을 마감했다.
☞ 오다 노부유키(織田信行)
? ~1557
오와리의 큰 멍청이 · 형 노부나가에 비해, 성격은 부드러웠고, 가신이 말하는 것을 잘 들었으며, 예의범절이 밝고, 학문도 잘 했기 때문에, 가신으로부터 노부히데의 사후 가장 유망한 주군으로서 받들어 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후, 시바타 가쓰이에와 하야시 형제들의 후원을 받아 형 노부나가와 싸우지만, 병력면에서 우세했던 노부유키군이 스에노모리의 싸움(末森の戰)에서 패배. 하지만 이 때는, 어머니 츠치다 고젱(土田御前)의 중재로 용서된다.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들은 마음을 고쳐 먹고 노부나가를 섬기지만, 노부유키는 여전히 기회를 엿보다 다시 모반을 계획, 결국 노부나가는 부득이 그를 죽이고 이후 오다가는 하나로 뭉쳐 지게 되었다.
☞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1510~1551
처음에는 오와리의 수호 시바가의 가신인 수호대 오다씨에서 봉행(奉行)으로 있었다. 그러나, 쇼우즈이(勝瑞城)성에서 서서히 세력을 확대. 나고야(那古野)성에 웅거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동생 · 우지도요(氏豊)와 연가 친구가 되었다. 어느날 나고야성을 방문, 우지도요는 연가의 연회를 여는데, 갑자기 노부히데는 성에서 쓰러져「여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유언을 남기기 위해 가신을 이 성에 불러주시오」라고 말하며 성에 가신을 들이는 데 성공,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나고야 성은 노부나가의 탄생과 함께 물려 주고 스에노모리(末森)로 옮긴 후에는, 1540년에는 안죠성(安祥城)을 탈취. 서 미카와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1542년의 아즈키자카의 싸움(小豆坂の戰)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물리친다. 그러나, 토키 요리아키(土岐賴芸)가 의지해 옮으로써 시작한 미노 공격에서는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에게 패배를 계속해 적자 · 노부나가와 도산의 딸 기초(歸蝶)공주를 혼인 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 후, 1549년의 아즈키자카 싸움(小豆坂の戰)에서 이마가와에게 패배, 안죠성에서 붙잡힌 장남 ·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廣)의 구출을 위해 마츠다이라 다케치요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와리 통일전 중, 1551년 갑자기 쓰러져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사후, 최후의 거성에 오다 노부유키를 놓아둔 것이 빌미가 되어 노부나가와 노부유키의 사이에 상속자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보통 노부나가를 이해한 유일한 남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 오다 히데노부 (織田秀信)
1580~1605
아명 기찌보시(吉法師). 하시바 히데요시의 추천에 의해 조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잇는다. 아즈찌의 땅에 봉해졌었지만 히데요시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어린 아이 · 기찌보시를 이용, 천하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히데요시에게 키워 준 은혜까지 느끼고 있었다. 성인이 되자 기후성 성주가 되어, 조부의 땅을 계승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 의한 아이츠(會津) 정벌 때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켜, 자신의 영지 미노가 주전장이 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신들은 동군에 붙도록 조언 했지만, 미츠나리의 사와야마성에 가서 자신을 키워 준 히데요시의 유아를 지키자며 서군행을 결의해 버린다. 다시 천하의 성 기후에서 농성을 하는 것이 유리 하다는 노신들의 말을 「우리 조부, 증조부는 한 번도 성에서 농성하며 싸우지 않았다.」라며 출진. 결국 동군의 선봉에 패퇴했다. 끝까지 자신을 따른 가신 전원에게 표창장을 보내는 상냥한 일면을 보이고 항복. 곧 후쿠시마 마사노리등의 구명 의견에 의해 다카노산(高野山)으로 가, 거기서 죽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다의 직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 오다 우라쿠사이 (織田有樂齋)
1547~1621
노부히데의 11남. 본명은 나가마스(長益)
노부나가의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셋츠국내 2천석에 봉해졌다. 게이쵸(慶長)5년의 세키가하라 싸움에서는 동군에 참여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측근 무장 몇을 죽이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에 의해 야마토국 내에서의 지쿄(知行)가 늘어나 총 3만석을 거느리게 되었다. 겐나(元和) 7년,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그는 다인으로서도 이름이 높아 센리큐우 7철의 하나로써 유라쿠류(有樂流)의 개조이다.
☞ 오다 노부미쓰 (織田信光)
? ~1555
노부사다(信定)의 삼남. 노부나가의 숙부.
츠다(津田)씨라 칭하며 오와리 이누야마성(犬山城)의 성주였다. 덴몬(天文) 11년, 아즈키자카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아즈키자카의 7 본창(小豆坂の七本槍)」이라 칭해졌다. 코우지(弘治) 원년, 나고야성의 성주가 되었다가, 같은 해, 가신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