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에
해 질 녘 온천천을 걷는다.
저녁밥을 먹고 하는 짓인데 시간을 조금 당긴 것은 순전히 기온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 오면 몸은 훨씬 더 빨리 반응해 옷가지를 선택하는데 난해해진다.
어제처럼 반소매를 입고 나서면 갑자기 추운 느낌이 있어 당황하고 그렇다고 오늘은 긴소매를 입고 나서야지 하고 챙겨입고 나가면 너무 더워 흘리는 땀방울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변덕은 날씨가 부린 것이 아니다.
몸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허둥대고 있음을 안다.
이처럼 늙으면 좋은 점이 많다고들 하는데 불편한 것도 많다.
물론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더 많게 보이겠지만 좋은 점은 잊히고 불편한 점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요즘의 현상인 것같다.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다.
이것은 가을이 왔다는 얘기다.
하늘은 푸르고 훨씬 높아 보인다.
흔히 말하는 좋은 계절이 왔다고 좋아하면서 뭐든지 하기 편한 계절이고 풍성한 계절임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 유난을 떨던 코로나19도 위력이 다했는지 하루가 다르게 감염자 숫자가 줄어들고 야외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지 않는다는 발표가 방송을 통해 전해지지만, 그동안 습관이 되어 그런지 나도 모르게 나서면 마스크부터 챙기고 다니다 숨쉬기 곤란해서 보면 어김없이 주둥아리를 막고 있는 것은 요즘 세상의 액세서리인 마스크가 차지하고 있다.
홱 벗어 재끼며 어휴 살만하네 하고선 마스크를 들고 달랑거리며 걷는다.
가끔은 그리운 사람이 생겨난다.
아니 잊고 살게 만들었던 환경이 원상태로 복귀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온종일 누구하고도 얘기하지 않고 지내는 일이 다반사이니 저녁에 누군가와 약속이 잡히면 당연히 설렐 수밖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늙은이에게는 보약 같은 일이다.
집돌이라서 집에서 혼자 이런저런 일로 소일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얘기는 할 수가 없다가 아내가 들어오면 괜히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다.
항상 기대와는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
밖에서 조잘대고 놀다가 온 아내는 그냥 쉬고 싶은 게 욕망이고 혼자 집돌이인 남편은 얘기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니 부딪치게 되어 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를 내고 싸움을 걸기에는 너무 늙어서 그냥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얼른 자신의 욕망을 거두워 들이고 재미없는 책을 붙잡고 읽거나 노래방 앱을 가져와 혼자서 가슴에 있는 안타까운 사연을 노래로 풀어내곤 한다.
살아보면 부부라고 하지만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들딸이 어릴 때는 이것저것 의견을 교환해야 하고 또 뜨거운 사랑도 필요하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나누어지지만 늙어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같은 관심거리가 현저히 줄어들어 그냥 지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짐을 알 수 있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 중에 병원에 맞고 온 남자의 사연을 보면 가끔은 이해가 가서 혼자서 웃을 때가 있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고 맞았다는 얘기는 웃픈 얘기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싫어지는 나이인지 모를 일이다.
되도록 아내의 바깥에서의 일들을 묻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굳이 알아야 할 얘기도 없지만, 흔히 말해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뻔한 일들만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할 상대가 없어 심심했으니 혹시 대답이나 잘 할까 하는 기대 속에서 묻으면 언제나 귀찮은 표정일 뿐 젊은 날 연인의 향기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자연히 궁금해하지도 않게 되고 대화를 할 꺼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낮엔 암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인을 만났다.
얼굴은 대하는 순간 많이 상했다는 느낌이 확 들어올 정도로 수척하다.
아무렇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에 웃음을 짓지만, 그동안 병마와의 투쟁이 힘이 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측은한 생각이 든다.
늙으면 병이 나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 같다.
늙고 아파야 죽으니까 그 관문은 너 나 할 것 없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열심히 살고 또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겠지만 주위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암과 같은 못 쓸 병이 든 대부분 사람은 성격이 꼬장꼬장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 태반임을 알 수 있다.
굳이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떠들 필요도 없이 주위 사람들을 보면 정말 스트레스받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스트레스는 욕망이나 욕심 때문에 생긴다는 생각이다.
게임을 하면 꼭 이기려는 욕심 때문에 라인 시비를 하는 사람도 있고 보면 굳이 꼭 이겨야 이유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인.아웃 때문에 열을 내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을 보면 의아한 느낌이 있다.
운동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게 늙은이의 목적인데 굳이 이기려고 용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줄 몰랐는데 젊은 날엔 대단한 이력이 존재함을 늙어 되돌아보면서 알고 참 열정적으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간혹한다.
하지만 늙어가면서 이해 안 되고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면서 한없이 여유로워지고 느긋해짐에 만족하면서 산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는 마음속에 존재했던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은 순간부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늙어가는 의미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간혹 궁금해지곤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안온하며 느긋하고 바쁨이 없으며 뭔가 이루고 싶은 욕심이 사라졌음이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에 대한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텔레비전을 보드라도 그냥 동물들의 이야기나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평온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는 게 전부이다.
우리가 늙어가면서 알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굳이 욕심을 내면서 다투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적절할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툼으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그냥 싫어졌다는 얘기다.
굳이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사는 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한 사흘쯤 몸져누웠다고 떠나고 싶은 욕심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늙은이의 충분한 바람으로 존재하길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
물론 어떤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난 신을 믿지 않으며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죄짓지 아니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니 그 기도라는 것도 간절한 바람일 뿐이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한 얘기를 되돌려 하면 아내가 저녁녘에 친구로부터 한잔하자는 전화를 받고 신난다.
전화 온 친구는 나도 잘 알고 가끔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관계여서 대부분은 같이 모이지만 전화를 받은 아내의 모습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같이 가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져서 “나도 가도 돼?” 하고 물었더니 예측은 적중하여 혼자 갈 거란다.
예전 같으면 몹시 기분이 언짢았을 테지만 그냥 수긍하고 다녀오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같이 가서 서로 불편한 일이라면 굳이 스트레스받아가며 갈 필요가 없을 듯하고 내가 좋아하는 집돌이 본연의 취미에 취하면 될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고 말았다.
모임 장소에 간 아내가 왜 안 오느냐며 의례적인 전화를 했지만, 안가겠다고 거절하고 편안히 소파에서 책을 읽으니 잘 안 갔다며 자신을 칭찬하고 있음에 놀랐다.
모든 것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항상 공존한다.
그러니 굳이 어두운 면을 바라보면서 스트레스를 창조할 게 아니라 밝은 면을 보면서 수긍하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편하게 즐기는 방법인지를 발견한 것은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터득한 지혜에 해당한다.
요즘 아내는 여행가면서도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왜냐고 물었더니 자기 맘대로 통보하는 관계로 변했다며 해맑게 웃는다.
아닌데 하고 따져본들 별로 변할 게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니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수긍하다 보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나도 가끔 친구들과 모임을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여행지에서 자고 올 때가 있듯이 아내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늙으면서 알아가는 지혜는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만큼 많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이고 바른 생각이라고 믿었던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 껍질을 벗고 덩그러니 생각의 무덤으로 누었으니 젊은 시절의 호기가 어땠는지 스스로 어리석음에 후회가 된다.
가을밤에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빛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잘못 간직한 잘못된 생각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아 자라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더운 바람 맛은 가슴속을 답답하게 하지만 서늘한 가을바람은 늘 싱그럽다는 느낌이 있어 좋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굳이 이름 짓지 않아도 책을 읽기에도 좋은 온도인지라 늦게 재미든 책 읽기에 가을은 한층 더 풍요로움을 선사하고 밖에서 친구와 한잔을 걸친 아내의 술 내음 섞인 숨소리가 가을밤을 싱그럽게 만드는 오늘이다.
가을밤에는 머릿속 수많은 생각을 비워두고 무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서 좋다.
있는 그대로의 형상에 생각을 담지 않고 바라보면 왜 그것이 그 자리에 존재해야 하는지가 상념처럼 떠오르듯이 불필요한 생각들을 거두고 멍해지는 멍때리기에도 적합한 가을밤인 듯하다.
오늘 하루 만났던 사람들의 순박한 소망들이 이루어지고 산야에서 익어가는 풍성한 곡식과 과일의 향기를 음미하는 기분 좋은 하루하루라 즐겁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보면 내 속엔 많은 생각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텅 비어 그냥 나는 마술의 지팡이를 탄 듯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