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관기와 동침했을까?
1597년 4월 21일 자 『난중일기』 내용이다. "저녁에 여산의 관노의 집에서 잤다(夕宿于礪山官奴家)"는 구절이다. 당시 관청에 속한 관노비 중에는 기생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지방관의 수청을 들거나 지방관의 권한으로 높은 손님을 접대하는 일도 있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4월 21일 일기를 두고 충무공이 관기와 동침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충무공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노(奴)는 남자종이고 비(婢)가 여자종이기 때문에 관에 속한 남자종의 집에서 숙박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 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모친상을 당한 데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가는 길이었다. 해당 구절 뒤에는 ‘한밤중에 홀로 앉아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고 적었다. 충무공이 여성과 잠자리를 했던 정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여진은 그 술상을 들고 들어온 관기였다. 기생이라기보다는 관노에 가까웠다… 정자나무에 매단 머리들의 뜬눈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나는 여진을 품었다…그 여자의 몸속은 따뜻하고 조붓했다.” 이는 2001년 김훈이 낸 소설 『칼의 노래』 중 일부다. 충무공이 여진(女眞)이라는 기생과 관계했다는 통설이 대중적으로 확산한 데는 『칼의 노래』가 영향을 끼쳤다. 다만 김훈도 노(奴)와 비(婢)를 구분하지 않고 썼다.
이 부분이 『난중일기』엔 이렇게 나온다. “하루를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함께했다”(1596년 9월 14일)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여진과 함께했다”(1596년 9월 15일)
그런데 두 날짜에 등장한 ‘여진입(女眞卄)’ ‘여진삽(女眞卅)’이라는 대목에서 해석이 갈린다. 1935년 일본 조선사편수회 등에선 이를 여진이란 여인과 두~세차례 잠자리를 가진 횟수라고 해석했다. 반면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여진입(女眞卄)’, ‘여진삽(女眞卅)’을 여진공(女眞共), 즉 ‘여진과 함께 했다’로 해석하고 있다. 한자 자체를 다른 글자로 보는 셈이다.
노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은 초서체로 쓰인 『난중일기』의 '공(共)'을 '스무 입(卄)', '서른 삽(卅)'자로 오독한 것”이라며 “『난중일기』에는 '~와 함께 했다'는 의미로 인명과 공(共)을 합친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노 소장은 “당시 호남에 이주해 살던 여진족과 생활을 의미하거나 글자 그대로 '여진·여진입·여진삽'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 것은 반박했다.
노 소장은 “15세기 전남의 노비 문서를 보면 ‘여자 종 여진(婢女眞)’이라는 기록이 있다. 다른 지역의 노비 문서도 마찬가지”라며 “충무공이 여진이라는 이름의 여자종과 함께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장도 “여진족을 여기에 끌어다 쓴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며 “일기 내용이나 당시 정황을 보면 전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낳은 달수를 계산해보니 나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에서도 내쫓아버렸다.”(1594년 8월 2일) “개(介)와 함께 잤다.”(1596년 3월 9일)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 (1596년 8월 19일)
『난중일기』에는 이순신과 관계된 여성들이 등장한다. 전문가들도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참작할 때 충무공이 정실 외에 첩을 두었으며, 그 외에도 다른 여성들과 동침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말한다. 다만 노 소장은 “여산에서 관노와 잤다'는 등 『난중일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사실처럼 수용되는 것은 큰 문제다. 흥미 위주로 쓰인 소설과 팩트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충무공과 동시대 인물인 이항복은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서 “(이순신은) 7년 동안 군중(軍中)에 있었으나, 몸이 고통스럽고 마음이 지쳐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在軍七年, 苦身困心, 未嘗近女色)”고 적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