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1908년 경남 통영 출생. 부산남여상(1966년) 교장 역임. 예술원회원 피선. 「청마시집」간행. 1967년 부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유치환 시인 ( 시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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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합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lily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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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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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幸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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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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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春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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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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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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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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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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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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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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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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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어느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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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들어 보라.
여기 진실은 고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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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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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 일장 ( 一章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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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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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갔느냐 사랑하는 것들이여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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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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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
1908년 경남 통영 출생. 부산남여상(1966년) 교장 역임. 예술원회원 피선. 「청마시집」간행. 1967년 부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유치환 시인 ( 시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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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합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l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