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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이황 종택
이장희 추천 0 조회 76 14.09.02 2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퇴계 종택...묘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조선 시대의 詩人 이광려가 두향의 무덤을 찾아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읊은 시이다.

 

퇴계의 후손들과 유학자들은 퇴계의 제례를 지내고나면 충북 단양의 강선대에 있는 두향의 묘를 참배한다. 이 처럼 퇴계학통의 후학들과 향토 사학자들의 추모를 받는 두향은 단양 기생이었다.

 

퇴계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퇴계를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말처럼 조선성리학의 완성자인 퇴계 이황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조선을 엄격한 유교국가로 이끈 학자라고 알고 잇으나, 밤퇴계와 낮 퇴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정감이 있는 인물이었다. 과부가 된 며느리를 개가시켜 줄 정도로 도량이 넓었다. 즉 퇴계는 인간이 本性을 존중했으며, 그의 이기이원론의 근본적 사상도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1548년 단양군수로 부임한지 한달만에 둘째아들 채를 잃어 비탄에 잠겨 있다. 당시 48살이었던 퇴계는 그때 이미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첫째부인 허씨를 산후풍으로 잃고난 뒤, 둘째부인 권씨마져 두 해전에 사별한 상태이었다. 권씨는 실성하였었다.

 

그즈음 퇴계의 日記에 두향이 언급되어잇다. 퇴계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가야금과 노래에 능하였고, 매화를 무척 좋아하였던 관기(官妓) 두향을 데리고 옥순봉을 유람하곤 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가 아내와 死別한 지 2년, 아들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아 기생 두향을 가까이 했기에 낮 퇴계, 밤 퇴계라는 말이 생겨 난 것이다. 이 때 퇴계의 나이 48세, 두향은 18세이었다.

 

그러나 퇴계의 단양생활은 열달만에 끝나고 만다. 고을 수령의 임기가 보통 5년이었지만, 퇴계의 넷째 兄 이해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그 이유이었다.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 하여, 퇴계는 자원하여 고개너머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게 큰 충격이었다.  두향은 떠나는 퇴계에게 수석 2개와 매화 화분을 건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퇴계가 도산서원에 머물때, 두향은 난초를 보내 왔고, 퇴계는 자기가 마시는 우물물을 두향에게 보냈다. 두향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매일 아침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로 사용하였다.

 

어느날 그 정화수가 피빛으로 변하는것을 보고 두향이는 퇴계가 죽은 것을 짐작하고 4일을 걸어 도산서원으로 찾아 간다. 그리고 돌아 와 남한강에 몸을 던져 퇴계의 뒤를 따른다. 서로 헤어진지 21년만에 그들은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두향의 묘는 지금 충주댐으로 생긴 충주호 곁 강선대에 있다. 유람선을 타면 안내방송을 한다. 수몰될 뻔하였으나 이장하였다.

 

퇴계의 유언은 매화에 물을 주어라....이었다. 죽기전에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매화에 보이기 싫어 매화를 다른 방으로 옮겨 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들의 사랑은..................

 

 

 

 

 

 

 

 

 

 

 

 

   

 

  

이퇴계의 묘

 

 

 

 이황의 생애를 출생...초년기...중년기...노년기 그리고 사망으로 나누어 정리해 볼 가치가 있다.

 

(出生)... 퇴계의 이름은 이황(李滉). 1501년 출생하여 1570년에 사망한다.  이황의 아버지 이식은 진사벼슬이었고, 어머니는 두분이었다. 의령 김씨는 2남1녀를 낳고 죽었으며, 재취로 들어 온 춘천 박씨는 5형제를 낳았는데..이황은 그 막내이었다.

 

(初年期).... 이황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에 종사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채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만에  40세를 일기로 죽는다. 가족의 생계를 홀어머니가 책임지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며 자식을 엄하게 키웠다고 한다.  이황은 6살에 이웃 노인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 12살때 병으로 집에 돌아와 있던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숙부가 돌아 가시자 이황은 독학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승없이 혼자서 공부하려니 한자 한자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인의 말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 들어 학문을 재해석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20세에 용수사에 들어 가, 밤낮을 주역(周易)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 지는 병에 시달리게 된다.

 

21살에 허씨부인과 결혼하고 성균관 유학을 마치고 34살에 문과에 합격한다.

 

 

 

 

 

(中年期) ... 34세에 대과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며, 43세까지 순탄한 관료생활을 보낸다. 이 때에도 학문에 정진하면서 43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 갈 뜻을 품는다.  이후 52세까지 귀향고 왕의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에서 벗어나 일종의 야인생활을 준비하는 과도기를 보낸다.

 

그가 45세에 을묘사화를 거치며 귀향의 뜻을 더욱 굳히게 된다.  그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 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退溪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으나 어쩔 수 없어 그는 외직(外職)을 원한다.  단양군수 (9개월), 풍기군수 (14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다.  특히 풍기군수로 있을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운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한다.

 

그가 물러나기로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세상 바로 잡는 일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것에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였기 ?문이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연속되어..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여는데

46세에 그마져 잃는다. 48세에는 둘째 아들이 죽고 그리고 형도 죽는다.

 

 

 

 

 

(老年期)...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벼슬을 권하였으나 그는 70여회나 거절한다,.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더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부분의 저술을 한다. 그리고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한다.

 

(死亡)... 선비의 품격은 생에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난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초에 병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등 제자 몇 사람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

 

12월3일 자제들에게 다른사람에게서 빌려 온 서적들을 돌려 주게 하였으며, 12월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의 전면에다 "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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