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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조선(朝鮮)은 어디에 있었을까?
○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주장(主張)하는 증거(證據), 사료(史料)의 고증(考證), 지형지세(地形地勢)의 비교(比較)등은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분들에게는 필수적(必須的)인 길일 것이다.
〈주변(周邊)에선 그까짓 일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지만, 매달려온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스스로 심혈(心血)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도 요즘은 많은 분들이 “대륙조선(大陸朝鮮)”이란 말은 접해 봤다고 한다.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인정(認定)하든 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든, 한국사(韓國史)는, “식민(植民)사학자(史學者)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認識)을 갖도록 하였다.” 고 논평(論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서력(西曆) 1,804년이라면, 이제 겨우〈이백 년(二百 年) 전(前)〉의 일이다. 이때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어느 땅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質問)은 참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지들 나라 강역(疆域)도 모른다고 하다니…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허나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은, 2백년(百年) 전(前)의 선대(先代) 나라(國)의 영토(領土)가 어디였는가? 하는 물음에 답(答)할 수 있는 자(者)가 없다.
자국(自國)의 ‘역사(歷史) 강역(疆域)’에 대해 설왕설래(說往說來)한다거나, 옛 왕성(王城)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나라(國)가 있을 수 있을까? 단언(斷言)하건대 수백(數百)의 나라 가운데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있다.
조선(朝鮮)은, 고대(古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로부터 근대(近代)에 이르기까지, 일만(一萬)년 그 이름이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마지막 〈조선(朝鮮) 왕(王) 고종(高宗)〉은 : 서력(西曆)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하고, 10월에 황제(皇帝)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한 뒤에, 국호(國號)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선포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日帝)에 의해 합병(合倂)되어 버렸다.
➠ 이것을 다른 면(面)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조선왕(朝鮮王) “고종(高宗)”은 본시(本是) 중국(中國)에 사대(事大)하는 제후왕(諸侯王)이었을 뿐이다.〉라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또 강조(强調)하는 것이,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宣布)와 황제(皇帝) 즉위(卽位)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해석(解釋)·해설(解說)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과 맞물리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또 건국(建國)된다. 이는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서, 「대한(大韓)으로 망(亡)한 나라를 다시 대한(大韓)으로 살리자」라고 제안(提案)하여 국호(國號)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하였다고 하니…기가 찰 일이다. 무슨 농담 따먹기도 아니고… …!
여기서 또 하나 : 반도(半島) 땅에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만든 것도 아니고, 반도(半島) 땅을 떠나, 남의 나라 땅에서 망명정부(亡命政府)도 아닌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세웠다는 것도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대륙(大陸) 땅에 있었던 조선왕조(朝鮮王朝)나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제(日帝)에 의해 합병(合倂)되니, 이들의 힘이 덜 미치는 곳으로 피신(避身)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세웠다면 모르되, 남의 나라 땅에서 망명정부(亡命政府)가 아닌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세웠다는 것 그 자체(自體)가 더 희극(戲劇)같은 일이 아닐까?
여기서「대한(大韓)」이란 이름은,〈삼한(三韓)을 통일(統一)했다〉는 뜻에서 「대한(大韓)」이라고 했다지만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삼한(三韓)의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는…삼한(三韓)속에 얼마나 많은 왕국(王國)들이 있었는지도 모르는…삼한(三韓)의 땅이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조차 모르는…이런 삼한통일(三韓統一)의 뜻에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고 했다는 말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 반도(半島) 땅을 삼한(三韓)의 땅으로, 고대(古代)조선(朝鮮)의 땅을 반도(半島) 땅에 가둬 넣기 위해 만들어진 “대한(大韓)”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合理的) 의문(疑問)이 제기(提起)되는 것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78개 나라가 올망졸망 살았던 적이 없다. 반도(半島) 땅에서, 그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사료(史料)나 유물유적(遺物遺蹟)이 없고, 흔적(痕迹) 또는 정황(情況)조차 발견(發見)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서력(西曆) 1,804년에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가 “북경(北京)=연경(燕京)”을 가기 위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지나면서,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한 기록(記錄)을 가지고, 반도(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반도(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서력(西曆) 1,804년이나, 2018년 04월 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어야 한다.
【관연록(觀燕錄)은, 저자(著者)인 김선민(金善民, 1772~1813)이 1,804년 동지사(冬至使)의 일행으로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에 다녀와 이듬해인 1,805년에 정리한 대청 사행 기록이다. 현재 원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일반에 서비스하고 있다.】고 “고전번역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인용한 것이다.”
○ 오늘의 게재(揭載)분은, 「아호(牙湖)에서 출발(出發), 한성(漢城), 의주(義州)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봉황산(鳳凰山)」에 이르는 여정(旅程)의 기록(記錄)에서 발췌(拔萃)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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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연록(觀燕錄) 상(上) 1804년(순조4, 갑자) / 10월 16일
《나는 아호(牙湖)에서 출발하여 사흘을 자고 서울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 저자(著者)가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출신(出身)인 것으로 보면, 아호(牙湖)란 아산(牙山)에 있는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산(牙山)과 아호(牙湖)가 같은 뜻으로 사용(使用)되었다. 또 당시(當時) 이곳은 호서(湖西 : 호우湖右) 땅이고, 호중(湖中) 땅이었다.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 땅, 호수(湖水)라고 불릴만한 곳이 전혀 없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충청도(忠淸道) 제천(堤川) 의림지(義林池)를 기준하여 호서(湖西)라고 했다는 말과 같은 웃기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제천(堤川)이란 하천(河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築造)한 제방(堤防) 곧 하천(河川) 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
그 둑(堤防)을 기준으로 서(西)쪽은 「호서(湖西)이니 충청도(忠淸道)요」, 「남(南)쪽은 호(湖)의 남(南)쪽이라서 호남(湖南)」이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경상도(慶尙道) 서(西)쪽 지방인 “문경·예천·상주·군위·김천·대구·고령·거창·함양·산청·합천·의령·하동·진주·마산·사천·통영·마산·창원”등지는 「호남(湖南)」이어야 한다. 아니 그런가?
그런데 왜 이곳을 “호남(湖南)”이라고 하지 않고, 경상도(慶尙道)라고 하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도대체 반도 땅 충청도(忠淸道) 어디에 호수(湖水)가 있었다고 하는가? 보령(保寧) 땅의 「영보정(永保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라고 계곡집(谿谷集)에서 설명한다. 덧붙여 설명(說明)하기를 :〈소주(少主)가 어린 나이에 풍류에 빠져버리면 어떻게 나라를 경영(經營)하겠는가 하였다.〉
이런 말은 이곳 ‘보령(保寧)이 호중(湖中)의 으뜸가는 경승지(景勝地)’이니 유람객(遊覽客)이 많이 몰리고 또한 술집과 여인(女人)들이 많다보니, 세자(世子)가 어린 나이에 이런 풍류(風流)에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다. 보령(保寧) 땅이 과연(果然) 이러한 곳인가? 그런 땅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정도의 척박(瘠薄)한 곳이다.
누가 이런 땅을 호중(湖中)의 제일가는 경승지(景勝地)라고 했는가?
➠ 아산(牙山)의 호수(湖水)는 무엇이고,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은 무엇이냐? 이런 이야기는 황해(黃海)바다 건너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일이고, 관계(關係)없는 사건(事件)이다. 오버(Over)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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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연록(觀燕錄)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 그믐 맑음 : 향대(饗臺 : 모화관의 연향대(宴饗臺)) 에 있었다.
《북쪽 땅 유연(幽燕)으로 내가 향할 제 : 我 向 幽 燕 北 / 자네는 한강 가에서 머뭇거렸지 : 君 遲 江 漢 涘 / 한강은 동쪽으로 흘러가기에 : 江 漢 向 東 邁 / 강물과 다른 나를 슬퍼하노라 : 慨 我 不 如 彼》라고 하였는데,
○「한강은 동쪽으로 흘러가기에 : 江 漢 向 東 邁」라는 번역(飜譯)이 뭔가 잘못되어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강한(江漢)〉이란 뜻이 한강(漢江)과 같은 말일까? 한강(漢江)은 한강(漢江)이지 왜 강한(江漢)이라고 했을까?
강한(江漢)이란 뜻은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을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뜻은 장강(長江)에서 한수(漢水)가 만나는 합류(合流)지역을 뜻한다고 하는데, 곧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 지방을 이른다고 한다.
《江 漢 向 東 邁, 慨 我 不 如 彼 : 장강과 한수는 합쳐져 동쪽 멀리로 향하는데, 강물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를 슬퍼하노라.》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말하는 땅은,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때가 서력(西曆) 1,804년이니, 이제 겨우 2백년(百年) 전(前)의 지형지세(地形地勢)다.
➠ 이러한 표현(表現) 역시, 〈직유법이나 또는 은유법, 아니면 의인법이나 활유법, 또 대유법, 풍유법 등의 비유법(比喩法)을 사용해 시(詩) 구절(句節)을 만든 것일까?
강한(江漢)이란 한강(漢江)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강(漢江)은 동(東)쪽으로 흘러가는(東流) 하천(河川)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오늘날의 한강(漢江)은 서(西)쪽 바다로 흘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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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연록(觀燕錄)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 13일 밤에 눈이 내리다가 아침에 갬. 30리를 가서 곽산(郭山)에 이르고, 40리를 가서 선천(宣川)에서 묵었다.
《패수(浿水)가 북쪽으로 흘러 북방 한기 완연하고 : 浿 水 北 流 渾 朔 氣》라고 하였는데,
○ 패수(浿水)는 어떤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일까? 압록강(鴨綠江),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同江), 임진강(臨津江) 또는 대릉하(大凌河), 난하(灤河)등 도대체 정설(正說)이 없다.
서력(西曆) 1,804년 당시 북(北)쪽으로 흘렀다(北流)는 패수(浿水)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 문제(問題)는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하천(下川)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북류(北流)하는 하천(河川)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지류(支流)들로써, 하천(河川)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지방하천(地方河川)수준급의 냇물이 여러 개가 있으나, 이를 두고 패수(浿水)라고 했을 리 없기 때문에 해당사항(該當事項)이 없다.
➊ 위의 연행기록(燕行記錄) 본문(本文)을 보면 : 「곽산(郭山)에서 선천(宣川)에 도착(到着)하여」,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패수(浿水)가 있었기에, 이를 바라보면서 노래(詩)한 것이다.
반도(半島) 땅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을 보면 :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하천(河川)이 없다.」 선천(宣川) 고을에 패수(浿水)라고 부를 만한〈하천(河川) 자체(自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반도(半島) 땅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 김선민(金善民)이 살아갔던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➋〈북(北)쪽으로 흘러가는(北流) 패수(浿水)〉라는 이 구절(句節)은, 패수(浿水)란 하천(河川)의 논란(論難)을 더욱 부채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수경주(水經注)로부터 보는 패수(浿水)는,「동류(東流)한다」고 했고, 근세(近世)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서류(西流)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하천(河川)이라고 패수(浿水)를 생각해 보면 :
ⓐ 북류(北流)하는 곳은, 감숙성(甘肅省) 란주(蘭州)로부터 동북(東北)쪽으로 방향(方向)을 틀어, 내몽고(內蒙古) 림하(臨河)까지를 흐르는 하(河)가 있으나 이를 패수(浿水)라 한다?
ⓑ 감숙성(甘肅省) 장액(張液)으로부터 내몽고(內蒙古) 액제납기(額濟納旗)의 액제납호(額濟納湖)【거연해(居延海)의 동해(東海)와 서해(西海)】로 흘러들어가는 약수(弱水) 【흑수(黑水)】가 있으나, 이를 패수(浿水)라 한다?
위의 글 ⓐ와 ⓑ는 북류(北流)하는 큰 하천(河川)을 예(例)로 든 것이지, 패수(浿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참 어려운 이야기다. 그럴수록 「반도(半島) 땅임이 아니다」라는 사실(事實)은 더더욱 명백(明白)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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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연록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 15일 맑음
《본문(本文) : 30리를 가서 소관(所串)에 이르고, 45리를 가서 의주(義州)에서 묵었다. 정오 무렵에 소관에 도착했으니, 바로 의주의 첫 경계다. 포시에 전문령(箭門嶺)에 도착해서 의주부성(義州府城)을 바라보니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통군정(統軍亭)이 성 북쪽의 산꼭대기에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새가 날개를 편 듯하였다. 중략(中略). 대개 서쪽 변방의 웅장한 진(鎭)이요 하늘이 동북의 경계로 삼은 곳이다.》하였는데,
○ 연행기록(燕行記錄)을 쓴 저자(著者)인 김선민(金善民)이 서력(西曆) 1,804년 11월 15일에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에 도착(到着)하여, 그곳에 묵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대개 서쪽 변방의 웅장한 진(鎭)이요 하늘이 동북의 경계로 삼은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서(西)쪽 변방(邊方)이란 말은, 조선(朝鮮)측에서 말한 것이고,
하늘(天)이 동북(東北) 경계(境界)로 삼은 것은, 중국(中國)측에서 말한 거다.
➊ 〈의주(義州)는, 서(西)쪽 변방(邊方)의 웅진(雄鎭)〉이라고 하였다. 지도(地圖)를 펴 놓고 방위(方位)를 보면, ‘서(西)쪽 변방(邊方)이 될 수 없다.’ 한성부(漢城府)를 중심(中心)으로 놓고 보면 서(西)쪽이란 강화도(江華島) 방향(方向)으로, 한성부(漢城府)로부터 겨우 35 km에 서해(西海)바다에 닿는다.
의주(義州)를 서(西)쪽 변방(邊方)이라고 표현(表現)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이 연행기록(燕行記錄)을 보면 서(西)쪽으로 가다가 북(北)쪽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
➋〈하늘이 동북의 경계로 삼은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청(淸)나라 서울(皇都 : 京)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의주(義州)가 「동북(東北)방위(方位)」가 될 수 있을까? 북경(北京)이나 의주(義州) 모두 40도 선에 겹쳐 있다는 것은, 정(正) 동(東)쪽에 있다는 증거(證據)다.
반도(半島) 땅이나 그 북(北)쪽의 의주(義州), 압록강(鴨綠江), 또 그 북(北)쪽의 요녕성(遼寧省)이나 수백(數百)년 이래(以來), 무엇이 변할 수 있겠는가? 산(山)과 산맥(山脈)이 새로 생겼나? 아니면 큰 하천(河川)이 새로 만들어졌나?
그 때나 지금이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크게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問題)인가?
➠ 서력(西曆) 1,804년 11월 15일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 김선민(金善民)이 도착(到着)한 의주(義州)는, 반도(半島)의 최(最) 서북(西北)쪽 의주(義州)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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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연록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 11월 27일 아침에 맑고 저녁에 흐림
◆ 관연록(觀燕錄) 1,804년11월27일 원문이미지(출처 : 한국고존번역원db)
《관연록(觀燕錄) 본문(本文) / 밥을 먹은 뒤에 후원(後園)에 올라 관제묘(關帝廟)와 여러 제불(諸佛)을 모신 정전(正殿)을 보았다. 돌아서 민가(民家)로 들어가 마려(磨驢 방아를 돌리는 나귀), 바늘〔針〕, 신발〔履〕, 양아(養兒), 주은(鑄銀 주조한 은) 등 각양의 물건을 보았다. 비록 그것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말이 되놈(侏㒧)의 것이라 다시 캐묻지 않았다.》
《물에 임해 들에서 밥 지어 먹고 : 臨水埜中飯 / 中略 / 주리(侏㒧)들이 무엇을 말하거나 : 侏㒧何所道 / 누린내에 코를 가리려 했지 : 腥臊欲掩鼻 / 中略 / 칼집 끝에 북풍이 날카롭다 : 鞘頭北風利》라고 하였으며,
《찬 하늘에 서리 내릴 제 밤늦도록 앉았는데 : 天寒霜薄坐深更 / 문 앞에 서 있는 되놈의 말 분명찮네. : 鬍子當門語不明 / 내일은 또다시 어디로 가야하나 : 來日又從何處去 / 봉황산(鳳凰山) 밖에는 봉황성(鳳皇城)이 서 있네. : 鳳凰山外鳳皇城》하였다.
○ 위의 본문(本文) 글을 보면【원문(原文)이미지 참조(參照)】: 아주 낯선 단어(單語)가 보인다. : 〈주리(侏㒧)〉란 무슨 뜻일까? 주리(侏㒧)란 주리(侏離)를 뜻하는데,
그 주석(注釋)편에서 : 《주-D001 / ‘되놈의 것’ : 원문은 ‘주리(侏㒧)’로 ‘주리(侏離)’를 말한다. 주리(侏離)는 중국 고대 서방의 소수민족, 혹은 그들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오랑캐의 소리를 뜻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➊〈되놈〉이란 ‘호(胡)=호자(鬍子)’를 말하는 것인데, 청(淸)나라 사람을 칭(稱)하고 있고, 그들의 몸에서는 누린내가 코를 찌른다고 하면서, 김선민(金善民)은 무엇 때문에 ‘주리(侏㒧)=주리(侏離)’라는 고대(古代) 서방(西方)의 야만족(野蠻族)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어찌됐든〈조선인(朝鮮人)과 청(淸)나라 사람들과는 외모(外貌)가 전혀 달랐다〉는 뜻이다. 특히 봉황산(鳳凰山)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곳은 건주위(建州衛)의 땅이었고, 건주여진(建州女眞)족이라는 말이고,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粱海)’족이라는 이야기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건주여진(建州女眞)은 곧 오량해(烏梁海)이고, 올량합(兀良哈)〉인데, 이들은 본시(本是)의 만주(滿洲)지방에서 살던 자(者)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김선민(金善民)”은, ‘되놈’이라고 하고, ‘주리(侏離)=주리(侏㒧)’로 표현(表現)을 했다.
주리(侏離)=주리(侏㒧)안 고대(古代) 서방(西方)의 한 부족(部族)을 말한다.
➋ 위의 본문(本文) 글을 보면 : 호자(鬍子)는 또 무슨 뜻인가? 그 주석(注釋)을 보면 :《주-D003] 되놈 : 원문은 ‘호자(鬍子)’다. 호자(鬍子)는 긴 수염이나 수염이 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과거 중국 동북 일대에 활동한 토비(土匪)를 일컫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썼다.》고 하였다.
호자(鬍子)란 : 〈호(胡 : 오랑캐)〉로써, 호(鬍)자는 오랑캐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수염과 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가 많은 이민족(異民族)인 서방(西方) 오랑캐(胡)들을 일컫는 말이다. 동양인(東洋人)과는 전혀 다른 외모(外貌)를 가진 자(者)들이다.
이러한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은, 동북(東北)지방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자(者)들은, 〈서방(西方) 종족(種族)〉이기 때문이다.
주석(注釋)에서 말하는, 〈과거 중국 동북 일대에 활동한 토비(土匪)를 일컫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썼다.〉는 설명(說明)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설명(說明)이다. 아주 궁색(窮色)한 변명(辨明)일 뿐이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연행기록(燕行記錄)이다. 존재(存在)하지도 않은 서방(西方)의 야만족(野蠻族)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必要)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➌ 위의 본문(本文) 글에서 말하는 것은 : 청인(淸人) 역시 몽고인(蒙古人)들과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자(者)들써, 되놈(胡 : 鬍子)이며, 주리(侏離)로, 몸에서 누린내가 풍기는 자(者)들이란 이야기다.
➠ 필자(筆者) 주(注) : 주리(侏離)란 서방(西方)의 악(樂)을 말하는 것으로, 서방종족(西方種族)을 뜻하는 말이다. 많은 고전(古典) 사료(史料)를 보면 :〈東 曰 韎, 南 曰 任 ,西 曰 侏 離, 北 曰 禁 : 동(東)은 매(韎)라 하고, 남(南)은 임(任)이라 하고, 서(西)는 주리(侏離)라 하고, 북(北)은 금(禁)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리(侏離)는 서방(西方)의 악(樂)인데, 효경구명결(孝經鉤命決)과 통전(通典)에서는 : 〈東 曰 侏 離 : 동(東)은 주리(侏離)〉라고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大部分)의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살펴보면 : 〈주리(侏離)는 서방(西方)의 종족(種族) 또는 악(樂)을 말한다.〉고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周禮卷24 四夷之樂·선화봉사고려도경 제40/악률(樂律)·해동역사(海東繹史)주례(主禮)주(注)·樂書(四庫全書本)/卷173·五禮通考(四庫全書本)/卷071 외(外) 많은 사료(史料)가 「서방(西方)의 것을 주리(侏離)」라고 하였다.】
【해동역사 제22권 / 악지(樂志) 악제(樂制)와 악기(樂器) : 동이(東夷)의 음악은 매(佅)라 하는데, 창을 잡고서 시절에 맞게 자라나는 것을 도우며, 남이(南夷)의 음악은 임(任)이라 하는데, 활을 잡고서 시절에 맞게 기르는 것을 도우며, 서이(西夷)의 음악은 주리(株離)라 하는데, 도끼를 잡고서 시절에 맞게 죽이는 것을 도우며, 북이(北夷)의 음악은 금(禁)이라 하는데, 방패를 잡고서 시절에 맞게 저장하는 것을 돕는다.〈효경구명결(孝經鉤命決)〉】
또 옥편(玉篇)을 찾아보면 : 〈매(韎) : 동방종족(東方種族)의 악(樂)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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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西曆) 1,804년…겨우 2백년(百年) 전(前)의 일이다.
반도(半島) 땅의 지형(地形)지세(地勢) : 국지개벽(局地開闢)? 급격(急激)한 화산(火山)과 지진(地震)활동(活動)…단층(斷層)의 충돌(衝突)과 융기(隆起), 급격(急激)한 기후(氣候)변화(變化) 및 지구(地球) 자전(自轉) 변화(變化)등등이 함께 어우러져, 2백년(百年)만에 오늘날의 지세(地勢)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서력(西曆) 1,804년 당시(當時)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는, 반도(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말이 옳을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판단(判斷)은 독자(讀者)들의 몫이다. 필자(筆者)가 아무리 강조(强調)하고 중요(重要)하다며 설명(說明)을 하더라도, 독자(讀者)들이 그것을 이해(理解)하지 못한다거나, 인정(認定)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뿐이다.
2018년 04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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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님께!
늘 열정과 깊은 가르침 고마와 같습니다!
19세기 초는 자료가 없지만 19세기 말에는 오늘날의 무한이 한양이었던 건 그 당시의 하이테크 첨단 기술제품이었던 증기기관차의 납품 계약 및 마지막 배송지를 150년 이 넘은 한 구라파의 기업의 문서보관서에서 제 눈으로 확인 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유수의 경제잡지 기자도 대동해서요!
분명 한수 (양자강의 지류)가 있는 무한이 한양으로 불리고 Hanyang Iron & Steel 한양제철이 최종 배송지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이 기업은 더 큰 기업에 피인수 되었고 포항제철 창립에 지대한 기여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관심과 성원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일들도 있었다니 널라운 일입니다.
고전원문등에서만 이러한 것들을 확인하는데, 실제 그곳에 있었던 기업의 이름과도 똑같다고 하니, 증거가 되는 것 같아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 더 많았으리라 생각이 드는 군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문 무 2차세계대전 패전국들의 기업 문서들이 (특히 계약서들) 손을 안 탄 경우가 흔치 않게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이치입니다.
만약 오늘날 자기부상열차/고속철, 원자력 발전소, Boeing 747이나 A380 또는 Tesla 전기자동차가 납품되었고 한 백년 후 그 납품과 배송지가 각 해당 첨단 기술 기업에 계약서로 님이 있다면 굳이 역사서가 아니더라도 확인이 가능한거죠! 조선왕조실록도 우리가 접한 모든 역사서가 영인본인 상태에서 손타지 않은 그 무엇이 없을까 대륙조선설을 접하고 찾다 보니 소뒷걸음질 치다 쥐잡듯 오히려 비역사학도인게 이런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십년도 더 전에 찾은 증거입니다!
놀라운 이야기네요. 무한이 한양일 가능성이 제일 높죠. 실지로 무창에 한양성터가 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관심과 성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무한이 한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데.....실제로 무창에 한양성터가 있다니, 새로 눈을 뜨는 것 같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문 무 죄송합니다. 선생님 오타 입니다. 무한을 무창으로치고 말았네요...^^!
예전에 구글어스에서 한양성으로 검색을 하니 우연히 성터가 나오더군요.
성곽터가 나와서 캡처를 해두려다가 말았는데요.
아마 대조연에서 활동할 때 같기도 하고 여기 같기도 하고 댓글로도 썼을 겁니다.
어제 다시 찾아서 보려고 했는데 그세 바뀌어서 안 나오더군요. 한수로 치면 무한에 있는
한수가 나왔는데 지금은 반도 한수로 나옵니다. 한양성 치면 지금은 반도로 나오네요.
한문으로 쳐도 그렇게 나옵니다. 분명한 것은 봣기 때문에 시간 나는 대로 무한을 뒤져보면 나올 겁니다.
제 기억으로 한양성터로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