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그의 작품을 강원도 산속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그의 작품은 백남준아트센터, 서울시립미술관, 소마미술관 등 주로 수도권 미술관과 기업에 전시되어 있는데, 강원도 원주시 산속의 한 사립미술관도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바로 '뮤지엄 산'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왼쪽/오른쪽]패랭이꽃이 만발한 플라워가든 / 자작나무 오솔길
패랭이꽃 만발한 플라워가든과 자작나무 오솔길
골프장, 스키장, 콘도미니엄, 수영장 등 레저시설을 고루 갖춘 원주 오크밸리의 골프빌리지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뮤지엄 산이 나타난다. '산(SAN)'은 '공간과 자연(Space & Nature)'에서 따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미술관과 주변을 감싼 정원들이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관람객들을 반겨준다.
웰컴센터와 뮤지엄 숍을 거친 동선은 밖으로 이어진다. 성벽을 연상시키는 돌담을 지나자마자 플라워가든에 만발한 붉은 패랭이꽃이 옴짝달싹 못하게 감동을 선사한다. 평창의 한국자생식물원이나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보았던 군락의 아름다움을 여기서 다시 느껴볼 수 있다니. 파란 하늘, 푸른 잔디, 붉은 패랭이꽃(꽃말은 순수한 사랑)이 어우러진, 자연이 차려낸 잔칫상. 그래서 사람들은 말했나 보다. 뮤지엄 산은 그냥 건축미만 뛰어난 게 아니라 정원도 아름다운 미술관이라고.
이쯤에서 한시의 한 구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연상된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다. 《고사성어대사전》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따로 세상이 있지만 인간 세상은 아니다.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거나 그런 세계가 있을 때 쓰는 표현이다." 꽃밭 속에 홀로 우뚝 선 거대 설치작품을 보고 나서야 관람객들은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강철 빔으로 만든 이 작품은 높이 10m, 가로와 세로 각 15m가 넘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움직이면서 예술적 감성을 깨운다.
이어서 자작나무 오솔길을 지난다. 자작나무 하얀 수피를 보니 인제군 자작나무숲과 횡성군의 '미술관 자작나무숲'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짧은 오솔길이 끝나면 콘크리트 옹벽과 자연석 성곽이 열십자 구조로 포개진 채 여전히 미술관의 얼굴을 가린다. 경북 지방 고택에 가면 볼 수 있는 헛담 같은 역할을 하는 구조다. 그 합일점을 지나서 왼쪽으로 몸을 틀어야만 비로소 물 위에 뜬 이미지의 단아한 미술관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왼쪽/오른쪽]미술관 본관 입구 '아치웨이' / 노출 콘크리트가 드러난 미술관 입구
하늘과 예술이 소통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미술관으로 들어가기까지는 50m 정도 보도를 걸어야만 한다. 보도에 깔린 돌은 충남 서산 해미에서 가져온 해미석이다. 하얀빛을 발하는 보도 양옆으로는 워터가든이 조성돼 있다. 잔잔한 수면이 강원도의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경기도 파주에서 나는 파주석으로 지은 미술관 본관도 수면에 얼굴을 드리운 채 하늘과 나무, 바람, 새소리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하늘빛 워터가든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주황색 설치작품 '아치웨이(Archway)'다. 미국인 알렉산더 리버만이 파이프형 금속을 잘라서 만들었다. 사람 '인(人)' 자를 연상시키는 이 조각품 아래를 통과하는데, 마치 강원도 산중의 절집 일주문이라도 지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미술관 건물로 들어가기까지 동행자의 감탄사와 말소리는 맑은 자연과 귀한 예술혼을 어지럽힐 뿐이다.
[왼쪽/오른쪽]미술관 본관 입구에 놓인 헨리 무어의 조각품 / 안도 다다오 코너
워터가든과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황톳빛 자연석의 조화. 우리 눈에 익숙한 건축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맞다. 이 미술관은 바로 안도 다다오의 솜씨로 탄생했지 않은가. 초승달 모양의 웰컴센터, 삼각․사각․원형의 공간이 이어지는 미술관 본관, 그리고 플라워․워터․스톤 등 3개의 가든이 대지와 하늘 사이에 넉넉한 자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페이퍼갤러리와 청조갤러리가 자리한 본관에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지속적인 시간 개념을 표현한 건축가의 의도가 가득 담겨 있다"고 미술관 관계자는 설명한다.
관람객들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와 발자취를 청조갤러리의 안도 코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안도 다다오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한 뒤 1969년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건축물에 빛과 그림자의 철학을 입힌 게릴라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안도의 작품으로는 일본 오사카 시의 스미요시 연립주택(아즈마 하우스), 이바라키 시의 빛의 교회, 가가와 현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 가가와 현의 베네세하우스 박물관, 홋카이도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 내의 물의 교회, 미국 포트워스의 현대미술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퓰리처미술관, 그리고 우리나라 제주도의 본태박물관, 휘닉스아일랜드 글라스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 서울시의 재능교육 혜화문화센터 등이 있다.
[왼쪽/오른쪽]파피루스 / 종이로 만든 호랑이베개
청조갤러리, 20세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
일단 미술관 본관으로 들어서면 헨리 무어의 조각품 '누워 있는 형상'(1976, 브론즈)이 예사롭지 않다. 2015년 5월부터 ‘종이의 탄생부터 현재까지’라는 제목으로 열리던 상설전시는 올해 3월 1일부로 막을 내렸다. 종이 발명 이전의 기록매체로 활용됐던 파피루스부터 종이의 탄생, 제지 기술의 발전과 가치, 국보 및 보물 전적류, 판화공방까지 종이의 모든 것을 집약한 전시로 인기를 얻었다. 빈자리는 또 다른 상설전시인 ‘한국미술의 산책Ⅱ:단색화’(2017.3.17.~9.3)와 기획전시 ‘색채의 재발견’(2017.3.17~9.3)이 채우고 있다.
[왼쪽/오른쪽]청조갤러리 1전시실 / 청조갤러리 4전시실 [왼쪽/오른쪽]카페 테라스 / 뮤지엄 숍
미술관의 핵심 공간인 청조갤러리에서는 미술관의 핵심 공간인 청조갤러리는 매년 두 번의 기획전과 상설전이 열린다. 20세기 한국 회화와 판화, 드로잉 작품들을 대거 감상할 수 있다. 4개의 전시 공간 중 특히 백남준관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만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작품을 하나하나 주목해서 감상하다 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조지 시걸의 작품 '두 벤치 위의 연인' [왼쪽/오른쪽]스톤가든 / 발길을 붙잡는 플라워가든의 패랭이꽃
미술관 산책은 경주의 고분을 모티브로 만든 9개의 스톤마운드가 놓인 스톤가든에서 마무리한다. 조지 시걸의 작품 '두 벤치 위의 연인', 헨리 무어의 조각품 '누워 있는 인체'가 산책로 중간에 놓여 관람객들과 함께 대지의 기운과 강원도의 산소 바람을 즐긴다. 끝으로 제임스 터렐관까지 관람하고 되돌아오면 방문객은 4.6km 거리를 부지불식간에 산책한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