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사마리아 지역의 이해
사마리아(SAMARIA)
이스라엘 분열왕국 북쪽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세겜으로 북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놓여 있다. 현재 이름은 헤롯이 이 곳에 새로운 도시를 증축 건설하고 그 이름을 아우구스토스의 헬라어 이름인 로 명명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Sebastia라고 부른다. 구약 성경시대에 이 곳은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이 지역을 사서 수도로 세우는데 이 산의 주인의 이름인 세멜로부터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온다(왕상 16:24).
사마리아성은 해발 고도 43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로마시대까지 성의 규모 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장되게 된다. 이 곳은 지정학적으로(세겜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 는 요충지) 경제적인 면에서 풍요한 농경지를 가지고 있어서 수도로 선택되었다
이스라엘 시대(철기 시대): 1. 성체의 첫 번째(내부) 벽, 2. 후기의 벽(포대), 3. 성체를 둘러쌓았던 "하층부 벽", 4. 오므리와 아합의 궁전, 5. 상아 궁전, 6. 도기파편이 발견된 집, 7. 성체로 가는 문이 위치해 있는 자리
헬라(헬레니즘) 시대: 8. 원형 탑
로마 시대: 9. 성벽, 10. 원형 탑을 가진 문, 11. 기둥들이 가로(街路)에 늘어선 길, 12. 아우구스도의 신전, 13. 코레-페르세포네
신전, 14. 경기장, 15. 극장, 16. 집회장소( , 서쪽 편에 공회당이 있는 공공 광장)
기독교 시대: 17. 비잔틴 시대의 교회, 18. 십자군 시대의 교회(현재 모슬렘 사원)
리아는 오므리 시대에 두로와 친근하려는 그의 정책에 걸맞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세 겜이나 디르사보다는 두로와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이름에 대해 서는 왜 오므리가 이 곳을 산 후에 그의 이름을 따지 않고 원 주인의 이름인 세멜을 그대로 유지 했을까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상속 법이 땅을 팔았어도 유업으로 물려받은 땅은 원 주인 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되는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본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두로의 왕 엣 바 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해서 이 곳을 바알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어 예언자 엘리야의 분노를 산 다.
이 지역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땅이었고 드보의 주장에 의하면 오므리는 원래의 수도 디르사에 서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디르사(엘 파리)의 발굴 결과 동시대 인 주전 9세기에 디르사에 주민이 급격히 줄어든 증거를 예로 든다. 아무튼 오므리가 동쪽인 디 르사에서 서쪽인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긴 다른 이유는 요르단 강 건너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침 입을 막기 위해서 했다는 주장도 있다. 세겜에서 동북쪽 방향인 와디 밧단을 지나 디르사로 가면 아브라함과 야곱이 지나갔던 길들을 만나게 되고 세겜에서 서쪽을 사마리아 방향 쪽으로 가면 요 셉이 형들을 만나기 위해 세겜을 거쳐 도단으로 갔던 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 가 성에 가셨을 때 지나가셨던 길과 나사렛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오고 가실 때 지나셨던 길을 접 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마리아는 헤롯왕에 의해 아름다운 도시로 건설되어 거룩의 이름을 가진 황제의 도시 세바스티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 전통에 의하면 거룩은 하나님께만 해당되어 사용되는 언어였으며 구약에서 황제 숭배는 다니엘의 경우만 보더라도 철저히 배격된 다.
아합은 이 곳에 상아궁을 짓고 바알 신앙을 위한 사당을 지어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치닫게 만 든다(왕상 16: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 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었더라").
사마리아는 외국의 침입에 종종 봉쇄되는 수모를 맛보며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아합 왕 때는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해 봉쇄되나 하나님의 사람의 도움에 의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되나 아합은 유다왕 여호사밧과 함께 사마리아 성 성문 앞 광장에 앉았을 때에 하늘의 신비한 환 상을 본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요르단 강 건너 길르앗 라못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왕상 22). 왕하 6장 이하에서는 아람군대에 의해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어 성안에 먹을 것이 없이 아들 을 삶아 먹을 때에 4명의 문둥병자를 통해 기적적으로 성이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리고 아람의 군대 장관 예후가 이 사마리아 성에서 아합의 아들 70명을 성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죽게 한다(왕하 10).
주전 734-732년 베가 왕 때에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셋 3세의 침공으로 사마리아 주민들의 유 배가 시작되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7년부터 9년까지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에게 성을 포 위당하다가 그의 갑작스런 죽음후 그의 아들 사곤 2세에 의해 완전히 함락당하고 역사 속에서 사 라지고 만다(주전 722). B.C.년 무렵에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 오므리에 의해서 건설되었다(왕상 16:24). 사마리아는대략 430 미터 높이의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부터 북쪽으로 68km, 지중해 로부터는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이 언덕은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동서를 연결하는 길목을 관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마리아는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가 용이한 장점을 갖고 있다. 도시의 취약점 은 가장 가까운 샘물이 일 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것인데, 이러한 취약점은 물탱크들을 만들어서 보완할 수 있 다.
사마리아는 아람왕 벤하닷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왕하 6:24-25), 결국에는 앗시리아에 의해서 722/1B.C. 년에 정복되었다. 앗시리아 제국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난 다음에 그 곳 주민 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그 도시는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에서 옮겨온 새로운 주민들에 의해서 정착되어졌다(왕하 17:24-25).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 종교 관습들이 이스 라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람들과 혼합된 결혼관계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요 4:1-10).
사마리아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 고고학자들은 수차례에 이르는 이스라엘 시대의 주거층을 확인하였다. 처음 두 번째 까지의 지층, 즉 오므리와 아합 시대에는 페니키아 사람들의 건축술이 반영된 주의깊은 건축술이 반영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도시의 최대 규모가 아마도 20에이커 정 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6내지 8미터 두께의 성벽성벽이 함께 만들어진 성벽으로 건축되었다. 높은 봉우리의 서쪽 가장자리 부 분에 2층 짜리 왕궁이 건설되었었고, 그 주변의 광장에서 5*9 미터 크기의 못이 발견되었는데, 아 마도 이 못이 아합이 아람 사람과의 전쟁에서 죽어서 그 병거를 씻었던 못(왕상 22:38)이었을 가 능성이 아주 높은 못으로 생각되고 있다.
왕궁은 '상아궁'(왕상 22:39, 암 3:15)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못 근처에 있던 한 창고를 발굴하면서 약 500여개의 상아로 만든 장식품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식품들은 가구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들로 보여진다.
세 번째 지층의 경우는 예후 시대(841-813 B.C.)의 것으로써, 새로운 건물들의 추가와 재건되어 진 흔적들을 발견하였으며,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 까지의 지층은 여로보암 II세 시대 이후의 건 물들로써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기 이전까지의 건물들인데 많은 재건과 보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건물들 중에 한 곳에서 102개의 오스트라카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 가운데 63개가 레이즈너에 의해서 판독되었으며(1-63), 나머지는 카우프만의 박사논문에 판독되어있다(64-102). 이러한 오스트라카들은 어떤 지역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보내어진 물품들의 목록과 그것을 보낸 사람들과 받은 사람의 이름과 연도가 적혀있다.
헬라시대의 건축물의 일부가 폐허 형태로 남아있으며, 원형으로 생긴 망대들은 헬라 시대의 대 표적 건축술들을 반영해주고 있다.
로마시대의 건축물은 서쪽 문에서 들어오면서 남아있는 돌기둥들이 나란히 늘어서있는 거리에 서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수로 시설, 스타디움, 그리고 극장 건물들은 로마시대의 것들이 남아있 는 유적들이다.
세바스티예라는 작은 아랍 마을이 고대 사마리아 도시 지역에 오늘날 남아있는데, 세바스티예 는 세바스테라는 그레코로마식 이름의 변형이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멸망되고 난 이후에도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야, 헬라, 로마 시대에 이르도록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아왔었고, 헤롯 대왕이 통치하던 때(37 B.C-4 B.C.)에 사마리아 지역을 재건하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를 위하 여 세바스테라고 개명하였다. 세바스테는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명칭이다. 바로 이 시대의 도시 가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는(행 8:5) 사마리아임이 분명하다.
신약 성경 속 사마리아 사람
‘사마리아’와 함께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정 30-37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해 기록하려고 했던 누가복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들에게 나타난 증거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들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성경 속 사마리아 사람 몇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전에 먼저 사마리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후에 당시에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는 지방 영토를 세웠습니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당시 점령국인 수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는데, 이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혼혈 주민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흔히 경멸하는 의도로 ‘사마리아 사람’이라 불린 사람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성전을 지을 때 이들의 도움을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단으로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명기 12장이 요구하는 예배 처소의 한 곳으로 시온산이 아닌 그리심 산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혼혈 주민인데다 이단 혐의까지 받았으니 유대인들이 그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을 경멸했고,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마리아 지역을 예수님은 결코 회피하지 않으셨고, 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 나오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유대인들보다 더욱 선한 이웃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는 또 다른 사마리아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나병환자로 예수님에 의해 치유를 받은 열 명의 환자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찾아와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한 사람입니다. 다른 아홉 명은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예수께 찾아와 엎드리며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 사마리아인을 일부러 하나님을 찬양하되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과 대조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갖고 본문을 다시 보면서,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께 찾아와 감사한 것을 부각시키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당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섬겨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랍비요 선지자요 선생님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나사렛 출신의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께 찾아와 하나님께 행하는 예를 갖춰 감사한 것입니다. 18절의 말씀은 또 다른 의문을 낳게 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 말씀에 따르면, 다른 아홉은 이방인이 아니고, 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규례에 따르면,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을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보여주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마치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할 정도의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사마리아인의 태도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이 세 가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이 본문 역시 먼저는 사람에 의해 버림받고 멸시받은 사마리아에 대한 복음서의 혁신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존재이며,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에게 보인 태도는 유대인들에게 감춰진 진실을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보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예수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주변 상황을 무시하고 예수에게 예를 갖춤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계명을 어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왜 이일을 전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왜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일까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는 하나님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마땅히 찬양의 대상이며 또한 감사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는 수가성에 사는 사마리아 여인과 수가성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본문 역시 예수님은 생수이며 예배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유대인들은 거부하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예배 받기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며 또한 그에게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 사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것이니 비록 사람들에게는 멸시를 받았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시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 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의 배경적 이해
신인철 목사
남아공 사랑의 교회
1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는 독자가 성서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서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름길 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서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적 배경은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보다 정확한 성경 해석을 위해 성서배경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서 사마리아라는 주제를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 성경을 읽다 보면 사마리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 독자들에게는 이 사마리아란 곳이 구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구약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있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지역적 배경을 사마리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 성경의 독자들은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장면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평신도 독자들이 누군가에게 사마리아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면, 사마리아의 역사, 종교, 문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마리아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은, 그들이 유대인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거나,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신약학자들이 사마리아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 역시 신약 시대에 유대인의 한 공동체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배경적 이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다 올바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사마리아의 기원에 대해서 고찰하려고 한다 둘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사마리아의 역사에 대한 고찰도 일부분 함께 이루어 질것이다. 셋째, 사마리아인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신앙이 유대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단순 비교하는 형식으로 고찰할 것이다. 넷째, 사마리아인들의 축제와 행사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의 언어와 문학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 사마리아인의 기원
지정학적으로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33km 떨어진 팔레스틴의 내륙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열왕기상 13:32절에 사마리아는 도시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로보암 당시만해도 사마리아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난 후 북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이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했다. BC 880년경 오므리 왕은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기 위해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구입했고 본래 주인인 세멜의 이름을 따라서 사마리아라는 명칭을 붙였다(왕상 16:24절). 사마리아는 히브리어로 솜론(Shomron)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현대어로는 세바스테(Sebaste)이다. 아모스 3:9절에서 사마리아를 산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므리는 사마리아가 자연적 요새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결정을 한 것 같다. 따라서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곧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받아들여졌고,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성은 많은 침략자를 막기에 적합한 천혜의 요새였지만 역사를 거듭하면서 이어지는 수많은 외침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공격으로 사마리아성이 무너지면서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고, 그들의 관공서가 자리하게 되었다. 파괴된 사마리아성은 기원전 30년 헤롯 대왕에 의해서 재건축 되었고 , 이후 사마리아는 하나의 도시가 아닌 사마리아 지방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신약 성경에는 사마리아를 지방적인 의미로 사용한 부분이 많다.
이제 사마리아인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기원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다스리고 있었다 (왕하 17:1절). 앗수르 왕 살만에셀(Shalmaneser)의 공격으로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메데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다 (왕하 17:2-6절).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지역으로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그리고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여러 성읍에 정착시켰다(왕하 17:24절). 이러한 앗수르의 정책은 점령지에 대한 통치 관습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사자들을(Lions) 보내서 몇 사람을 죽이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왕하 17:25절). 사마리아로 이주한 이방 백성들은 앗수르 왕에게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마리아 출신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을 돌려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사마리아로 돌아온 제사장은 벧엘에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백성들은 각자 자기들의 토속 신을 섬겼다 (왕하 17:24-41절). 결국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혼합이 이루어졌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이방 종교의 전통들이 사마리아 전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이방인과의 혼합을 비웃으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구데스(Cuthes) 또는 ‘사자에게 개종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위에서 제시한 유대인들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들은 요셉 족속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직접적인 후손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이 해외로 추방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마리아에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아있었고 55년이 지난 후 해외로 추방된 백성들은 다시 돌아왔으며, 그들의 자녀들이 사마리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분리된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그리심산에 세워져야 한다는 모세 율법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엘리가 불법으로 성전을 실로에 세우면서부터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가 앗수르라는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앗수르의 침략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타 민족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인 사마리아 지역에 정착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과연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마리아 지역 백성들이 해외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이곤 (Sagon)은 2만729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외로 이주 시켰다고 기록했다. 열왕기하 15:19-20절에 의하면 앗수르 왕 불이 와서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은 1천 달란트를 지불하고 위기를 모면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역대하 34:9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둔 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전 수리 비용을 냈고, 성전 수리를 위해서 이 돈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앗수르는 점령지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외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평민 계층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종합한다면,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지배를 받는 동안 분명히 이방인들이 이주해 왔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혼합되었다는 견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에 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견해를 부인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견해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에 의해 정복 당한 후 유대인들로부터 혼합주의에 빠진 절반은 이방인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예로, 유대 문학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분류 기준으로 절반은 이방인이라는 내용들이 기록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순수성을 어느 정도 상실한 부분이 있지만 유대인들의 견해처럼 사마리아인들을 완전히 이방인으로 치부하는 것도 무리가 따를 것이다.
3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반감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흐르는 반감을 논할 때는 언제나 충돌이 예상된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갈등하게 된 것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리될 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남북 왕조가 갈라진 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였을 뿐이라는 견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므리 왕조 시대에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아주 좋은 관계를 형성한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은 반감의 시작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본국으로 귀환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민족적 순수성의 문제로 인하여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가지는 반목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아마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이 깊어진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의 행위였을 것이다. 성전 건축에 동참하려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거부 당하자 그리심산에 사마리아 성전을 세우고 여호와를 예배하였다. 이 성전은 기원전 128년에 요한 히라크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다. 성전 파괴 사건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지탄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요한 히라크누스 (Hyrcanus)는 기원전 108년에 사마리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모든 지방을 자기 영토로 편입을 시켰다. 그는 또한 사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자기 통치 지역이 종교적,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에 귀속되도록 시도했다. 히라크누스(Hyrcanus)의 이러한 정책은 헬라화된 사마리아 성읍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유대교에서 분리하려는 세력으로 간주했으며, 그들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아주 강력하게 저항을 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BC 65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단지 종교적인 공동체만 회복하게 되었다.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으로 많은 통치의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의 기본 정책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뚜렷한 종교 문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랍비 문학에 담긴 내용들이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화되었다. 헤롯 대왕의 부인 중 한 사람인 말테세 (Malthace)는 사마리아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아마도 헤롯은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가 보다 건설적이고 평안하기를 원한 것 같다. 그러나 AD 6-9년경에 사마리아인 몇 사람이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 성전에 뿌리며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서로가 가진 오랜 증오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후손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것도 배제되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사마리아인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는 것도 많은 금지 조항을 두어 제한시켰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신약을 읽는 우리들에게 유대인들이 가진 사마리아인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 이해 할 것 인가를 전반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마태복음 10:5절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는 들어가지도 말라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절은 사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서는 한 시대만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시대와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가 활동한 시대가 시간적으로 겹쳐져서 묘사되어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마태 공동체가 사마리아 선교를 반대했다는 견해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단지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을 근거로 한 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누가복음 9:53절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후 율법사에게 누가 선한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서 단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하였다. 율법사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를 회피함으로 인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기록 역시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는 아주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요 8:48). 그러나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에 대한 선교를 부정 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사마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으로 보는 것 보다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인에 대한 선교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유대교와 분리된 기독교 공동체는 사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년)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러한 결과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4 사마리아 인들의 신앙
사마리아인들이 나름대로 형성한 신앙을 살펴보는 것은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들의 신앙에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책은 ‘사마리안 모세오경’(Samaritian Pentateuch)과 ‘탈굼’ (Targum)이다.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살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는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다. 둘째는 모세에 대한 중요성이다. 셋째는 모세오경에 대한 태도이다. 넷째는 그림심산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지막 날에 받게 될 보상과 심판이다.
4.1 하나님
사마리아인들 신앙의 핵심은 유일신 사상이며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영적인 존재로 믿는다. 유대인들이 믿는 것처럼 사마리아인들 역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인식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을 영광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믿으며,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처럼 존귀한 분으로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모든 것을 아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출 3:14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믿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들과 특별한 계약을 맺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 역시 자기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Shem (유일한 이름)라는 단어로 대신하여 호칭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칭하는 엘(El), 엘하(Elah)를 잘 사용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야훼(Jahwe)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있다.
4.2 모세
사마리아인들이 가진 모세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가진 개념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들은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이자 최고의 예언자라고 주장 한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으며 모든 사도들보다 뛰어나다고 믿는다. 이 말의 의미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대화 통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빛에 비유했다면(요 1:5절) 사마리아인들은 모세를 빛에 비유했다. 모세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며, 그는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 했으며, 나중에 그의 부모를 통해 육신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모세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자세는 신적인 개념을 능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4.3 모세오경 (사마리아 모세오경)
제1 성전 시대에는 (the First Temple)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동일한 필사본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아람어의 영향으로 서로의 필사본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사마리아 모세 오경이 아람어로 번역된 것은 BC 1세기 말과 AD 11세기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 진 것 같다. 그들은 모세 오경을 하나님이 주신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언서나 다른 구약의 책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오경은 진실되며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오경을 직접 썼고 그것은 영원하며 불변 하다고 믿는다.
사마리아인들의 모든 예배 시간에는 모세오경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서였고, 모세 오경을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세오경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맛소라 (유대 모세오경) 사본과는 근소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든다면, 신명기 18:15-18절에 있는 모세의 예언자에 대한 예언이 사마리아 모세오경에는 없다. 모세의 예언이 호렙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기록된 내용을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모세오경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리심산의 거룩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은 모세 오경의 정경화가 이루어질 때 유대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이미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통해서는 유대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언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4.4 그리심산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생활의 중심은 그리심산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심산은 하나님과 모세오경에 의해서 거룩한 장소로 구분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심산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든 십계명에 그리심산을 덧붙였고, 신명기 11:30과 27:2-8절의 내용을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번역본과 사마리아 본문 신명기 27:4의 내용은 그리심산에서 축복 에발산에서 저주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받아들인다.
그리심산은 이미 창조 이전에 선택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그리심산 만이 유일하게 노아의 홍수를 피했고, 마지막 심판 때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그림심산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첫번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곳으로 알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만난 곳도 그리심산 이라고 믿는다. 마지막 날에는 생수의 시냇물이 그리심산에서 흘러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궤 역시 이곳에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이곳에서 찬란한 빛이 비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이 그리심산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여러 산들을 그리심산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했다. 예를 든다면 창세기 10:30절의 ‘동편 산’, 28:17절의 ‘하늘의 문’, 28:19절의 ‘벧엘’, 그리고 출애굽기 15:17절의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그리심산으로 해석했다.
4.5 종말에 받게 될 보상과 심판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종말관이 있다. 마지막 날 받게 될 보상과 심판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신명기 32:34-47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시고 저울에 무게를 다는 것처럼 심판을 하신다고 믿는다. 천사들이 마지막 날 인간들의 행위에 대해서 잘못을 고소하거나 변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할 것이며 땅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모세가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선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은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깨끗한 옷을 입고 사랑의 향기를 날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누더기로 몸을 가리고 악취를 풍길 것이다. 심판을 받은 후에 행복한 삶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은 에덴으로 들어가서 모세, 아론, 그리고 영적인 선조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뜨거운 불이 있는 곳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가인, 라멕, 고라, 아멜렉과 다른 악한 죄인들과 같이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부활의 날, 청산의 날, 그리고 공평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마지막 날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타헵 (Taheb)이 올 것으로 고대한다. 타헵 (Taheb)의 원래 이름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타헵 (Taheb)은 어떤 것을 회복시키거나 수확을 나타내는 자동사이거나 사역동사이다. 그러나 타헵 (Taheb)은 전능자나 메시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4:25, 29절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그녀가 가진 심판자의 개념은 유대인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개념인 타헵(Taheb)의 역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신명기 18:18절에 언급을 전제로 한 마지막 선지자 일 것이다. 그는 기적을 행하며 율법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는 또한 그리심산에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어 희생 제사를 회복시킬 것이며 이방인들 역시 그를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5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축제와 실재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달력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아랍의 영향을 받으면서 단지 제사장들만 축제일을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달력의 계산법이 복잡하게 되었다. 현재 사마리아인들은 양력과 음력을 겸하여 사용하는데 1년을 354일로 계산 한다. 그리고 1년을 12달로 나누고 매달을 29일이나 30일로 고정을 시켜두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을 중요한 3대 절기로 지내고 있다. 3대 절기가 되면 그리심산을 순례하는 행사를 하는데 오순절은 언제나 유월절 안식일이 지나고 15일 후가 된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언제나 주일이 된다. 축제의 주된 행사는 속죄 일에 모두 금식을 하고 모세오경을 읽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안식일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다. 안식일에는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집을 떠나 다른 곳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임시 처소를 만들어두는 것을 사마리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울 수도 없다. 먹을 음식은 안식일 저녁이 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날 예배의 절정은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아비사 (Abisha)두루마리를 예찬하며 모세 오경을 읽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할례를 아주 중요한 의식으로 행하고 있다. 아들이 태어나서 8일이 지나면 할례를 행한다. 만약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마리아’ 인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할례는 대 제사장의 집도로 반드시 새벽 기도가 마친 후에 행한다. 결론적으로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과 비슷한 절기와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축제의 가장 중요하고 특이한 면은 그리심산 순례이다. 그리심산 순례를 이해하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축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6 사마리아인의 언어와 문학
사마리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아라비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언어는 서쪽 아람어 방언이며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했다. AD 634-636년에 이슬람이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아람어 방언은 기도문을 제외하고 점차적으로 아라비아어로 바뀌었다. 헬라시대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처럼 헬라어를 그들의 전적인 생활 언어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라어로 번역된 사마리안 모세오경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 고고학자는 사마리안 회당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비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현재 초기 사마리아 문학 작품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문학 작품은 50여권도 채 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문학 작품들은 사마리아가 이슬람화 되기 전에 민족 방언으로 기록된 한 그룹과 이슬람화 후에 주로 아랍어로 기록한 그룹으로 구분된다. 이슬람화 이전 그룹의 문학 활동은 AD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 모세오경은 사마리아인들이 소유한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이며 학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위 4장에서 살펴본 것 같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이 유일하게 거룩한 기록으로 자기들에게 전해졌다고 믿는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관계없이 모세오경의 일반적인 권위로 인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나누어졌다고 본다. 사마리안 모세오경은 맛소라 사본 (유대인이 받아들인 사본)과 6천 군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 사마리안 모세오경은 맛소라 사본보다 양이 많으며 부연(敷㴊)과 해설 또한 많이 더해져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은 전체적으로 ‘사마리안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종교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모든 문학 작품의 발전은 사마리안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된 책들을 잘 이해하고 자기들의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역사적인 문학 작품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사마리아에 대한 배경을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사마리아인의 기원에 대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고, 유대 민족의 전통적 혈통을 가졌지만 절반만 유대인인 사마리아 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오랜 반목을 거듭하며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형성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이 가진 신앙관은 많은 부분에서 유대인들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특히 짧은 부분이지만 사마리아인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의 영향을 받았음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학은 모세오경이며 모세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과 문학의 발전은 다분히 반 유대적인 사고와 배경에서 출발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위에서 제시한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통해 많은 유익함을 얻을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 가운데 사마리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읽을 경우 지금까지 살펴본 사마리아의 역사, 사회적 배경은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유대인들로부터 늘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신약 성경에는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특히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것은 사마리아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 대상지였다는 것을 신약 성경 독자들에게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싫어했는지에 대한 보다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Anderson, R. T 1992. ‘Samaritans’,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5권 pp. 940-947.
Brindle, W. A 1984. “The origin and history of the Samaritans.” Grace Theological Journal 5, pp. 47-75.
Coggins, R. J 1975. Samaritans and Jews: The origins of Samaritanism reconsidered. Oxford: Basil Blackwell.
Crown, A. D. 2001. Samaritan scribes and manuscript-xs. Tübbingen: Mohr Siebeck.
Edersheim, A 1971.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Gibson, J. C. L 1971. Textbook of Syrian Semitic inscript-xions, I. Hebrew and Mobite Inscript-xions. Oxford: Claredon Press.
Hjelm, I 2000. The Samaritans and early Judaism: A literary analysi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 2004. Jerusalem’s rise to sovereignty: Zion and Gerizim in competition.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Jagersma, H 1982. A history of Israel in the Old Testament period. London: SCM Press.
Kahen, H. W 1969. The Samaritans: Their history-religion customs. Nablus (Kahen은 사마리아 성직자이며 그의 책은 정식 출판이 아닌 전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Koester, H 1982.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I: History, culture and religion of the Hellenistic age. Philadelphia: Fortress.
Loewenstamm, A. ‘Samaritan language and literature.’ Encoclopaedia Judaica 15권 (1971), PP 724-758.
Montgomery, J. A 1968. The Samaritans, the earliest Jewish sect. New York: Ktav.
Mor, M 1989. The Persian, Hellenistic and Hasmonaean period, in Crown, A D (ed) The Samaritans, Tubingen: Mohr, pp 1-18.
Naveh, J 1998. “Script-xs and inscript-xions in ancient Samaria,” Israel Exploration Journal. 48, p 91-100.
Petrozzi, M T 1981. Samaria (trans. C. Fannell), Jerusalem: Franciscan Printing Press.
Purvis, J. D 1975. The fourth Gospel and the Samaritans. Novum Testamentum 17, pp. 161-198.
--------1992. ‘Samaria’,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5권 pp. 914-921.
Schäfer, P 1995. The history of the Jews in antiquity: the Jews of Palestine from Alexander the Great to the Arab conquest (trans. D. Chowcat), Luxembourg: Harwood Academic Publishers.
In-Cheol, Shin, Matthew’s inclusive community: A narratological and social scientific reading, unpublished Ph.D thesis. Pretoria: University of Pretoria.
Tetley, M. C 2002. “The date of Samaria’s fall as a reason for rejecting the hypothesis of two conquests. CBQ 64, Pp. 59-77.
Younger, K. L 1999. “The fall of Samaria in light of resent research.” CBQ 61, Pp 461-482.
Waltke, B. K 1992. ‘Samarian Pentateuch’,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5권 pp. 932-940.
한글 자료
임진수, “복음서들의 사마리아 이해와 선교”, 신학논단 9 (2002 여름), p. 383-408.
장동수 “복음서들의 사마리아 이해와 선교에 대한 논찬”, 신학논단 9 (2002년 여름), P. 409-412.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