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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지털한성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이노나
1. 신선하고 감각적인 시 |
동아 99
흑백사진-최경민(29)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 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있네.
동아2000
고래- 이승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
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추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 는
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
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
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
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
<장미>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
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
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
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
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옥수,응봉
세 개의 海域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으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정은
묘하기도 하지,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동아01
이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몽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 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걸음씩 비켜 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않고 있으므로.
96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 마다 넘치는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 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97 (중앙일보)
안개바다 - 이성일
1
바다 근처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이 마을의 집들이
유리창을 번뜩이며
바다를 보고 있다 서로
다르게 비어 있는 창 속에서
조금씩 바다가 증발하고
있다 불빛만이 가려진
커튼 사이로 안개를
흘릴뿐
2
한지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생을 탁본하는 밤이면
그대가
너무 깊게 박고 간 내 가슴속
못 하나가 쉼표처럼, 그대의
죽음 밖으로 삐져나와
바다로 간다. 아직,
행간을 건너가 보지 못한 생각들이
몇 척 배로 찍혀 정박해 있는
바다. 안개 속이다
고동에서 고동으로
생을 탁본하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바다를 떠다닌다. 난파선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바다를 끌고 와
고동, 그 빈 먹통 속으로 확,
죽음을 펼쳐 보이는 안개. 멀리서
안개 경보 울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로 풀어진 자들의 신음,
2.제재 인식이 특이한 시 |
동아04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06(동아일보)
개기월식- 곽 은 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k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콘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 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 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레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동아02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3.착상과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시 |
중앙일보
95 (윤지영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중앙일보
가작입선시 : 가족일기 -이용규
발가락이 가려웠다. 노을 밑으로 낙엽들이
서둘러 떨어질 때, 국문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들이
허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밟아 보았다.
길은 덜 자란 마늘밭 하나 건너지 못하고 내려갔고, 그날 밤
법성포로 떠난 아버지의 굵은 손끝에 매달린 굴비 한 두름
짜게 절여두겠지. 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쉰 밥풀 같은 하루, 밑으로 가볍게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유채꽃같이 찾아오는 봄.
풀어지겠지, 개울에 갇힌 은어 몇 마리쯤.
언덕부터 고추꽃들이 매운 바람으로 불고, 아직 덜 꺼낸
유품 같은 우물을 왔다. 그날 돌아가신 할머니 팔까지 올라오던
물결, 씻고 행구는 나의 발자국 멀리 흘러갔다.
자취방은 어머니 근심이 기어나오던 그날 같은 배고픔.
신문배달을 했다. 셔터 밑으로 자꾸만 쑤셔넣던 체첸반군들.
군에 입대한 형으로부터 엽서가 오고
가지런히 기댄 등교길이 즐거웠다.
일몰은 눈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들은 하나씩의 풍경들을
들고 들어가 꿈을 만들고, 껌 씹는 낙엽을 밟으며
술집 누이가 들어왔다. 그날 밤,
기도의 형식으로 버려진 수난들이 일기장 속에 접혀 들어갔고,
이유를 몰랐다.
신발을 신지 않은 개들이 고향을 향해 떳떳하게 짖어대고
기쁜 꽃들로 나가 계절을 바꿀 수 있는 이유를.
세월은 넘지 못하는 것일까. 누이의 이마 하나,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중앙99
3월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중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중앙01
복숭아-서광일
비닐 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딪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서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4.당대를 반영한 시 |
99
실업 -여 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내내
순환선 열차에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 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 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5. 신화 원형적인 시 |
98 (동아일보)
자모의 검
여정(본명 박택수, 70년 대구 출생, 계명전문대 경영학과 졸, 현재 '시나인'동인)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 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 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 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 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 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 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 떼를 불러 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 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 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00 (조선일보)
우물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 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발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신춘당선작을 읽을 때마다 더 많은 공부를 해야 겠단 생각 듭니다. 아주 신선하고 창의적인 이런 시가 영~ 좋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