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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글>
시월의 기도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다보면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말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 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月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더욱 더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주소서.
10月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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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바람 속에서...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해가 저물면서
구름이 모아져
바다 위 하늘에서 만났습니다.
하루를 일하고 밤으로 들어가는
빨갛고 눈부신 저녁노을이
능금처럼 붉어서 아름답습니다.
바다 위 하늘가로 찬란한 빛 무리가
가슴으로 다가와 슬프도록 아름다움에
바라보고 바라보며 침묵의 밤 속으로
나의 언어를 다 살라 태웁니다.
갈매기가 날아 울며
저녁노을 속에서 집으로 집으로 가고
나는 빨간 눈부심으로
마음속 가득히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빨간 환희와 찬란한 눈부심이
바다로 들어가고 난 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의 바닷가에서
조용히 하늘을 보며
바람 속에서 나의 하루를 생각합니다.
하루를 생각하는 나의 작은 시간
홀로의 가슴으로 지금 여기 있음을
감사의 눈으로 바람을 맞습니다.
내가 살아온 작은 하루는
바람 속에서 머물러 왔습니다.
기쁨의 바람으로…
만나고 스쳐간 옷깃과 마음들이
때때로 가슴속에서
머물러 있기도 하면서…
자유로움을 생각합니다.
의미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도
살아가고 살아갈 날들도
쉬이 앉아있을 수도,
금방 떠날 수도 없는
언제나 하나의 생명이
살아가는 일인 것을 보면서…
내 살아가는 날까지,
내 살 수 있는 날까지,
내 사랑할 수 있는 날까지…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으며
이슬을 지나고
구름을 이고서
나의 삶을 살겠습니다.
생의 의미를 추구하겠습니다.
오늘도 바닷가 바람이 옷깃 속까지 다가와
내 마음속에 머뭅니다.
신부님의 ‘순례자의 노래’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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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7주일 / 군인 주일
2020. 10. 4
마태오 21, 33 ~ 43
♠ 복음 공부 -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이 단락의 출전인 마르코 12.1-12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를 박해한 역사, 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비행, 부활과 새로운 교회의 출현 등 구원역사를포도원 소작인들의 이야기로 엮은 우화(allegory)다. 우화는 비유에 등장하는인물이나 내용을 상징적인 것으로 보며, 그 상징을 통해 구체적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당신 적수들과 논쟁이 극에 달했을 때에 발설한 것이다.
* 33절 : 이사 5.1-2절 그대로이며, 당신 포도원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포도원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포도밭을 만든 이는 하느님이시며, 울타리는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을, 탑은 성전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백성을 위해 모든 여건을 다 갖추었다. 그리고 그들을 믿고 멀리 떠나셨다. 이 비유의 중심인은 소작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정치, 종교적 지도자 책임자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 34~39절 : 주인의 신뢰와 사랑은 보답을 못받는다 - 포도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여기서 예레미아 7.25-26을 떠올린다. 주인으로부터 파견된 종은 예언자를 상징하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다. 예언자들은 소명을 받고 말씀을 선포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에 파견된 예언자들을 표현하며 하나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시험을 해본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보낸다. 머리를 모으고 의논을 한다.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차지하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서 처형되었던 사실에 맞추어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고 제시한다.
* 40~44절 :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소작인들을 없애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줄 것이다.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벌어졌던 참상과 연결시켜 종말론적 심판이 내릴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느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선택할 것을 나타낸다. 이제는 소출을 내는 민족(21.43)에게 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즉 믿음을 간직한 이들에게 옮겨가게 된 근거를 제시한다. 돌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로 인용된 시편(118.22-23)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 죽였으나, 그 분은 부활하셔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셨다는 의미다.
* 45절 : 지도자들은 악한 소작인들을 심판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심판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체포하려 한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 -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그 지도자들의 죄상을 이야기한다. 당신께서 가장 귀중한 것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토록 중하게 여기신 포도원을 못 믿을 사람에게 도지로 주신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믿으시는 하느님의 바보스러움, 그러나 그 신뢰는 보답을 받지 못한다. 주인은 사람을 믿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주어 생계도 되고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종들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렸지만 거부되자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겠지... 하는 사랑에서 위험을 무릎쓰면서 까지 선(善)으로 유도하시는 구원을 선포했지만,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진 사건으로 하느님은 새로운 백성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유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이다. 비유는 소작인들 곧 지도자들의 악행을 소재로 하지만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고,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파견하는 사랑 깊은 주인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구원역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소작인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전체를 요약하며 그 안에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인내를 보여주고 있다.
♠ 대화 방향 : ①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을 당장 벌하시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인내로 기다려줌으로써 어떠한 결실을 본 일이 있는지 나누어보세요.
② 포도원 주인이 나에게 돌아왔을 때 나의 도지 몫의 지불에 대하여 묵상해보고, 주인과 소작인의 나를 비교해보세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성서묵상 ( C.M마르띠니 지음. 성염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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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8주일
2020. 10. 11
마태오 22, 1 ~ 14
♠ 복음 공부 : 혼인 잔치의 비유
* 1~2절 : 하늘나라는 비길 수 있다. - 구약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다. 거기에 상응하여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혼인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그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신.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 기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 3절 : 오려고 하지 않았다. - 예수님 자신의 비유해석대로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자 요한의 예언직 역할과 메시지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 4절 : 잔치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다. 천국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 5절 : 그들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장사를 더 가치있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준수에서 얻은 자기의 선행과 봉사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다.
* 6절 : 헤롯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서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해서...’ 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 7절 :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과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로마군대가 하느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 간혹 하느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 8~10절 :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느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
* 11~14절 : 예복 – 구원의 옷이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이라는 옳은 행실이다.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옳은 행위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느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세상의 요구와 하느님의 초대
- 유다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도래하는 징표는 잔치로 나타난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이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은혜로움을 강조하고 구원에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힐책하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모든 준비를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는 임박한 구원에로의 초대와 이 초대에 우물거리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이 비유에서 뒷부분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는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행실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마태오의 신자 공동체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이미 초청되었으나 참석하기를 거절한 손님들은 유다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미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초청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고 하늘 나라에 들도록 초청했을 때 저들은 그 초청을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참석하기를 거절한 손님들은 술타령이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러 가기 때문에 참석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상 사업(밭일, 장사)을 하기 위하여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한적인 일에 분주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기 쉽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잊기 쉬우며,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 기울이느라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초청을 놓치기 쉽습니다.
♠ 대화 방향 : 우리는 신앙으로 살면서 역시 세속에서의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성서형제회의 회원으로 세상의 규율대로 살면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① 이를 극복해나가는데 적지 않는 장애가 생긴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 극복해야하는지 생각해보고,
②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겪은 일중에서 생각과 달리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거나, 아니면 좌절에 빠진 일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③ 나는 잘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혹시 과다한 요구를 했거나, 그것이 두려워서 이를 모른 체하고 덮어준 적이 있었는지도 아울러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보득솔(청년성서모임) ▪ 성경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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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9주일 / 전교 주일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20. 10. 18
마태오 28, 16 ~ 20
♠ 복음 공부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16절 :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뿐이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갈릴래아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17~18절 :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한, 모든 민족,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한으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 19~20절 :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 (23:8) 가르치는 권한이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전교 사명은 교회의 존재 이유
오늘은 더불어 전교 주일이기도 합니다. 전교 사명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전교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이러한 고백 이면에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인으로써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을 갖도록 각성시켜 줍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복음의 가난한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하며 주님의 파견 명령 앞에 주저함 없이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 대화 방향 : 성경을 읽어보면 특히 복음서에서는 거의 같은 장면이 다른 식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말씀을 받아들인 공동체의 환경과 그때에 생활상이 다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떨 때에는 그날 복음이 완전히 나를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와 닿을 때가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어떤 존재이신지 느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경 주해서 ▪ 보득솔 (청년 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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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0주일
2020. 10. 25
마태오 22, 34 ~ 40
♠ 복음 공부 : 가장 큰 계명
* 34~35절 :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두가이들이 모두 대답을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 36절 : 이중에 율법교사 한명이 예수님께 시험하려고 질문을 한다. 그의 의도덕인 질문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 37~40절 : 예수님은 곧바로 ‘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4-5)말씀으로 대답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계명으로 이웃사랑을 하나 붙이신다. ‘쉐마’의 첫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답변을 대신하셨다(마르코 12:28-34;). 비록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속에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추가하긴 했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고 있던 ‘쉐마’의 중요성을 그대로 인정하심을 보여준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 복음 요약 : 신명기 6;4,5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은 ‘쉐마’교육으로 대표된다. 그렇다면 ‘쉐마’ 교육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쉐마’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마아’의 명령형으로, 우리말로는 ‘들으라’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도록 되어있는 ‘쉐마’는, 이스라엘의 의식구조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앙고백문이다. ‘쉐마’를 정기적으로 암송하는 관습이 구약시대부터 정착되어 있었다.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 6:6-7)를 본문 낭독의 명령으로 이해하였고, 신명기 6장 7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이든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아침과 저녁에 한 차례씩 ‘쉐마’를 암송하는 제도로 삼았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에, 부모들은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신명기 6장 4절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주후 2세기 랍비였던 아키바가,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당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쉐마’를 암송하였다. 그런 전례를 따라, 다른 순교자들도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쉐마’를 암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직전의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쉐마’를 암송하는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 ‘쉐마’는 유대인들은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는 신앙고백이면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암송하는 신앙고백인 셈이다.
♠ 대화 방향 : 유대인들의 ‘쉐마 이스라엘’ 외에 우리에게는 강력한 또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결혼잔치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재물이 떨어지거나 건강이, 또는 삶의 열정이, 누군가에게는 오랜 봉사생활에 이제는 봉사하고자하는 마음이 떨어져가고 있을 수 있다. 도저히 떨어진 포도주가 다시 생길 수 없었지만, 하지만 성모님의 유언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라는 말씀을 다시 우리가 다시 우리 마음에 품는다면 우리에게는 삶의 생동감이 올라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시간표와 하느님의 시간표 앞에서 많이 좌절할 때가 있다. 우리 시간표에 맞게 보다는 많은 경우 하느님은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응답하시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응답하신다. 그런데도 때론 하느님의 시간표를 우리의 시간표에 일치하게 할 수 있다.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언제인가? 바로 성모님께 청하는 경우이다. 성모님은 기적을, 예수님께서 기적을 빨리 행하도록 이렇게 청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 절박한 상황 속에서 성모님께 매어 달릴 때 우리는 체험할 수 있다. 또 성모님께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성모님께서는 생명을 돌보시면서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함께 해 주시고 그분은 과부로써 오랫동안 사셨기에 세상살이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우리의 고통을 잘 아시는 분시다. 그 성모님께 우리를 위해 청할 때 그것은 강력한 것이다. 세상의 중재기도 중에 도대체 이보다 더 강력한 중재기도가 있을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한다. 하느님께서 분노하시고 그들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신다. 그때 모세가 하느님께 청한다. 모세가 청했을 때 들어 주시는데 하물며 성모님께서 청하신 기도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신다. 마더 데레사가 살아생전에 늘 드렸던 기도가 바로 기억하소서라는 기도이며, 이 기도문은 급행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 들안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은 항상 이 급행기도를 바친다.
기억하소서, 지극히 인자하신 동정마리아여 :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함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나이다. 저희도 굳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어머니 앞에서 죄인으로 눈물을 흘리오니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천주의 성모님 저희 기도를 못들은채 마옵시고 인자로이 들어 주소서, 아멘 !
☞ 성모님께 전구했을 때 체험했던 기적을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 : ‘쉐마’란 무엇인가? (권혁승 교수)
▪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성서를 통해 만나는 어머니 마리아 ( [교황프란치스코 영성특강] / 송봉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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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1 >
말씀의 자녀들에게...
백 막달레나 (선희) / 구 광주 계림동 팀 FB
당신의 빛나는 얼굴로 이들 침울한 시름을 비추어 밝혀주소서.
당신의 활기찬 말로 모두의 이마를 활짝 펴 주소서.
당신의 지칠줄 모르는 부지런으로 우리의 게으름을 채찍질 해 주소서.
당신의 아름다운 꿈은 모두의 생명의 불로 피워 올립니다.
당신의 눈동자는 바다처럼 맑아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 보여 주십니다.
당신의 몸에서 풍기는 생명의 기운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강력한 효소입니다.
당신의 우람한 팔은 설계를 하고 기초를 닦고, 또 끝마무리까지 해나가십니다.
당신의 발걸음에는 두려움도 없고 위태로움도 없어라.
당신의 영원한 봄이어라.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여름의 접근을 알리고 있어라.
위대한 여름의 접근을,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에 그것은 호소하고 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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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2 >
전국 조정 말씀선포자 직분을 맡으면서...
이 리드비나 (유경)
전국 조정 말씀선포자
♱ 찬미 예수님!
F・B 회원 여러분! 주님 안에서 오늘도 시작과 마침을 하고 계시는지요?
저는 ‘F・B’ 라 불리던 시기인 1984년에 처음으로 F・B 를 접하고, 회합(코이노니아)안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강렬해서 성령의 인도로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했던 것으로 F・B를 떠올립니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는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지만, 크로노스(Chronos) 안에서는 계산해보니 벌써 36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전남 강진의 고등학생(성요셉여고)이었던 저는 토요일이면 10여명이 사제관을 내어주신 신부님의 배려에 진지하게 모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서울의 묵동성당에서, 청년팀을 구성해서 진행하게 되었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철산동에서 공동 생활하던 자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성소가 있는지도 점검했었습니다.
F・B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18년 6월 PRH워크숍 중 Seeking God을 주제로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6박 7일간 워크숍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갑자기 삶에서 미뤄두었던 과제들 중 F・B가 떠올라서 인터넷 검색을 했고, 다음카페와 밴드에 발자취가 있어서 제 연락처를 남기자 보나벤투라 형제님이 전화를 주셔서 연결이 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라고 느낍니다.
아마 F・B 안에서의 기도를 제 안에 영의 소리가 듣고 응답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일상 안에서 고민하는 것은 제 삶의 길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 길이기를 계속 질문하면서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현실 안에서 가정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한 가정을 위해 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예수님께 계속 묻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저의 의지와는 별개라서 석사 1학기 때부터 가족치료를 경험하게 하고, 박사를 하고 나서도 가족상담전문가, 모래놀이치료, 미술치료, 로고테라피, OEI(트라우마 치료), PRH워크숍 등을 계속했습니다. 그러한 자격과 내적 작업을 통해 법원에서 이혼하는 부부를 위한 상담과 조정, 아동학대 행위자, 가정폭력 행위자와 피해자 등을 상담하는 활동을 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도 어떤 길을 보여주시고 함께 하실 지는 저는 모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 20) 라는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F・B의 ‘전국 조정 말씀선포자’로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갑자기 주어진 역할이라 지금부터 질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F・B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코로나19로 행사들을 2021년으로 미루고, 50주년 준비위원회에서는 F・B 성가집을 만들고, FB교본을 수정하고, 인쇄 제작하면서, 50년간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F・B가 충분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과제로 보여지는 부분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인준으로 보여집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자, 함께 마음을 모아서 기도를 해나가면서 전주교구 이외의 교구 인준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있어서 인준 여부는 당신 뜻이라고 예수님께 또 맡겨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에게 이런 역할을 하라고 하신 뜻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전임 조정 말씀선포자이신 팜필로 형제님의 F・B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전달되어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하셨던 순명의 정신, 특히 아나윔(겸손, 가난, 순명)을 떠올립니다.
코로나19로 SNS를 이용한 회합을 하는 곳도 있고, 멈춘 곳도 있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신앙 안에서 영적성숙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또 다른 못자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렇게 우리 회원들이 둘씩 짝지어 파견한(마르코 6, 7) 사도가 되기 위해, 코로나19로 지내는 현재를 내적성숙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으로 삼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의 장이 F・B 안에서 움트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마태오 18, 19-20)’ 는 말씀을 믿고 두 손 모아 기도해 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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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3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15 부 -
권 토마 (순) / 안산 원곡본당 F・B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되살리신 그 젊은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독자가 그 젊은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넘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걷고 있지 않은 사람은 넘어지지도 않지만,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첫 단계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새 생명은 좋은 것이며 살아볼 만한 것입니다.
결코 우리를 저버리는 일 없이 앞날도 함께해 주실 그분께서
우리가 이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으로 새로운 창조이고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저 마음 다스리기가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오늘날 유행하는 대로
다음과 같은 ‘마법’ 주문들을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
되풀이하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긍정 에너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면이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더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는 거룩한 창조의 말씀이며, 이 말씀만이 꺼져 버린 생명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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