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이의 엽서편지
사노라면(1)
-쇼난편지 230호(2023년 12월)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
예수는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하나의 말씀으로 산다고 기롣괴어 있다."
(마태 4:4, 구어역)
나는 1960년 5월 노보리토 학료(기숙사)에 들어가 2년 후인 1962년 3월에 나왔다. 취직 때문이었는데, 학교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기초를 배웠다는 행복한 은혜를 맛보았다. 학당식으로 사는 윤리를 얻었다는 게 아니다. 36명의 학교도 다른 학우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세간의 학생들은 철저히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고 생활해나가는 '1인생활'을 원하던 때였지만, 우리는 1인실에 지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생활을 한 것이다. 게다가 枡形산록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신을 갈고닦는 기회를 얻었던 참 소중한 시기였다.
학료가 설립된 지 3년째였던 그때부터 70년대까지는 전후 가장 격렬한 대학내 투쟁이 있었던 시기였다. 우리 노보리토 학료에도 그 바람이 불어왔다. 당시는 岸內 내각이 미일안전보장 조약을 개정한 新안보조약 채택을 강행하여, 국회도 여론도 폭발하여 젊은 층과 대학생이 중심이 되어 헌법을 위반한 新군사동맹이라고 반대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학료에 들어가던 해의 5월말부터 2주간 교육실습이 있었는데, 이를 마치고 대학에 돌아갔더니, 수업은 전면 중지되었고 전체 학생들의 항의집회가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단상에 올라가 발언하기도 했었다.
그후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국회를 향하여, 의사당 앞 광장에서 '메이지유신'의 깃발을 든 우익의 무차별 폭력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시위에 참가했던 여학생 樺美智子 씨가 정문에 끼어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늦은 밤 학료에 돌아오니, 전체가 캄캄한데 사토미(里見) 료장이 홀로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료생 3명이 체포되었는데(3일후 석방), 그 중 한사람이 퇴료(退竂) 후에 소금정(小金井) 부근에서 철도자살을 하고 말았다.
기숙사 수료식에서 니시무라 히데오(西村 秀夫) 씨는 스승 야나이하라 선생의 '졸업생을 보내다'라는 글을 배포하며, "꾀부리며 헤매지 말고, 정직하게 걸으라."고 당부하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