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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제水火旣濟 화수미제火水未濟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ᆢ
계란이 병아리로 깨어나는 것을 중부라 했고 병아리가 깨어나서 독수리로 자라는 생명을 소과라 했다. 그리고 생명의 특징을 계속 발전하는 것이라 했다. 계속 발전하는 것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 한다. 향상일로의 궁극이 도道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일은 도道에 이르자는 것이다. 계속 발전하여 자유의 경지에 오르자는 것인데 그것을 주역은 형이상形而上이라 했다. 형이상이란 물질을 초월한 정신의 주체요 주체가 활동하는 영성의 세계를 말한다. 내 맘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자유의 세계를 열어가는 그 주체적 행위를 도라고 한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빈낙도安貧樂道, 나눔과 비움의 가난함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진리와 함께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유의 세계, 어떻게 그런 안빈낙도의 경지에 도달하는가? 주역에서 그 방법을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 했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방법으로 계속 발전하여 음양을 벗어나고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유의 경지에 이르면 무엇이나 하나의 진리로 꿰뚫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인道人이 된다. 동양은 이처럼 진리나 생명보다도 도를 최고의 경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의 내용도 모두 그 도를 추구하는 길을 말하자는 것이다.
주역은 수화기제水火旣濟와 화수미제火水未濟로 끝맺는다. 기제는 이미 건너갔다는 뜻이요 미제는 아직 건너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순차적으로 볼 때 미제가 먼저 있고 기제가 나중에 결말이 되어야 하는데 주역은 거꾸로 기제가 앞에 나오고 미제로 끝이다. 주역은 왜 이렇게 미제로 끝났을까? 범인을 찾을 수 없어 사건이 종결되지 못하면 미제사건이라 한다. 미제사건이 되면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수사를 이어가야 한다. 그럼 주역에서도 인생은 미제사건이라는 뜻일까?
기제와 미제, 이미 건너갔는데 아직 건너지 못했다. 이런 모순되는 메시지를 통해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너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인생은 죽음으로부터
둘째, 우주는 미정고
셋째, 종말적 시간관
넷째, 나선형 발전 과정
현대의 우주관은 빅뱅으로 출현한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 알이라는 한 점이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로 농축되어 있다가 폭발하여 시간과 공간의 우주가 출현했는데 지금도 우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한다는 것이다.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커지는 것처럼 인류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도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나의 알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도 세포분열의 폭발로 이뤄진다. 이처럼 우주와 인류의 역사가 계속 발전 진보한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을 직선적 시간관이라 한다.
그런데 우주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빛이 나타나고 소립자의 우주먼지에서 별이 탄생하여 수많은 원소들이 태어나는 물리화학적 진화의 과정이 있고, 또 태양계와 지구의 출현으로 생명이 태어나는 생명진화의 과정이 있고, 이어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의 출현과 의식의 진화라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우주의 진화는 중층적이고 단계적이며 진동하는 지속적 과정이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쯤 된다는데 태양계와 지구가 나타난 것은 46억 년 전이고 지구 생명 가운데 인류가 나타난 것은 4만 년 전이고 의식의 출현과 함께 호모사피엔스의 문화가 시작된 것은 4천 년 전이라 한다. 우주 내 별들이 탄생하는 은하계의 모습을 보면 모두 나선형이요 천체의 움직임들은 모두가 원운동과 회전운동이다. 지구는 스스로 자전을 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춘하추동이라는 4계절이 나타난다. 그래서 지구 생명체들은 이런 춘하추동의 주기에 맞춰 살아가면서 진화 발전한다. 그러니까 생명은 주기적인 활동으로 발전하는 것인데 이는 곧 원운동과 직선운동이 결합된 나선형 발전을 뜻한다. 즉 모든 생명활동은 원운동의 주기를 가지면서 동시에 직선적 발전과 역동적 진화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 춘하추동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돌게 되면 매듭이 하나 지어지고 이어서 다시 또 새로운 춘하추동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매듭을 짓는 순간에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뜻이다. 하루를 매듭짓고 나서 새로운 하루를 살게 되고, 한 달을 매듭짓고서 새로운 달을 맞이한다. 한 해를 매듭짓고 새해를 맞이하듯 일생을 매듭짓게 되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 하면 직선적 시간관인데 나선형 시간관으로 보면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말하길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 했는데 이 말씀도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곧 새로운 시작임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은 죽음을 먹고 산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식물의 사체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석은 식사는 곧 제사라 하였다. 입안에서 동식물의 제물로 희생제를 치름으로써 우리가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제물로 바쳐 죽게 되면 나보다 더 큰 생명 안에서 나는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성인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하였다. 소크라테스도 죽으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말하였고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노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죽음을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말하길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하였다. 이때 제자가 그럼 삶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라면 아마도 죽음을 알면 삶을 알게 된다고 했을 것이다. 왜냐면 주역에서 공자가 강조하는 말이 사생지설死生之說, 즉 죽어야 살아나는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화기제는 죽음이요 화수미제는 새로운 삶이라고 풀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강을 다 건너간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끝이 아니라 우리 앞에 새로운 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제 다음에 새로운 미제가 기다린다. 이제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지구 생명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것이다. 우주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인생과 생명과 우주는 끝없이 진화하는 것이지 멈춘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주가 활동을 멈춘다는 것은 곧 신의 죽음이다. 우주와 세계 안에서 인생이나 생명의 활동이 모두 멈추는 일은 곧 절대의 죽음이다. 그런데 우주가 살아있는 한 그런 절대의 죽음은 일어날 수 없다. 살아있는 우주는 새로운 생명을 출현시킬 것이요 새로운 의식을 출현시킬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인생도 미정고未定稿요 진리도 미정고요 우주도 미정고요 하나님도 미정고라 하였다. 인생과 역사와 우주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아직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 예술가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며 새로운 창작을 시작한다. 창조적 예술가에게 완성품이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도 창조적 예술가의 소질과 능력으로 문화와 역사와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종말론을 말한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우주와 세계도 끝날이 있다는 직선적 시간관이다. 세상이 끝나는 그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낙원에서 살게 된다는 것으로 의인들에게 주는 희망이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끝나기 전에 재림한다는 믿음을 두고 온갖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핵심은 종말이 미래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께서는 때가 오려니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간관은 순환적 시간관이지 직선적 시간이 아니다. 심판이 곧 구원이요 그때가 오는데 지금이 곧 그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또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다시 오실 것이다. 과거의 현재성이요 장래의 현재성이다. 장래의 현재성과 과거의 현재성이 지금 여기서 하나가 되는 이런 동시성이 순환적 시간관이다. 그러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라는 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한 점을 이루는 순간으로 그 한 점을 깨닫는 것을 다석은 가온찍기라 한다. 우리가 미래로 가고 가는 중이라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만나는 별빛은 수억만 년 전의 과거가 도래하는 순간이다. 과거의 본질직관의 체험도 별빛처럼 도래하는 장래의 현존이다. 그래서 이런 가온찍기의 믿음으로 사는 생명은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다시 사는 향상일로의 길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처럼 깨어 기도하는 신앙이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사는 하루살이, 여수 애양원에서 활동하다 순교하신 손양원목사(1902-1950)처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요 심판의 날이라 믿고 날마다 거듭나는 신앙이다. 그것이 오늘 하루 속에서 영원을 사는 영생이다. 오늘 하루를 매듭짓고 죽었다가 다시 맞이하는 새로운 빛 가운데 새 하루를 힘차게 계속 올라가고 영원히 발전하는 영적 생명이 곧 영생이다. 이런 영생의 길을 보여주자는 것이 주역의 기제旣濟와 미제未濟라 보고 풀어본다. 다시 말해 기제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요 미제는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으니 힘써 노력하는 세계로 기제와 미제는 이제라는 지금 여기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를 얻어야 죽는 것이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죽음으로부터. 십자가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