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송...............New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제게 고통의 길이 있는지 보시어 저를 영원의 길로 이끄소서.
본기도...............New
하느님, 죄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죄로 더럽혀진 사람은
다시 깨끗하게 하시니, 저희 마음을 하느님께 이끄시고
성령의 열정을 저희에게 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성서풀이_......New
하느님께서는 사람마다 그 길에 따라,
그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고 강조합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살아 있는 동안 나쁜 것을 받았던 라자로는
죽은 다음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복음).
제1독서...............New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New
◎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
○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도다. ◎
제2독서...............New
복음환호송...............New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 음...............New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감사송...............New
예물기도...............New
주님, 저희가 이 제사로 사순 시기를 거룩히 지내게 하시고,
회개와 절제와 선행을 통하여 내적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New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사람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사람들!
영성체 후 묵상......New
세상은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자질이 많은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고생만 하다가
편하게 죽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도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건 죽음 전까지 보이는 현상일 뿐이라고,
죽음 저 건너편에서 그 정의와 공평함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영성체 후 기도.....New
하느님, 저희가 이 거룩한 제사의 힘으로,
날마다 선행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소서. 우리 주…….
3월 16일 가톨릭 성인들
[포르투갈] 포르투: 대성당
대성당의 고딕 양식의 회랑. 기둥 사이를 장식하는 훌륭한 어즈레이조(장식타일)는
18세기의 작품이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자치 특권의 증거인
‘페로우리뇨’라고 불리는 원주가 서 있다.
♤ 성 그레고리오 마카르 GREGORY MAKAR 1010년경 순교 주교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에서 출생한 그는 리틀 아르메니아의
니크로폴리스 교외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다가,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설교자로서 크게 성공하였고,
그의 선임 주교가 서거할 때 주교로 승품되었다.
독수생활을 늘 갈망하던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회 설교하던 중에 피티비엘에 자리를 잡고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영적 지혜가 뛰어났고,
대중들을 사로잡는 능력이 비상하였으며 치유의 은사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 성 데니스 Denis 순교 284년경
♤ 성 또렐로 TORELLO 1282년 순교 은수자
까센띠노의 뽀삐 출신인 또렐로는 열성적인 부모의 배려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해왔으나,
부친을 잃은 뒤부터 나쁜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하루는 같은 패거리들과 함께 나무공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닭장에서
수탉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팔아래 앉아서 세 번 울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자신의 잘못을 통절히 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그길로 산 페델레 수도원으로
찾아가서 고백을 한 후, 권고 말씀을 따르게 되었다.
그는 고향 뽀삐를 떠나 8일 동안 숲속을 방황하다가 어느 큰 바위 밑에
쉴 곳을 마련하여 8일을 머문 뒤, 은둔소 예정지를 확정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전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은둔소 예정지로 돌아갔다.
그는 이어서 움막을 지었고, 고복을 입고는 철저한 회개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고, 빵과 물도 없이 이틀씩 단식하곤 했으며,
평소의 음식은 빵 한 조각과 냉수 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또렐로는 거의 40년 동안 은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수많은 영적 은혜들이 따랏고, 기적이 수없이 많았다.
그는 발룸브로사 혹은 프란치스칸이라고도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수도회에도 속하지 않던 뽀삐의 어느 원장으로부터 수도복을 받은 것이다.
♤ 성 아가피토 Agapitus 주교 라벤나 4세기경
♤ 성 아브라함 키두나이아 Abraham Kidunaia 6세기경 은수자 키두나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 교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부모들은 결혼을 강요하면서 신부를 골라 두었지만,
자기 자신은 독신생활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입밖에 발설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결혼 풍습은 7일 간의 결혼 축제가 계속되었는데,
그는 7일째 되는 날을 기하여 어느 사막으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그를 찾는 수색작업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모두가 허사로 끝났으나,
그의 친구들이 사막에 있는 그의 은둔소를 발견하여 억지로 끌고 고향으로 왔다.
그러나 이미 부모들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위임장을 친구들에게 써주었다.
아브라한 자신에게는 시계와 염소털옷, 그리고 몇 개의 식기만 남겼다.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자신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지면서부터 에데사의 주교는 은둔소를 떠나
백성들에게 설교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여,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주교에게 요청하여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키두나에 성당을 짓게 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아브라함은 잔잔한 미소와 인내심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우상숭배에 빠진 주민들을 감동시키게 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선교활동 중에 혹시라도 이 세상 일에 마음이 헷갈릴까봐 늘 조심하다가,
결국은 은퇴하여 자신의 은둔소로 돌아가서 여생을 지냈다. 그는 70세에 운명하였다.
♤ 성녀 에우세비아 Eusebia 680년경 원장 하마쥬
성녀 에우세비아는 오스트레반트의 성 아달발도와 성녀 릭트루다의 장녀이다.
남편이 살해된 뒤, 릭트루다는 두 딸과 함께 마르시엔느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
이때 그녀는 맏딸 에우세비아를 하마쥬 수도원으로 보내어,
그녀의 큰 할머니뻘이 성녀 제르트루다의 지도를 받게 하였던 것이다.
성녀 제르트루다가 서거했을 때, 에우세비아는 불과 12세였지만,
성녀의 대를 이어 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당시에 어쩔 수 없는 관습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막강한 집안의 사람을 원장으로 세우므로써 내외적으로
안정과 도움을 받으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우세비아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덕이 출중하여져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젊은 원장이지만 매우 현명하게 처신하였고, 성녀 제르트루다 시대처럼
수도원 규칙을 다시 손보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수도원 내부 문제에는 아무런 요동이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뜻하지 않는 죽음을 당하여 하느님 품에 안기었다.
그녀가 지금 온 방안에 큰 빛이 퍼지고 있다고 말한 즉시 하늘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성 요한 John 1183년 주교,순교자 비첸자
요한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다.
크레모나의 소르디가문 태생인 그는 16세 때에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8년 후에 그는 성 빅토르 수도원장이 되었고, 1155년에는 쌩 로랑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빅토르 4세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 어좌를 요구하는
산따 체칠리아의 추기경인 옥타비아노를 반대하고 교황 알렉산델 3세를 지지하였으므로,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싸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는 만투안 지방에서 몇 년 동안이나 고적한 생활을 해야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는 엄격한 생활을 계속했고,
음식과 의복 그리고 집안 가재도구 등에도 세심할 정도로 가난을 지켰다.
그는 만투아의 주교, 그 다음에는 비첸자의 주교로 봉직하였는데,
대중적인 주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반대자들로부터 살해당하였는데,
비첸자의 주민들이 모두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살해자를 색출하여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웠고,
그를 지원했던 이들이 살인자를 몰래 도망시켰다고 한다.
♤ 성 율리아노 Julian 연대미상 순교자 안티오키아
실리시아의 자기 고향에서는 그를 일컬어 "아나자르부스의 율리아노"라고 부르는데,
그는 많은 고문을 받고 자루에 묶인 채 바다에 던져졌기 때문에 순교자로 공경받는다.
성 요한 금구는 자신의 강론에서 자주 그를 언급하였다.
♤ 성 타시아노 Tatianus 순교 284년경
♤ 성 핀니안 로바르 Finnian Lobhar 560년경 원장 아일랜드
아일랜드 렌스터의 브레지아에서 태어난 핀니안은
성 골룸바의 제자로서 수학한 뒤에 팻트래드 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가 로바르 즉 나환자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몇년 동안 앓아오던 나병 때문이다.
그는 덕행과 기적으로 좋은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그의 치유 은사가 돋보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부인이 태중소경에다 벙어리이며 나환자이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이 성인이 밤낮으로 기도하고 고행하여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니스팔른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으나, 클론모어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다.
그 후 그는 성 골룸바가 원장직을 사임한 스워드로 가서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30여 년 동안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 성 헤리베르토 Heribert 1021년 주교 쾰른
혹은 헤르베르또(Heribert Or Herbert)
독일의 보름스 태생인 그는 로렌의 고르즈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토 3세의 재상으로 있다가 쾰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인의 도우츠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평화의 전달자로 크게 활약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엄히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에 온힘을 기우렸다.
그는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Altarpiece of the Patron Saints of Cologne(URSULA, PETER the Apostle, GEREON)-LOCHNER, Stefan
1440s. Mixed technique on wood, 260 x 185 cm (central), 261 x 142 cm (wings each)Cathedral, Cologne
축일:3월16일
쾰른의 성 헤리베르토 주교
St. Heribertus Archiep
St. HERIBERT of Cologne archbishop
Sant’ Eriberto di Colonia Vescovo
c.970 at Worms, Germany -
16 March 1021 at Cologne, Germany; relics in the church at Deutz
Canonized:1075 by Pope Gregory VII
독일의 보름스 태생인 그는 로렌의 고르즈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토 3세의 재상으로 있다가 쾰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인의 도우츠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평화의 전달자로 크게 활약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엄히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옛부터 정치가로서 성인이 된 사람은 비교적 적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위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며 국가를 안녕하게 인도했으니,
성 헤리베르토도 그런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790년경 독일의 보름스의 후작가(侯爵家)에서 태어나 그곳 주교좌 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뒤 로드 링겐 주 고르즈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귀향 후 히르데바르토 주교에게 서품을 받고
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는 한편, 그 시의 이탈리아 정책국(政策局)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독일 황제 오토 3세가 보름스에 행차했을 때
헤리베르토의 재능이 발견되어 시종(侍從)에 임명되고 그 뒤 늘 황제를 수행하며 봉사하게 되었다.
다른 시종들은 제 관직이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있었지만
헤리베르토만은 오로지 봉사의 정신으로 황제의 신변을 염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토 황제는 깊이 그의 충성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그를 유르드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겸손한 그는 완강히 이를 사양했다.
그런데 999년 마침 게룬의 대주교 에베르게리오가 서거한 것을 기회로 또다시 그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아,
쾰른의 성직자나 신자들은 합심해 드를 추대하고 황제도 그의 취임을 원했으며 교황 실베스테르 2세도 그를 정식으로
퀼른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므로 비록 헤리베르토 일지라도 이번만은 거절할 길 없어 때마침 머물던 라벤나에서 퀼른으로 향했다.
그는 엄동설한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그 시(市)로 들어갔던 것이다.
선임자 에베르게리오는 성직자로서 맞지 않은 사치를 즐기던 사람이었던만큼 대단히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으므로
신자들은 신임 대주교의 이런 검소한 모습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고도 하지만,
실제 헤리베르토의 일상 생활은 빈민의 아버지, 수도자의 보호자, 영혼의 착한 목자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1002년 오토 황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헤리베르토도 그를 수행했지만 불행히 황제는 중병에 걸려 비테르보 지장에서 승하했다.
이때에 성사를 주고 황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임종에 대한 교회의 기도문을 외우며 그의 명복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유해를 독일에 운반해 아헨에 있는 가롤로 대제의 무덤 옆에 매장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는 실로 헤리베르토 바로 그분이었다.
그 뒤 곧 하인리히 2세가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당선되어 황제위에 올랐다.
그때 헤리베르토는 다른 이를 추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쾌히 오토 황제에게 의탁받은 황제의 표시인 창을 하인리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그에 대해 모함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의 충성을 의심하고 그를 벌주기 위해 쾰른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그의 무죄함을 깨닫고 도리어 오랬동안 불의를 감수하여 온 그의 온순함에 감탄하고 그 후부터는 한층 더 그를 우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021년 관할 내의 지방교회 시찰차 출발한 대주교 헤리베르토는 도중 중병을 얻어 쾰른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재기 불능을 각오한 그는 유산을 교회와 빈민 구제에 기부하도록 유언하고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이 곤궁을 당하지 말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며 3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가 친히 세운 독일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를 완덕의 성인이라고 극구 찬양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