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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6) 2021-06-
거룩한 삶을 위한 권면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6번째 시간입니다.이제 4장에 들어왔는데, 4장과 5장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실제적인권면과 교리적인 가르침이 나옵니다. 물론 이 가르침들은 우연히주어진 것이 아니고,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난 후에- 저들의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온전케 하고자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4장 1-12절까지 거룩한 교회 생활을 위한 실제적인 권면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시면 “종말로 형제들아,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여기서 ‘종말로’는 영어로finally인데 보통 결론을 내릴 때 쓰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 밖에 것에 관하여> 라는 의미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말입니다. 여기서‘형제들아’라는 호칭을 쓴 것은 필자나 수신인모두가 주 예수 안에서한 형제요 가족임을 강조한 것이죠! 그래서 전해지는 권면이 영적인 형제 관계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권면하노니’라고 말씀한 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부탁하듯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한 두 동사가 현재시제로 쓴 것을 보면, 이는 단회적인 부탁이 아니라 반복해서 구하고 권면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절 上 반절의 내용은 형제들에게 하는 권면으로 위압적이거나 강압적인 명령이 아닌 권면임을 말씀해 줍니다.
권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1절 下 반절에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받았으니>라는 말은- 바울이 지금 구하고 권면하는 것이 복음을 전해 줄 때부터 해왔던 것으로써 전혀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에 전해 준 것을 생각나게 하면서- 더 분명하게 권면하고자 한 겁니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은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수있는지>를 영어로 보시면 <How you ought to walk and please God>입니다. 여기서ought to는 must와 같은 의미입니다. 매우 당연한 의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떤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두 개의 분리된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모든 삶의 방향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라 믿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기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자는믿음으로 역사하게 되고- 사랑의 수고가 뒤따르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 그 자체가 우리로 세상과 구별해 주는 거룩한 삶입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을 보시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항상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며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할지니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 앞에5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해 줍니다. 맞습니다. 에녹은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창세기 5장 24절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아니하였더라”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삶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이 삶이 우리로 거룩하게 살도록 해줍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도 에녹처럼 주님 오시는 그날에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는 휴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자 하는 삶이-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지만- 이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1절 끝부분에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라고 권하신 것입니다.
이제 2절을 보시면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여기서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무슨 명령을 준 것을 상기(想起) 시켜 주면서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게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주 예수로 말미암은 무슨 명령’이- 복수형입니다. ‘명령’은 헬라어로 <파랑겔리아>인데- 이는 상관이 지시하는 명령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주 예수로 말미암아’라고 분명히 주님의 명령임을 선언해 줍니다. 이는 바울이 권면하는 이 가르침이 주 예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지시 사항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제 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말씀해 줍니다.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제 구체적인 적용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하는데- 그것이 곧, 음란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하기아스모스>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께 드려짐” 혹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바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몸도 주님을 위해서- 거룩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이는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며 점차 하나님께 헌신해 가는 삶 자체가 거룩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의 삶을 양도해 드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삶, 곧 옛사람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새 피조물로써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삶의 순결함이 요구됩니다. 특별히 음란을 버리는 성적 순결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성화는 평생을 걸쳐서- 내가 주님께로 가든지 주님이 나에게로 오시든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몸의 구속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거룩한 삶을 사는데 특히 성적인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에 있어서 특히 교회 생활은- 공동체의 삶을 사는 곳이므로- 성도의 교제가 없이는 안 되므로 음행의 문제는 거룩한 삶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의 거룩함을 해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보면 음행은 사람의 몸을 부패시킵니다. 다른 죄들은 우리를 간접적으로 손상(損傷)하지만, 간음은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 우리의 전 존재를 더럽히고 극도로 저속하게 만듭니다. 더욱이 음행은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에게 우리의 몸을 내어주는 것이므로- 주님을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란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여기서 ‘버리라’라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멀리하라는 말인데- 이는 완전히 잘라버리라는 말입니다. 특히 부정사의 현재시제로 썼으므로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음란으로부터 멀리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기능합니다. 끊임없는 성령의 은혜로 자기 훈련으로 몸의 구속이 이뤄지는 그 날까지 음란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음란 (포르네이아)는 일반적으로 부정하고 비정상적인 불법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당한 결혼 밖에서 하는 어떠한 성행위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방 종교는 그 신들과 여신들이 부도덕했습니다. 신전에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여사제들이 신전에 상주해 있었고 공식 제사 가운데 난잡한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부도덕하게 사는 것이 큰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데살로니가 교회도 이러한 음란 문화 속에서 엄청난 유혹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거룩함을 언급할 때, 육체의 순결을 말씀하면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임을 강조해서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제 4, 5절을 보겠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취할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각각’이라는 단어는 이 요구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적용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각자는 성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언해 줍니다. 왜냐면 4절은 3절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다(에이도)는 경험을 바탕으로 ‘인식하다.’ ‘분별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순결의 문제는 일순간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분별로 바른 습관으로 형성된 올바른 부부생활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부부가 한 몸으로 연합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4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그릇 소유할 줄을 알고”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 아내를 그릇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을 보면 “남편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그릇임을 말씀하지만 결혼 관계에서 아내는 더 깨지기 쉬운 약한 그릇이니 평생 동반자로 살려면 조심스럽게 귀한 그릇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4절에서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취할 줄을 알고-“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상태를 가리키고 ‘존귀함’은 사람 앞에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서 부부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부부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피차에 존경하는 위치에 서서 아름답게 유지해야만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이것이 영적인 경건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알고- 우리로 음란함에서 곧, 불법적인 성관계를 피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거룩함과 존귀함을 주는 결혼생활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2~6절에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 가르침을 액면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었을지라도 영뿐이고 혼과 몸은 아직 구속함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혼은 계속 성화 되어야 하고- 특별히 몸의 음란을 제하는 일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누구나 사단의 시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거룩하게 여겨 부부가 동반자 관계로 있으면- 서로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부당하게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한 마디로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부부의 애정이 식고 갈등이 커지면, 쉽게 각방을 쓰곤 하는데- 중년의 위기는 대부분 여기서 파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일 뉴스에 나오는 성추행이나 성폭행 사건의 배후에는 대부분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분별합니다. 한 마디로 분방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도외시한 결과라고 봅니다.
부부는 서로의 필요를 돌아볼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라고 명했고, 본문 4절에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고 서로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고 서로의 필요를 배려하고 상대를 존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강제나 억지가 아니라 서로가 합의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명령은 아니라 했지만, 이 세대가 너무도 악하고 음란하기에- 이 규범이 무너지면 누구라도 사탄의 시험에 넘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부부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는 4절 말씀과 대조를 이룬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남편)를 대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라 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지므로 거룩함에서 멀어지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존귀함 없이-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상 여기서 모든 부부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영으로 몸의 사욕을 죽이며 삽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온 사랑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먼저 살피고 배려하며 섬길 때 이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자녀들도 안정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6절 上 반절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이제 바울은 성 윤리의 사회적 원칙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4절에서 거룩함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입니다. ‘분수를 넘어’라는 단어는 <휘페르바이노>로 ‘경계를 넘다.’ ‘침해하다.’는 뜻으로 불법적인 사취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해하지 말라’는 더 많이 취하다; ‘속여서 빼앗다’라는 뜻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형제를 속여 빼앗는 결혼 밖에서의 성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두려운 죄입니다. 이 죄는 남의 아내나 남의 남편과의 간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이전이나 이후에도 다른 사람의 순결을 빼앗는 모든 음란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다른 제삼자에게도 해를 끼치는 추악한 행동입니다. 따라서 혼전 문란은 장래 배우자의 권리를 짓밟는 악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6절 下 반절에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경고합니다.여기서 ‘신원’이란 단어 <엨디코스>는 복수자, 처벌하는 자라는 뜻으로 모든 성적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복수하는 자가 되시고, 처벌하는 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 성적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이미 복음을 전할 때부터 증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증언한 것과 같이“라는 동사는 <말튀레오> 앞에 <디아>라는 전치사가 접두어로 붙은 것은 그 의미를 강화시키는 말로 “엄숙히 단언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둔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강한 의식을 심어주고자 일부러 강조한 말입니다.
이제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라고 이미 우리가 회심할 때, 이 모든 부정한 성범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던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은 <아카다르시아>로 ’불결함’ ‘더러움’입니다. 영어로 uncleanness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성적인 불결을 말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반의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거룩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하셨는데 여기서 ‘저버리는 자’는 어떤 것을 금지한다고 결정된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써- 능동적이고, 고의적인 거부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성적 순결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무법하고 불결하게 사는 자인데- 이 거절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나 경멸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경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것입니까?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을 ’주신‘이란 <디도미>라는 헬라어가 현재 능동태 분사로 쓴 것을 보게 되면 ”그의 성령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거룩함을 지켜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 때만,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부부가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제 9절과 10절을 보시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제 사랑‘이란- 사랑을 말하는 <필에오>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스>가 합쳐진 <필라델피아>라는 헬라어 번역입니다. 바울은 3장 12절에 있는 사랑에 관한 그의 말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사랑에 대한 이 강조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임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했고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우리가 만일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결코 음행이나 도둑질이나 거짓을 범하지 않을 겁니다.
11절과12절에서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히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우리에게 종용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처럼 여기저기 다니면서 남의 일을 참견하거나 수다를 떨지 말고, ’잠잠히 자기 일을 성실히 하라.’는 권면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생명과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서로 대접하고 환대하는 분위기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를깨는가장 큰 원인은- 성도들 각자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몫이 있는데- 그 의무를 지지 않고 판단하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갈등과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에게 짐 지우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 단정한 사람, 곧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기본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마도 당시 일부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에 지나치게 동요하여 지상의 일들은 별로 중요하지않다고 여김으로 일상의 업무에 손을 놓는 사람들이 생겨서- 형제 사랑을 이용하여 적당히 살려고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5장에서 주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면서 매일의 삶에 관한 실제적인 권면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일상생활에 책임을 회피하는 잘못된 적용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당시 헬라 인들은 육체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일로 보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몸을 드려 타인을 섬기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참된 경건임을 말씀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동료들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서 틈틈이 장막 짓는 일을 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11절 말씀대로 자기 일을 근면하게 힘써야합니다. 이것이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는 것이며, 아무 궁핍함이 없이 자립하는 예의 바른 모습입니다. 물론 궁핍한 사람을 지원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립할 수 있고 타인을 섬길 수 있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제 오늘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거룩한 삶을 위한 권면입니다. 크게 두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곧, 순결한 결혼생활과 근면한 직업의식입니다. 이 둘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두 선물입니다. 에덴은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이 둘을 잘 돌보고 가꿀 때 인생의 즐거움은 배가 되지만, 그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축복을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무쪼록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복을 누리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