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의 남해답사 스케줄
충북 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해마다 한 번씩 다른 지역으로 학술답사를 간다. 이번에는 경남 남해군 지역을 답사하기로 했다. 1박2일의 이번 답사는 남해대교를 건너 노량으로 들어가 남해군의 문화유산을 답사한 다음, 창선교와 삼천포대교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답사의 중점은 충무공 이순신 유적과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그렇지만 최근 명승과 천연기념물 지정이 늘면서 남해에 또 다른 볼거리가 생겨났다. 명승인 가천 다랭이 마을과 원시어업 시설인 죽방렴 그리고 천연기념물인 물건리 방조어부림이 그것이다.
남해와 관련이 있는 과거 인물로는 아무래도 충무공 이순신이 유명하다. 그는 1598년 11월19일(음력) 남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전사 후 그는 이곳 남해 땅 노량에 3개월간 묻혔다가 충남 아산의 현충사로 이운되어 갔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처음 묻혔던 곳에는 현재 충렬사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이 약천 남구만과 서포 김만중이다. 이들은 이곳 남해에 유배되어 많은 시문과 저서를 남겼다. 이들의 기록은 남해 유배문학관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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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의 유배문학을 대표하는 서포 김만중 |
ⓒ 이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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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현재 남해의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김두관 지사다. 그는 남해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속된 말로 남해 촌놈이 군수와 장관을 거쳐 도지사까지 되었으니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대과(大科)를 통하지 않고 경상감사와 이조판서가 된 대단한 인물이다. 남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덕으로 근면성과 단결력 그리고 높은 교육열을 들고 있다.
남해하면 경남의 가장 서쪽에 있는 섬으로 사실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남해는 섬인데도 불구하고 임야의 비율이 높아 농지는 전체 면적의 23%에 불과하다. 그 농토도 간척사업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과거에는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농작물로는 마늘이 있다. 어업으로는 멸치잡이가 유명하고, 우럭과 광어 등을 양식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경제가 그나마 조금 나아지고 있다. 노량과 금산이 역사와 관련이 있는 대표적 문화유산 지역이다. 그런데 최근에 유배문화가 재조명되고 있고, 명승과 천연기념물, 독일마을 등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우리는 남해로 가다 중간에 금산군 추부면에 있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쉰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들이 이곳에 많이 들린다. 그래선지 소위 잡상인들이 많은 곳이다. 우리 차에도 상인이 올라와 인삼파스도 팔고 토시도 판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또 한 사람이 올라온다. 이 사람은 잠시 우리 버스를 타고 함께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우리 답사진행자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본격적으로 제품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무주의 안성 영농조합에서 만든 천마제품을 팔려는 것이다. 천마는 '하늘이 내려주신 신비의 약초'라는 것이다. 고혈압, 당뇨, 전립선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만병통치약이다. 자신들의 제품이 KBS와 MBC에 방송되었다고 하면서 그때 방송된 화면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운전기사와도 사전 조율이 된 모양이다. 한 20-30분 정도 천마제품을 열심히 선전한다. 정말 열성적이다. 땀을 뻘뻘 흘린다.
그 점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선지 24만 원이나 되는 제품을 한 사람이 사 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문제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단체여행에 다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24만 원 짜리 천마제품을 팔기 위해 천마비누와 볼펜 같은 미끼를 던진다는 점이다. 공짜사은품 대신 천마제품의 값을 내리는 게 차라리 낫지,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영농조합도 이렇게 장사에 나서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가 탄 차는 장수 나들목으로 나가더니 장수에서 그를 내려준다. 그리고는 19번 국도를 따라 수분치를 넘어간다. 수분치는 물이 나누어진다는 뜻으로 금강과 섬진강이 갈리는 곳이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에 있는 뜬봉샘을 우리는 금강의 발원지로 삼고 있다. 고개를 넘으면 장수군 번암면으로, 여기서부터는 섬진강 수계다. 우리 차는 번암면에서 다시 남장수 나들목으로 들어간다. 다시 19번 국도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구례가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점심식사 장소였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섬진강변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차가 지리산 화엄사 계곡으로 들어간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진다. '토박이식당'이란 곳이다. 모든 게 기사양반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주체적이지 못한 게 문화단체의 현주소다. 구례에서부터 차는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내려간다. 하동을 지나 남해대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10분이다. 계획보다 30-40분 정도 늦어졌다. 상행위와 점심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남해 땅에 도착해 만난 남해 역사연구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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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역사연구회 정의연 회장과 조혜연 문화해설사 |
ⓒ 이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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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해 역사연구회 사람들과 노량의 충렬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 충렬사에 도착하니 정의연 회장과 안희영 연구실장, 조혜연 문화해설사가 나와 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바로 충렬사로 향한다. 해설은 조혜연 해설사가 전담한다. 남해역사연구회는 현재 28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향토사 연구단체다. 그들은 남해에 유배된 인물들을 연구해 유배문학관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고려대장경의 판각장소로 남해를 재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충렬사로 가다보니 두 개의 비석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충무공의 비가 아니고, 자암 김구(金絿: 1488-1534)의 적려유허비와 삼도통제사 이태상(李泰祥: 1701-?)의 공덕비다. 이태상 비석의 상단 부분 조각이 특이하다. 용을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김구선생에 대해서는 유배문학관에 가서 좀 더 자세히 공부하게 될 거라고 조혜연 문화해설사가 말한다.
김구는 중종 때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19년 조광조 등과 함께 개혁을 추구하다 남해로 유배되었다. 1533년 유배에서 풀려난 김구는 이듬해인 1534년 직첩이 환원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선대 고향인 예산에서 죽었다. 이태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으로 1760년 8월부터 1762년 6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삼도통제사를 지냈다. 그때 그가 퇴락한 충렬사를 중수했다고 한다.
충렬사에서 보고 들은 이순신 이야기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가니 일중 김충현이 쓴 충렬사 중건비가 보인다. "노량 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 계단을 올라 충렬사 내삼문을 들어가니 충무공비가 보인다. 이건 충무공비를 알리는 표지석 같은데 모양과 조각이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름답다. 진짜 충무공비는 일욕천보(日浴天補)라는 현판이 있는 비각 안에 들어있다. 공식 명칭은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다.
"무술년(1598) 11월 19일에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게 적탄(敵彈)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陳璘)이 적에게 포위(包圍)되어 위태로웠는데, 공의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공처럼 독전(督戰)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사이에 행장(行長)은 간신히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陣營)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우레 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牙山)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 길에도 끊일 줄 몰랐다."
이 비문은 1660년 우암 송시열이 찬하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1663년 통제사 박경지가 세웠다. 그런데 이 비각의 현판에 쓰인 일욕천보가 무슨 뜻일까? 날마다 깨끗이 하면 하늘이 도와준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비각 뒤로는 신주를 모셔놓은 충렬사 사당이 있다. 그리고 사당 왼쪽에는 충민공비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처음에는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당 뒤에는 낮은 담이 있고, 그 뒤로 이충무공의 가묘가 있다.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 충무공의 시신이 이곳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가 아산 현충사로 이장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허묘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파묘를 하지 않았다. 충렬사는 현재 사적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0년에 만들어진 거북선 체험
충렬사를 나온 우리 일행은 노량 바다에 떠 있는 거북선으로 간다. 이 배는 『이충무공 전서』와 옛 선박 관련기록을 참고하여 1980년 1월 복원한 것이다. 거북선은 이 충무공이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1년 공격용 전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선체 길이 34.3m, 거북선 길이 25.5m, 선체 폭 10.3m, 선체 높이 6.4m이다. 이 배에는 130명이 탈 수 있으며, 최대 6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배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닻과 노, 함포와 각종 무기가 복원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수군들의 모습도 재현해 놓았다. 원하는 사람은 수군 옆에 놓인 갑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거북선 내부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에는 노를 젓는 초군들이 있었을 테고 위층에는 전투를 하는 수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거북선이 3층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거북선의 덮개를 보니 뾰족한 못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것은 적들이 거북선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거북선은 왜선에 비해 견고하고 몸을 숨기기 좋아 공격과 방어에 유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군이 보유한 거북선은 3-5척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북선은 우리 해군의 주력선이 아닌 특수선이었다. 거북선을 보고 나서 우리 일행은 최근 관음포에 만들어진 이순신 영상관으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