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르노 출생. 유대계 명문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 다닌 뒤,
1906년 이후는 파리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다음해에는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제작을 시도하여,
니그로조각과 브랑쿠시식(式)의 사실(寫實)을 떠난 간결한 조형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후 다시 회화로 돌아가 세잔, 피카소
등의 감화를 받은 독창적인 작풍(作風)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첼로를 켜는 사람》 등 6점의 유화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으며,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에콜 드 파리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베르트 베유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풍경화도 몇 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부터는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적 개성을 보여준다. 시인적 자질이 풍부한 다감한 미남자로 일화가 많으며,
만년에 잔 에뷔테른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다.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1884-1920)
Nude Sdraiato
35세란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만큼 인생이 미화되고 전설화된 작가도 드뭅니다. 모딜리아니를 따라 오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만삭의 임신부 잔느 에뷰테른 (Jeanne Hebuterne)의 순애보도 신화적 전설에 기여했겠지만, 역사상 화가중에서 가장
출중했다는 그의 탁월한 외모와, 대개의 불운한 화가가 그랬듯이 그 역시 죽고난 다음에야 그의 작품의 진가가 비로소 제 빛을 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The Pretty Housewife
그가 죽기 삼년 전인 1917년, 파리에서 닭 한마리도 10 프랑에 팔렸는데 그의 드로잉은 5프랑에 팔렸다고 합니다. 밥값 대신 그림을
받은 어느 음식점 주인이 화가 나서 그의 그림에 국수가락을 내던졌다고 할 만큼 그의 그림은 과소평가 되었습니다. 가난에 쪼들린 그의 말로는 죽기
전에 애인 잔느가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그의 그림값은 갑자기 뛰어올라 15년만에 오십만
프랑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그림은 몇 천만 프랑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Young Redhead in an Evening Dress
전설과도 같은 삶, 신화적 운명 등 모딜리아니의 삶에 붙여진 이름은 많습니다.
그러나 보헤미언과 같은 그의 삶의 여정속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고요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어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정열적인
기질을 지닌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데도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던 그는 1884년 7월
12일, 이태리 토스칸 지방의 리부르네에서 유태 상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니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으제니 가르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던 어머니 으제니는 철없는 응석받이 막내아들 모딜리아니에 대해 1895년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애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생각해봤다. 아마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nude
멘델스존과 스피노자 등 예술과 철학을 좋아하던 이모와 할아버지 덕분으로 모딜리아니는 어릴때부터 지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열네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모딜리아니는 화가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풍경화와 데생을 익혔습니다.
La jeune bonne (The Servant Girl)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난 지금 내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느끼고있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고 있네. "
Juan Gris
1902년. 열아홉살의 청년 모딜리아니는 플로렌치아로 떠났습니다. 누드 전문
미술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후 베니스 미술학교로 옮긴 그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이라는 작품에
심취해 대마초를 피우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일생동안 마약과 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의 생활방식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림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가장 훌륭히
받을수 있었고 미술관과 도시곳곳을 다니면서 이태리의 전통을 몸에 익힌 것도 이 시기입니다.
nude
그는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화가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같은 절제 없는 생활을 향유합니다.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주게됩니다
잠시 위 그림을 살펴보면 :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이그림은 나부의 얼굴 표정으로 구성이 집중됩니다. 여체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으로도 이 여성은 알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합니다
Portrait of Paul Guillaume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디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합니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디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습니다.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합니다. 그의 파리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습니다.
Portrait of Max Jacob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습니다. 이때는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으며. 1908년에 그린 [누드공부]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Elena Pavlowski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으며 이 때의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입니다.
Reclining Nude from the Back (Nu couche de dos)
모디가 죽자 뒤를 따라 자살할 만큼 그를 사랑한 잔느 에뷰테른을 만난 것은 1917년 7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디는 서른세 살이었다. 그들은 화가나 미술학도가 다니는 미술학교 아카데미 콜라르시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디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습니다. 착하고 순정적인 잔느는 술과 마약에
시달리는 모디와는 달리 절제된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라로통드로 찾아가 만취한 남편을 찾아오곤 했으며. 잔느와 함께
동거하면서도 모디가 다른 여자로부터 애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Woman of Algiers
잔느는 1918년 11월 29일에 딸 지오바니를 낳습니다,
시청에 출생신고를 하거 가던 모디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한 잔 한다는 것이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버려 그 날 결국 딸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내닫고 있었습니다.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 영양상태는 엉망인데다가 술, 담배와
무절제한 생활은 그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방탕함은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재촉했습니다.
모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잔느는 속수무책인 채 넋나간 사람마냥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를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ortrait of Jeane Hebuterne Seated in Profile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안에서 환자는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고, 이젤엔 오일이 채 마르지 않은 바르고니의 초상이 미완성인 채
남겨져 있었습니다. 모디는 의식이 몽롱한 채, "나는 딸이 크는 것조자 보지 못하고 죽는다.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이태리여! 내가 죽으면
잔느는 친구 수탄하고 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생전의 모디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습니다. 1920년 1월 24일 저녁 8시 50분에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
다음날 아침,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러 병원에 간 잔느는 오랫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시체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쳐 영안실을
나왔습니다. 겁이 난 그녀의 부모는 실신상태에 있는 잔느를 집에 데려다 오층 식모방에 가두어 놓고는 남동생 앙드레로 하여금 밤새 누나 곁은
떠나지 않고 지키도록 했습니다.
Jeanne Hebuterne with White Collar
그러나 이미 잔느에게는 자살할 각오가 서 있었습니다. 결단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동생이 잠깐 조는
큼을 타 오층 창밖으로 임신 9개월의 몸을 내던졌습니다. 잔느는 순결과 희생,그리고 생명까지 던져 그를 사랑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인이었습니다.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아이러니칼 하게도 모디의 장례식은 비참한 그의 생애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습니다.
온통 꽃에 파묻힌 그의 관이 실린 영구차의 뒤에는 파리의 유명한 모든 화가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피카소, 데리앵, 우틸로, 작크 립시츠,
키슬링, 올티즈, 자라데, 부랑빙 ... 수도 헤아릴 수 없는 화가들이 페르 라쉐즈 묘지로 가는 슬픈 행렬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이틀후 그의 그림값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폭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Girl with a Polka-Dot Blouse
파리의 벨 라시즈
공동 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석에는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만삭의
몸으로 그를 뒤쫓아, 아파트 6층에서 투신 자살한 모딜리아니의 처, 쟌느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쟌느 에퓨테른느. 1889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블론드의 여자(르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없는 배경을 통해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의 특징은
인체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델들을 화폭 속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재탄생시키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모딜리아니상'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 데는 인물을 그리면서
그가 지닌 몇 가지 독특한 표현을 구사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1917
모딜리아니가 이처럼 독특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흔한 초상화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만큼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기 때문인데, 그는 작품 속에서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였습니다.
파이프를 가진 니이스의 노인 1918
모딜리아니가 보헤미안적 생활을
보내면서 파리에서 얻은 것은 P.세잔의 엄격한 조형성과 불필요한 세부를 떼내버리고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파악하는 입체주의의 미학이었으며, 아프리카
흑인조각의 다부진 표현력이었습니다. 그는 인물을 즐겨 그렸고, 풍경이나 정물은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초상화가 많고, 그 다음이
나부상(裸婦像)입니다. 단순화되고 데포르메된 형태와 정묘한 색조는 그의 시인적 자질과 어울려서 애조를 띤 독특한 화풍을 만들었습니다.
모자를 쓴 여자
모딜리아니는 단순화된 형태와
부드러운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습니다. 큰 타원형으로 몸을 그리고 , 작은 타원형의 얼굴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리면 기본
형태가 갖춰집니다. 즉 모딜리아니는 작품의 기본 윤곽을 단순한 형태로 그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됩니다. .
반 뮈덴 부인의 초상
모딜리아니가 탄생시킨
인물상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목의 표현입니다. 모딜리아니는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렸습니다. 이는 그가 그린인물들이 갖는 독창적인
이미지였습니다. 길고 가는 목의 표현은 원시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영향에서 비롯되는데, 그 중에서 인체를 길게 왜곡시켜서 그린 매너리즘
화가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기도 합니다.
부채를 가진 루니아 체호우스카
다양한 양식의 영향으로 완성된
모딜리아니상은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양식으로 자칫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기 쉽지만,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저마다의 개성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모델을 그리면서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심리적인 상태를
잘 그려냈기 때문이며, 그 심리 상태는 눈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모딜리아니가 그린 눈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비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심리상태와 모델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눈이나 표정 등에
섬세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젊은 하녀 1919
아마도 모딜리아니가 죽자 모든
생의 의미를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른 에뷔테른의 순애보적 사랑이 바로 그의 모델이 되어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 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부부
모딜리아니의 색깔 중에서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이 ‘파란 색의 신비’입니다. <파란 눈의 소녀> <파란 옷의 소녀> <파란
에이프런의 소녀> <파란 상의의 소년> 등,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왠지 청색을 주제로 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파란
상의의 소년>(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합니다.
첼리스트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자화상>(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합니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한 친구인 음악가 마리오 바르보리를 그린 데생에서 넘쳐 흐르는 신생(新生)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음을
예감한 인간의 환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 1918
F. Schubert -
현악 4중주 in D minor. D810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 2악장
|
첫댓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새삼 신선하게 감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예술인들은 남모르는 내면의 앓이 앓이가 진주가 여무는 고통을 진주 조개가 감내하듯이 쌓여있는 것 같습니다. 청솔님 덕에 좋은 시간 가져보았습니다.
한참을............그림속에 머물다 갑니다. 슬픈일이지만 예술가들의 生이 전반적으로 불행한듯 허요~
모딜리아니그림...참 많이 좋아했지요..모델의눈빛과 긴얼굴이 주는 고독...한때는 내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도...ㅋㅋㅋ
한참젊은 보헤미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정말 극적인 삶이었지요.왜이다지도 불행한 화가들이 많았을까요,,아, 가엾고불쌍한 쟌느,,,아 얼굴이 갸름하고 목이길고 가 냘픈몸매,, 그기까진 하늘맘님이랑은 비슷한데 첫인상 의 하늘맘님의 깊숙한눈매는 매우 이국적이고 영롱하쎴지요.
마음 져려옵니다. 35세. 부인 잔느. 잔느의 사랑이 더욱 아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