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은 한글날이었지요. 훈민정음 반포기념 국경일을 맞아 방송사에서는 민간 광고, 표지판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문서인 공공기관 보도 자료에도 오탈자가 수두룩하다고 지적하면서 국방부의 경우 '다이내믹' 대신 '다이나믹'이라는 틀린 표기가 사용됐고, 심지어 교육부는 '페스티벌' 대신 '페스티발'이라고 썼음을 지적했습니다. 최근 3년 동안 47개 공공기관은 2만 4천여 건의 보도 자료를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10%인 2천 2백여 건에서 표기 오류가 발견됐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방송사에서 오탈자를 지적함에 있어 영문표기법 오류보다는, ‘역동적’, ‘축제’로 순화해 쓰도록 제언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TV에 나오는 패널들, 강사들 상당수가 굳이 한국어로 얘기하고는 같은 의미의 영어나 독일어 등 외국어로 덧칠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 것도 안타까움을 더하는 일입니다.
오탈자보다 더한 것은 학생들의 심각한 문해력입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선생님들을 상대로 학생 문해력 실태를 조사했더니, 선생님 10명 중 9명이 '학생들 문해력이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응답했답니다. 머리카락을 뜻하는 두발을 두 다리로, 족보는 족발과 보쌈 세트로, 이부자리는 별자리로 잘못 알고 있고, 사건의 '시발점'이라 했더니 왜 욕하냐며 따지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추후 공고’란 공지를 보고 추후 공업고등학교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는 웃픈 얘기도 있습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23년 성인 146만 명의 문해력이 ’초1~2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 입사지원서의 휴대폰란에 휴대폰 번호가 아닌 휴대전화 기종을 쓴 이도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집 교사가 학부모와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예시 중 하나로, '우천 시'를 어디냐고 묻기에 당황스러웠다고도 합니다. 소풍 가서 중식 제공한다니까 “우리 아이에게는 한식으로 주세요.” 하는 부모도 있었답니다. 물론 학교 측에서 점심 제공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리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디지털 기기 과의존, 독서 부족, 입시 위주 교육 등을 꼽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문해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독서 습관 들이기, 토론과 글쓰기 활동, 디지털 기기 사용 줄이기 등을 제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을 보면(13세 이상) 최근 15년 중 ‘11년에 12.8권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계속 줄어들어 ’23년에는 7.2권에 불과했습니다. 연령별 평균 독서량을 보면 과거에는 10대부터 60대까지 낮은 연령대부터 독서량이 많고 연령대가 높을수록 줄어들었는데 최근에는 10~30대에서 가장 많이 감소하여 2030세대의 독서량이 40대보다 낮았답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특히 10대 및 20대의 독서량 감소 폭이 60.5% 및 64.9%로 큰 폭으로 하락했는데, 글보다는 영상을 읽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시대의 특징이 반영된듯하다는 분석입니다. 30대에서도 독서량은 40.1% 감소했는데 40~60대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60대 이상의 독서량은 3.0권으로 가장 낮았답니다. UN이 발표한 연간 평균 독서량을 보면, 미국은 79.2권, 프랑스는 70.8권, 일본은 73.2권이랍니다.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거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독서의 계절 가을입니다. 더 많은 책을 읽어, 60대 이상 연간 독서량 3.0권이라는 부끄러운 수치를 0.0000001%라도 높이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바로 쓰기에 더욱 신경을 쓰리라 재삼 다짐합니다. 아래 모셔 온 글에서처럼‘짓다’하나에도 이런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그런 다양함을 익힘에도 독서가 큰 힘이 될 거라 믿습니다.
지난 한글날에 가족들과 함께 가산수피아의 품에서 행복을 지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612917720
짓다(모셔 온 글)===========
우리말엔 같은 글자를 갖고 있어도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갖는 말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말의 묘미이기도 하다. 그런 말 중에 나는 '짓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짓다'라는 단어가 늘 나를 미소 '짓게'한다. 밥을 짓고, 옷을 짓는 것처럼 재료를 들여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을 짓는다고 한다. 시를 짓고 노래를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논밭을 다루어 농사를 하는 것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모두 생산의 의미가 있다. 말을 생산하는 것도 지어낸다고 한다. 엉뚱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을 지어서 한다고 한다. 묶거나 꽂거나 해서 매듭을 만드는 것도 짓는다고 하고, 이어져 온 일을 끝맺는 것도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영어로는 make, build, construct, write, compose, name등 여러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모습이 계속 무언가를 짓는 일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만들어내고 마무리하는 일의 반복이니까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을 지어 먹고 길을 나선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말을 지어서 일을 하고 , 마무리를 짓는다. 퇴근하면 힘든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잠자리에 든다. 하루 종일 짓고 지어서 짓는 일의 연속이니, 짓는 것만 잘하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과연 짓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의 양을 잘 조절하는 것이 관건인데, 쌀의 종류에 따라 물의 양도 세심하게 달라진다. 밥 짓기 초보는 물의 양을 말 맞추지 못해 죽을 만들거나 떡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몇 십 년 주방 일에 이골이 난 주부라면 매번 같은 농도의 밥을 끼니때마다 척척 해낸다. 짓는 일의 연속인 우리 삶의 모습도 그렇다. 처음엔 손에 익지 않아서 실수를 반복하던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 꾸준히 그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고수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짓는 일은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조바심을 내고 처음부터 잘 지어지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리다보면 결코 단단하게 지을 수가 없다. 시를 짓고 노래를 지을 때는 한순간 떠오른 영감으로 짓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도 작곡가도 순간의 창의력만으로 짓지는 않는다. 한편의 시가 나오기까지 쓰고 버린 수백 장의 파지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명곡이 나오기까지 쓰고 버린 수백 장의 오선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그렇게 수많은 노력을 통해 지어낸 창작물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많은 것을 지을 때는 혼자 힘으로 지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오로지 내 힘으로 견디며 지어야 할 것들도 많다. 협동할 것과 스스로 할 것,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며 우왕좌왕한다면 결코 훌륭하게 지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비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
- 마이클 린버그의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 중에서-
누군가의 충고가 절실할 때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충고 속에서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집을 짓고 그 안에 살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내가 지은 것에 책임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짓는 사람이다. 지어서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세운 것이 소홀함이 없도록 마무리를 잘 짓는 일도 중요하다. 매듭을 짓는 일을 잘못하면 제대로 된 마무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지어놓았어도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작하는 순간에는 거창한데 늘 마무리가 빈약한 사람을 더러 보게 된다. 활기차게 짓기 시작했지만 늘 마감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을 잘 맞춰야 하고, 집을 지을 때는 기초를 잘 다져야 하고, 시를 지을 때는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말을 지을 때는 거짓이 없어야하고 마무리를 지을 때는 깔끔하게 해야 한다. 생활의 전반에서 짓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걸림돌이 없다. 나는 지금 제대로 짓고 있는지, 내가 짓고 있는 것들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고도원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