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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신앙을 가지라(요12:20-27)-2020.1.26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죽어야 산다고 말합니다. 낮은 자가 높아진다, 약할 때 강하다, 주라 채우리라,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말합니다. 모두 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도 역설적인 진리가 나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밀알은 밀의 씨앗, 밀의 열매, 밀의 종자라는 뜻입니다. 밀알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명의 신비와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비록 작고 볼품없지만 그 속에는 밀의 뿌리와 줄기와 잎이 다 축소되어 생명이 공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을 손바닥에 놓고 바라만 본다면 그러한 신비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 씨앗이 차가운 땅속에 들어가 흙속에 묻히고 썩어야 신비가 밝혀집니다. 밀알 비유는 농경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비유입니다. 밀알의 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명의 신비가 들어 있고, 믿음의 신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비밀과 흡사합니다. 사과속의 씨앗은 우리가 셀 수 있으나, 씨앗 속에 사과를 셀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밀알에 죽음이 있듯이 십자가에도 죽음이 있고,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십자가도 죽음을 통해 부활의 생명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밀알정신은 기독교 정신과 흡사하고, 밀알의 원리가 십자가의 원리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밀알신앙인 셈입니다. 혹시 소금과 양초와 밀알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소금이 짠맛을 내려면 반드시 자신의 형체를 죽이고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짠맛을 냅니다. 양초도 불을 밝히려면 자신을 태우고 녹아야 합니다. 밀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땅속에 들어가서 자기 형체를 죽여야 합니다. 썩어야 껍질이 벗겨지고 싹이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죽어야 산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죽어 많은 것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기의 형체를 상실하는 아픔을 통과해야 공력이 드러납니다. 자기희생과 죽음을 통해 생명의 결실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죽어야 삽니다. 만일 이 세 가지가 죽지 아니하면 별 볼일 없습니다. 자기 혼자 잘났다고 처음상태를 깨트리지 아니하고, 깨어지지 아니하며, 녹아지지 아니하고 해체되지 아니하면 절대 생명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1)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밀알 정신이 필요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은 소중하지만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아무 영향력이 없습니다. 죽지 아니하면 밀알 하나는 하나 이상의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으며, 존재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한 포기가 되고 한 그루가 됩니다. 그러면 한 포기에서, 한 그루에서 수많은 열매들이 풍성하게 열리고 재생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밀알 정신은 내가 죽고 많은 것을 살리는 생명부흥운동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번식의 원리로 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됩니다.
밀알 정신은 희생정신입니다. 이른바 순교정신입니다. 이 세상은 밀알 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사회나 국가, 직장이나 학교 등 어디서나 이 밀알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 밀알 정신만 있으면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 엄청난 결실을 보게 됩니다. 아라비안의 수수께끼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늙은 아버지가 자기 유산을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이라고는 집에서 길러온 낙타 18마리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중에서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한 마리의 낙타는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17마리를 가지고 상속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의 법에 의하면 장남은 2분의1, 차남은 3분의1, 3남은 9분의1로 나누어야 합니다. 걱정이 생겼습니다. 17마리를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학적으로는 어떤 비율로도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당신이 가장 아끼고 상속해주고 싶지 않았던 한 마리의 낙타를 내어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18마리가 됩니다.
큰 아들은 9마리, 둘째 아들은 6마리, 셋째 아들은 2마리입니다. 그러면 1마리가 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사랑하는 낙타를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버지가 끝까지 자기 몫의 낙타 한 마리를 내어놓지 않으면 이 문제는 풀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한 마리의 낙타를 내어놓을 때 분배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것도 얻을 수 있고, 모두가 다 행복해지는 원리입니다. 이 아라비안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자기 것을 포기하면 모든 것이 예상외로 쉽게 풀린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이나 자존심이나 고집을 포기하고 희생하면 너와나, 모두가 행복해지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밀알 정신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자기희생은 고사하고 남에게 손해만 끼치지 않아도 살만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폐를 버리지 않으면 절대 비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구석구석마다 이 밀알 정신이 필요합니다. 다들 자신들이 잘났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언제부터인지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다 적으로 간주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극단적인 진영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밀알 정신은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정신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희생과 헌신과 포기를 하려들지 않습니다. 내려놓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초신자들은 그런다 할지라도 믿음의 연륜이 있다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정신을 모릅니다. 자기는 죽을 생각이 전혀 없으니 당신이 죽어달라고 강요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썩어지는 밀알 정신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밀알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나 성도들에게 밀알 정신이 없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그러합니다. 다들 자기밖에 모릅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자기 입맛에 맞추려고 합니다. 교회가 자기에게 맞추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예전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희생이나 헌신, 봉사정신이 전혀 없습니다. 밀알정신도 없고, 밀알신앙도 없다는 말입니다. 밀알정신은 자기를 죽여 희생하는 정신이요, 밀알신앙은 오직 주님을 닮은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신앙입니다.
(2) 밀알 신앙은 예수 신앙입니다
본문 24절의 썩어지는 밀알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셨습니다. 본문은 유대인의 큰 명절 유월절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유대인은 당연히 1년에 3번은 올라오지만 헬라인 몇 사람이 예배하러 올라왔습니다(20절). 이방인이 예배하러 올라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열려 있음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빌립에게 예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21절). 그들이 왜 빌립에게 부탁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증을 많이 자아내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헬라인들은 철학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 전혀 생뚱맞은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까지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아직은 자기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제 자기 때가 임박함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사 구속을 성취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으심을 설명하는 내용이 한 알의 밀알 비유입니다(24절). 예수님의 생애가 밀알 같은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정신도 밀알의 정신과 흡사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미미하고 볼품없는 한 알의 밀알 같았습니다. 사실 그분에게서 세상적인 어떤 권위나 위용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연한 순 같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모습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과 같았던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모습도 닮았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목표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보십시오. 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일까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으면 죽을 수 없고, 죽지 않으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표면적인 이유는 죽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서 우리와 함께 살려하심입니다(살전5:10).
그래서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한 알의 밀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이 밀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마20:28). 대속물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왜냐면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단단한 껍질이 벗겨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 감추인 생명체가 싹을 틔웁니다. 싹은 자랍니다. 단단한 땅을 뚫고 연한 순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랍니다.
그런 다음에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들이 맺힙니다. 이것이 밀알의 생명이요, 밀알 운동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의 싹을 틔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드리는 자는 그분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아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요, 밀알의 신비입니다. 때문에 밀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신앙과 같은 것이지요.
(3) 이제 당신이 밀알이 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밀알 정신을 가장 먼저 사도들이 계승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피 흘리는 순교신앙이 됩니다. 시대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복음은 온 누리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그 밀알 신앙의 합법적인 계승자는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이 밀알 신앙의 계승자가 된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값지고 복된 일입니까? 이제 우리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나 혼자 그대로 있는 한 알의 밀알이 아니라, 내가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한 알의 밀알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제자가 되라, 밀알 같은 제자가 되라, 십자가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16장24~25절을 보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다시 말해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기를 죽이고 따라가면 됩니다. 이것이 제자정신이요, 제자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마땅히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하러 오셨는데 희생하려 들지 않는 것은 제자가 아닙니다. 희생 없는 제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고난 없는 영광이 있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밀알신앙을 계승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베드로는 로마에서, 안드레는 소아시아에서, 빌립은 헤에라블리스에서, 바돌로메는 아르메니아에서, 도마는 인도에서,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한 알의 밀알처럼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다’라고 말합니다. 종자가 밀알입니다.
한국교회 교회사를 보더라도 밀알처럼 썩어지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때문에 그분들의 순교의 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복음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장 먼저 밀알로 순교하신 분이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입니다. 그는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오다가 평양감사에 의해 셔먼호가 불이 붙게 되어 체포됩니다. 27세의 나이에 포박된 토마스 선교사는 복음의 사역을 채 이루기도 전에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박춘권이라는 사람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한국 땅에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뿌려진 것입니다. 당시 평양감사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피가 대동강 물을 적셨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참수시킨 박춘권이 나중에 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일군이 되었습니다. 당시 참수형을 받는 장소에서 구경하던 12살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 준 성경 3권을 주워가지고 와서 지방관리 박영식에게 전해줍니다.
박영식이라는 사람은 성경을 뜯어서 자기 방의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카가 자기 집에 놀러 와서 벽에 발라진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됩니다. 후에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의 조사가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으로 참여하여 성경번역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도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사무엘, 모페트 같은 분들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한 알의 밀알로 뿌려집니다. 그분들의 밀알정신, 밀알신앙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처럼 부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들의 밀알 신앙으로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찾아볼 수 없는 복음의 부흥기를 누리고 복음을 전 세계에 수출하는 선교한국으로 우뚝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믿음의 후손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복음의 터를 닦고 복음으로 세운 이 나라를 복음으로 잘 관리하고 복음의 강국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복음의 빚진 자가 되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한국으로 마지막 때에 마지막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우리를 제사장적 나라로 부르시어 지금까지 복음의 강력한 부흥을 경험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우리에게 위임하신 복음의 마지막 때 마지막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선교한국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나부터 밀알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밀알 신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밀알 되게 하소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 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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