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분노(耶律盆奴)
耶律盆奴,字胡獨菫,惕隱涅魯古之孫.景宗時,為烏古部詳穩,政尚嚴急,民苦之.有司以聞,詔曰:「盆奴任方面寄,以細故究問,恐損威望.」尋遷馬群太保.
야율분노(耶律盆奴)는 자(字)가 호독근(胡獨菫)이고 척은(惕隱) 열로고(涅魯古)의 손자이다. 경종(景宗) 때에 오고부양은(烏古部詳穩)이 되었는데 정사(政事)를 더욱이 혹독[尚嚴]하게 하여 백성들이 괴로웠다. 유사(有司)가 이를 듣고, 조(詔)를 내려 말하기를
분노는 방면(方面)의 일을 맞아 자그마한 일도 샅샅이 캐물어
위망(威望)을 손상 시킬까 두렵다.
이라 하고, 곧 마군태보(馬群太保)로 옮겼다.
統和十六年,隱實燕軍之不任事者,汰之.二十八年,駕征高麗,盆奴為先鋒.至銅州,高麗將康肇分兵為三以抗我軍:一營于州西,據三水之會,肇居其中;一營近州之山;一附城而營.盆奴率耶律弘古擊破三水營,擒肇,李玄蘊等軍望風潰.會大軍至,斬三萬餘級,追至開京,破敵於西嶺.高麗王詢聞邊城不守,遁去.
통화 16년(998)에 은실연군(隱實燕軍)의 직무를 잘 수행 하지 못하는 자를 가려냈다. 통화 28년에(1010) 황제【註1】가 고려(高麗)를 친정[駕征]하여 분노를 선봉(先鋒)으로 삼았다. <아군이> 동주(銅州)【註2】에 이르자, 고려장수 강조(康肇)【註3】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아군(我軍)에 항거하였다【註4】. 하나는 주(州)의 서쪽으로 삼수(三水)가 모이는 곳에 진(陣)을 치니, 조는 그 가운데에 있었다.【註5】 다른 하나는 주의 가까운 산(山)에 진치고【註6】, 나머지 하나는 성(城)에 붙어 진을쳤다.【註7】.
분노가 야율홍고(耶律弘古)를 거느리고 삼수영(三水營)【註8】을 격파(擊破)하고【註9】, 강조와 이현온(李玄蘊)【註10】 등을 사로잡았다【註11】. 고려군이 이를 보고 바람처럼 무너졌다.【註12】 대군(大軍)을 모여 이르자 <적병> 3만여 급(級)을 베었고【註13】, 개경(開京)까지 추격하여 서령(西嶺)의 적을 깨트렸다. 고려왕(高麗王) 순(詢)【註14】이 이를 듣고 변성(邊城) 지키지 못하고 도망갔다.【註15】
盆奴入開京,焚其王宮,乃撫慰其民人.上嘉其功,遷北院大王,薨.
분노가 개경에 입성하여 그 왕궁(王宮)을 불사르고【註16】, 이내 그 인민(人民)들을 무위(撫慰)【註17】하였다. 황상이 그 공(功)을 칭찬해 북원대왕(北院大王)으로 옮겼다. <뒤에> 훙(薨)하였다.
【註1】거란(契丹) 성종(聖宗)
【註2】통주(通州)이다. 통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평안북도(平安北道) 선천(宣川)이다. 통주성에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선천의 동림성(東林城)이 선주성(宣州城)으로 밝히고 있다. (선주는 곧 통주이다. 『高麗史』「地理志」권3에서 ‘宣州。本安化郡。高麗初。改爲通州。顯宗二十一年。稱宣州防禦使。’이라 하였다.)
【註3】『遼史』本紀와 烈傳에는 ‘康肇‘로 나오지만『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는 ‘康兆’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人이므로 高麗側 史料가 더 정확할 것이다.
【註4】기해일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남으로 나와서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己亥,康兆引兵,出通州城南,分軍爲三,隔水而陣- 『高麗史節要』券3
조가 통주성남에 나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陣)을 쳤다.
兆引兵出通州城南。分軍爲三。隔水而陣。-『高麗史』『高麗史』券127「康兆」
【註5】 一營于州西。據三水之會。兆居其中。-『高麗史』『高麗史』券127「康兆」,『高麗史節要』券3
【註6】一營于近州之山。-『高麗史』『高麗史』券127「康兆」,『高麗史節要』券3
【註7】一附城而營。-『高麗史』『高麗史』券127「康兆」,『高麗史節要』券3
【註8】삼수채(三水砦)를 말하는 것 같다.
【註9】거란의 선봉 야율분노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채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병이 왔다 고(告)하니 조가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다시 고하여 말하길 “거란벼이 이미 들어 왔다.”라 하니, 조가 “정말인가?”라고 하는데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중에 목종(穆宗)이 보이며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즉시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契丹先鋒耶律盆奴。率詳穩耶律敵魯。擊破三水砦。鎭主告契丹兵至。兆不信曰。“如口中之食。少則不可。宜使多入.” 再告曰。“契丹兵已多入.”兆驚起曰。“信乎?” 恍惚若見穆宗立于其後。叱之曰。“汝奴休矣。天伐詎可逃耶.” 兆卽脫鍪牟長跪曰。“死罪死罪“
-『高麗史』『高麗史』券127「康兆」,『高麗史節要』券3
【註10】 고려의 행영도통부사 이현운(李鉉雲)이다. 거란군에 사로잡혀 성종의 신하가 되었다.
【註11】말이 끝나지 않아 거란병이 이미 이르러 조를 결박하여 담요로 싸서 가고 현운도 역시 잡혔다. 거란주(契丹主;성종)가 조의 결박을 풀고 묻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이 고려의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 하였다. 다시 물어도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또 살을 찢으면서 물었으나, 역시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현운에게 물으니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마음을 가지고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라 하였다. 조가 노(怒)하여 현운을 차며 말하기를, ”너도 고려인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라고 하니, 거란이 마침내 조를 죽였다.
言未訖。契丹兵已至。縛兆。裹以氈。載之而去。鉉雲亦被執。契丹主解兆縛。問曰。“汝爲我臣乎?” 對曰。“我是高麗人。何更爲汝臣乎” 再問對如初。又剮而問。對亦如初。問鉉雲對曰。“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兆怒。蹴鉉雲曰。“汝是高麗人。何有此言.” 契丹遂誅兆。
-『高麗史』券127「康兆」
강조와 이현운 이외에 다른 장관(將官)들도 많은 수가 포로로 잡혔다.
이현운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잡혔고,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죽었다.
李鉉雲,都官員外郞盧戩,監察御史盧顗,楊景,李成佐等,皆被執,盧頲,司宰丞徐崧,注簿盧濟,皆死.
-『高麗史節要』券3
【註12】거란인이 조를 담요로 싸서 수레에 싣고 가버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丹人,以氈裹兆,載之以去,我軍,大亂.-『高麗史節要』券3
【註13】거란병은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 3만여 급을 베었다.
契丹兵乘勝追奔數十里。斬首三萬餘級。-『高麗史節要』券3, 『高麗史』券94「楊規」
【註14】고려(高麗) 현종(顯宗)
【註15】○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辛未,智蔡文奔還于京,壬申,奏西京敗軍狀,群臣,議降,姜邯贊,獨曰,“今日之事,罪在康兆,非所恤也,但衆寡不敵,當避其鋒,徐圖興復耳.” 遂勸王南行,蔡文,請曰,”臣雖駑怯,願在左右,庶效犬馬之勞“ 王曰,”昨李元崔昌奔還,自請扈從,今不復見,爲臣之義,果如是乎,今卿旣勞于外,又欲捍衛,深嘉乃忠.“ 仍賜酒食,及銀粧鞍轡,是夜,王,與后妃,及吏部侍郞蔡忠順等,禁軍五十餘人.
-『高麗史節要』券3
【註16】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거란주가 서울에 들어와서 태묘와 궁궐ㆍ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타버렸다.
春正月乙亥朔,契丹主,入京城,焚燒大廟,宮闕,民屋,皆盡--『高麗史節要』券3, 현종 2년
【註17】撫慰[무위]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