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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잘된 영화 한편을 보았다. 추석 차례음식 준비를 끝낸 백작부인을 모시고 영화관을 찾았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말썽 많았던 '광해군'의 승정원일기 가운데에서 사라진 15일의 빈 공간(Fact)에 기다란 허구(Fiction)을 덧입힌, 소위 말하는 'Faction' 영화였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내쫒기고, 강화에서 교동, 그리고 제주로 유배를 떠나 마침내는 절해고도 탐라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에게는 묘호조차 없어 지금도 우리는 '광해군'으로 부른다.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광해'였기에 이제 다시 그의 이야기는 추석영화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던 임금이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은 폐위되어 제주섬으로 압송되어 유배를 살다가 죽음을 맞았다.
반도의 나라로 살아야 하는 지정학적 운명은 광해군의 시대나 지금의 사정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망해가는 明나라에 事大의 명분을 들고서 신진세력인 여진족의 後金을 적대시 하려는 사대세력과 현실적인 외교를 펼치려는 광해의 싸움은 지금의 국제정세인 한반도 역학관계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결코 짧지 않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당쟁만을 일삼는다며 폄훼한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조선의 역사는 다시 써야한다. 다행히 영화속의 궁의 모습이나 의상들은 칙칙하지 않고 조선왕조의 영화를 재현한 것 같아 새로웠다.
영화는 시대적 고민에 마냥 우리를 빠트리진 않는다. 시작부터 중간중간 영화를 보는 관객을 키득거리며 웃게 만들었다. 잘 만든 영화는 억지춘향으로 웃음을 짜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웃게만 놔두지도 않는다. 적당하게 '왕이란 이래야 된다!'라고 요구하고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건 있을 수 없다고들 한다. 이 영화는 '만약 광해가 이런 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은 누구나 반역을 두려워 했다. 유력한 가문의 신하들은 그 절대권력에 妃의 끈을 이으려고 부단히 음모와 술수를 부렸다. 반역과 궁중의 권력암투 속에서도 국사를 제대로 수행해야 했던 조선의 왕들은 超人이어야 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는 거의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끝 마무리에서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크게 우리를 웃기던가, 눈물이 새나게 하던가 아니면 가슴에 큰 못을 하나 박았으면 좋았으련만... 영화의 앞 부분에 비해서 라스트 신은 좀 억지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밋밋했다. 그렇지만 총평으로 보자면 오랫만에 잘 만든 영화 한편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 영화수준이 이만큼 되었다는 게 뿌듯했다.
광해군의 유배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내 고향 제주 섬사람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이귀 ·김자점 등이 대북파에 둘러싸여 실정을 되풀이하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를 옹립하는 인조반정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그의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뒤에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도에 이배되었고, 인조 15년(1637) 4월에 제주도로 다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에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염려하여 겨울옷을 광해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인조 19년(1641) 7월 7일에 제주읍성 내의 유배장소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옮겨 양주에 안장하였다. 광해군이 사망하자, 당시 제주목사 이시방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 광해군의 죽음을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후일 음력 7월 7일 제주에 내리는 비는 광해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주도민들이 흘리는 눈물이라 전해지기도 하였다. 어찌하여 제주사람들이 그토록 애통해 했는지는 글로 남긴 게 없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15년간 국왕의 자리에 있던 광해군묘는 작고 초라하고 무덤 바로 앞은 낭떠러지로 비탈이 가파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또 한 명의 광해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가던 왕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한다. 이에 허균은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발견한다. 왕과 똑같은 외모는 물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왕의 흉내도 완벽하게 내는 하선. 영문도 모른 채 궁에 끌려간 하선은 광해군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 가슴 조이며 왕의 대역을 하게 된다.
왕이 되어선 안 되는 남자, 조선의 왕이 되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허균은 광해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광해군을 대신하여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한다. 저잣거리의 한낱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천민 하선. 허균의 지시 하에 말투부터 걸음걸이, 국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들켜서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왕노릇을 시작한다. 하지만 예민하고 난폭했던 광해와는 달리 따뜻함과 인간미가 느껴지는 달라진 왕의 모습에 궁정이 조금씩 술렁이고, 점점 왕의 대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하선의 모습에 허균도 당황하기 시작하는데...
[제작노트]
[ 序文 ]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 - 光海 100卷 8年 2月 28日
시대의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 혹은 비운의 군주. 한 명의 왕, 역사가 기억하는 두 개의 얼굴인 광해군! 당대와 후대의 평가가 극단으로 나뉘는 조선의 15대 왕 ‘광해’...
도처에 깔린 암살과 역모의 위협은 그를 폭군으로 만들었으나 비사(祕史)에 따르면 왕으로 불렸던 15년 중, 어느 15일간 그는 전에 없던 성군이었다.
궁 내 가장 아랫사람들의 안위까지 두루 살피고 백성 스스로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현세에 개탄했으며 왕위를 지키기 보다, 민생을 염려하는 조선이 꿈꿔온 왕이었다.
하지만,
왕조실록 광해군 8년, 2월 28일, 광해군 일기에는 이러한 글귀가 남아있다.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
... 그리고 승정원일기에서 광해군 15일간의 행적은 영원히 사라졌다. 역사 속에 사라진 15일 간의 기록, <광해, 왕이 된 남자> Faction의 시작이다. 광해군 8년, 사라진 15일 간의 기록이 2012년 스크린에서 되살아난다.
조선 15대 왕으로 16년 간의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왕 ‘광해’. 하지만 최근 광해군이 행했던 실리외교의 대외정책과 대동법 등의 민생 안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며 더 이상 광해군은 비운의 폭군이 아닌 개혁 군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렇듯 당대와 현대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조선의 왕 광해를 다룬 최초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 “숨겨야 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는 한 줄의 글귀에서 시작된, 광해군 재위 시절 사라진 15일 간의 기록을 과감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팩션 사극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광해’를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게 된 천민 ‘하선’이 왕의 대역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실제 실록에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15일 간의 행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창조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양면성으로 대표되는 왕 광해를 조명하는 데 있어 그의 대리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는 참신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한다. 하늘이 내린 임금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 아무도 모르게 왕의 대역을 맡았던 천민이 있었다는 신선한 발상으로 기존 사극과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선사할 <광해, 왕이 된 남자>. 실제 역사와 상상력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를 통해 역사 뒤에 감춰진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담아낸 휴먼 팩션 드라마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012년 가을, 진한 웃음과 감동으로 관객들을 강렬하게 사로잡을 것이다.
왕이 되어선 안 되는 남자, 조선의 왕이 되다! 2012년 현세대가 바라는 왕! 웃음과 카타르시스의 결정체!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천민이 진정한 왕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와 예상치 못한 재미를 형성한다. 저잣거리에서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권력을 풍자한 만담을 일삼던 하선이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궁 안에서 왕의 대역을 연기하는 모습은 누구에게 들켜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설정이 더해져 아슬아슬한 재미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말투와 걸음걸이는 물론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사소한 일상부터 국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생전 처음 접하는 왕의 법도를 익혀가는 과정은 하선 특유의 인간미와 소탈함으로 의외의 웃음과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허균이 지시하는 대로 왕의 대역 역할에 충실하던 하선이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왕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자신의 안위와 왕권만을 염려하던 왕 광해와 달리 정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람과 백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는 잘 아는 하선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한다. 비록 은 20냥에 수락한 15일 간의 왕 노릇이지만 상식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그 어떤 왕보다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게 되는 천민 하선. 권력의 가장 하위에 있는 천민의 모습을 빌어 조선이 필요로 했던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그려낸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진정한 리더를 바라고 꿈꾸는 2012년의 현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것이다.
월드스타 이병헌, 조선의 왕이 되다! 이병헌의 첫 사극, 왕 vs 천민 완벽 빙의!
한류를 이끄는 중심이자 전세계적 월드스타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우 이병헌이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사극 연기에 도전, 1인 2역 연기를 선보인다. [올인] [아이리스]를 비롯해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등 로맨틱함과 거친 남성미, 매력적인 악역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이며 스타성과 연기력을 갖춘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병헌. 2009년 전세계적으로 3억 달러의 수익을 기록한 블록버스터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으로 성공적인 할리우드 진출 이후 <지.아이.조2>와 <레드2>에 연이어 캐스팅 되었을 뿐 아니라, 최근 미국 할리우드 맨즈 차이니즈 시어터에 아시아 배우 최초로 핸드 프린팅을 남기는 등 월드스타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처럼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의 대표 배우로 입지를 공고히 한 이병헌은 최초의 사극 작품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 광해군과 천민 하선을 오가는 극과 극의 모습을 선보인다. 광해는 왕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해하려는 무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판단력을 잃고 폭군이 되어버린 인물인 반면 하선은 저잣거리의 천민으로 타고난 넉살과 소탈함을 지닌 인물. 독단적이면서도 예민한 카리스마의 광해와 만담꾼 특유의 재치와 여유를 지닌 하선의 캐릭터는 이병헌의 섬세하고 탄탄한 연기력이 더해져 완연히 다른 존재감의 상반된 두 캐릭터로 완성될 수 있었다. 첫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부터 저잣거리 천민의 모습까지 강렬한 1인 2역의 변신을 선보인 이병헌은 할리우드 진출 이후 첫 한국 영화 복귀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대표할 최고의 스타 배우임을 입증할 것이다.
대한민국 명품 배우들의 완벽한 조우! 류승룡, 한효주, 장광, 김인권, 심은경, 김명곤! 2012년 韓 영화 흥행돌풍 이어갈 배우진 주목!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이름만 들어도 압도적인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작품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장광, 김인권, 심은경, 그리고 김명곤 등 최근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이끌어 온 대표 주자들부터 깊은 연륜의 연기파 배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색깔의 배우들이 함께 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이들의 완벽한 연기 호흡으로 기대를 고조시킨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전설의 카사노바로 분해 독보적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458만의 흥행을 일군 류승룡은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의 대역을 만드는 비밀스런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킹메이커 ‘허균’ 역을 맡았다. 실제 역사 속 인물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조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허균 캐릭터는 왕과 나라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충신의 모습 속 자유로운 사상과 혁신적 사고를 갖춘 현대적 인물이다. 류승룡은 신중하고 빈틈 없는 전략가이자 때론 나라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줄 아는 허균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로 완성해 내며 이병헌과 함께 극의 중심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끈다.
[동이], [찬란한 유산], <오직 그대만> 등을 통해 20대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한 한효주는 두 명의 왕이 사랑한 여자 ‘중전’으로 분해 당당한 위엄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흡인력으로 스크린을 메울 예정이다. <도가니>의 악랄한 교장으로 악역의 진수를 선보였던 장광은 ‘하선’의 정체를 알면서도 진심으로 그를 돕는 ‘조내관’ 역을 맡아 전작을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따뜻한 캐릭터로 변신을 선보이고, <해운대>의 천만 배우 김인권은 왕을 의심하는 호위무사 ‘도부장’으로 분해 극의 긴장감과 밀도를 더한다. 여기에 <써니>의 히로인 심은경이 광해군의 나인 ‘사월이’ 역을 맡아 특유의 순수한 매력과 폭발적인 연기력을, 12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배우 김명곤이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박충서’ 역으로 특별 출연하여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이렇듯 연기력은 물론 대중성과 흥행력을 겸비한 충무로 대표 배우들의 연기 호흡과 각기 다른 매력은 <광해, 왕이 된 남자> 최고의 관람 포인트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광해' 추창민 감독, "왕, 광대판에 세우니 통하더라"
영화 '마파도'와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추창민 감독. 여윤계 김수미 김을동 김형자 이순재 윤소정 송재호 등 노년 배우들의 앙상블을 극대화하며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흥행을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흥행 열풍인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추 감독에게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등 스타 배우들이 한데 모였고, 처음 시도하는 사극이기도 하다. 예산의 규모도 전작에 비해 훨씬 커졌다.
추 감독은 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래 전부터 사극을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며 "사극은 상상력을 펼치지 좋은 장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왕이란 사람을 광대판에 끌어들이는 이야기"라며 "수직적인 관계에 놓인 왕을 수평적인 마당에서 놀게 했을 때 오는 쾌감을 전해주고자 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마파도,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마찬가지로 광해 역시 배우들에 대한 호평이 줄을 잇고 있다. 이에 추 감독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원하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떼쓰고 부탁하는 것 뿐"이라며 웃었다.
이병헌 역시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감독님 고집이 정말 장난 아니다"며 "스스로 됐다 싶은데 감독님은 한 번만 더 하자고 하더라. 그리고 나서 또 진짜 마지막이라며 한 번 더를 요구하는 분"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런 추 감독의 집요함은 결과로 드러났다. 첫 사극 도전이자 1인 2역이었던 이병헌은 물론 허균 역의 류승룡, 조내관 역의 장광, 도부장 역의 김인권 등 출연 배우 모두 전작의 이미지를 뒤엎는 모습으로 영화에서 빛을 냈다.
추 감독은 이에 대해 "저만의 연출 방식 중 하나"라면서 "그대를 사랑합니다 할 때 김수미 선생님이 치매 노인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말이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기존 이미지를 쓰는 것보다 그걸 바꿨을 때 호기심을 갖고 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출연 배우 대부분이 감독이 생각했던 섭외 1순위였다. 배우들 역시 단번에 수락했다. 추 감독은 "정말 원했던 배우들과 하게 돼 감사할 뿐"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러면서 캐스팅에 얽힌 일화도 상세히 들려줬다.
이병헌 캐스팅을 위해 제작사 대표와 추 감독이 직접 미국을 향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하지만 정작 만나서는 별말을 하지 않아 이병헌이 작품을 하지 않을 뻔했다.
추 감독에게 이병헌의 속내를 전하자 "이상하게 할 말이 없더라. 헤어지고 나서 사실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다음날 하겠다고 전화가 왔을 때 의아하기도 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병헌씨한테 진짜 놀랐던 건 투정은 부리지만 연기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김인권은 본인 스스로도 도부장 캐스팅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 추 감독은 "김인원이 어느날 '왜 캐스팅 하셨어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조폭 두목들 보면 키도 작고, 빵빵하지 않냐. 그런 사람이 무서운거야'라고 이야기해줬다"며 "진지한 역할만 잘해주면 웃기는 역할은 원래 잘하니까 '1+1' 느낌이 들 것 같았다"고 밝혔다.
류승룡의 경우에는 비중이 크지 않아 제안을 하면서도 주저했던 배우다. 추 감독은 "승룡씨가 '자칫 하선이 서포트 역할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절대 그럴 일 없다. 이 영화를 투톱 영화로 보이게 하고 싶은데 당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과정을 전했다. 이어 "솔직히 확신은 없었는데 배우를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며 "근데 시나리오 보다 훨씬 잘해줬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도가니'의 악랄한 교장에서 따뜻하고 푸근한 조내관으로 돌아온 장광에 대해서는 "조내관 역은 제일 늦게 결정했는데 사실 장광씨가 연기를 오래 했던 분이 아니라 확신이 없었다"며 "직접 만나보니 하얀 도화지 같은 분이더라. 그래서 안심했다"고 기억했다.
광해의 흥행 돌풍의 또 다른 요인은 코믹함이다.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정작 추 감독은 스스로를 '재미 없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추 감독은 "정통 코미디라면 아마 못했을 것"이라며 "코미디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코믹한 장면 찍을 때 긴장을 더 많이 한다"고 털어놨다. 이어 "웃기는 장면할 때 일부러 웃지 않으려 한다. 다 같이 웃으면 배우들이 오버하는 것 같더라"고 나름의 기술을 전했다.
코믹함 못지 않게 현실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메시지도 훌륭히 전달한다. 얼핏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에 추 감독은 "그렇게 느껴질거란 생각은 하긴 했다"면서도 "초고는 더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저는 오히려 그걸 희석시켰다"고 밝혔다.
"정치적으로 누군가를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이런 방식을 취하면 안 될 것같다. 굳이 메시지를 던진다면 인본주의적 덕목이 필요하다는 정도다. 어쨌든 세상은 강자가 약자한테 잘해야 하는 것같다.“
[노컷뉴스 영화팀 황성운 기자] 2012년 9월 20일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 광해군의 분조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계속되는 이순신의 승전보 소식과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군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우리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이 땅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처럼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열거되는데, 여기에 하나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광해군의 분조(分朝) 활동이 아닌가 한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을 나누다’ 또는 ‘조정의 분소’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와 평양 등지에 상주하였던 선조(宣祖)가 있던 원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발발 몇 해 전 정철(鄭澈) 등이 건저의(健儲議,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제기, 정치적 파란이 있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결국 부리나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분조의 책임자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영창대군의 탄생과 위협받는 세자 지위
분조의 활동 등으로 임진왜란 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내심 세자의 자리가 굳건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하여, 선조가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더구나 평소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였기에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유영경 같은 이는 세종 때 고사를 원용해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기도 할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간혹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루는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족자에 대나무를 그렸다. 하나는 바위 위에 왕대(王竹)가 늙어 바람과 서리를 겪어 꺾이고 마르는 모습이요, 또 하나는 악죽(悪竹)이 왕대 곁에서부터 뻗어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데, 긴마디가 한 치를 넘어, 너럭바위를 넓게 점거한 채 꾸불꾸불 서리서리 엉킨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 돌 위에 왕죽의 원줄기로부터 뽑혀 나와 어린 가지와 연한 잎이 비록 아직 장성하지는 못했으나, 싱싱하고 운치 있는 바른 죽순이 하늘을 찌르고 달을 희롱할 기상이 있었다.
며칠 뒤 선조는 이항복ㆍ이덕형ㆍ유영경ㆍ이홍로 등을 인견하고는 내시에게 족자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며 이르기를, “내가 병중에 우연히 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어떠한가?”라며 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기함을 칭송할 뿐이었으나 유영경이나 이홍로 등은 선조의 의중을 간파하였으니, 이홍로 같은 인물은, “전하의 오늘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죽은 선조를, 악죽은 광해군을,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한 것인데, 이홍로나 유영경은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었다. 심지어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하는 것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의 손을 들어 주어 큰 변화없이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으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도처에 산재하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안 되어서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연릉부원군 이호민과 오억령 등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국과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비의 승하나 책봉 등이 있을 경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를 통보하고 그에 합당한 조서 등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에게 장자가 되는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호민 등이 이런 저런 이유를 말했으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급기야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결국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순탄치 않은 왕좌였다.
임해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여 광해군의 왕위가 바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배다른 형제로 적자인 영창대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에게 엉뚱한 방향에서 호기가 다가왔다. 1613년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허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박응서 등이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조령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흔히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한다. 체포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된 뒤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용의 꼬리? 뱀의 머리? 실리외교를 선택하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허준을 지원해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동안 조선의 사대국가로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 여진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용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하였다.
마침 161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앞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서둘러서 파병해야만 하였다. 당시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의 요청에 신속하게 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시세를 관망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파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파병 군사의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뒤 치러진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일행은 이후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명요동도지휘사차’ - 명의 지원을 위해 파견된 강홍립 등이 관망의 태도 하에 진군하지 않음을 책하면서 합력 진군할 것을 종용한 명나라 장군의 기록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묘호조차 갖지 못한 왕
▲광해군 즉위년 2월 1일자의 광해군일기. 광해군일기는 다른 왕대의 실록과는 달리 중초본과 정초본이 남아 있다. 하이라이트 표시된 부분의 기사는 정초본에는 없는 기사이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 사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묘호의 제정은 또한 제정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이다. 흔히 묘호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게 마련이다. 태조니 태종이니 세종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재위했음에도 그는 왕자, 그것도 적장자가 아닌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혹자는 그가 후궁 소생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후대이지만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는 종과 조가 붙여지지 않았는가.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며 묘호조차 갖지 못하다가 사후 250여년이 지난 숙종 대 묘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어느 시기에도 그의 묘호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이유는 폐륜적 행위와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지배층인 사림들은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륜을 중시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국관계에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취한 모습은 이것과 사뭇 달랐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묘호를 갖지 못한 것은 시대의 이상과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결과가 아닐까?
이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준 명나라를 돕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상적으로 본다면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포용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글 이근호(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그림 장선환(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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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력은 취하기도 어렵지만 물려주기는 더 어렵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創業도 어렵지만 守成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도 같은 맥락.
재산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요즘 재벌가의 꼴사나운 재산분규를 보고 있노라면...
많은 돈과 절대권력은 이렇듯이...
처절한 싸움이 있게 마련인가 보네...ㅎㅎ
추천덕에 가족동반 간만에 국산영화 한편을 돈 다주고 감상하였습니다. 주로 다운로드 이용했는데 볼만하더군요.아직 좀 억지 스러운 몇 장면이 거슬리긴해도,이병헌이가 연기는 잘합디다.
우리나라 영화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이 들더라고...^^
좋은 영화 명 해설에 고맙습니다,다시한번 기회되면 한번 더 보겠습니다.어쨌든 세상은 강자가 약자한데 잘해야 하는 것같다.명심 하십시다,!!!
영화 보았구나!ㅎㅎ
암튼... 매화통에 똥싸는 이야기 하며...
재미있게 보았는지?
피에타 보려 갔다 시간 안맞아 첫 상영하는 날 보았져.가짜의 행동는 어딘가 어설펴? 남들에게 보여주기위해 살기 보다 나의 모습 그대로 살아야 어설프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