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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곡(塞下曲)
이 문 열
그날 아침 이상범(李相範) 중위는 ‘전쟁이란 이렇게 터지는 것이로구나.’ 하는 각오가 되었으면서도 얼떨떨한 비장감과 묘한 열기 속에 눈을 떴다. 내무반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태는 충분히 예견되었고, 만일에 대비해 여러 가지 작전과 상세한 행동 계획이 수립돼 있었지만, 몇몇 고참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형편없는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완전 군장을 꾸미느라 장비와 병기가 부딪는 소리, 철모가 통로의 시멘트 바닥에 요란스럽게 떨어지고, 반합이 떨그럭거리며 침상을 굴렀다. 거기다가 쉴 새 없는 전화 벨소리, 포대장과 인사계의 고함소리, 욕설……. 전쟁이란 아무리 정확하게 예측된 것이라도 한번 터지고 나면 병사들에게는 항상 돌발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중위에게도 그런 것을 더 이상 한가롭게 지켜볼 틈이 없었다. 그는 이 야전 포병대의 통신장교였고, 그래서 이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능률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돼야 할 백여 종의 통신장비와 마흔여 명의 과원이 그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출동해야 할 통신 차량과 무선 장비의 점검이 급했다. 그는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일어나는 선임하사관 임 상사에게 막사의 유선병을 맡기고 통신 차량이 엄폐돼 있는 대피호로 달려갔다. 산허리를 파 대공 위장망을 씌워 놓은 노천호였는데, 거기서도 혼란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어젯밤부터 대기해 온 무전병들마저도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각종 전문(電文) 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중위는 먼저 갓 통신학교를 나온 신병이 배치돼 있는 17호 차량으로 들어갔다. 인접 포대망을 맡고 있는 녀석은 웅웅거리는 v―17 앞에서 무엇인가 방금 수신한 음어를 해역(解譯)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뭐야?”
“018 대대 전개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보다 상황이 좀 빨랐던 같습니다.”
“빨리 전해.”
그때 갑자기 플래시가 번쩍이며 지원 연대망을 맡고 있는 유 상병이 이 중위를 찾았다.
“과장님, v - 25 수신부 침묵입니다.”
“퓨즈 점검했나?”
“네, 이미 점검해 봤지만 이상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약 십 분 전부텁니다. 지금 보조 수신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감이 아주 나쁩니다.”
“배터리는?”
“어제저녁 최종 점검 때 충분히 충전된 것으로 갈았습니다.”
“그럼 수신부, 빨리 예비와 바꿔. 그리고 결과 보고해.”
무선반의 사고는 그 밖에도 두 건 더 있었다. 멀쩡하던 사단 AM망이 갑자기 송신 불능에 빠진 것과 V-17 한 대가 차량 배터리의 합선으로 가동할 수 없게 된 게 그랬다. 둘 다 예비로 대치하면서 이 중위는 새삼 예비를 확보해 둔 것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며칠 전 인근 부대에 통신장교로 근무하는 동기들로부터 거의 사 분의 삼 톤 트럭 한 대분의 장비를 빌려 두었는데, 그것은 기재계(器材係) 강 병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강 병장의 주장에 따르면. 야전에서 통신 장비 특히 무선 장비 성능을 백 프로 믿는 것은 통신장교의 정강이뼈를 그대로 대대장의 워커에 맡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아직 진공관을 쓰는 구형 장비가 태반인 탓이었다.
대략 무선병 점검이 끝나자 이 중위는 선임하사가 맡은 유선병 쪽으로 가 보았다. 역시 장비 적재로 부산하기는 하였지만 당장 쓰이는 것들이 아니어서 성능 때문에 오는 혼란은 없었다. 선임하사가 그의 독특한 충남 사투리로 유선반장 양 하사에게 무엇인가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뒤로하고 이 중위는 다시 교환대로 향했다. 날은 아직도 어두웠다.
교환대 못 미처 설상(雪上) 파카와 설상 위장포를 들고 오는 서무계 권 일병을 만나고서야 이 중위는 비로소 눈이 오는 것을 알았다.
“제기랄, 전쟁이 터지는 날은 언제나 인상적이로구나.”
그런 기분은 비가 왔더라도 안개가 끼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설령 청명했더라도.
그런데 교환대 문을 연 이 중위는 의외의 광경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이런 법석 중에도 교환병 김 일병이 야전 교환기의 신호음을 꺼 놓고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이 앉닌가.
“야, 이 개새끼야.”
이 중위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과 함께 김 일병을 걷어찼다. 그러나 놀라 그를 올려다보는 김 일병의 얼굴을 보고 그는 ‘아차’ 했다. 녀석의 안경알 밑으로 번질거리며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두 줄기의 눈물이었다. 함께 근무하던 배 상병의 변호가 아니더라도 녀석이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화가 나는 실수였다.
“근무 똑똑히 해. 임마, 곧 출동이야.”
마침 기재계 강 병장이 야전선 적재 문제로. 이 중위를 찾아왔으므로 그는 자칫 난처할 뻔한 자리를 여전히 화난 목소리로 때우고 교환대를 나섰다.
“뒷산 야전선을 좀 써야겠는데요.”
위장망에 단독 군장 차림으로 출동 준비를 완전히 갖춘 강 병장이 은밀한 의논 투로 말했다.
“뒷산 야전선?”
이 중위는 그게 무얼 뜻하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반복했으나 이내 강 병장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지난여름 전방의 야전선을 재래식 화기의 화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하로 매설할 때, 이 중위와 강 병장은 약 8마일의 야전선을 빼돌렸다. 사단에 보고할 선로도(線路圖) 는 매설 곤란을 이유로 곡선으로 그리고 실제 매설이 일치하는 지점을 몇 군데 표시해 두었다가 적당히 구워삶은 검열관으로 하여금 형식적으로 확인하게 하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힘들여 또 시가로도 몇 십만 원이 되는 야전선을 빼돌린 데에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병 유선 장비용 야전선은 한 번의 훈련이 끝나면 보통 상당한 감량이 생기는데 사단 보급소는 그 감량 인정에 인색했다. 거기다가 때로 지상 가설에서 절취당하는 수도 있어 자칫하면 통신장교가 몇 마일씩 변상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때를 위해 부대 뒷산의 쓰지 않는 방공호에 은밀히 감추어 둔 것인데, 이제 강 병장이 그걸 쓰자는 것이었다.
“사단서 수령한 훈련용 야전선은 폐선이 많이 섞여 재생을 해도 대개 저항 300이 훨씬 넘습니다. 감도가 나빠 선로가 길어지면 어렵죠. A급을 자르기는 안됐지만, 미더운 게 필요해서요.”
“그래, 그럼 강 병장이 알아서 몇 마일 싣도록”
이 중위는 언제나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강 병장의 판단에 일임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강 병장만 대하면 모든 것이 미덥고 든든하면서도 원인 모를 위축감에 빠지곤 했다. 강 병장이 자기보다 두 살 위이고 또 유능한 기재병이어서 그가 맡은 정부 재산을 잘 관리해 준다는 것 이상으로 강 병장에게는 무언가 그를 압도하는 것이 있었다. 그만의 어떤 특이한 힘이었다.
실제로 지난여름 강 병장은 대대장도 손을 든다는 작전과장 장 대위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그를 굴복시킨 적이 있었다. 강 병장에게는 갓 전입 온 신병에게까지도 깍듯이 경어를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사 출신의 전형적인 군인인 장 대위에게는 군기(軍紀)의 문제로 비친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타일러도 강 병장이 듣지 않자 화가 난 그는 어느 날 정식 명령으로 그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강 병장은 그 명령마저도 “쌍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더니 군번 빠
른 것도 벼슬인가.” 하며 일소에 붙여 버렸고, 그걸 안 장 대위는 명령 불복종으로 인사과에 입창 의뢰를 해 버렸다. 그런데 그 입창 의뢰가 정식으로 기안돼 대대장의 결재에 올라갈 때쯤해서 일은 엉뚱하게 전개됐다. 평상시와 같이 근무하던 강 병장이 갑자기 의무대에 입실해 버렸다. 알고 보니 단식 일주일째였다.
장 대위가 펄펄 뛰었으나 속수무책 ― 이미 일주일이나 굶어 늘어진 사람을 어쩔 수는 없었다.
결국 강 병장의 일은 단식 열흘 만에 대대장에게 보고되었고 놀라 달려온 대대장에게 눈만 번쩍이는 강 병장이 내놓은 것은 그 열흘 동안 수십 번을 검토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군인 복무 규율』 한 권이었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그러나 책 어느 조문을 보아도 군번 늦은 후임병에게 경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귀절은 없었습니다…….”
그런 강 병장의 힘은 이 중위도 한 번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지난여름의 일이었다. 그날 무심코 기재 창고를 지나던 이 중위는 돌연한 고함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알았어? 너희 대장 하 대위가 와도 내게는 그리 못해. 그런데 이 새끼, 너 그 태도가 뭐야?”
이 중위로서는 처음 듣는 강 병장의 고함이고 욕설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상대였다.
“강 병장님, 뭘 그리 화내십니까?”
기가 꺾인 목소리로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 보안대 장 병장이었다. 평소 사병은 물론 장교까지도 개똥같이 여기는 전방 보안대 사병의 표본 같은 녀석이었다.
“조심해 임마. 병아리도 못 되는 주제에 장닭처럼 벼슬을 흔들어대면 모가지가 부러지는 법이야.”
그러자 장 병장은 들여다보고 있는 이 중위를 의식했는지, 아니면 당하다 보니 화가 났던지 갑자기 지금까지의 부동자세를 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이거 강 병장 뭘 자꾸 그러슈? 까짓 배터리 몇 개 안 주면 그만이지 …….”
그러나 그의 말은 강 병장이 무섭게 따귀를 내리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차렷! 이 새끼, 이 새까만 일병 놈의 새끼가. 아직 말 끝나지 않았어. 야전 건전지가 너 같은 놈 물고기나 잡으라고 나온 줄 알아? 야 임마! 그 한 박스면 포대 하나가 한 달간 쓸 수 있어, 이 썩은 새끼야.”
이 중위는 비로소 강 병장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가를 알았다. 야전 건전지는 폐품 반납 과정에서 잘 조작하면 여분을 남길 수 있었다. 폐품 80프로만 반납하면 전량 새 건전지로 지급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강 병장도 기재장부 밖의 여분을 적지 아니 가지고 있었는데 장 병장이 그걸 알고 얻으러 온 듯했다. 무전기나 특수 장비용 배터리는 직렬로 연결하면 물이 얕은 개울에서의 고기잡이에는 넉넉한 전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쓸 데가 있어서…… 남는 걸로 알았습니다.”
신통하게도 금세 기가 죽은 장 병장 아니 장 일병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녀석은 보안대의 공공연한 관례대로 지금까지 일등병이 병장 계급을 사칭해 온 모양이었다.
“그렇더라도 그건 정부 재산이야. 장교가 와도 기장(記帳)하지 않고는 내준 적이 없어. 어디서 순…….”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꺼져 버려. 아구통 돌아가기 전에.”
“필, 승!”
결국 장 일병은 경례까지 깍듯이 하고 돌아갔다. 평범한 전방 야포대의 사병인 강 병장이 무엇으로 막강한 보안대원을 그토록 무섭게 굴복시켰는지 이 중위는 몹시 궁금했다.
“군대 와서는 처음으로 군번을 따졌죠. 녀석은 일병이었으니까요.”
강 병장은 히죽이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게 아닌 것은 분명했다. 거기다가 이 중위가 또 하나 감탄하는 것은 강 병장의 깊이 모를 능력이었다. 이 중위는 이 부대에 통신장교로 근무한 이래 그가 모른다거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특히 통신 분야에서는 20년이 가까운 선임하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장비는 물론 작전 면에까지 그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는 과원들의 통솔까지도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마흔 명이 넘는 과원들의 신상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어, 청원 휴가나 포상 휴가의 재량이 이 중위에게 돌아올 때 그에게 자문을 청하면, 대개 그가 정해 주는 서열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따라서 통신과에는 이 중위와 임 상사 외에도 분대장인 세 명의 하사와 다섯 명의 고참이 있었지만 모든 일은 사실상 거의 그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가끔씩 이 중위마저도 통신과의 정신적인 과장은 그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갑자기 맞은편 산등성이에서 청색 신호탄이 오르더니 여기저기서 총성이 터졌다. 본부 포대장의 신경질적인 명령이 산 아래 연병장에서 들려왔다.
“각과 삼 분의 일씩 경계조를 편성, 삼 분 이내로 본부 연병장에 집합 ― .”
중대한 상황이 발생한 듯했다 이 중위는 상황실로 달려가 보았다.
“차리(C포대) 북방 무명고지 일대, 수 미상의 게릴라 출현.”
C포대의 보고에 상황실의 급박한 지시가 하달됐다.
“차리, 차리, 빨리 타격대를 편성하라. 타격대를 잔류시켜 게릴라에 대항하고 빨리 포를 빼라.”
뒤이어 각 포대의 상황 보고가 날아들었다.
“풍랑객 하나, 병아리를 날리도록. 끝.”
선임 A포대가 전개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뒤이어 브라보(B포대)의 호출과 전개 명령, 그리고 마지막으로 C포대의 보고였다.
“여기는 풍랑객 셋, 병아리를 날린다. 까치발 오공(캘리버 오십 경기관총)과 병아리 한 배(일 개 소대)를 남긴다. 현재 까마귀(게릴라) 침묵 중.”
그사이 본부 차량들도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다 이 중위가 탄 상황실 박스카도 천천히 진지를 빠져나왔다. 날은 드문드문한 눈발 사이로 어느새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사단 규모의 통합 훈련 청룡 25호 작전의 디데이가 밝아 오는 중이었다.
진지를 떠나 눈 속을 느릿느릿 10마일쯤 이동했을 때에야 이 중위는 상황 장교를 통해 사태의 정확한 진전을 알 수 있었다. 적(가상)은 총 일 개 사단의 병력으로 그날 새벽 네 시를 기해 대대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아군 390 연대는 중앙이 돌파당해 20마일이나 후퇴해서 재정비 중이었고, 392 연대는 임진강 지류 하나를 끼고 치열한 교전 중이었으나, 역시 적의 주공(主攻)은 사단 본부를 끼고 있는 391연대 쪽이었다. 조공(助攻)이 기타 두 방향에서 있었고, 수 미상의 유격대가 지난밤 아군 후방으로 공중 침투된 것도 밝혀졌다. 얼마 전 차리(C포대)를 교란한 것은 그 일부로 보였다. 그리고 뒤이은 보고에 따르면, 그들에 대처하기 위해 남겨졌던 C포대의 잔류 병력과 차량은 결국 상실된 것으로 판정이 났다. 그 밖에 알파(A포대)가 차량 전복으로 장교 한 명 사병 네 명을 상실, 일 개 포반(砲班) 하나가 낙오 판정을 받았다.
그 모든 상황은 6·25 이듬해에 태어나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고 임관 후에도 줄곧 후방 근무만 해 온 이 중위에게는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 든 하사관들이나 경험 많은 고참 장교들에게는 심드렁한 전쟁놀음일 뿐이었다.
“글쎄, 그년을 만났더라요.”
수송부 선임하사인 문 중사였다. 새벽부터 어디서 한잔 걸쳤는지 약간 취한 목소리로 간밤의 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첨 살림을 차린 무등산 기슭의 판잣집이드랑께. 차암 그때는 재미있었제…… 그런디 ― 그 ×할 년이 갑자기 왜 나타났이까…….”
그에 관해서는 이 중위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술과 계집으로 팍삭 늙어 얼굴은 마흔 줄도 중반이 넘어 보이지만 실은 서른넷의 나이였다. 시골 목사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고 교육도 상당히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하러 광주로 나왔다가 옆방에 자취하던 술집 여급과 눈이 맞아 삶이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고지식한 부모에게 의절당하고 학교마저 중퇴한 그는, 방금 얘기한 그곳에서 그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으나 그 나이에 그 학력으로는 생계가 막연했다. 거기다가 상대편 여자도 차츰 정이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복한 집의 귀공자와 희롱하는 기분으로 어울렸던 것이지 자기에게 더부살이하는 어린 건달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 싸움이 잦아지고 어느 날 돈을 타러 갔던 그가 부모에게 칼부림을 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기 소지품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몇 달 그녀를 찾아 헤매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경에 빠진 그는 결국 길가 담벼락의 포스터가 끄는 대로 하사관 학교에 입교하고 말았다는 게 하사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그의 이력이었다.
“년도 꽤 쪼그라들었을 것이로구만잉, 나보다 세 살이나 위였응께…….”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그날따라 야릇한 감개가 서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여자는 그에게 있어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였다. 그 후 그는 세 번이나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번번이 한 달도 못 가 끝나 버렸다. 그를 만년 중사로 만들어 놓은 고약한 술버릇 때문이었다.
“×× 껌 씹는 소리 그만하고 그 수통에 쐬주나 있으면 한 모금 나눠 주슈.”
문득 맞은편에서 묵묵히 차량에 거치된 석유스토브를 쬐고 있던 군수과장 ‘별’ 대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혀도, 과장님은 그 소리 들은 지 오래됐을 건디.”
수통을 건네면서 문 중사가 하는 소리였다. 군수과장 역시 몇 년 전에 상처하고 아직 홀아비였다.
그들은 곧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소주를 나눴다. 장교와 하사관이라는 신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잘 어울렸다. 문 중사가 군수과 선임하사였을 적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것 외에도 무언가 그들에겐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군수과장의 계급 앞에 ‘별’이란 별명이 붙게 된 경위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였다.
10여 년 전 신임 소위로 OP에 파견 근무를 하던 그는 항상 은박지로 큼직한 별을 두 개씩이나 철모에 오려 붙이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불시에 순찰 나온 사단장과 그 철모를 쓴 채 맞닥뜨리게 됐는데, 그 사단장은 준장이었다. 그런 종류의 실수는 종종 군인으로서의 그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어 10년째 그를 대위로 묶어놓았지만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요즈음도 멋모르는 소령이 전화 같은 데서 상대가 대위라는 것만 알고 반말이라도 쓸라치면 그는 대뜸 전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말 조심해. 중령 같은 대위다.”
갑작스러운 긴급 임무의 하달로 그들의 그런 술자리는 깨지고 말았다. 끝내 밀리게 된 592연대가 적의 진격 속도를 줄여 줄 지원포격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처 얼어붙은 논바닥에 긴급 방렬을 하고 삼십 분가량 비사격을 했다. 그동안 유선 가설에 땀을 뺀 이 중위는 비상식량으로 늦은 아침을 때운 후 부대가 다음 진로로 이동할 무렵 가설 차량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철거한 야전선 뭉치와 빈 방차통이 개인 장비와 뒤죽박죽이 된 차량 한구석에 교환병 김 일병이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김 일병, 새벽에는 내가 지나쳤다. 대신 작전이 끝나는 즉시 휴가는 책임지마. 안 되면 단 며칠 특박이라도.”
이 중위는 불면으로 핼쑥한 김 일병의 얼굴에 알지 못할 연민을 느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도 녀석에겐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강 병장이 들려준 이야기는 바로 그 아내가 백일도 안 지난 아이를 시가에 떼 놓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중위는 힘들여 녀석의 청원 휴가를 얻어 냈으나 이번 작전으로 그만 연기돼 버렸다. 이 중위의 다정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김 일병은 그저 망연한 눈길로 이 중위를 올려 보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과장님, 저는 그때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 또 그 전화 얘기, 이 중위는 약간 한심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설병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킥킥 웃었다
“터어키 병사였습니다…….”
김 일병은 최근 들어 기이한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늦어 졸면서 근무하던 전방의 교환병이 간혹 환청을 경험하는 수가 있기는 하지만 김 일병의 그것은 좀 특이했다 한결같이 이 땅에서 죽은 외국인 병사들의 전화가 거의 매일 저녁 그에게 걸려 온다는 것이었다.
군의관은 김 일병의 그런 증상을 지난여름의 야전선 매설 작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했다. 그 작업 중 몇 군데 땅속에서 해골 더미가 발견됐는데 그것이 그때 그 작업에 동원됐던 김 일병의 의식 깊이 잠재했다가 다른 어떤 심리적인 요인과 함께 환청으로 나타났으리라는 추리였다. 그러나 이따금의 그런 환청 이상 다른 증상은 전혀 김 일병에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특별한 치료나 후송 같은 것은 고려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건달이었답니다.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꾼 날 아침 적의 박격포에 당했대요…….”
이 중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일병은 여전히 몽롱한 표정으로 폭사한 터키 병사의 얘기를 계속했다. 그는 우리말밖에 모르는데도 환청 속에서만은 어느 나라 말이건 신통하게 알아들었다. 영어, 불어, 일어는 물론 서반아어, 태국어까지도. 그리고 그에게 전화질을 해 대는 망령들은 한결같이 일정한 유령이었다.
지난가을 늦게 녀석에게 처음 전화를 한 것은 산동성 출신의 중공군 병사였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왔는데 무단 후퇴를 하다 독전병(督戰兵)에게 즉결됐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다음이 전직 복서였다는 콜롬비아 중사, 약혼녀에게 자랑할 전리품을 위해 인민군 시체 더미를 뒤지다 생존자에게 저격됐고, 다음은 삼류 가수와 결혼한 캐나다 군의 나팔수로 아내의 변심을 고심하다 자살, 그리고 지뢰를 밟은 소 장수 출신의 영국 하사관 등 ― 그러다가 며칠 전에는 청일전쟁 때 죽은 일본군 병조장에게서까지 전화가 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아내나 약혼녀를 가졌던 병사들의 망령들이었다. 언젠가 이 중위는 빙글거리며 김 일병의 환청을 전하는 강 병장에게 언뜻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김 일병은 누구일까?”
강 병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캐나다 군의 나팔수일 겁니다. 녀석도 사회에 있을 때 나팔을 불었죠. 맥주홀의 밤무대 같은 데서 ― 여자도 거기서 만났다니까요.”
그러나 그때는 거의 희롱처럼 느꼈던 강 병장의 얘기가 지금 이런 상황 아래서 망연한 눈길과 함께 떠오르자 왠지 이 중위도 음울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고통 속에 죽어 가던 그 순간도 그의 아내는 다른 사내와 흥청 대고 있었다는 거예요…….”
김 일병은 이 중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독백과도 흡사한 애기를 힘없이 이어 갔다.
“그러나 너는 살아서 돌아간다. 이건 도대체가 훈련이고 죽음 같은 것과는 아무 관련도 없어. 거기다가…… 아마 네 아내는 현숙한 여자일 거야. 어디선가 틀림없이 너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을 거다”
깊어 가는, 알지 못할 연민으로 다소 감상적이 된 이 중위는 그렇게 위로하며 김 일병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차량 뒤켠으로 가서 마치 무거운 기분을 떨쳐 버리듯 두터운 방수천을 걷어 제쳤다. 갑자기 찬바람과 함께 굵은 눈발이 날아들었다. 멎었던 눈이 다시 하늘 가득히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도로 위에 포를 뒤로 뺀 우군 전차가 어디론가 황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시가 펴레이드에서 자랑하던 위용과는 먼, 무언가 초조와 불안에 싸인 듯한 조그만 쇠붙이의 초라한 행렬이었다. 전차대가 사라져 간 산모퉁이로 보병의 행렬이 끊임없이 눈 속을 헤쳐 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이 중위는 막연히 중얼거렸다.
“전쟁은 참으로 쓸쓸한 것이로구나…….”
몇 군데에서의 긴급 방렬을 거쳐 그들이 숙영지로 예정된 네 번째 전개 진지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그곳은 조그만 내를 끼고 멀리 인가가 보이는 넓지 않은 계곡 입구의 논이었다.
그들이 막 포 방렬을 마쳤을 때 갑작스러운 적기의 공습이 있었다. 다행히 대공 위장이 거의 완료돼 진지는 피해가 없었지만, 고장으로 뒤져 들어오던 보급 차량이 반파(半破)의 판정을 받고 말았다.
공습 후부터 저물 때까지 이 중위는 정말 바빴다.
“눈썹과 ×털이 바람에 휘날리도록 달려와.”
“워커 밑창에서 가죽 냄새가 나도록 뛰어.”
선임하사가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사병들을 몰아 대고 있었지만 이 중위는 웃을 틈조차 없었다. 긴급 방렬 때와는 달리 진지에서는 정규 가설을, 그것도 통제관의 시간 체크 아래 해치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포대선은 포대의 가설병이 끌어오게 돼 있었고, 참모부 선은 구간이 짧아 문제가 안 됐지만, 포사(砲司) 선, 연대선, OP선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대부분 몇 마일씩 되는 장거리 선인 데다 지형지물이 낯설어 독도법(讀圖法)에 서툰 가설병에게만 전적으로 맡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수 없이 두 개의 OP선을 직접 지휘한 후 다시 연대선을 끌고 목적지 부근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6부 정도의 능선에서 일단의 보병들이 참호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 땅이라 야전삽 정도로는 교통호는 고사하고 개인호도 제대로 파여질 것 같지 않았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소대장인 듯한 소위 하나가 철모를 쓴 채 눈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앳되고 수려한 얼굴이었다.
“연대 본부가 어디요?”
그러자 고개를 약간 든 그는 말도 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이미 어둠이 짙어 오는 계곡 밑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기계적인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병들도 몹시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도보로 행군했을 것이다 적어도 20마일 이상을, 그것도 가끔씩은 구보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 중위는 비록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체험해 보지 못한 전쟁의 또 다른 일면을 생생히 실감했다.
“전쟁이란 피로한 것이로구나.”
그러나 피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설을 힘들여 마치자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원인 모를 단선(斷線)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단선을 잠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도로 횡단 지점에서였고, 그 형태는 누군가가 야전선을 돌로 짓찧어 놓은 것 같았다. 몇 번인가 똑같은 경우를 당한 후에야 비로소 이 중위는 그 원인을 알아냈다. 범인은 우군 자주포와 전차였다. 땅이 얼어 깊이 묻지 못한 야전선을 그 육중한 무한궤도가 짓씹어 놓은 것이었다. 견디다 못한 이 중위는 모든 도로 횡단을 가능한 한 매설 횡단에서 가공(架空) 횡단으로 바꾸고 말았다.
밤 여덟 시 무렵에야 모든 작업을 마친 이 중위는 숙영지로 돌아왔다. 겨울밤으로는 상당히 깊어 사방은 고요했다. 불빛이 통제된 진지는 한층 완강한 침묵으로 어둠과 추위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중위가 바짓가랑이와 군화에 묻은 눈을 털고 분대용의 가설병 막사에 들어가니 썰렁한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식은 우내장(牛內臟) 국이었던 모양으로 표면에는 기름이 두껍게 굳어 있었고, 절인 무에도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제야 이 중위는 추위에 언 가설병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중 민가에라도 들러 저녁을 먹이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돈보다는 이동 통제반과 적의 게릴라가 두려워 그는 가설병들을 재촉해 귀환해 버렸다. 약간 미안해진 이 중위가 멀거니 식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반합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서무계 권 일병이었다.
“뭐야?”
“찌갭니다. 과장님 몫은 따로 끓이고 있으니 함께 가시지요.”
가설병들이 환성을 지르며 식기를 들고 반합 주위로 모여들었다. 군용 두부와 동태, 콩나물 따위를 넣고 역시 군용 고추장을 풀어 끓인 것으로 이 중위가 보기에도 먹음직했다.
“누가 끓였나?”
“강 병장님 솜씹니다. 자, 과장님, 가시죠. 강 병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권 일병이 인도해 간 곳은 계곡 한편의 전주 밑에 자리 잡은 강 병장의 톈트였다.
개인 덴트 몇 장 교묘하게 결합한 한 평 남짓한 그 속에는, 강 병장이 단짝인 암호병 박 상병과 함께 이 중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야, 이 사람들 봐라.”
톈트를 들치고 들어간 이 중위는 우선 감탄했다. 덴트 안에는 군용 갓을 씌운 백열등이 켜져 있었고, 구석에는 조그만 전기 곤로가 발갛게 달아 있었다. 그리고 텐트 한가운데 놓인 등산용 고체 연료 위에서는 무엇인가가 한참 기분 좋게 끓고 있었다. 그 곁에는 소주병도 두어 개 보였다.
“전기는 누가 끌었나? 고압선 같던데.”
“한전(韓電) 기사가 끌었습니다.”
한전에 근무하다 입대한 신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강 병장은 방한모도 야전잠바도 벗은 채로였다.
“곤로는?”
“미리 준비해 왔죠. 고체 연료도 서너 개. 아무래도 겨울에는 따뜻한 게 제일이니까요.”
“거기다가 야전 전기 세트라 ― 이건 PLL(전투 예비) 아냐?”
그러나 이 중위의 질문은 나무람이기보다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하여튼 애들을 위해 찌개를 끓여 둔 건 잘했다. 그런데 이 술은 웬 거야? px품이 아닌데 ― .”
“역시 px 겁니다. 이럴 때 px도 한몫 봐야죠.”
그러자 이 중위에게도 생각나는 게 있었다. 원래 px는 군납품만 쓰게 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가가 있고 이윤이 적은 데다 때로는 질(質) 문제로 잘 팔리지 않았다. 영내에 있을 때는 사단 px와 감찰부의 통제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제 그들의 통제권 밖으로 나온 이상 반드시 군납품을 쓸 필요는 없었다. 듣기에 주임 상사는 이번에 개인적인 투자로 거의 한 트레일러분의 사제(私製) 물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자 이 중위도 방한모와 야전잠바를 벗었다. 눈에 젖은 바짓가랑이와 군화에서 가는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강 병장이 넥타 깡통에 소주를 반 가까이나 부어 권했다.
“한 잔 드십시오. 몸이 확 풀릴 겁니다.”
안줏거리 찌개는 따로 있었다. 강 병장이 납작한 철제 약상자에서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범벅해 둔 양념이며, 조미료, 장조림 따위를 꺼내는 걸 보고 이 중위가 다시 물었다.
“치밀하군. 누구 솜씬가?”
“박 상병 어부인 솜씨죠. 지난주 외출 때 가져왔습니다.”
육사를 중퇴했다는 풍문뿐 강 병장의 경력이나 환경이 깊이 감추어진 것임에 비해 박 상병의 그것은 비교적 대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선 그는 부대의 최고령자였다. 국내 제일의 명문에서 대학원까지 수료하고도 고시 준비로 몇 년을 더 보낸 바람에 스물여덟에 입대, 지금은 강 병장보다 한 살 많은 서른이었다. 부인은 약사로 개업 중이었고 세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강 병장과는 각별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중위는 그들과 술을 나누다 보면 자기가 군에 있다는 것을 깜박깜박 잊어버리곤 했다. 한번은 술이 취해 그들과 강 형, 박 형 하다가 부대장에게 경을 친 적도 있을 만큼 그들의 화제는 군대를 떠나 있었고 그 분위기는 독특했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서로 강 형, 박 형 하는 것이 조잡스럽게 보였고 그들의 대화도 공허하게 들렸다. 처음 한동안 영문을 모르고 마시던 그는 술이 몇 순배 돈 후에야 그 원인을 깨달았다.
“그런데 말이야, 강 병장 나는 장교로 2년째 근무하면서도 도무지 너희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어.”
“뭔 데요?”
강 병장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희들이 ― 그 무어랄까…… 이를테면 모든 것을 방기해 버린 것 같은 자세 말이야.”
“구체적으로 어떤 것 말씀입니까?”
“예를 들면 너희들의 탐식. 너희들은 이상하게도 먹는 것에 집착한다 이미 우리 군대에는 아무도 배고픈 사람이 없을 톈데도 말이다.”
“먹는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입니다. 그다음은요?”
“너희들의 나태. 너희들은 병적으로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훈련이나 작업은 물론이지만, 분명 너희들에게도 유리한 일도 시키기 전에는 안 한다. 대신 기회만 있으면 자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멍청히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배부른 사병이 가장 열렬히 바라는 게 그 두 가집니다.”
“또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집요한 탐락. 한번 술잔을 들면 쓰러질 때까지 놓지 않고 여자를 얻으면 날이 새기 전에는 그 배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너희들이 용감하고 부지런해지는 것은 그 둘을 위해서뿐이다.”
“대개 총기 사고는 그 둘 중의 하나 때문이죠.”
“너무 철저한 자기 방기다. 더구나 그것이 학력이나 인격, 연령에 관계없이 너희들에게 공통되는 것을 보면 아연할 때마저 있다.”
“이거 오늘 우리가 되게 당하는군요. 너무나 사병적 (士兵的)인 야영 준비였습니까?”
강 병장은 여유 있게 웃었다.
“그런데 과장님은 그 원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나는 그게 일제의 나쁜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남의 나라, 다른 민족을 위해 죽음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들의 군대관이 지금까지 그릇 전승돼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오래된 일이고 또 지금은 다르다.”
“그래도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죠.”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이 와전된 쾌락주의라 생각했다. 개인주의와 현실 승배의 기형적인 결합 같은 것 ㅡ 하지만 그것도 너희들의 그 철저한 방기의 설명으로는 불충분해.”
“맞습니다. 잘 보셨지만 과장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습니다.”
“무언가?”
“니힐이죠. 병사의 절망입니다.”
“병사의 절망?”
“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 버린 자아의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죠.”
“그런 것을 정말 너희들이 모두 느끼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쟁이 터져 존재 자체가 실제 위협을 당할 때조차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게 없다는 건 별개지요. 모든 병사는 군번과 함께 그 절망을 잠재의식 속에 지급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소위 동일시라든가 동기의 합리화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집단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 같은…….”
여기서 불쑥 박 상병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이 화제에 어느 정도 익숙한 것 같았다.
“그런 것을 자발적인 것으로 사병들에게 구하는 것은 무리지요. 더구나 우리는 대개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에 따라 의무적으로 왔을 뿐이니까요. 효과적인 동기 부여나 정치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걸 위해 정훈(政訓)이 있지 않나?”
“그러나 그 효과는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병사의 절망을 확인시키는 때도 있죠.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수십 매의 논문이라도 쓸 수 있는 사병이 ‘프롤레타리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즉 빈털터리.’ 식의 암기 사항을 강요당할 때, 그는 자기의 절망을 확인할 겁니다. 또 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별로 전문화 되지 못한 정훈 교관에게 ‘이순신 장군은 배 열두 척으로 적선 삼백을 격침시켰다.’ 따위 얘기를 듣고 웃었다고 기합을 받게 될 때도…….”
“대개 박 상병이나 강 병장 자신의 얘길 테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아.”
“그래도 우리 본부 요원의 태반은 대졸이나 대재(大在)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비율은 높아 갈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강 병장이 다시 끼어들었다.
“지적 수준이 낮은 사병도 마찬가집니다. 별 알맹이도 없이 어렵기만 한 한문 용어로 된 정훈 교범을 대할 때, 토요일 내무 사열에서 수십 개의 비슷비슷한 암기 사항을 다 못 외워 그날의 외박이 취소당했을 때, 시골 중학을 중퇴한 그 사병은 또한 자기의 절망을확인할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정훈은 완전한 낭비인 셈이군.”
“아니죠. 만약 어떤 곳에서 보다 전문화된 교관에 의해 근거 있게 등급화된 사병들의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여기서 이 중위는 묘한 저항감을 느꼈다.
“아니면 너희들 중 하나를 정훈감에 앉히거나…….”
원래 논리에 감정이 개입되면 그 논리는 끝이다. 그런데 돌연 그들의 대화에 노골적인 감정을 끌어들인 것은 어느새 취한 박 상병이었다.
“병사들을 절망시키는 것은 그 밖에도 더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사관 층의 원인 모를 가학 성향(加虐性向), 장교들의 아리스토크래티즘[貴族主義] - .”
“박 형, 잠깐.”
갑자기 노련한 강 병장이 요란스레 술병을 부딪히며 박 상병의 말을 중단시켰다.
“술이 다 됐어. 수고스럽지만 술 좀 더 가져오쇼.”
강 병장은 그쯤에서 대화를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차츰 분노로 변해 가는 이 중위의 묘한 저항감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취한 박 상병은 할 얘기를 다 하고야 일어섰다.
“사단 보충대에서의 일입니다. 제 신상명세서를 본 인사과 행정반의 장교들이 저를 부르더군요. 멋모르고 쓴 대학원 학력 때문이었죠. 그들은 나를 잘 보아준답시고 사역과 훈련에서 빼낸 것입니다. 그런데 일없이 행정반에 빈둥댄다고 그들에게 처음 받은 과업이 뭔지 아십니까? 군화를 닦아 달라는 것과 px에서 담배를 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거스름 몇 십원으로는 오리온 마미를 하나 사 먹고…… 또 한번은 치핵(痔核)으로 지구 병원에 후송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는 경환자에 한해서 가벼운 사역을 시킬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죠. 그래서 저는 엉덩이에 커다란 혹을 달고 어기적거리며 성한 장교들을 위해 구내 테니스장의 무거운 롤러를 끌었습니다…….”
강 병장은 조심스레 이 중위의 눈치를 살폈지만, 거기서 이 중위는 오히려 원인 모르게 착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박 상병을 붙들어 앉히고 대신 일어섰다.
“작전 중이야. 술은 됐어. 오늘만은 그놈의 절망을 절제해라.”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강 병장의 막사를 나왔다. 강 병장이 따라 나왔다.
“술 잘 마셨다. 잘 자라.”
“죄송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필승!”
강 병장은 전에 없이 단정하게 경례까지 했다. 그러나 보기보다 많이 취한 것 같은 박 상병은 그동안도 비스듬히 앉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니힐, 니힐, 니힐리아 노래 부르며…… 저 바벨론의 강가에서 먼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노라…….”
하지만 그날 밤은 결국 누구도 잘 잘 수 있는 밤이 못 되었다. 게릴라 침투가 세 번이나 있어 무전 차량 한 대가 반파, 포차 한 대가 완파되고, 스무 명 가까운 사병과 하사관 한 명이 사상 판정을 받았다. 전 병력은 별수 없이 취침을 포기하고 철야 경계에 들어갔다. 거기다가 새벽녘에는 또 난데없는 헌병대가 들이닥쳐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인근 부락의 술집에서 나이 든 작부 하나가 피살된 사건 때문이었다. 술집 주인의 신고로는 전날 밤 아홉 시경 술 취한 군인 하나가 찾아와 술과 여자를 청하기에 들여보냈는데 한참이 지나도 조용하기에 문을 열어 보니 여자 혼자 목이 졸려 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군인은 풀이 많이 꽂힌 위장망을 입고 있어 계급과 군번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위장망이 한 단서가 되어 헌병대는 부근에서 훈련 중인 부대에 중점을 두고 하나씩 뒤져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근에서 작전 중인 병력만도 사단 규모인 데다 야영지에서 정확한 병력 통제란 원래가 어려운 것이어서 범인은 아직 윤곽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 중위의 부대에서도 그 시각에 진지에 없었던 것이 명백한 몇몇이 ― 예를 들면 보선(補線)을 나갔던 가설병이나 부식 수령을 갔다가 늦은 일종계와 취사병 같은 병사들이 ― 턱없이 엄한 심문을 받고 데려온 술집 주인과 면대까지 했으나 술집 주인은 이미 얼굴을 잊은 후였다. 사건 후부터 지금까지 벌써 수백 명을 면대한 그는 그저 자고 싶으니 돌려보내 달라고 할 뿐이었다.
이튿날 D +1일은 숨 가쁜 이동의 연속이었다. 반격에 실패한 지원 연대를 따라 이 중위가 소속된 야포대도 30마일이나 뒤로 밀렸기 때문이었다. 오전 동안에 긴급 방렬이 두 번, 게릴라 출현이 한 번, 그리고 적의 경비행기가 투항을 권고하는 전단을 뿌리고 사라졌다.
그런데 오후 늦게 재반격이 시작되면서 이 중위의 부대는 포병으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제6 전개 진지에서 적 보병 집결지를 향해 맹렬하게 비사격을 하고 있는데 통제관이 화집점(火集點) 확인을 하러 들어왔다. 그러나 핀이 꽂혀 있는 것은 적의 집결지가 아니라 392연대의 CP 부근이었다. 지원 연대가 이미 삼십 분 전에 진공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그 머리 위에 포탄을 퍼부은 셈이었다. 다행히 비사격이어서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그 오폭에 대한 통제관의 피해 판정은 지원 연대의 부관을 비롯해 세 명의 장교와 사병 120명의 사상(死傷), 그리고 차량 파손 여섯 대였다.
상황실은 벌컥 뒤집히고 컴퓨터(계산병)들은 거의 얼이 빠졌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 봐도 연대 최종 지원 사격 요청 지점의 좌표는 그곳임에 틀림없었다. 결국 지원 연대에 문의한 결과, 연대는 진공 작전에 그 지역에 대한 포격 중지 요청을 AM 망으로 날렸다고 회신했다 그렇다면 그 전문을 처음 접수한 AM이나 그걸 조립한 암호병 박 상병과 상황실 사이에서 무슨 이상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걸 확인하자 이 중위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한 이십 분 전에 이 중위는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 부은 박 상병이 멍하니 v―34가 장치된 박스카에 기대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때 마침 RC ― 292 안테나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그리로 달려가던 길이어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었다. 이 중위는 급히 박 상병을 찾아보았다. 박 상병은 아직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박 상병,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저는 이 전문을 전하러 상황실로 뛰어갔습니다.”
박 상병은 아직도 문제의 전문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전하지 않았나?”
“도중에 본부 부관 소위님을 만났습니다.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어요…….”
“무엇 때문에?”
“철모도 안 쓰고 위장망을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박 상병은 주로 박스카 안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전투 복장에 소홀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라도 그 전문은 전했어야 하지 않나?”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다시 자기를 노려보았다고 주먹과 발길이 계속 날아들었으니까요.”
그런 박 상병의 두 눈에는 은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입술은 좀 전보다 더 흉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계속 맞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만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나 스스로가 너무도 처참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 이십 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기어이 박 상병의 목이 잠겨 왔다. 이 중위는 그와는 더 이상 얘기가 될 것 같지 않아 심 소위를 찾아 나섰다.
심 소위는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비정규 사관학교 출신으로 금년 봄에 임관된 이른바 ‘신삥 소위’였다. 군인으로는 대개 충실한 편이었는데, 계급을 지나치게 따지는 게 흠이어서 처음에는 마흔이 넘는 하사관들까지 함부로 다루다가 물의를 빚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차차 실무를 경험하면서 그들에게는 다소 부드러워졌지만 일반 사병들에게는 여전히 엄하고 거칠게 대했다. 특히 그런 그의 엄격함은 참모부의 대학 출신 사병들에게 심해, 그들 중 한 번쯤 심 소위에게 당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강 병장은 그 원인을 심 소위의 ‘대학 콤플렉스’로 분석했는데, 그 예외 중의 하나가 박 상병이었다. 나이가 나이인 데다, 암호병이란 직책이 원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 병장은 오히려 그 점을 더 염려했다. 그것은 박 상병이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대학이 심 소위가 입대하기 전에 두 번이나 낙방한 바로 그 대학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강 병장의 판단이 옳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결과는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심 소위는 마침 px 차 근처에서 동기인 박 소위와 깐포도 캔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어이 심 소위, 나 좀 봐.”
“웬일입니까? 통신장교님.”
심 소위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박 상병 일이 어떻게 된 거야? 영창 가게 됐잖아?”
“아, 그 새끼요? 영창 가야 싸죠. 하두 복장이 엉망이고 군기가 싹 빠졌길래 몇 대 줘박아 보내려 했더니, 아 이게 째려보잖아요? 그리고 나중에는 숫제 징징 울며 기어 붙는 거예요. 그래서 좀 짓밟아 버렸죠.”
“그래도 급한 용무로 가는 사람을…….”
“그 새끼가 말하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터진 후에라도 뛰어갈 일이지, 기집애처럼 쿨쩍 거리기는.”
“그래도 나이 든 사람을 ㅡ 좀 심했지 않나?”
이 중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심 소위는 조금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병신 새끼, 나이 처먹었으면 지가 처먹었지. 一 미쳤다고 서른이 되도록 자빠져 있다가 이제 오기는…… 억울하면 새벽밥 먹고 군대 올 일이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지다 늦게 끌려온 그런 새끼 설움 받아 싸죠. 지가 대학원을 나왔으면 나왔지. 아니꼬워서…….”
“심 소위, 사병들에게 너무 그러는 거 아냐. 이게 실전이라면 뒷총 맞는 수가 있어.”
“흥, 이게 실전이라면 그런 같잖은 새끼는 당장 즉결입니다.”
드디어 이 중위도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야, 이 새끼 정말 악질이구나.”
이 중위의 주먹이 날랐다. 심 소위의 고개가 젖혀지며 철모가 언 땅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심 소위의 기세는 여전히 수그러질 줄 몰랐다.
“이거 왜 이러슈? 이 중위님. 사병 애들 보는 데서 창피하게…… 말루 합시다, 말루.”
“뭐 이 새끼야, 말루? 개발에 다갈이다. 임마, 너 같은 놈이 장교라는 건 대한민국의 수치다.”
그러나 심 소위도 지지 않았다. 연신 날아오는 이 중위의 주먹을 두 손으로 막으며 악을 쓰는 것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슈, 통신장교님. 철모가 빵꾸 나게 해 먹을 것도 아니면서…… 못난 자식새끼 편력 드는 애비도 아니고…….”
그러나 함께 있던 박 소위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수송장교의 제지로 소동이 길지는 않았다.
그날의 숙영까지는 두 번의 이동이 더 있었다. 우군의 재반격이 순조로운 탓이었다. 그러나 숙영지와 정규 가설을 끝내고 지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돌아온 이 중위에게는 또 다른 성가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선 감시조가 야전선을 걷어 가던 마을 아이들을 잡아 혼내 준 것이 말썽을 일으켰다.
“보쇼. 말똥(무궁화) 두 개를 달았으면 눈에 뵈는 게 없소? 철모 르는 애들이 좀 잘못이 있었기로 잘 타일러 보낼 일이지. ― 개 패듯 팰 건 뭐요? 걔들이 빨갱이 새끼요? 너무 그러지 마쇼. 나도 내 한 몸 나라에 바친 일급 상이용사요.”
이 중위가 급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CP 막사로 달려가니 왼팔이 날아가고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 50대의 남자 하나가 목발로 바닥을 땅땅 쳐 가며 대대장에게 따지고 있었다. 대대장은 무척 난처한 표정이었다. 민폐는 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통제관의 체크 사항이었다.
“통신장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힐끗 통제관을 보며 이 중위에게 그렇게 묻는 대대장의 표정은 차라리 ‘통제관이 납득하도록 잘 설명해.’라는 명령이라는 게 옳았다. 그러나 이 중위는 해명할 틈이 없었다. 대뜸 그 남자가 이 중위를 보고 퍼부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통신장교야? 이봐, 새파란 사람이 그러면 못써. 왜 남의 아이를 탕탕 치는 거야. 그렇게밖에 부하 교육을 시킬 수 없어?”
이건 숫제 반말이었다.
“가서 그놈 데려와. 우리 아이 친 그놈 말이야. 내 이 갈쿠리로 눈깔을 뽑아 놓고 말 테니.”
그는 이 중위의 눈앞에다 왼손의 의수(義手)를 흔들어 댔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 놈이야. 지금 정신없이 앓아누웠어. 치료비 내놔. 연천에라도 데려가 입원시켜야겠어.”
그러자 대대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럼, 이 중위. 우선 군의관 데리구 아이나 한번 보구 오지.”
그러자 그 남자는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펄펄 뛰며 악을 썼다.
“얕은 수작 부리지 말어. 링거나 한 병 맞히고, 아스피린 몇 알 먹인 뒤에 어물쩡 뜨려고? 어림없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나 아니야.”
그는 은근한 협박까지 곁들였다.
“내 비록 지금은 병신이지만 이래봬도 백선엽이 따라 혜산진까지 갔다 온 용사야. 너희 사단장 김 소장? 철의 삼각지에서 피 함께 흘린 전우야. 전화 한 통화면 끝나. 날 무시보지 말어.”
그때였다. 뒤늦게 불려온 선임하사가 갑자기 꽥 고함을 질렀다.
“영감 이거 조용하지 못해? 여기가 어디 제집 안방인 줄 알어? 이 순 사기꾼 같은 영감쟁이가”
일순 그는 움찔했다. 그걸 보며 선임하사는 자신 있게 대대장에게 말했다
“속지 마십쇼. 대대장님, 이 영감 몽땅 거짓말입니다. 뭐, 일급 상이용사라구요? 어디서 불발탄 분해하다 팔다리 날리고선…….”
그러자 갑자기 그 남자가 악을 썼다.
“야, 넌 뭐야. 네가 뭘 안다고 이 개 같은 새끼야.”
그러나 선임하사는 눈도 깜짝 안 했다.
“자, 여기 전화 있다. 내 사단장실 대 주지. 뭐 함께 피 흘린 전우? 정말 웃기네. 늙어도 곱게 늙어.”
그러고는 다시 대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대대장님, 더 이상 상대하지 마십쇼. 전문적으로 훈련 부대 티 뜯고 다니는 치죠. 5년 전에도 여기 왔다가 이 비슷한 일로 쌀 두 가마 뜯겼습니다. 어이 김 상병, 이 일병, 이자 끌어내.”
사내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끌려 나가자 대대장이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
“걱정 마십쇼. 저런 치들은 한번 본때를 봐야 해요. 약하게 뵈면 끝이 없습니다.”
임 상사는 이어 그들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포 사격이 있으면 사령부보다 먼저 아는 친구들이죠. 사격 중 십 분 휴식이 있어도 그 시각까지 정확히 알아 탄피나 불발탄을 주워갑니다. 뿐만 아니라 야전선을 걷기도 하고, 자동차 부속을 빼가기도 하지요: 아무리 중요한 걸 잃어도 저치들한테 구하면 얻을 수 있지요. 한번은 포대경을 잃어 쌀 한 가마니와 바꾼 적도 있습니다. 거짓말 좀 보태면 저치들 집 하나만 뒤져도 소대 하나분의 장비는 넉넉히 나올 겁니다… ….”
정말로 그 남자는 부대가 철수할 때까지는 부근에 얼씬도 않았다
그 밤에는 게릴라의 출현이 여섯 번이나 있었다. 사병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장교들도 대부분은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말았다. 좀 이상한 것은 게릴라가 주로 통신 차량 부근에서 출몰한 것과 게릴라의 출현이 있을 때마다 어디선가 심 소위가 나타나 통신병을 들볶아 대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게릴라를 본 사람은 없었고, 통제관도 상황 부여에만 만족하는 듯 피해 판정에는 관대했다. 여섯 번의 게릴라 출현에도 불구하고, 피해 판정은 무선 차량반파와 경상 세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총중에도 후일 오래오래 얘기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하나는 후방 OP로부터 심 소위에게 날아온 긴급 전문이었다. 짧은 음어 전문이었는데 무전병이 급히 해역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영자 × × 그리워, 오(吳).
― 나도. 권(權) -.
이번 작전에 참가하지 못해 심심해 죽겠다는 O1의 오 소위와 O2의 권 소위가 동기 심 소위에게 보낸 전문이었다.
― × 대가리 근지럽거든 그걸루 총구 수입이나 해라 ―.
심 소위의 답신이었다. 물론 이들의 교신은 고위충이 탑승한 비행기의 이륙 시간을 그저 자모분철법(子母分綴法)으로만 날린 이웃 사단의 무전병과 함께 황새봉의 무전 감식반에 잡혀 후일 처벌을 받았다.
그다음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교환대 김 일병의 것이었다.
그날 밤 세 시경 돌연 그는 각 참모부를 동시 호출한 후 외쳤다.
“왜군이 북상한다. 이여송(李如松)을 격파하고.”
기이하게도 그는 그날따라 임진왜란 때 참전했다가 벽제관에서 죽은 명나라 병사의 전화를 받았던 듯했다. 그러나 이상히 여긴 상황병이 교환대 막사로 달려갔을 때 그는 교환기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한편 잦은 게릴라 출현으로 새벽까지 잠을 설친 이 중위는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걸 보고서야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폭 잘 수 있는 박스카로 갔다. 그러나 그 창틀 밑을 지나던 이 중위는 그 차량 안에서 들려온 무슨 다툼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박 상병 홀로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강 병장과 함께였다.
“박 형, 참아요. 그거 이리 내고. 대신 내가 해 주겠소. 내 반드시 놈의 골통을 바수어 놓을 테니…….”
강 병장은 박 상병을 상태로 무언가를 간곡히 만류하고 있었다.
“강 형은 상관 마쇼. 이건 내 일이오. 반드시 내 손으로 해야할…….”
“박 형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저급한 감정의 논리요. 현명해야지요. 나를 믿어 주쇼. 나는 아무도 상하지 않고 보복해 주겠소.”
“강 형이 무슨 수로…….”
“조금 전에 방법을 생각해 냈소. 두고 보쇼. 내일 아침에도 녀석이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가.”
무슨 일이 또 있었구나, 생각하며 이 중위는 차량을 돌아 박스카 뒷문을 열었다. 무엇인가를 서로 붙잡고 승강이를 벌이던 두 사람이 놀라 떨어졌다. 강 병장의 등 뒤로 무언가가 번쩍하며 숨겨졌다.
“강 병장 뭐야? 등 뒤에 감춘 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소답지 않게 침착을 잃은 목소리였다. 이 중위는 강 병장의 감춘 손을 앞으로 끌어당겨 보았다. M-16 단검이었다. 그걸 보고 이 중위가 꽥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짓들이야?”
“…….”
“심 소위지?”
그러자 그새 약간 여유를 회복한 강 병장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심 소위님이 좀 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또 박 상병을 짓밟고 갔습니다.”
“왜?”
“게릴라가 출현했는데도 차 속에 가만히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이 중위도 얼굴에 열기가 확 치밀었다. 바로 심 소위 자신의 발길질 때문에 박 상병은 거동조차 불편했던 터였다. 어제의 오폭 사건으로 징계를 당하게 된 심 소위가 이 중위의 변호로 무사하게 된 박 상병에게 고의적인 화풀이를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중위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했다. 그는 역시 한 사람의 육군장교였다. 심 소위의 소행은 충분히 가증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단이 고수해야 할 근본적인 질서와 위계(位階)였다. 그런데 조금 전 그가 엇들은 것은 바로 핵심을 폭력으로 부인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가 아무리 믿고 사랑하는 과원들이라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중위는 짐짓 험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 이 칼로 찌르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박 상병이 즘 흥분한 것 같기에 제가 달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 말은 순전히 박 상병을 달래기 위해 지어낸 겁니다.”
어느새 이 중위가 자기들의 얘기를 엇들은 걸 간파한 강 병장이 자기가 박 상병에게 한, 아마도 틀림없이 실현될 약속까지도 천연스레 농치고 있었다.
“염려 마십쇼, 과장님. 저나 박 상병이나 철없는 짓 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집단의 원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구요.”
그러나 이 중위는 더욱 험한 얼굴로 그런 강 병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이 건방진 새끼들. 사병이면 사병답게 처신해. 기왕 사병으로 와 놓고 굳이 사병 대접을 받지 않으려 드는 것은 꼴불견이야. 그리고 ― .”
이 중위는 두 사람을 천천히 번갈아 보며 낮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일로 또 다른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 두 놈은 모두 영창이야. 시시한 사단 영창이 아니라, 군법회의에 부쳐 남한산성으로 보내겠어.”
그런데 이 중위가 아침 아홉 시경 다시 눈을 떠서 처음으로 부딪친 것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질의 사건이었다. 선임하사의 조심스러운 보고에 따르면 전입 온 지 두 달도 못 된 천 일병이 밤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충청도 어느 두메에서 왔다는 천 일병은 어떻게 현역 입대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학력과 지능이 낮은 유선병이었다. 따라서 마흔 명 넘는 과원 중에 섞인 천 일병의 존재는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지만, 이 중위에게는 그를 특별히 기억할 일이 하나 있었다.
약 한 달 전 어느 된서리가 내린 아침, 우연히 교환대를 지나던 이 중위는 양지바른 벽에 기대서서 홀로 쿨쩍이는 천 일병을 만났다. 이 중위가 다가가 원인을 묻자 그는 갑자기 복받친 듯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며 떠듬거렸다.
“벌이…… 다 얼어 죽겠네유. 엄씨(어머니) 혼자 ― 가을걷기가 잘될란지유 섬께밭에 보리 파종도 해얄 거인디…….”
뒤에 강 병장을 통해 들었지마는 그는 산촌에서 전답 몇 마지기에 벌 몇 통을 치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
이 중위는 왠지 불안한 마음으로 일방 수색조를 보내고 일방 포로 명단을 확인하면서 진지 이동 때까지 초조히 기다렸다. 그러나 천 일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D+2일. 대대적인 우군의 반격 작전이 전개됐다. 작전 초에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아군 390연대는 대오를 정비해 적을 우회, 적후방 사 마일 지점의 무명고지에 돌출했다. 조공을 맡은 392연대는 적의 좌익을 충실히 견제했고, 정예 391전투단의 주력 일부는 임진강 도하 작전에 성공 적진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작전 초에 무리하게 병력을 산개(散開)한 적은 서서히 봉괴돼 가고 있었다.
이 중위의 야포대는 반격 이 개시되면서 더욱 바빠졌다. 여기저기서 화력 지원 요청이 들어오고 종합화망형성(綜合火網形成)에도 참가해야 했다. 그날 그들은 낮 동안만 여섯 번 진지를 이동했고 여덟 번 포를 방렬했다. 실사격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이틀의 야전 체험은 그런 중에도 이 중위에게 어느 정도 전쟁을 객관적으로 음미하고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상한 것은 연 사흘째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산발적 인 게릴라 침투 외에는 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포병 진지에 적의 보병이 나타난다면 볼 장 다 본 셈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왔지만, 그것은 이 중위에게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제 우리의 전쟁은 적을 볼 수 없는 것이 되었구나…….”
적을 볼 수 없다는 것 ― 거기에 현대전의 잔학성이 있는 것 같았다. 항병(降兵)을 도살한 항우는 그로 인해 천하를 잃었고 포로를 학대한 나치나 일제의 장군들은 전범(戰犯)으로 처벌되었다. 그러나 포탄이나 미사일의 발사를 명 한 현대전의 장군들에게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전자는 적을 보았는데 비해 후자는 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날아간 포탄이나 미사일은 분명 항거의 의사나 능력을 묻지 않고 대량으로 적군을 도살하였는데도.
다음 또 하나 이 중위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전의 정묘한 메커니즘이었다. 그들은 바쁘게 이동하고 포를 쏘았지만, 기실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공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일정한 거리를 이동해 이미 핀이 꽂힌 지도상의 한 지점으로 역시 일정량의 포탄을 퍼붓는 것은 피스톤의 왕복이나 톱니바퀴의 회전같이, 전쟁이란 거대한 메커니즘의 부분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각 다른 병과는 그들대로 주어진 그들 몫의 부분 동작에 열중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문득 이 중위는 이상하게 왜소해진 개인과 소집단을 보았다.
그런데 이 중위가 학훈단 동기인 남 중위를 만난 것은 제6전개 진지의 연대선 가설을 하는 도중이었다. 공병 병과인 남 중위는 4분의 3톤 차량에 몇 명의 사병을 태우고 어디론가 출동하다가 가설 중인 이 중위를 보고 차를 세웠다. 반가운 인사 끝에 이 중위는 언뜻 그 차량 뒤에 실린 몇 통의 야전선을 보고 무심히 물었다.
“공 대도 가설을 하나?”
남 중위는 빙긋 웃었다.
“왜 공병은 가설을 하면 안 되나? 이게 다 네놈들 포가 백발백중하라고 하는 짓이다.”
“무슨 말이야?”
“지금 천마고지로 가는 길이다.”
“천마고지? 거긴 내일 우리의 최종 화집점인데…….”
“그러니까 손 좀 봐 두러 가는 거야. 하기야 실제로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지만…….”
“그래서 공병대가 뭘 하겠다는 거야?”
“멍청한 새끼, 이게 순 형광등이군. 고위층이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화집점에 포탄이 제대로 날아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 어쨌건 네놈들 포나 잘 유도해. 통신이 포병의 눈깔이라니까.”
그리고 남 중위는 손짓으로 무엇이 펑 터지는 듯한 흉내를 냈다. 그제야 이 중위도 그가 내일의 사단 화집점에 설치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 중위가 진지로 돌아오니, 사병들이 전부 진지 앞 공터에 집결해 있었다. 인사과장의 안전 교육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사상이 있었고, 또 의무대나 군수과에 의해 실제와 동일하게 처리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 통제관의 판정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적군의 점령 전에 그 지역을 빠져나가지 못했다든가, 적에게 위치가 노출돼 부대가 집중 포화를 받았다든가, 게릴라의 침투를 몰랐다거나 등 그런데 작전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갖가지 안전사고가 발생해 상당한 실병 력(實兵力) 소모를 가져왔다. 교육은 그래서 실시되는 것 같았다.
인사과장이 안전사고의 사례로. 든 것 중 가장 처참한 것은 설상 파카를 입고 술에 취해 논두렁 밑에 쓰러져 자던 보병이 탱크에 깔려 버린 사건이었다. 설상 파카의 위장 효과 때문에 탱크병이 주위에 쌓인 눈과 그 사병을 구별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음은 기름에 젖은 옷을 입고 불을 쬐다가 불이 붙어 중화상을 입은 수송병과 메틸알코올을 에틸로 잘못 알고 포도당에 타 마신 의무병, 그리고 동사가 둘, 차량 사고가 여럿 있었다. 통신병에 관계된 것으로는 GRC - 19를 조작하다 감전 사고가 난 것과 엉뚱한 가스 중독이 있었다. 가설 중이던 유선병 다섯이 산중에서 아직 따뜻한 숯막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들어가 잤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미련하게도 그들은 숯막의 모든 출입구를 판초 우의로 봉하고 잠들었는데 결국 무사히 깨어난 것은 그중에서 둘뿐이었다.
이 중위가 알기로 아직 대대 내에서는 별 사고가 없었다. 그런데 인사과장은 그 교육 끝에 끔찍한 차량 사고 하나를 전했다. 그날 오후 대대 부식 수령차가 전복돼 뒤에 탔던 취사병이 즉사하고 선임 탑승했던 수송부 문 중사와 운전병이 각각 중경상을 입은 사고인데 그것을 전하는 헌병대의 전통(電通)은 세 사람이 모두 취한 상태에서였다고 했다.
인사과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 중위에게 문득 작전 첫날 상황실 박스카 안에서 꿈 얘기를 하던 문 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 놓고 한번 사라진 후 다시는 찾을 길 없던 그 여인이 꿈속에서 그를 찾아온 것은 닥쳐올 이 끔찍한 사고의 불길한 전조나 아니었던지.
“전쟁은 언제나 마지막이 치열했었지.”
그 밤 세 번째의 진지 이동을 하면서 이 중위는 혼자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겨울밤 하늘에 조명탄이 눈부시게 피었다 졌다 하고 있었다. 우군은 점차 적의 주력을 압박하여 마지막 섬멸의 단계로 돌입하고 있었다. 지금 이 중위의 야포대도 내일의 그 통쾌한 섬멸전을 치르기 위해 마지막 숙영지로 이동 중이었다.
이 중위는 힐끗 전면을 살폈다. 방금 타오르는 조명탄 아래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는 보라보(B포대)의 탄약차(彈藥車)가 뚜렷이 보였다. 그걸 보며 그는 안심한 듯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통상으로 이동 간 본부 차량의 선도(先導)는 작전과장의 지프차가 맡아왔는데, 그 밤은 어떻게 됐는지 영문도 모르게 이 중위가 탄 AM 박스카가 앞장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도 한 장 없이 선도하게 된 게 약간 꺼림칙했지만 조명탄이 계속 터지고 있었으므로 이 중위는 곧 악심을 했다. 백 미터 남짓 앞서가는 브라보의 탄약차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탈이었다. 원래 조명탄은 이 중위를 위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산 너머 작전 중인 보병을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대대가 삼십 분쯤 이동하자 더 이상은 뜨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덮친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이 중위는 그만 브라보의 탄약차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이 중위는 운전병을 재촉해 행군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오 분이 지나도 십 분이 돼도 앞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중위가 탄 차는 더욱 속도를 냈다. 여전히 앞차는 보이지 않고, 대신 영문을 모르는 후미 차량들로부터 항의하는 무전만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보병의 행군에서도 그렇지만 차량 행군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상한 현상이 있다. 앞차가 시속 50마일로 달리면 여남은 대 뒤의 차량은 육칠십 마일을 내야 한다. 그러나 당황한 이 중위는 더욱 속도를 냈고 투덜거리면서도 본부는 미친 듯이 뒤따라왔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전면에 약간 긴 교량이 나타나고 멀리 도회의 불빛이 보였다. 연천(連川)이었다. 아차, 싶어 차를 세우고 곧 달려온 작전과장과 좌표를 확인해 보니 부대는 목표에서 무려 삼십 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헤매고 있었다. 뒤따라온 대대장이 빈 권총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자식, 쏘아 버릴라. 뭘 믿고 달리긴 달려, 이 새끼야.”
대대장의 군화가 이 중위의 정강이에 사정없이 날아왔다. 다행히 중요 작전이 끝나고 목표지가 단순한 숙영지여서 그 이상의 책임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중위가 거기서 치른 곤욕은 이만 저 만한 게 아니었다.
“ROTC가 군인이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더라, 이 망할 자식.”
결국 대대장이 1호 차에 작전과장을 태우고 직접 선도해서 대대가 숙영지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은 새벽 두 시 경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포 방렬을 마치고 숙영 준비로 들어갔다. 그러나 겨우 취침을 시작한 그들이 선잠도 들기 전에 또다시 게릴라가 출현했다. 어제와 같이 자취도 없고 피해도 없었지만 사병들에게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릴라였다. 별수 없이 본부는 병력을 삼개 조로 편성하여 번갈아 경계에 임하게 했다. 그리고 경계조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에게는 취침 명령이 하달됐지만 왠지 사병들은 잠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낮에 요령껏 자둔 데다 지난밤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아예 취침을 포기한 듯했다. 대신, 인사과장이 엄격히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은밀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중위 역시 그 밤은 잠자지 못했다. 침구가 준비되는 대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대대장에게 걷어차인 정강이뼈가 욱신거리는 데다 바쁜 낮 동안에 잊고 지냈던 몇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떠올라 잠을 날려 버린 까닭이었다. 그 첫 번째는 천 일병의 일이었다. 천 일병의 탈영이 명백한 이상 그 문책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데 그는 천 일병의 신상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물론 원진지의 행정반 서랍에는 과원들의 신상명세서가 들어 있으나, 그가 돌아가 그걸 읽고 확인할 만큼의 시간 여유가 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다음은 교환대의 김 일병 문제였다. 사람들은 어젯밤의 일을 폭소로 넘겼지만 이 중위에게는 그게 현저한 증상 악화로 여겨져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그 새벽 박 상병과 강 병장의 일, 그 후가 어떻게 진전됐는지 궁금했다. 결국 이 중위는 다시 일어나 강 병장의 텐트를 찾아나섰다. 그를 만나면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강 병장의 텐트에서도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고체 연료 위의 반합에서는 무엇이 기분 좋게 끓고 있었고 소주도 몇 병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강 병장은 없고 대신 유선반장 양 하사와 병기과의 ‘예’ 병장이 박 상병과 함께 있었다.
“여기는 항상 따습구나. 끓는 게 뭐야?”
“개구립니다.”
‘예’ 병장이 약간 익살맞은 얼굴로 대답했다.
원래의 성이 최(崔) 인 ‘예’ 병장의 ‘예’는 ‘예수’를 줄인 것인데, 그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재미있는 그의 부활 소동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 위장 풀을 베러 간 그는 산에서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부대로 가져오는 도중에 그 뱀의 목을 맨 끈이 느슨해진 걸 보고 한 손에는 위장 풀을 든 채 이로 그 끈을 죄려다가 그만 뱀에게 입술을 물리고 말았다. 입술이 물려 지혈을 할 길이 없는 그가 의무대로 업혀 갔을 때는 이미 뱀독이 온몸에 퍼져 목 부근의 임파선 주변이 사람 머리보다 더 굵게 부어 있었다. 대대는 급히 통합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얼마 후 날아든 것은 사망 통지였다. 흔하지 않은 일이라 대대는 밤새워 사망 처리를 하고 며칠 후 연락을 받고 온 부모는 통곡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석 달 만에 그는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다.
그런 착오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은 부활이었다.
“개구리?”
“주간 제4진지서 잡았습니다.”
“겨울에 무슨 개구리가 있나?”
“얼음을 깨고 지렛대로 큰 돌을 들치면 물개구리가 수십 마리씩 모인 곳이 있죠. 여섯 개째 겨우 잡은 겁니다. 재수 좋으면 뱀도 있는데 ― .”
“뱀한테는 질렸을 텐데…… 하여튼 몬도가네로군.”
“아닙니다, 과장님. 잡숴 보십쇼. 맛도 맛이지만 대단한 스태미나 식이죠.”
“벌써 스태미나 식을 찾는 걸 보니 너도 다된 놈이다.”
“아니죠. 스태미나란 그저 ― 다다익선(多多盜善)이니까요.”
얘기는 주로 ‘예’ 병장이 하고 있었지만 박 상병도 새벽의 그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눈두덩이며 입술의 부기도 거의 빠져 있었다. 이 중위는 다소 가벼워진 기분으로 박 상병을 향해 물었다.
“강 병장은?”
“지금 경계 나가 있습니다.”
“교환(대) 근무를 하면 추운 데 나가서 떨지 않아도 될 텐데…….”
“유선병 김 상병이 몸이 좀 불편해 바꿔 준 겁니다.”
그렇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 중위는 강 병장을 찾으러 나갈까 망설이다가 거기서 기다리기로 하고 양 하사가 주는 술잔을 받았다.
“교대 시간이 언젠가?”
“이제 한 삼십 분 남았습니다.”
강 병장은 왠지 교대 시간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을 비우며 사병들의 잡담을 듣고 있던 이 중위는 불쑥 박 상병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희미한 꼬마전구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 늙어 보였다.
“박 상병, 새벽의 일 기분 나빴나?”
이 중위는 부드럽게 물었다. 사실 그 정도의 폭언도 그들에게 한 것은 그 새벽이 처음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박 상병은 담담하게 대담했다.
“너 같은 사병, 참으로 부담이다. 나이도 있고, 학식도 있다. 아마 나 이상으로.”
“설령 그렇다 해도 장교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군대에 대한 이해도…… 부담 갖지 마시고 여느 사병처럼 대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이 중위는 돌연한 취기와 함께 일종의 자신 같은 걸 느끼며 언제부턴가 그들에게 하고 싶던 말을 천천히 시작했다.
“박 상병이 알다시피, 나는 자연과학을 전공했어. 따라서 집단이라든가 인간의 심리 같은 것에 대해 밝진 못하지만…… 그리고 또 박 상병이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모르지만…….”
“말씀 계속하십시오.”
“군대가 아주 특수한 사회란 생각 ― 박 상병도 그런가?”
“예, 약간은.”
“그런데 나는 달라. 이건 오히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해. 그걸 특수하게 만든 것은 어떤 사회의 왜곡된 의식 구조나 관찰자의 편견 같단 말이야.”
“…….”
“박 상병도 입대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나?”
“예, 대체로.”
“그런데 나는 도무지 그게 이해 안 돼. 먼저 자유의 문제. 내가 보기에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입대 전에도 우리는 분명 복종해야 할 권위가 있었고, 때로는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시인해야 할 규율이 있었어. 외관은 달라도 본질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복종하고 시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어. 그러고 보면 결국 달라진 것은 우리의 식사와 의복이 좀 거칠어지고 주거 환경이 좀 딱딱해졌을 뿐이야.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유일한 척도는 될 수 없
지…….”
“…….”
“결국 입대와 함께 우리에게는 갑작스러운 의식의 과장이 일어난 거야. 바깥의 것은 무조건 크고 화려하고, 안의 것은 무조건 작고 초라하다는 식의 ― 그리고 그것은 너희들도 일부 인정하고 있더군. 집에 금송아지 안 매 둔 놈 없다는 얘기 말이야.”
“…….”
“마찬가지로 ― 우리가 제대를 한다는 것, 그것도 너희들이 믿는 것처럼 전혀 새로운 세계에로의 출발은 아닌 것 같아.”
“아마…… 반드시는 아닐 테지요.”
“아니야, 전혀. 그것 역시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여기보다 더 좀 관례가 다른 부대로 전입을 가는 정도에 불과해. 이 시대에는 이미 순수한 개인이란 존재할 수가 없어. 어디를 가든 우리는 집단에 소속하게 되어 있고, 그 집단은 또 나름대로의 위계와 규율을 우리에게 강요할 거야. 예를 들어 우리가 취직을 한다는 것은 대대장이나 사단장이 전무나 사장으로 바뀌는 정도야. 명칭은 감봉이나 징계 따위로 다르지만, 그곳에도 빳다와 기합 같은 게 있지. 그리고 때로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체험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가혹하고 철저해.”
“그렇지만 거기에는 선택의 자유라든가 창의의 개발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선택의 자유라고? 그렇지만 한 집의 가장으로서 생계가 걸린 직장을 팽개치기가 이곳에서 탈영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 같은가? 또 수천수만의 종업원이 있는 회사에서 한 말단 사원의 창의라는 것이 포대 소원 수리보다 대단할 거 같은가?”
“…….”
“물론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나가면 곧 취직을 해야 하는 내 처지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예외는 없을 거야. 죽거나 신(神)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은 아무도 홀로일 수가 없으니까.”
“…….”
박 상병은 처음부터 별로 이 중위의 화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좀 전부터 무언가 초조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것도 모르고 이 중위는 계속 자기의 논리에 열중해 있었다.
“너희들은 장사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거기는 또 고객이란 왕이 있어. 불특정 다수의 집단이지만 그들의 불매(不買)는 너희가 이곳에서 받은 그 어떤 제재보다 더 강력할지도 몰라. 부유한 부모를 가져서 외부적인 집단에 속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그때는 바로 그 부모 자체가 규율이고 권위인 거야…….”
그 무렵이었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요란스러운 폭음이 났다. 게릴라의 모의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박 상병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게릴라 출혀어언 ― .”
“게릴라 출혀어언 ― .”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양 하사와 ‘예’ 병장도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소란스러움은 곧 여럿의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이 중위가 의아해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먼저 달려갔던 양 하사가 헐떡이며 텐트로 돌아왔다.
“과장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강 병장이 심 소위님을 쳤습니다.”
“뭐?”
“심 소위님이 강 병장에게 개머리판으로 맞아 기절했어요. 머리가 터지고 피가 몹시 흐릅니다.”
이 중위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 양 하사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벌써 군의관이 나와 심 소위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심 소위는 그새 깨어났으나 아직 정신이 잘 돌아오지 않는 듯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어? 강 병장.”
이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 곁에 멍청히 서 있는 강 병장에게 물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데 누가 나다나 모의 폭탄을 던지길래 게릴라인 줄 알고 한 대 쳤더니 ― 심 소위님이었습니다.”
강 병장은 정말로 겁에 질린 듯 떠듬거렸다.
“한 대야? 이 새끼야, 철모가 날아간 후에도 두 번이나 더 쳤잖아? 아이쿠.”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심 소위가 악을 쓰다가 상처가 쑤시는지 신음을 냈다. 이 중위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모의 폭탄은 어디서 났나?”
“저 새끼가 순 지어낸 말입니다. 게릴라가 도망친 후에 내가 달려갔는데, 아이쿠”
“아닙니다. 분명히 심 소위님이 던지는 걸 보았습니다. 주머니에 더 있을 겁니다.”
갑자기 끼어든 강 병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질린 것이었지만, 강경하고도 확신에 차 있었다. 이 중위도 왠지 강 병장의 말이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왔는지 함께 있던 작전과장 장 대위가 심 소위를 보며 날카롭게 명령했다.
“심 소위, 주머니에 든 것 전부 꺼내 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새끼가 지어낸 말입니다…….”
그러나 어딘가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확인해야겠다. 강 병장이 포상 휴가를 가야 할지 군법회의에 넘겨져야 할지 말이야.”
장 대위는 직접 호주머니 검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심 소위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때 누군가가 둘러선 사병들을 헤치고 나타난 장 대위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확인할 것 없다, 작전과장 모의탄은 내가 준 거니까. 그리고 저 사병은 분명히 모범 사병이다.”
작전 초부터 CP에 상주하는 군단 통제관이었다. 심 소위는 묘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황 부여를 대신해 준 건 고맙지만 ― 자넨 좀 심했어.”
통제관은 심 소위를 비웃는 듯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역시 나지막이 말했다.
이 중위는 무엇으로 머리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강 병장은 저만치서 무슨 거인처럼 당당히 서 있었다.
심 소위는 그날 밤 뒤통수를 일곱 바늘이나 꿰매고 이튿날 날이 밝는 대로 원진지로 후송되었다. 포경수술을 받고 며칠 되지 않아 작전에 참가했다가 수술 자리가 터져 버린 하사 하나도 심 소위와 함께 돌아갔다
심 소위의 수술을 지켜보고 돌아온 이 중위는 그날 묘한 갈등을 경험했다. 분명 강 병장의 정당함을 확인했고 또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지 못할 분노가 부글거렸다. 아득한 무력감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강 병장의 뒷모습을 환영 속에서 바라보다가 다시 초라하게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심 소위를 떠올리면서 이상한 모욕감으로 몸을 떨었다.
‘녀석은 교활한 사냥꾼처럼 덫을 놓고 숨어서 기다렸다. 멋모르고 심 소위가 걸려들자 ― 개 패듯 처 넘겼다…….’ 그러나 이 중위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안절부절했다. 그렇게 이 중위가 잠들지 못하고 있을 때, 돌연 CP에서 예기치 않은 부름이 있었다.
이 중위가 여전히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Cp 막사로 들어가자 그때껏 잠들지 않고 있던 대대장이 험악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통신장교, 도대체 부하 통솔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 중위는 그게 강 병장 얘긴 줄 알았다. 일순 이 중위의 머리는 눈부시게 회전했다. ‘어쨌든 그는 나의 부하고, 심 소위는 당해 마땅한 짓을 했다. 거기다 일은 일단락됐고, 설령 강 병장의 고의를 증명하려고 해도 그가 부인하는 이상 아무런 증거가 없다…….’
이 중위는 마치 지금껏 준비라도 해 온 듯 강 병장을 변호하고 나섰다.
“심 소위가 모의탄을 던지니까 게릴라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벌컥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냐. 그 뭐야 ― 어제 행방불명된 천, 천재룡 일병 말이야.”
“네?”
“이 중위는 그 녀석 신상이나 파악하고 있어?”
그제야 이 중위는 천 일병이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아는 대로 친 일병의 신상을 떠듬거렸다.
“그것뿐이 아니야. 녀석은 용두리에 붙들렸어.”
용두리는 DMZ 가까운 곳이었다.
“네?”
“짐작이 가나? 단순 탈영이 아냐. 월북 기도자로 붙들린 거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천 일병의 공허한 눈길과 바보스럽게 벌어진 입을 떠올렸다. 홀어머니를 위한 순수한 눈물도.
“하여튼 ― 이상이 보안대의 통보야. 그리고 또 그들은 참고인으로 자넬 소환했어. 내일 작전이 끝나면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해 둬.”
대대장은 성가신 듯 말을 잘랐다. 이 중위는 멍한 기분이었다.
“이제 가 봐. 멍청하게 섰지 말고. 그리고 내일 작전에는 살수 없어야 돼.”
어둠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D+3일. 작전 마지막 날이 밝아 왔다. 이 중위가 탄 사 분의 삼 톤 차량은 매운 새벽바람을 가르며 잠든 연천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이 중위는 지금 여섯 명의 숙달된 가설병과 무전병 하나를 데리고 출동 중이었다.
이번 작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날 오전 아홉 시에 개시될 천마고지의 점 령이었다. 기습에 실패한 적은 30마일 이상을 퇴각했지만 그 고지를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 인접 두 개의 무명고지와 더불어 여전히 연천평야를 장악한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군의 최종 목표는 바로 그 천마고지에 포진한 적의 주력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이 중위의 야포대도 사단 예하의 전 포대와 군단의 지원 포대, 그리고 공군기까지 동원되는 대규모의 선제 포격에 참가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 중위에게 문제가 된 것은 그 포격을 위한 OP선 가설이었다. 적의 철수 완료가 오전 여덟 시, 적과 잇대어 들어간다 해도 이 중위는 한 시간 내에 전장 6마일이 넘는 마일의 op선 둘을 가설해야 했다. 물론 몇 개 조로 나누어 구간 가설을 연결하면 가능한 시간이었고, 또 사전 준비도 충분히 돼 있었다. 무거운 야전선은 사전 답사 때 선로 근처의 민가에 맡겨 두었고, 중요한 매설 지점은 미리 땅을 파 두었다. 그러나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부담이 얼마 전 대대장의 깨우침 이후 무겁게 이 중위의 가슴을 늘러 왔다. 만약 어떤 실수가 있다면 아직도 상당히 남은 군생활은 틀림없이 괴로운 것이 될 터였다. 결국 이 중위는 모험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ㅇP선은 적의 주력에서 떨어진 곳인 데다 적은 철수 직전의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므로 적이 철수하기 전에 적지에 침투해 시간을 벌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서둘러 출동하는 이 중위에게는 이미 간밤의 여러 혼란은 흔적도 없었다.
날이 밝아 오면서 점차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적의 관측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자 갑자기 이 중위는 자기의 모험에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주었다. 황량하기만 했던 겨울 들판이 정답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느껴졌다. 도로변 곳곳에서 눈에 띄는 오분 저지선의 허옇게 서리 친 철조망 뭉치들도 무슨 화려하고 섬세한 화분처럼 보였다. 을씨년스럽게 보이던 블록 막사들도 고향의 초가들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는 문득 그 모든 것들을 애정으로 둘러보았다. 또다시 젊은 몸으로 이 벌판을 달릴 일이 있을 것인가. 그는 유월이 제대였고 별 커다란 변화가 없는 한 장학금을 얻어 쓴 기업체로 가서 복잡한 전자회로에 갇힌 채 나머지 생애를 보낼 것이었다.
때때로 우군의 자주포와 전차의 행렬이 요란한 캐터필러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미 퇴각 때의 불안하고 초조한 쇳덩이는 아니었다. 박격포를 멘 보병대와 무반동총을 거치한 지프차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아무 관련 없다는 듯이 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부착된 푸른 표지로 보아 몇 시간 내 그들의 화력은 불과 이 마일 안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이 중위는 다시 현대전의 정묘한 메커니즘을 실감했다.
갑자기 차량이 산길을 접어들면서 좁은 계곡 양면에 굵은 콘크리트 기둥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폭파 스위치를 누르면 굴러내려 이 도로를 차단할 장애물이었다. 그걸 보며 양 하사가 불쑥 말했다.
“이번에 전방에 와서 보니 남침 위험이라는 게 어째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포병의 화력과 저지선 통과만으로도 적의 전력은 절반이상이 소모될 테니까요.”
“마지노선이 강했어도 프랑스를 보호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우리에겐 우회할 수 있는 중립국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북한이 전 병력을 공중 침투시킬 수도 없고, 또 대규모 상륙작전을 전개할 충분한 선단이 놈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가 봤어? 그리고 땅굴은?”
그러자 양 하사는 피식 웃었다.
“노일전쟁이나 ‘디엔비엔푸’에서처럼 한 진지 또는 한 요새의 공격이라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전면전에서의 땅굴은…… 아무래도 미련스러운 데가 있어요.”
“전면전이라는 것은 바로 그 한 진지 혹은 한 요새의 싸움이 모인 거야. 많이 웃어 봐라. 그런 네놈 집 마당에 땅굴 입구가 나타날테니.”
그러다가 이 중위는 의외의 사태에 놀라 말을 중단했다. 전방 20미터 지점의 길섶에 서 있는 4톤 트럭 뒤에서 갑자기 일단의 북한군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차를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모두 AK 소총으로 무장한 이 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중위는 가슴이 섬뜩했다. 사실 휴전선은 거기서 직선 거리로 20킬로미터도 안 되었다. 인솔자인 듯한 상위(上尉) 계급의 사내 하나가 거센 이북 사투리로 물었다.
“동무들 어딜 가오? 보아하니 청군 동무들인데.”
“아, 저, 가설 나가는 길입니다.”
이 중위는 얼떨떨해 대답했다.
“기래요? 그럼 통신장교 동무로구만.”
만약 거기 있는 차량이 아군 차량이 아니고 그들 중에 끼들끼들 웃는 녀석이 없었더라면 이 중위는 정말로 그들을 북한군 병사로 착각했을 것이다.
“동무들은 운이 좋소. 한 시간 전이라면 동무들은 전사나 포로가 됐을끼니…….”
그리고 그도 킥 웃었다. 뒤이은 그의 말씨는 단정한 서울말이었다.
“수고합니다. 나는 ○○사단에서 홍군 지원 나온 황 대위요.”
이 중위도 마지못해 웃었다.
“놀랬습니 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고무테이프 좀 하고 퓨즈 하나 빌립시다. 저게 말썽이오.”
그는 세워 둔 트럭을 가리켰다. 마침 여분이 있음을 확인한 이 중위는 운전병에게 그걸 내오게 했다.
“대신 하나 묻겠습니다. 지금 이 부근의 홍군 상황이 어떻습니까?”
“주력은 벌써 철수를 개시했소. 하지만 군데군데 잔류 병력이 있을 거요. 왜 무슨 일인데?”
이 중위는 간단히 자기 처지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도 지도까지 꺼내 적의 주요 잔류 지점을 알려 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국도로 가지 말고, 이쪽 B16 작전 도로로 빠지는 게 나을 거요. 그러면 이 고지 팔부 능선까지 오를 수 있소. 그곳은 어제 홍군의 화기 중대가 숙영했던 곳이라 지금쯤은 아무도 없을 거요. 거기서 차량을 버리고 곧장 그 봉우리를 넘으시오. 마침 장비가 적으니 별로 힘들지는 않을 거요. 그래서 도로 하나만 무사히 횡단하면 바로 그 맞은 봉우리가 당신들의 OP요.”
참으로 의외의 수확이었다.
적의 진지에 접근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적의 흔적을 보았다. 포병 진지터, 보병 숙영지, 땅이 얼어 형식적이 되고 만 참호 등이 인근 논밭이나 산 계곡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꺼진 모닥불에서 아직 연기가 오르는 곳도 있었다. 그들은 그 대위가 가르쳐 준 대로 전진했다. 때로 멀리 포신을 뒤로 뺀 채 퇴각하는 홍군 전차를 보기도 하고 쌍안경 속에 홍군의 보병 행렬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으나 대체로 상황은 그가 알려 준 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마지막 도로 횡단에서 결국 이 중위는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정보가 정확한 것만 믿고 관측도 경계도 없이 시계가 트인 도로를 횡단한 탓이었다. 그들이 목표 봉우리의 계곡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그 봉우리 좌측 능선에서 일단의 적(홍군) 보병들이 나타나 공포탄을 쏘며 정지를 외쳐 댔다. 포로가 되면 가설은 끝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병인 경우에는 사흘간의 영창 장교의 경우에는 징계였다 개인 화기만 든 보병들과 그 밖에 여러 장비를 가진 통신병들과의 산악 경주라면 결과가 뻔한 것이지만 그들은 무턱대고 우측 능선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 총중에도 문득 이 중위에게 떠오르는 회오 섞인 상념이 있었다.
“장교의 공명심이 사병을 죽이기도 하는구나.”
그때였다. 갑자기 앞서 달리던 가설병 하나가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키며 멍청히 걸음을 멈추었다.
“과장님, 저기, 저기…….”
이 중위는 맥이 탁 풀렸다. 그가 가리키는 그 능선에서도 산개한 병력이 까맣게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전병을 불러 비문(秘文) 파기를 지시하고 본대를 부르도록 했다. 이쪽의 상황을 알려 새로운 가설조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자신도 장교 수첩에다 파기 표시를 했다. 사병들은 암담한 얼굴로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를 돌아본 양 하사가 들뜬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과장님, 홍군이 달아납니다. 이쪽은 우리 편입니다.”
이 중위도 동작을 멈추고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병사들을 자세히 살폈다. 아, 그들의 가슴께에 부착된 것은 분명 가로세로 2인치인 청색 헝겊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아군의 진격 예정 시간이었다. 일찍 차를 버려 도중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 오히려 그들을 구한 셈이었다. 이 중위는 돌연 콧등이 시큰해졌다. 가설병들 중에는 정말로 눈물을 글썽이는 녀석도 있었다. 전우애, 영화 같은 데서나 있을 것 같던 그 전우애란 것이 강한 실체로 그들에게 체험된 것이었다. 악수를 청하고 함성을 지르며 법석을 떠는 그들 때문에 오히려 멍청해진 것은 새까맣게 그을은 보병 소대장과 밤새도록 행군해 와 지친 그의 소대원들이었다.
오전 아홉 시. 무사히 가설을 끝낸 이 중위는 양 하사와 그대로 OP에 눌러앉아 쌍안경으로 우군의 천마고지 탈취 작전을 보고 있었다. 어림잡아 우군 진지의 상공으로 보이는 곳에서 몇 줄기의 신호탄이 오르더니 쉬잇쉬잇 하는 제트기 소음 같은 것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이어 고지 가운데서 풀썩 연기가 솟았다.
“8 인치 포군요.”
관측 장교가 말했다. 그제야 은은한 폭음이 들렸다. 이어 갖가지 방향으로부터 폭탄이 쏟아지고 순식간에 산봉우리 여기저기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한 덩어리로 어울려 곧 포격의 명중 여부를 따질 수가 없게 돼 버렸다. 그는 문득 공병대의 남 중위를 생각했다.
“새끼, 헛수고깨나 했군.”
포탄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이어 삼십 분경 지원 나온 공군 편대가 가세하자 천마고지는 그대로 거대한 화염의 고지로 변했다. 정말로 적이 거기에 포진해 있다면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전방 50미터 지점에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솟았다. 이어 다시 후방에서도 포탄이 무섭게 터지는 소리가 났다.
“엎드려, 박격포다. 빨리 방공호 속으로.”
관측장교가 호 입구로 굴러떨어지며 외쳤다. 이 중위도 얼결에 곁에 섰던 양 하사를 끌어당기며 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모두 OP 방공호 속으로 대피하자 그들 머리 위로 우박 떨어지듯 박격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콘크리트 벽이 울리고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관측 장교가 무전병에게 고함을 질렀다.
“박격포 쏘는 놈들 확인해 봐!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야?”
그러나 포격은 한 오 분 만에 멈췄다. 다행히 그들은 모두 방공호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군 박격포 중대 하나가 Op를 천마고지 좌측 적 점령하의 무명고지로 오인한 탓이었다. 그들이 그걸 알고 무전으로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갑자기 Op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 중위가 수화기를 들자, 느닷없는 욕설과 고함이 튀어나왔다.
“이 새끼들아. 포를 어떻게 유도하는 거야. 우리 탄약고 날아가게 생겼잖아.”
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은 이웃 사단 전차 중대장이었다. 천마고지 뒷산에서 그들의 탄약고 앞 1킬로미터 지점까지 포탄 두 개가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목표에서 3 킬로미터 이상을 벗어난 셈이었다.
“우리 105밀리는 아닐 겁니다. 장약 7호로도 그만큼은 못 갑니다. 아마 175밀리 자주포 애들일 거예요. 걔들은 여기서 개성까지도 쏴 붙일 수 있으니까.”
전화를 바꾼 관측장교는 별로 성난 기색도 없이 이죽거렸다.
한 시간가량 포격이 계속된 후에 갑자기 은은한 함성과 함께 보병의 공격이 시작됐다 아직도 포연과 흙먼지에 싸인 천마고지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보병들이 개미 떼처럼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 쌍안경 속에서 보였다. 다시 삼십 분쯤 후에 이제는 다소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고지의 정상에는 태극기가 꽂히고 은은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중위가 본대로 돌아온 것은 열한 시 반경이었다. 포 사격 성과가 좋았던지 대대장의 기분은 몹시 좋아 보였다. 그는 너털웃음을 치며 이 중위를 맞았다.
“OP선 수고했어. 나는 걱정했지.”
이 중위는 하마터면 포로가 될 뻔했던 일을 생각하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러나 분명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점심 식사 후부터 원진지로 귀환하는 오후 다섯 시까지는 부대 정비 시간으로 돼 있었지만 사실상 휴식이었다. 나흘에 걸친 청룡 25호 작전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중위도 며칠간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식사가 끝나자마자 침구를 깔아 둔 AM 박스카에 누웠다. 그러나 오래는 못 잘 잠이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는데, 누가 이 중위를 흔들었다. CP 당번병이었다.
이 중위가 간신히 잠을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지프차 한 대와 사복을 한 보안대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무시는데 안됐습니다. 보안대 박 중삽니다. 천재룡 일병 일로 왔습니 다.”
“아, 네.”
이 중위는 아직 훵한 머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타시죠. 함께 가서 이야기합시다.”
이 중위가 차를 타니 선임하사 임 상사가 먼저 타고 있었다.
“임 상사두 가요?”
“아닙니다. 수송부 문 중사가 위독하다고 해서 ― 박 중사에게 부탁을 했죠. 마침 가는 길목에 지구 병원이 있길래…….”
“그렇지만, 선임하사도 없으면 귀환 때 애들 통제를 누가 하죠?”
“양 하사와 강 병장에게 잘 일러두었습니다.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문 중사는 어느 정도요?”
“어제저녁 수송 장교가 가 봤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했답니다.”
“그럼 할 수 없군.”
이 중위가 인도된 곳은 전에 미군 주둔지였던 듯한 기지 한구석의 콘센트 막사였다. 서른 안팎의 대위 하나가 이 중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평소 천재룡에게 이상한 점이 없었소?”
간단한 자기소개 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전혀. 그저 좀 지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능이 모자란다고? 그럼 이걸 보시오.”
그는 오만 분의 일 지도 한 장을 꺼내더니 앞에 놓인 서류에 따라 일정한 곳에 붉은 사인펜으로 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점들을 연결했다
“이게 천재룡이 탈영 후 최전방 부대 수색대에게 잡힐 때까지 지나온 길이요. 그리고 ― .”
그다음에 그는 서랍에서 처음부터 붉은 선이 그어져 있는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이건 이미 우리에게 포착되어 지난 유월 이후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지만, 간첩들의 남파 및 월북 루트요.”
이 중위는 가슴이 섬뜩했다. 두 개의 지도 위에 있는 붉은 선은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우직하고 단순한 천 일병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혹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요. 간첩들의 남파 루트라면 그만큼 초소가 드물거나 은신이 용이한 지역이란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천(千)이 무턱대고 몸을 숨기고 초소를 피하다 보니 우연히 그 루트와 일치하게 됐다 그 말이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도 정확히 이 두 개의 선이 일치하는 데다 또 천은 너무 많이 휴전선에 접근해 있었소.”
“하지만 제가 알기로 그는 방향을 식별할 만한 지능이 없습니다. 그저 막연히 부대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다 보니…….”
“물론 그렇게 단순 탈영이라면 모두가 좋겠지요. 당신도 이런 데 불려올 필요가 없고, 나도 밤잠 설쳐 가며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될 테니. 그런데 그의 신원 조회를 해 본 결과 우리의 추측이 정당하다고 믿을 만한 사실이 나왔소.”
“무엇입니까?”
이 중위는 문득 불길한 예감으로 물었다.
“그의 본적은 남원(南原), 그 아버지 천득수는 지리산으로 숨어든 인민군 패잔병을 도와주다 부역죄로 토벌군에게 총살당했소. 천재룡은 그 유복자요. 그리고 삼촌 천태수는 월북, 이쯤 되면 모든 건 명백하오.”
자기의 강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 중위는 천 일병의 변호를 단념했다.
“사상이란 것이 지식인의 전유물은 아니요. 나는 여기서 2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경도된 사병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보지 못했소. 그들에게는 행동력이 없으니까.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이 없는 그러나 저돌적인 행동력을 가진 맹신이요. 그게 바로 천 일병의 경우요. 조사에 따르면 천 일병의 생활은 아주 넉넉한 편이었소. 그런데도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그 어머니 때문이었소. 교육 대신 그녀는 자기 또한 무식한 농군이었던 남편에게 물려받았음에 분명한 그 맹신을 자식에게 주입한 거요.”
결국 이 중위는 전방 근무자의 신상 파악이 그토록 불철저했던 경위를 중심으로 양면 괘지 십여 장에 달하는 참고인 진술을 하고 오후 늦게서야 그곳을 나왔다.
“아, 참! 강대욱이라고 거기서 사병으로 근무하죠? 안부 전하더라고 말해 주쇼. 여기 하 대위라면 알 거요.”
방문을 나설 때 그 보안장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두워서 원진지에 돌아와 보니 내무반이고 기재 창고고 떠날 때만큼이나 엉망이었다. 양 하사의 지휘 아래 완전 군장을 풀어 관물 정돈을 하고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등이 가설된 기재창고 부근에서 장비 수입과 야전선 재생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선임하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강 병장이 주표 그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런 강 병장의 노련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며 이 중위는 새벽에 그에게 품었던 묘한 적개심이 서서히 걷혀 가고 있음을 느꼈다.
“과장님, 대충 정리된 후 회식 어떻습니까?”
잠시 쉬려고 교환대로 향하는 이 중위에게 강 병장이 뒤따라와 말했다.
“웬 술이야?”
“막걸리는 지난 일요일에 수송부와 축구해서 딴 거고, 소주는 휴가 귀대한 함 상병 겁니다. 마침 돼지고기가 나왔길래 비계지만 그것도 서너 근 취사반에서 얻어 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 내키지 않던 이 중위도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어쨌든 이 훈련은 성공적이었다. 대대장의 진급이 확실하다는 풍문이 들릴 만큼. 천 일병의 일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으나 그건 이 훈련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 사병들의 고생은 혹심한 것이었다. 디데이의 눈에 이어 강추위가 이틀간 계속 됐는데도 대부분 불 한번 피우지 못하고 언 밥과 식은 국으로 속을 채웠다. 전례로 미루어도 이런 날 저녁의 회식은 당연했다.
“좋아, 하지만 술은 하나로 통일해라. 되도록 막걸리로. 그리고 이거 보태 안주 좀 낫게 장만해라.”
이 중위는 주머니를 털어 삼천 원을 내주었다.
“돈은 저희들에게도 좀 있습니다.”
“사병이 무슨 돈이야?”
“양키들 야전선을 좀 걷었죠. 녀석들이 ATT(대대 포병훈련)를 하길래…… 우리라고 끊길 수만 있습니까? 그런데 애들이 좀 많이 걷어서 우리 걸 채우고도 남길래…….”
“어디서야?”
갑자기 이 중위의 신경 이 곤두섰다. 일종의 자기방어 본능이었다. 그러나 강 병장은 산악처럼 끄떡도 않았다.
“저희들도 그게 어딘지 모릅니다. 과장님도 안 들은 걸로 하시죠. 사실은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그렇지만 ―.”
더 따지려던 이 중위는 문득 밀려드는 피로감으로 그만 강 병장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좋다. 나는 그 얘기를 못 들었다. 그러나 오늘 회식에는 그 돈 써선 안 돼. 이 돈을 쓰고 부족하면 px에 내 앞으로 달아. 그렇지 않으면 이 회식은 허락할 수 없다.”
그러자 강 병장도 할 수 없다는 듯 그 돈을 받고 물러났다.
회식은 장비 정리가 대강 끝난 밤 열 시경부터 기재 창고에서 벌어졌다. 푸짐한 안주로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취침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중위에게만은 아닌 듯 다른 과원들도 잡담을 그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김 일병 솜씹니다. 어떻습니까?”
곡이 끝나자 강 병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대에선 시켜도 안 불더니, 웬일일까?”
“아마 휴가 때문에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지요?”
김 일병은 내일이 휴가 출발이었다. 이 회식에도 그는 휴가 준비를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저녁때 이 중위도 그가 싱글거리며 정비실에서 일계장 피복을 다려 들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 과장님. 한잔 드시지요.”
잠시 멈칫했던 분위기를 되살리기나 하려는 듯이 강 병장이 큰소리로 말하며 잔을 쳐들었다.
“건배! 찢어진 영자의 팬티를 위하여.”
다른 부원들이 와 하며 술잔을 쳐들었고, 다시 흥겨운 회식이 계속되었다.
“상병 ‘요오료오’ 노래 일발 송신.”
‘군따이와 요오료오다.(군대는 요령이다.)’라는 말을 자주해 ‘요오료오’ 상병 이라 불리는 무전병이었다.
“송신 ― .”
과원들이 일제히 복창했다. 병과마다 노래를 시작할 때 쓰는 말이 다르다. 수송부는 ‘노래 일발 시동’, 병기과는 ‘노래 일발 장전’, 군수과는 ‘노래 일발 기장(記帳)’ 등으로. 뒤이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인천에 성냥 공장 성냥 만드는 아아가씨 ― .”
노래는 곧 합창이 되고 만다.
“선임 하사가 빠져서 안됐군.”
선임하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문 중사님 곁에서 밤을 새울 모양이지요. 두 분은 하사관학교 동기니까요.”
그날따라 유난히 자주 술잔을 비우던 강 병장이 약간 취한 소리로 말했다. 보통 회식에서 그는 자리 잡고 있는 법이 드물었다. 술잔을 고르게 분배하고 주벽이 사나운 과원들을 억제하는 등 보이지 않는 통제를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그가 요청하는 회식을 이 중위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밤은 달랐다. 요량 없이 퍼마신 과원들이 기재 창고 벽에도 웩웩거리며 토해도 저희들끼리 감정이 격해 투다닥거려도 강 병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술만 마셔 댔다. 결국 회식은 엉망이 된 채 자정 무렵 상황장교의 통제 아래 끝이 났다.
“과장님, 딱 한 잔만 더 하십시다.”
과원들을 전부 내무반으로 돌려보낸 이 중위가 교환대로 가자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강 병장이 말했다. 그는 어떻게 구했는지 두 홉 들이 Px용 맥주를 열 병 정도 구해 놓고 있었다.
“강 병장이 과할 텐데…….”
“괜찮습니다. 이 강대욱이 취해 실수하는 것 보셨습니까?”
“강 병장, 오늘 이상해.”
“이상할 것 없습니다, 과장님. 자, 앉으시죠.”
강 병장은 이상하게 풀린 웃음을 웃으며 이 중위를 끌어 앉혔다.
“건배를 합시다, 과장님. 빛나는 대한민국 육군장교를 위해.”
통조림 깡통 가득 부은 맥주를 들어 올리며 강 병장은 또 허허거렸다. 몹시 공허한 웃음이었다.
“정말, 강 병장답지 않은 건배로군. 장교를 위해서라니…….”
“건배할 가치가 있으니까. 그리고 저는 비록 실패했지만,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장교로 보낼 겁니다.”
“강 병장이 육사를 중퇴했다는 건 사실이었군.”
“정확히는 퇴교죠. 그래요, 저는 분명 거기 다닌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지방 수재가 흔히 그렇듯이…… 안부를 전한다던 하 대위, 그 친구가 제 입교 동깁니다.”
“그런데 왜?”
“쓸모없는 관념의 병이죠. 2학년 때까지도 모범 생도였는데, 3학년 초에 그만 ― 빗나가 버렸습니다. 갑자기 장교가 된다는 게, 특히 남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두려워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껏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군인의 길 그 자체가 아니라 사이비의 것 ― 예를 들면 화려한 제복이라든가 장군의 위용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걸레 같은 깨달음이었죠. 하여튼 ― 그해 여름에 고향에 간 나는 술을 퍼마시고 고향 마을 지서 주임을 두들겨 패 ―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랬었군. 그런데 갑자기?”
“제 몸에 드럭드럭 밴 이놈의 사병 근성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병 근성?”
“네, 무책임하고 피동적이고 잘 굴종하고 거기다가 뇌동하는 버릇, 감격하는 버릇, 그리고 정대하지 못하고 잔꾀에 밝은 것.”
“예를 들면 심 소위를 친 것 말인가?”
“짐작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저께 밤에 이미 심 소위가 통제관의 묵인 아래 모의탄으로 상황 부여를 대리하고 있다는 걸 알아 놓고 어제저녁 숨어서 기다렸지요.”
“통쾌 했겠지.”
“그런데 그게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젯밤은 통쾌한 기분으로 잤지요. 그러나 날이 밝아 오면서부터 그 통쾌감은 점점 불쾌함으로 변해 갔습니다. 내 행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는 게 처량하고 서글펐죠. 나의 왜소함, 나의 천박스러움 ― 이런 것들이 말입니다”
“미묘한 얘기로군.”
“그래서 정대해지고 싶었습니다. 훈련에서 돌아오자 맨 먼저 심 소위가 누워 있는 의무대로 갔지요. 그리고 사실을 죄다 말했습니다. 참회나 사죄가 아니라 정대하기 위한 구실을 찾은 겁니다. 심 소위가 계급 따위나 들먹이며 보복하려 들면 정말로 죽도록 패 주고 영창이나 가려구요. 지적으로 세련된 건 아닐지 몰라도 그것만이 제가 정대해지는 방법이었으니까요.”
“그래 어찌 됐나?”
“두 번 비참해졌습니다. 그 어린 것이 ― 죄송합니다 ― 제기랄,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얘기를 다 듣고도 아무 말 없이 픽 돌아눕는 게 아니겠어요? 돌아가라, 강 병장. 본관은 네 말을 안 들은 걸로 하겠다.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사병에게 맞을 수 있겠나. 강 병장은 근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는 겁니다.”
“…….”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그놈의 사병 근성이 나온 거죠.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지요. 당신이 심 소장쯤 된다면 그 소리는 썩 어울릴 거라고.”
“그랬더니?”
“제 비참만 더했습니다. 그는 경멸에 찬 눈으로 돌아보더니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니까 너는 더러운 잔꾀나 부리는 사병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안됐다…….”
그때였다. 교환대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몸을 제대로 가늘 수 없을 만큼 취한 선임하사가 들어왔다. 어디서 글렀는지 얼굴이 긁히고 군복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임 상사, 왜 늦었어요?”
이 중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쓸쓸해서 ― 한잔 먹었임다 과장님.”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물기가 서린 듯했다.
“그래, 문 중사는 좀 어떻던가요?”
“씨팔 놈…… 뒈져 버렸어요.”
“뭐요?”
“내가 가니까 벌써 뒈져 있더란 말요. 어차피 뒈져야 할 놈이긴 하지만…….”
“어차피 죽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임 상사.”
“그 새끼가 ―그년을 죽였던 거요.”
“그년?”
“거 왜 작전 첫날밤에 목 졸려 죽은 늙은 갈보 말이오.”
“그건 어떻게 알았소?”
“그 운전병 새끼가 깨어나 불었단 말요. 문 중사 그 새끼 아주 죽을 셈 잡고 그날 차도 지가 몬 거요. 눈길을 시속 백 킬로미터루다가…….”
“문 중사가 왜 그랬대요?”
“그 쌍년이 바로 그 전날 꿈에 뵌 년이요. 그년이 하필이면 그런 데서 ×을 팔고 있을 게 뭐람. 하기야 이제는 연놈 다 뒈졌으니 끝은 깨끗이 난 셈이지만…….”
얘기를 하는 임 상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중위도 강 병장도 숙연히 침묵을 지켰다.
“그 새끼 운전병에게 고백한 살인 이유가 또 웃기지. 뭐 그년을 다시 대한 순간 자기는 그년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던가. 그래서 그년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해 준다는 게 바로 그년을 목 조른 것이라나요. 같잖은 새끼.”
“…….”
“그래 놓고 이틀은 겨우 견뎠지만 결국은 제 김에 간 거죠. 병참부에서 부식을 수령해 오다가 술을 처먹고 사병들에게 질질 짜며 죄다 불고, 그리고 그년을 찾아간다면서 차를 몰아 댄 거요. 망할 새끼.”
“…….”
“내 하사관 학교서 그 새끼 처음 만날 때부터 제 명에 못 죽을 놈이라는 걸 알아봤다니까요. 암, 내 그 새끼 일이라면 워커 밑창부터 철모 꼭대기까지 다 알지 으흐흐흐…….”
임 상사는 신음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뒹굴었디. 이 중위와 강 병장은 그런 그를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교환기의 신호음이 이 방의 모든 것을 흩뜨려 놓았다. 신호를 받은 배 상병이 놀란 소리로 이 중위를 불렀다.
“뭐야?”
이 중위가 불길한 예감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김 일병이 ― 목을 맸습니다. 대공 초소 부근이랍니다.”
그제야 이 중위도 조금 전 과원들을 재우려고 내무반에 내려갔을 때 김 일병이 보이지 않았던 걸 상기했다. 이 중위는 정신없이 대공 초소로 달려갔다. 벌써 상황장교와 주번 사관이 와 있었고 시체도 내려진 후였다. 김 일병은 근처에 무성한 참나무 가지에 야전선으로 목을 맨 것이었다. 교범에 있는 결박법대로였다. 곧 놀란 대대장이 달려오고 의무관이 시체를 조사했다. 혀를 쑥 내민 시체는 흉측하게 불거진 두 눈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희극적인 모습으로 둘러싼 사람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어찌 이리 턱 없이 죽지…….”
대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걔들이 원래 그래요. 월남서도 보니까 베트콩 총 맞아 죽는 놈 정말 몇 안 되더군요. 그저 지가 슬슬 죽는 거지요. 계집 배때기 위에서 죽고, 술 처먹다 죽고, 돈 벌려다 죽고, 적도 못 보고 미쳐 죽고, 아니면 고향 생각으로 자살이나 하고…….”
언제 왔는지 군수과장이 무감동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병사의 절망이지요…….”
망연한 기분으로 곁에 대대장이 있다는 것도 잊고 이 중위가 불쑥 끼어들었다.
(1979년)
* 새하곡: 저자의 197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중국 악부 (樂府)의 제목인데 변방을 지키는 병졸들의 애환을 읊은 것으로 한 (漢)의 이연년(李延年)이 처음 썼고 이백(李白) 등의 유명한 작품이 있다.
2016년11월 21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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