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대부분이 '8'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5+3=7+1'도 된다. 그 뿐인가? '9-1'도 된다. 또 있다. '2×4', '16÷2', '1.1+6.9' 등 답은 끝이 없다. '5+3=8'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공식과 틀은 우리의 삶을 세워 주는 기둥이 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우리를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일단 벗어나보면 참으로 엄청나게 넓고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또 물어보는 게 있다. '삶은 계란'을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고. 영어를 좀 아는 유식한 이들은 'a boiled egg'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틀에 박힌 '정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Life is egg'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날계란은 말갛고 유연하지만 뜨거운 물에 넣으면 굳어버린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상황에 익숙해진다. 달걀이 뜨거운 물에 익혀지듯 상황에 익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감각이 둔해지고 자신의 그러한 점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직장인의 삶에는 반복적인 요소가 많다. 규칙적인 출퇴근이 그렇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 그렇다. 그러다 보면 그런 틀에 익숙해져 "지금 이대로 좋은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잊어버리고,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삶은 계란이 되어 가는 것이다. 삶은 계란이란 그것이 타조 알만큼이나 또는 바위만큼이나 크다 해도 거기서는 단 한 마리의 병아리도 태어날 수 없다.
최명희의 <혼불>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눈멀고 귀먹어 민둥하니 낯바닥 봉창이 된 달걀 껍데기 한 겹, 그까짓 것 어느 귀퉁이 모서리에 톡 때리면 그만 좌르르 속이 쏟아져 버리는 알 하나. 그것이 바위를 부수겠다 온몸을 던져 치면 세상이 웃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달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니,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지만 달걀은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
'삶은 계란'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익혀 버리려는 뜨거운 물들과 끊임없이 싸워 나가야 한다. '현재의 자리에 오래 버티기', '자기계발 게을리 하기', '새로운 변화 피해 가기'가 날계란을 익혀 주는 뜨거운 물이다.
그리고 '새로움'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전과 동(同)!'이라는 안일한 삶의 방식을 못박고 거기에서 과감히 탈출해야 한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말고 평지풍파를 일으킬 줄도 알아야 한다. '절대로', '반드시', '꼭', '기필코'라는 말과 거리를 둬야 한다. 그래야 창조적인 날계란이 된다.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달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