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선도, 악도 내 것 삼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근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 무엇이든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자기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과 진리는
본래 주님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길 때
그는 그 선을 자기 능력으로 행했다고 믿게 되며
이때 그 선은 더 이상 선으로 남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사랑과 공로사상으로 물들게 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자기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에게서 흘러온 선이나 진리를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을 주님께로 향하는 통로에서 떼어내어
그 중심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 순간, 그 선은 본래의 생명(주님의 생명)을 잃고
내 생명, 곧 자기사랑과 결합된 죽은 선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선의 변질(perversion, 왜곡)이라 부르는 상태이다.
(엄밀히 말해 선 자체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의 상태에 따라 변형되어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왜곡’이라는 표현보다는 ‘변질’이 더 적절해 보인다.
변질은 선이 악한 목적 아래 왜곡된 결과이다.)
주님에게서 비롯된 선이
자기사랑에 의해 자기중심적 동기 속으로 끌려들 때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의 선이 아니라
나의 명예, 나의 공로,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변한다.
따라서 내 것으로 여김은 단순한 인식의 착오가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자기 의지와 결합시키는 영적 행위이며
그때부터 그 선이나 악은 내 생명 속에 자리하게 된다.
내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 선은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유지하며 내 안에서
살아 있는 통로가 되지만
반대로 그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순간 통로는 막히고
그 선은 자기사랑의 포획물이 되어
더 이상 주님의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요약하면 내 것으로 여기는 행위는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을 끊고 자기사랑 안으로 돌리는 것이고
그 결과 선은 선으로 남지 못하고 자기영광과 공로의 수단으로 변한다.
반대로 선을 행하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할 때
선은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담은 살아 있는 유기체로 작동한다.
이처럼 내 것으로 여김은 악의 근원이 되어
신앙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실체를 좀 더 깊이 파헤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 선과 악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유..
그 선은 누구의 것인가?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믿으면
그 선은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간직한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여기면 그 순간 자기사랑이 문을 연다.
무엇이든 내 것으로 여길 때
그것은 내 욕망의 소유물이 되고 만다.
이때 자기사랑은 그 선을 먹이로 삼아 자라난다.
칭찬받기 위한 선행,
도덕적 우월감을 주는 봉사,
혹은 죄책감을 덜기 위한 선의 행위 등..
이 모든 것이 겉으로는 선해 보여도
그 중심에는 나를 위한 선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사랑의 포획물이다.
선이 자기영광의 도구가 될 때
악은 그 선을 통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선이 주님께 돌려질 때 악의 힘은 끊어진다.
내가 행한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려놓는 순간
악은 그 근거를 잃는다.
악은 자기정당화를 먹고 자라난다.
‘이것은 내 힘으로 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악의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내게 행하신 것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순간
악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한다.
그때 선은 주님의 생명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 있는 질서가 된다.
겸손과 평화, 감사의 기쁨이 그 마음의 자리를 대신 채운다.
진정한 자유는 선과 악 이 둘 모두를 주님께 돌리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그가 선하든 악하든 간에 자유와 합리성이라는
이 두 능력을 통해 주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선과 악의 근원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판단의 주권을
자신으로부터 주님께로 옮겨드리는 데 있다.
선을 행할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이 주신 힘임을 시인하며,
악을 마주할 때 역시 자기비하의 절망에 머물지 않고
주님이 그 악을 보게 하셨으며
제거할 힘 또한 주께서 주심을 믿는 것이 영적 전환의 핵심이다.
선과 악을 자아의 소유로 삼지 않고 주님 앞에 되돌려드릴 때,
선은 사랑과 지혜의 통로가 되고 악은 자아를 지배할 근거를 잃는다.
이처럼 모든 영적 유입의 출처를 주님 앞에서 바르게 분별할 때
인간의 내적 질서는 회복되며, 이것이 곧 주님의 생명에 합치하여 사는
영적 자유의 질서이다.)
주님은 사람을 자유 안에서 선으로 인도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시고
그 자유를 통해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내가 내 뜻대로 한다는 독립의 자유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인식 속의 자유이다.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선을 왜곡하여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그릇이 된다.
그 안에서 생명은 흐르고 악은 힘을 잃는다.
악을 내 것으로 볼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절망에 빠지지만
그것을 주님 안에서 볼 때 힘주시는 그분으로 인해 소망이 생긴다.
-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사람은 오히려 악과 싸울 영적 자유를 되찾는다.
선을 내 것으로 여길 때와 악을 내 것으로 여길 때
이들 모두가 해로운데
그 작용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즉 선을 내 것으로 여길 때는 교만과 자만으로 선이 변질되고
악을 내 것으로 여길 때는 절망과 결박으로 악이 고착된다.
악을 내 것으로 여길 때
인간은 지옥의 유입을 자신의 생명으로 착각한다.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흘러들어오며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생명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악의 감정과 생각이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낀다.
이 감각 자체는 주님이 주신 자유의 조건이지만
그 사람이 그것을 정말로 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그 악은 그의 것이 된다.
즉, 유입된 악을 ‘내가 느끼는 내 마음’,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며 동일시하는 순간
그는 지옥의 유입 선로(線路)에 스스로를 연결시켜 버린다.
그 결과 악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악을 외부로부터 온 유입으로 볼 때는
그것을 거절하거나 떨쳐낼 영적 거리가 가능하다.
‘이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유혹일 뿐이다.'
이렇게 인식할 때 그 사람은 여전히
주님과의 연결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길 때
그 사람은 악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그가 ‘이건 내 본성이다, 내 안에 있는 나다.’라고 믿으면
그는 악을 자아와 결합시켜 버린다.
그때부터 그 악은 변명과 정당화의 근거를 얻게 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건 내 성격이다.’
이런 식의 자기 동일시는 악을 고착시키는 사슬이 된다.
이때 그 사람은 악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미워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 대신 자기정당화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지옥적인 고착은 경고되어 마땅한데
이는 그 악의 성향이 더 확립되면 돌이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악을 내 것으로 여기는 믿음은
회개와 구원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믿음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람이 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으면
그는 그 악을 버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악을
자기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을 버리면
자신의 생명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낀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영들이 사람을 속이는 방법이다.
그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이것이 너 자신이고. 너의 진짜 모습이니
네가 원하는 그대로 살라.'
하지만 주님은 진리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너 자신이 아니라 네게 유입된 것이다.
그 유입에서 분리시키도록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내가 악하다’라는 절망적 동일시가 아니라
‘내 안의 악은 주님이 제거하실 수 있는 외부 유입’이라는
인식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악의 가장 무서운 속임수는
“이건 네 본성이야, 너는 원래 그래.” 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 악과 동일시되고, 그 안에 갇혀버린다.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사람은 오히려 ‘진정한 책임’과 ‘자유’를 회복한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식할 때
사람은 악과 싸울 영적 자유를 되찾기 때문이다.
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 때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그 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받는다.
즉, 악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 악에 붙잡히는 것이고
악을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 악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자유의 시작이다.
그 악으로부터 해방의 길은선은 주님께 속한다는 인식과
악은 유입된 것이며 주님이 제거하신다는 인식이다.
선과 악 모두 내 것으로 여길 때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지게 되고
주님께 돌리는 인식 속에서만
인간은 겸손과 자유, 그리고 회개의 가능성을 되찾는다.
- 사람이 악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악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으면 그 악은 그의 것이 되지만
그것이 지옥에서 온 것임을 알면 주님이 그것을 제거하실 수 있다.
이 유입의 질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지 않도록 하는 섭리의 보호 장치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유입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선과 악이 자기 안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느낀다.
이 감각은 자유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그 자유가 잘못된 방향으로 쓰인다면 선은 교만으로,
악은 절망으로 변한다.
선을 내 것으로 여길 때
그는 이제 선의 도구가 아니라 선의 주인이 되려 한다.
이때 작동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사랑이다.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 돌리면 그 선은 더 이상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선한 행위라 해도
그 내면은 자기 공로와 인정의 탐욕으로 물들어 있다.
그 선은 더 이상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의’라는 이름으로 변질된 악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가르치신다.
“너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
이는 단지 겸손의 예법이 아니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려놓는 영적 질서의 가르침이다.
(오른손은 주님이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선의 실제 작용이고
왼손은 선한 행위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자아의 기능이다.
즉, 저 말씀은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기에
인간의 자아(왼손)는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는 선을 주님께 돌려 영적 질서를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길 때
그는 지옥의 유입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이건 나 자신이다, 내 본성이다.’라고 믿는 순간
그 악은 외적 유혹이 아니라 자기 생명으로 동일시된다.
이때 사람은 악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그는 회개 대신 자기정당화에 빠지고
죄책감 대신 체념이나 자기비난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회개란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믿음은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막는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는 악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악하다.’는 고백이 ‘나는 악 그 자체다.’로 바뀌면
그는 더 이상 주님께 회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악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참된 해방은 선도, 악도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자유와 회개는
그들에 대한 소유의 감각을 갖지 않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선은 주님께 속하며 악은 지옥에서 유입된 것임을 아는 것,
이 인식은 인간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책임의 가능성을 회복시킨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악을 외부의 유입으로 인식하므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내적 거리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을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자유의 여지가 생긴다.
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음을 알 때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그 악을 물리칠 힘을 받는다.
이 인식 속에서,
선은 교만으로부터 보호되고
악은 자기정당화로부터 분리된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자기 자신을 회복한다.
그는 자기 안의 선과 악 모두가
주님과 분리된 ‘자기 것’이 아님을 아는 인간,
즉 주님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다.
<참고 하나님의 섭리 321
[4]
둘째,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고
모든 악과 거짓이 지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진실처럼 믿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적인 원리이며
따라서 천사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선과 진리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는 신학적 신앙과 일치하기에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과 거짓이
지옥에서 온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믿는다면 사람은 자신이 전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생각이 어떤 근원에서 오든지 간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것처럼 보이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비록 지옥으로부터 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 수 없을 것이며
위에서 여러 번 보여주었듯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되어 개혁될 수도 없을 것이다.
[5]
이와 같이하여 주님께서는 사람이 악 안에 있을 때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생각할 때
지옥으로부터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시며
또 그것으로부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
주님은 또한 사람이 어떻게 지옥에서 나와
(더 이상)그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주님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또한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셔서
이로부터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악과 거짓을 생각하며
또 이것저것이 악이고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이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외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외관이 없으면 사람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진리로부터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적 원리이며 따라서 천사적 원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과 천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주께서 그의 개혁을 위해 그렇게 허락하신 만큼
인간은 그것을 진리로 믿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각에 느껴지는 대로 악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그는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여겨
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고 그로 인해 악을 버릴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사람은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악과 싸울 영적 자유를 되찾아
악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6]
셋째, 이렇게 믿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이 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가능하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불가능한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한다고 믿는다.
또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런 자들은 지옥으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한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가능한데 이는
위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다.(288–294)
[7]
넷째,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자들은
죄로서 악을 피하고 멀리하기까지 자신 안의 악을 돌아보고
그것을 그것이 나온 지옥으로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은 악은 지옥에서, 선은 천국에서
온다는 것을 알거나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악을 피하고 멀리하는 만큼
지옥을 피하고 멀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마찬가지로
악을 피하고 멀리하는 만큼
선을 원하고 사랑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주님에 의해 지옥으로부터 구출되고
천국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악과 선이 각기
그 고유한 근원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 안의 악을 돌아보고
(이는 곧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그것을 피한다면,
그는 자신을 지옥에서 벗어나 그것을 등 뒤로 던지고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며 그곳에서 주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을 사람이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주님께로부터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한 마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이 진리를 인식할 때
그것은 그가 나중에 마치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 안에 내적으로 숨겨져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씨앗 속의 생식 원리가 새로운 씨앗에 이르기까지
성장 전체를 내적으로 동반하는 것과 같고
또는 사람이 한때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인정한 음식에 대한
식욕의 즐거움이 그러한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가 마치 자기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 속의 심장이나 영혼과 같다.
(선은 천국에서 또 악은 지옥에서 온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만일 그가 모든 악이 지옥에서 비롯된다고 믿지 않는다면
지옥이 자신을 악으로 내몰고 있다고 믿지 않고
그 악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반대로 만일 악이 주님과 반대되는 지옥에서 온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악을 지옥으로 내던져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 것이다.
물론 이것을 사람은 마치 자기로부터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주님께로부터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한 마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이 진리를 인정한다면
이후 그가 모든 것을 마치 자기로부터 생각하고 행할지라도
그 속에는 그러한 믿음이 여전히 내적으로 깃들어 있다.
이는 마치 씨앗 속의 생식 원리가 새로운 씨앗에 이르기까지
성장 전체를 내적으로 동반하는 것과 같다.)
[8]
다섯째, 따라서 신성한 섭리는
악이나 선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내 것 삼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의 분별력이 이 둘을 (자신에게)귀속시킨다.
이것이 지금까지 말해진 모든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선은 신성한 섭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모든 활동에서 그것(선)을 의도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선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선은 공로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악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사람은 악에 대해 유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 둘을 자기 자아로부터 귀속시킨다.
왜냐하면 자아(proprium)는 오직 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자신의 것 중 의지에 속한 것은 자아 사랑이고
이해에 속한 것은 자기 지혜에 대한 교만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 고유의 분별력이 나온다.>
- ‘자기 것’이란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의 의식이다.
참된 자유는 선과 악 모두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
주님과 분리된 ‘자기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주님과 멀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는 잘못된 인식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상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주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그 힘을 자기가 만들어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그는 영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의 통로를 스스로 끊는 것이 된다.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의 영적 의미는 이렇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것(proprium, 자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자아는 악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자신을 신처럼 높이고자 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천비 210, 215)
즉, ‘자기 것’이란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의 의식이며
그 안에는 자기중심성, 자기사랑, 자기 신격화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상태가 바로 주님과 분리된 상태이며
그 속에서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조차 왜곡되어
자기의 영광이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결과적으로 주님과 분리된 상태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끊고
모든 것을 자기의 힘과 의지로 판단하고 행하려는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
정리하자면 주님과 분리된 ‘자기 것’이란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것,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소유하려는 마음,
자기를 신격화하는 상태를 뜻한다.
반면 ‘주님 안에서의 나’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유입 안에서 자유롭게 응답하는 존재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흔히 자유를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자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유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아는 데서 비롯되는 자유이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상 그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
우리가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자기 것, 곧 자아 속에 갇히게 된다.
그 안에서는 자아가 중심이 되고 자기사랑이 작동하며
심지어 선한 일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주님과 분리된 상태이다.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에
그 선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그 안에는 ‘내가 했다’는 교만과, ‘나는 옳다’는 자기정당화가 자리한다.
반면 주님과 연결된 사람은 다르게 말한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내가 행한 선은 주님이 내게 주신 선의 흘러나옴이다.’
이 고백 속에는 참된 자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자신의 선을 붙잡지 않고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안의 선을 자랑하지도 않고
자신 안의 악을 절망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주님과 분리된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을 때
그는 악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악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임을 알고
그것을 거절할 때, 그는 악과 자신을 분리시킨다.
이때 악은 더 이상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영적 자유이다.
자기 안의 선과 악 모두가
주님과 분리된 ‘자기 것’이 아님을 아는 자유,
이 인식 속에서만 우리는 주님께로 열린 생명의 통로를 유지하며
주님 안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존재가 된다.
우리 안의 선도, 악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며
참된 자유의 길로 인도하소서.. 기도해야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 안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악은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을 왜곡시켜 들어온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선을 행할 때 ‘내가 했다.’라고 교만하지 않고
악이 일어날 때 ‘이게 내 본성이다.’라고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보고, 주님께 속한 질서로 돌려놓는다.
그래서 그는 선에 있어서 자만하지 않고,
악에 있어서 절망하지 않으며,
항상 주님의 인도 안에서 평안을 얻는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인은
선과 악 모두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라는 표현은
선과 악의 근원을 보는 시각, 즉 선과 악이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말한다.
인간 안에는 고유한 생명이 없고,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선은 주님에게서 직접 유입되는 생명의 작용이며
악은 주님의 선이 왜곡되어 수용된 결과,
즉 천국으로부터의 유입이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그릇된 의지 속에서 굽어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모든 악은 주님으로부터 단절된 결과로서 생겨난 것임을
아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 인식 안에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할 때 자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이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을 볼 때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악조차 주님의 손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질서 안에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악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평안의 상태,
즉 주님의 인도 안에 있는 자유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 인정 속에 있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안의 선과 악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주님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 자유는 스스로의 뜻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선으로 인도되는 자유이다.
참된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사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인도하심을 인정할 때 시작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이건 내가 잘해서다.’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선은 내 것으로 바뀌고, 자기애가 그 선을 삼켜버린다.
하지만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돌려드릴 때
그 선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의지를 천국 쪽으로 이끈다.
또 반대로 우리가 악한 생각에 빠질 때
‘이것이 나다, 어쩔 수 없어.’라며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
그 악은 곧 우리의 생명 안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진리 안에서
이 악은 내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 들어온 것임을 인식하면
그 악은 우리 안에 머물 힘을 잃고
주님께서 그 자리를 선으로 채우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참된 자유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참된 자유는 ‘소유의 환상’에서 벗어난 자유다.
‘사람은 자기가 선을 행하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할 때 참으로 자유롭다.
즉, 선을 행하되 그것이 자기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자유의 출발이다.’(하나님의 섭리 43, 97)
반대로 악을 자기 것으로 삼을 때 속박이 생긴다.
악이 내 것이라고 여길 때,
그 사람은 그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게 된다.
이제 악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으로 결합된 악,
즉 자기 생명으로 된 악이 된다.
그런 악은 교만, 탐욕, 분노, 질투의 형태로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하며 사람의 의지를 붙잡아 놓는다.
이것이 바로 지옥적 속박의 상태이다.
이와 달리 참된 자유는 자기 안의 선과 악 모두가
주님과 분리된 ‘자기 것’이 아님을 아는 상태이다.
선을 행할 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돌려드리고
악을 볼 때 이것이
나에게서가 아니라 나를 넘어온 유입임을 인식하고
그것의 제거를 위해 주님께 구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주님 안에서 자유롭다.
그때 사람은 선을 자랑하지 않으며
악에 매이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일을 주님께 의탁하며,
그분의 질서 안에서 인도받는 기쁨을 누린다.
‘주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사람은 진정 자유롭다.
그 자유는 천국의 자유이며
선을 사랑하고 그것을 행하려는 자유이다.’(천국과 지옥 598, 603)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다.
그 진리는 단지 지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질서의 생명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선과 악 모두를 다스리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영혼은 참된 안식에 들어가며 그 자유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흘러드는 모든 선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그 선을 자랑하거나 내 것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악을 볼 때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선도, 악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요한 5:30)
이 말씀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선언이 아니라
참된 힘의 근원을 가리키는 진리이다.
주님 안에서 행할 때에만
선은 선으로 머물고 악은 물러난다.
선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것은 교만의 시작이다.
악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것은 절망의 시작이다.
오직 주님께 돌릴 때
우리의 마음은 자유롭게 된다.
<참고 인애 204. 4
악을 죄로써 피하지 않는 한 사람은 그 안에 머무르게 된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으며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는 존재가 되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지혜 그 자체가 되어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기에
결국 자신의 본성을 뒤집어 주님에게서 자기 쪽으로
애정과 생각을 돌렸다.
그리하여 주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심지어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것 때문에 멸망하지 않도록 방편을 마련해 두셨으니,
그 하나는 곧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의 모든 선과 지혜의 모든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되고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잡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께로 향하게 되고
자신이 창조되었던 상태,
즉 자신의 모든 선과 진리를 주님에게서 받고
자신에게서는 전혀 받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람의 자아가 이렇게 전적으로 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다른 방편은
‘악을 죄로 알고 그 악을 피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악을
죄로서 피하지 않고 단지 해로운 것으로만 피한다면,
그는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여전히 전도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악을 죄로서 피할 때
그는 또한 그것이 주님께 반하고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며,
그때 그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것을 저항할 힘을 간구한다.
그리고 이 힘은 간구할 때 결코 거절되지 않는다.
사람이 타고난 악에서 정화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수단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태어났을 때와 같은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참고 생활의 교리
20 인간은 어느 쪽으로든 돌아설 수 있는 영적 자유 속에 유지된다.
이 자유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람이 자유 안에 보존된다(kept free)고 말한다..
21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악을 피하는 만큼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며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만큼 선을 행하는데
그 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일반 원리가 성립한다.
사람은 악을 피하는 만큼 선을 행한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방법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이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만큼 사람은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때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이다.
선과 악을 주님 앞에 되돌려드릴 때
선은 통로가 되고 악의 권세는 무너진다.
악을 죄로 여겨 주님께 돌려드릴 때 악이 자기에게 고착되지 않는다.
사람이 악을 죄로서(=악을 죄악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피할 때
그는 사실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며
그리할 때 주님은 많은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고
그 결과 그를 영적인 적으로부터 해방하실 수 있다.
악에 대한 자각은 자기 비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시는 은혜로운 과정이다.
악을 보게 하시는 것은 버릴 힘을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 내 것으로 여길 때 잃어버리는 것들..
선은 주님께 돌리고 악은 내게서 분리시킬 때 제자리를 찾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는
두 가지의 유입이 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으로
그것은 조용히, 그러나 생명의 맥박으로 흘러들어온다.
또 하나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으로
그것은 속삭이듯 유혹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스며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들을 구분하지 못해
선이든 악이든 모두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여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 15:5)
그분 없이는 선이 나타날 수도 없고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에서 흘러들어 온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온 선을 ‘내가 했다’고 여길 때
그 순간 선은 빛을 잃는다.
그는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영광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선은 더 이상 하늘의 향기가 아니라 자기 자랑의 냄새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선의 변질이다.
선의 모양을 한 자기사랑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악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악은 더 이상 외부의 유혹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악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으면
그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악이 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버리면
그는 회개할 수 없게 된다.
회개는 자신과 악을 구분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해지는 이유는
회개란 ‘내가 악을 행했다’는 자각이지
‘내가 악 그 자체다’라는 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악의 포로가 되고, 악은 그의 생명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악이 그토록 강력해 보일지라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순간, 그 악은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건 내게서 온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유입된 것이다.’
그렇게 고백할 때 그 악은 나를 사로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악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되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게 하시고
악이 일어날 때 그것이 나의 생명이 아니라
내게 들어오려는 외적 영향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다.
그것은 선을 주님께 돌리고 악을 자신과 분리시키는 자유다.
어떤 것이든 내 것으로 여길 때 그것은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선을 내 것으로 여길 때, 나는 교만에 사로잡히고,
악을 내 것으로 여길 때, 나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둘 다 주님의 것이요,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영혼은 가벼워진다.
선이든 악이든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릴 때,
나는 그것들 위에 설 수 있다.
그때 주님은 속삭이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사야 41:10)
선이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면
우리는 강이 아니라 다만 강이 흐르는 길일뿐이다.
악이 지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다면
우리는 바람이 아니라 다만 바람이 스쳐가는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선을 자랑하지 말고, 악을 절망하지 말라.
‘주님께 돌릴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때 선은 빛으로 변하고, 악은 더 이상 우리를 붙잡을 힘을 잃는다.
(‘주님께 돌린다.’는 것은 모든 선과 악의 판단을
자기로부터 주님께 옮겨드린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을 행했을 때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내게 그 선을 행할 힘을 주셨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악을 보았을 때 나는 전적으로 악하다고
자기비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이 악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돌리는 행위이다.
이는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아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영적 전환을 말한다.
선과 악을 스스로의 소유로 삼지 않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 되돌려드릴 때
선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통로가 되고,
악은 더 이상 자아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즉, 선은 주님께 속하고 악은 주님 앞에서 분별될 때
인간의 내적 질서가 회복된다는 뜻이다.
이런 것이 곧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맞추어 사는
영적 자유의 질서이다.)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의 마음은 천국의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작은 선조차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임을 모를 때
그 선은 쉽게 ‘자기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천국의 선은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인정(acknowledgment)
위에서만 살아 있다.
따라서 주님은 섭리 가운데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하는 듯 보이게 하시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 안에서 선으로 굽히신다.’는 뜻이다.
자유를 빼앗지 않고 선의 근원을 교정하시는 방식이다.
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도록 가르치시며
또 우리가 악을 볼 때 그것을 ‘나의 본성’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오는 유입’으로 인식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리할 때 악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악의 근원을 자신에게서 떼어낼 때
비로소 악은 떠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할 때, 즉시 주님을 기억하며
“이 선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라고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 선은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그 인정 한마디가 선을 정화시킬 것이다.
또 악한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나의 것’으로 단정하지 말라.
그것은 유입된 것이며 내가 곧 그 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악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순간
그 악은 힘을 잃는다.
자기정당화를 경계해야 한다.
정당화는 악의 생명이다. 변명하는 순간 악은 산다.
선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이다.
그때 감사로 내 소유욕을 끊을 수 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내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 바라본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강제로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리라.” (사 42:3)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의 내면을 강제로 꺾지 않으시고
자유 안에서 조금씩 굽혀 선으로 돌리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선으로 굽히신다.
우리의 선도, 우리의 악도
결국 ‘주님 앞에 올려놓을 때’ 제 자리를 찾는다.
선은 그분의 것으로 돌려질 때 빛을 내고
악은 그분께 구분되어질 때 힘을 잃는다.
이것이 참된 회개이며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흐르는 유입의 질서이다.
(‘선도 악도 주님 앞에 올려놓을 때’ 라는 표현은
회개의 실제적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적 행위, 즉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주님의 빛 아래에 드러내는
영적 자세를 말한다.
참된 회개의 세 단계는 자신 안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자복하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서려는 의지로 사는 것이다.
‘주님 앞에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 세 과정을 포함한다.
즉, 자신의 선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자신의 악을 숨기지 않고 주님께 드러내어 빛에 비추는 것이다.
그 결과 선은 주님의 것으로 되돌려질 때 참된 빛을 발하게 되고
악은 주님께 드러나 구분될 때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악이 힘을 잃는다.’는 말의 실제적 의미이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흐르는 유입의 질서이다.
즉,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나의 것’으로 하지 않고
내 안의 악을 주님께 숨기지 않을 때
비로소 그분의 생명과 질서가 내 안으로 흐른다.
그것이 참된 회개와 참된 자유의 상태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