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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A보살님께서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B대학의 C교수님이 어떤 경을 강의하시고 D대학교의 E선생님은 어떤 것을 하고 했는데
교수님은 왜 강의 안 해주세요?"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원래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을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이는 제가 임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할 때 지표로 삼는 것이 크게 세가지라는 말입니다.
첫째는 교육이며, 둘째는 연구고, 셋째는 봉사입니다.
A보살님께서 문제로 삼은 '강의'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행하는 교육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로서 행하는 강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 따라서, 또 교수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이 교수의 의무사항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에 가장 큰 비중을 둘 것인가? 그 비율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 달라집니다.
대학은 크게 교육중심대학이 있고, 연구중심대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개 교육중심대학이 많은 것이 아직까지 실정입니다. 물론 우리 학교도 사실상은 교육중심대학입니다. 그런데 연구중심대학과 같은 역할을 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근래의 추세입니다. 대학에 대한 언론이나 정부기관의 평가같은 것이 많이 행해지고, 거기서는 연구가 중요한 지표로 배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실 대학교수라고 하는 직업이, 방학도 있고 참 좋다 싶기도 하지만 --- 상대적으로 좋은 직업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닌 것같습니다.
이 중에 외부인, 즉 보살님이나 불자님들을 향해서 강의를 할 수 있는 봉사의 비중이나 순위는 사실상 마지막에 놓여있습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비중도 가장 적습니다. 그나마 일본불교사독서회나 일본불교사연구소를 하면서, 학교로부터 받을 수 있는 봉사점수는 얼마쯤 될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5점입니다. 그런데 1년에 제가 기록하는 업적이 작년에도 근 900점 가까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900점 중에서 5점입니다.
그러니까 학교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면, 겨우 5점 밖에 못 받을 일을 그렇게 하느라고 정력낭비 시간낭비 돈낭비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에 논문을 쓴다면, 점수가 팍팍 올라갈 터인데 ---. 보상도 더 많이 받고 ---. 누이좋고 매부좋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학교의 꿈과 저의 꿈, 그리고 부처님의 꿈이 늘 같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만약 학교의 꿈과 부처님의 꿈이 같다면, 고민은 없습니다. 학교의 꿈을 위해서 살면 되지요. 그런데 다르다면, 학교의 꿈을 우선해야 할까요? 부처님의 꿈을 우선해야 할까요? 5점 짜리 밖에 안 되지만, 일본불교사독서회 같은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은 부처님의 꿈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2
이야기가 우회했습니다만, 다시 A보살님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사실, 작년 같은 경우나 현재는 제가 봉사로서 외부인을 모시고서 강의를 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A보살님도 아십니다. 저 역시도 과거에는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언젠가, 벌써 여러 해 전에 겨울방학 때 명진관(석조관)의 구석진 작은 방에서 "나무아미타불" 강의를 10번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글 읽으시는 분 중에서, 그때 강의를 들으신 분이 계시리라 봅니다. 물론 무료로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는 안 할 것입니다. 안 한다는 것은, 제가 '주최(=권진)'가 되어서 오십시오. 제가 무엇무엇에 대해서 강의합니다. 와서 들으세요. 이런 이야기를 이제는 안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학생들 외에, 학교 밖에서 하는 강의를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연대는대로,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어떤 법회나 어떤 절의 스님께서 수강생(=청중)들을 다 모아놓고, 제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을 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제가 가서 강의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숟가락만 들고 가면 됩니다. 용수보살님 말씀을 빈다면, 정히 이행도(易行道)입니다. 배를 타고 가는 것만큼 쉬운 일입니다. .
우리는 대개 이런 불교를 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까요? 강의를 듣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리 예습을 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듣고 나서 집에 와서 복습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공부가 될까요? 공부가 된다는 말은, 어디가서 제3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계의 불자들은 이렇게 듣는 것은 대단히 즐깁니다. 많이 들으러 다닙니다. 제게 질문을 해주신 A보살님 역시 그렇게 하다보니, 다른 대학의 교수님들은 그렇게 강의를 해주던데 왜 저는 안 해주느냐는 질문을 하시게 된 것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불교의 모습을 '강의불교'라고 합니다.
물론 강의를 많이 하고 많이 듣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것이 좋으려면 듣고 나서 제3자에게 나누어주는 회향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회향을 하려면 얼마나 들어야 할까요? 한번만 듣고도 회향할 수 있고, 수천 수만 번을 듣고도 회향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회향은 능력이나 앎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회향을 위해서 들으면 한번을 들어도 회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향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원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회향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발원이 없다면, 아무리 많이 들어도 회향이 안 됩니다. 발원을 세우는 것은 편한 길 이행도를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
독서회 불교(=권진불교)는 이런 강의불교와 다른 것입니다. 강의불교는 우리에게 강의해 주시는 분과 우리만 있으면 됩니다. 이 양자의 왕복상호관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독서회 불교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강의불교에서는 듣는 자는 수동이고 말하는 자는 능동입니다. 능동자인 설법자가 위주가 되고, 듣는 자는 그냥 그 이야기를 수용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독서회불교에서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말하는 자입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권진을 말하는 자로 고정시키고, 다른 회원들은 듣는 자로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독서회는 권진의 '강의불교'가 됩니다. 무늬만 독서회불교이지, 강의불교로 되고 맙니다.
권진과 회원 모두 능동적으로 말합니다. 법에 대하여, 부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침묵합니다.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은 침묵합니다. 많은 보살님들이 말합니다. 승만경에서는 승만이 말하고, 부처님은 침묵합니다. 나중에 그래 잘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독서회 불교는 독서회 나오는 모든 분들을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말하도록 시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말하자 그렇게 말합니다. 독서회 불교를 하기 어려운 점이 여기 있습니다.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서회 권진으로 활동하는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독서회하자, 같이 모여서 공부하자라고 하면 다 싫어합니다. 머리 아프다 말합니다. 그냥 법회에 가면 스님이나 법사님이나 누구 이야기 들을 수 있는데, 그것으로 좋은데 --- 뭐하러 그렇게 공부할 것인가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독서회 불교는 난행도(難行道)입니다. 육지를 걸어서 가는 것 만큼 어렵습니다. 어떤 하나의 독서회가 성공하는 것은, 독서회가 회향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책이 끝났다고, 우리가 방편적으로 세운 50회를 넘었다고 회향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속제(俗諦)일 뿐입니다. 진제(眞諦)로서는, 독서회의 회향은 독서회의 회원들이 권진이 되어서 다시 다른 회원을 모아서 독서회를 성립시킬 때입니다. 권진이 권진을 낳고, 독서회가 독서회를 낳을 때뿐입니다.
앞에서 강의불교는 설하는 자와 듣는 자의 상호관계이며, 수직관계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1회로 끝나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독서회불교는 말하는 자와 말하는 자의 수평관계이고, 제3의 말하는 자로 향해 나아가는 회향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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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A보살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난행도를 가는 사람에게, 더욱 힘든 고행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이행도로 가는 사람들을 모범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이행도가 필요합니다. 강의불교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강의불교만 있고 독서회불교가 없는 한국불교는 미래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종래에는 강의불교만 있었고, 독서회불교는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없었던 독서회불교를 덧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강의불교에서만 편안한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칭찬 못 받는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부처님께 우리를 위해서 복을 주시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부처님의 명령을 듣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지요? 부처님 입장이라면, 당신의 뜻을 받드는 제자들이 더 이쁘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저는 강의불교에만 빠져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미워(?) 합니다. 공부만 하는 사람들, 권진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은 이 강의에 내일은 저 강의에 ---. 저는 그 시간 중에 몇 분의 1이라도 내어서, 같이 말해 볼 독서회원을 모으러 다니는 권진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는 좋으나 남에게는 무관심한 소승이 아니겠는지요? 진실로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강의불교에서 배우듯이 그렇게 위대하고 진실하다는 점을 안다면, 어찌 그것을 우리 이웃들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요?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나 혼자 좋고 편안하고, 남들에게 이 좋고 편안한 세계를 알려주지 못한다는 것인지요?
이것이 바로 독서회불교입니다. 우리는 다만 지금 일본불교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적기에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일본불교 공부를 권진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첫댓글 "일본불교사공부방" 13호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무거운 글은 인터뷰라고 저는 봅니다. 다른 글은 책상 위에서 나온 글이거나, 책에서 나온 글이지만, 이 글은 3년 이상의 실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들은 참으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는 "권진불교론"을 쓰려고 합니다. 그때에는 환희행 보살님의 인터뷰나 지금 이러한 글을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권진불교론" 역시 책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실천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을 제가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잊기 전에 정리한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