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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국민시를 만들자
삼국유사의 ‘사복이 말을 못하다.[蛇福不言]’란 제목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서울의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사는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두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 하여 사복(蛇福)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다가 사복을 보고는 맞이하여 예를 올리니, 사복은 답례를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옛날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어머니를 가리킴)가 지금 죽었으니, 우리가 장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원효가 승낙하자 함께 집에 가서 사복은 원효로 하여금 포살수계(布薩授戒 같은 지역의 승려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계율을 범한 자가 다른 승려들에게 고백․참회하는 의식)를 하도록 하였다. 원효가 시체 옆으로 가서 말하기를,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기가 괴롭다.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기가 괴롭다.”하니,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
하였다.
그래서 원효가 다시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
원효가 사복 어머니의 주검을 보고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기가 괴롭다.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기가 괴롭다.”고 말하니, 사복이 이를 듣고 말이 길다고 하므로, 다시 원효가 이를 짧게 고쳐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라 했다는 것이다.
말은 반드시 길게 해야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촌철살인이란 성어가 있듯이 말을 짧게 하면서 최상의 효과를 거둔다면 그게 상책이라 할 수 있다.
짧은 글 속에도 크고 긴 뜻을 담을 수 있다. 기술의 문제다. 그러나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짧은 글 속에 많은 뜻을 담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은 작고 날카로운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짧은 경구로 사람의 마음을 찔러 감동시킨다는 의미다.
이처럼 짧은 글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 것으로는 왕안석의 독맹상군전(讀孟嘗君傳)을 들 수 있다. 전체가 90자밖에 되지 않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사기(史記)에 실린 맹상군전의 내용을 비판하고, 거기에 나오는 계명구도(鷄鳴狗盜)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과 다른, 자기의 견해를 요령 있게 짜 넣었다.
계명구도란 제(齊)나라의 맹상군이 진(秦)나라에 가서, 잡힌 몸이 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식객(食客) 중의 닭 울음소리 잘 내는 사람과 개처럼 몰래 들어가 도둑질 잘 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고사다.
전국시대 때는 왕과 귀족들이 인재를 모으는 데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맹상군은 식객을 환대한 것으로 유명하여, 범죄자라 하더라도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받아들였기로 그의 문중은 삼천 명이 넘었다. 개 흉내로 도둑질을 잘 하거나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조차도 재주로 여겨 맞아들였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각국의 제후들도 그를 슬기롭고 재능이 있는 인물로 알게 되었다.
맹상군이 한번은 진의 소왕에게 잡힌 바가 되어 곤경에 처했다. 위기를 느끼게 된 맹상군 일행은, 탈출하기 위해 소왕의 애첩에게 뇌물을 주고 소왕을 설득하고자 했는데, 애첩은 여우 가죽으로 만든 귀한 호백구(狐白裘)란 옷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맹상군이 진나라에 올 때 가지고 온 호백구는, 이미 소왕에게 선물로 바친 후였다. 그러자 개 도둑 출신 식객이 소왕의 침전으로 몰래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 와, 애첩에게 바친 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국경에 도착했을 무렵은 아직 동이 트기 전이어서, 함곡관의 관문이 열리지 않아 맹상군 일행은 조바심을 내며 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식객 하나가 닭 울음소리를 내자 동네 닭들이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모두 울어댔고, 이 소리를 들은 경비병들은 날이 샜다고 여겨 관문을 열었다. 드디어 맹상군 일행은 진나라를 벗어나는 데 성공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보고, 맹상군의 뛰어난 식객 대우 때문에, 그러한 고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며 탄복하였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의 평가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겨우 90자밖에 안 되는 짤막한 ‘독맹상군전’이란 글을 써서 촌철살인의 뜻을 그 속에 담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맹상군은 대해 현명한 선비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현사(賢士)들이 모두 그에게 몰려들어, 마침내 그들의 힘을 의지하여, 호랑이와 표범 같은 진(秦)나라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 맹상군은 다만 계명구도의 두목일 뿐인데, 어찌 뛰어난 선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맹상군은 결코 훌륭한 책사(策士)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가 제나라의 강한 국력을 충분히 이용하여 단 한 사람의 현사라도 얻었다면, 마땅히 제왕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찌 닭 울음소리나 잘 내는 사람이나, 개처럼 교묘히 담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의 힘을 빌렸겠는가?
계명구도의 인물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나, 바로 이런 요인 때문에 오히려 참된 현사들이 그에게 다가 가지 않게 된 것이다.”
계명구도 같은 잡기(雜技)를 가진 자를 삼천이나 모았으나, 진정 한 사람의 현사를 얻었더라면 그는 왕이 되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봐와 같이, 많은 식객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이 결코 최선의 인재를 얻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말이나 글이 반드시 길어야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어서 화를 가져오는 경우마저 있다. 그래서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 게 아닐까도 생각된다. 말은 될 수 있으면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로 하는 것이 좋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젊을 때는 한데 모여 왁자지껄 떠들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 없이 어울렸지만,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삶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갖추기 때문에, 말 많은 것이 눈에 그슬리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장시간 냅다 지르는 것은 좌중을 역겹게 만든다. 젊은이가 그러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예쁘게 봐 줄 수도 있지만, 나이든 사람이 제 자랑이나 하는 듯이 장광설을 내뱉으면서 좌석을 독차지하는 것은 정말이지 꼴사나운 짓이 아닐 수 없다.
짧은 것이 긴 것보다 못한 것이 아님을 그런 데서 실감한다.
촌철살인에 해당하는 것이 경구나 속담이다. 그리고 문학 장르에서는 시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시란 원래가 긴 말을 짧게 응축시킨 문학양식이다. 짧은 글귀 속에 갈래갈래 굽이굽이 많고 많은 숨결을, 작디작은 그릇에 함축해서 담아 놓은 것이 시다. 그러나 생긴 모양은 종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독보다 크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는 쥘 르나르의 ‘뱀’이란 작품이라 하는데, ‘너무 길다’가 그 전문이다.
우리나라의 시인 고은도 ‘별똥’이란 제목의 단 한 줄로 된 시를 썼는데,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가 그 전문이다. 짧지만 속에 담긴 내용은 한량없이 크다. 읽는 이에 따라 수없이 많은 정서를 거기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일에 지치고 외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별똥별에서나마 자신을 반겨주는 대상을 보았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허덕거리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별똥별 같은 것이었음을 새로이 발견했을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이정환의 ‘서시’라는 작품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꽃이 붉은 빛으로 피어나자는 않았다는 의미망은 그 얼마나 넓은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이 쓴 세 줄로 된 ‘그 꽃’ 이란 시다. 전문이 15자다.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시를 읽는 순간, ‘아, 그랬지!’하고 가슴을 칠 것이다. 아, 그때는 몰랐지. 지나고 보니 알겠는 걸. 만약 그 때 그것을 알았더라면과 같은, 그러한 상념들이 머릿속에 소용돌이 칠 것이다. 짧지만 사람마다 느낀 정서는 그처럼 끝이 없이 길 것이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가 쓴 ‘탑’이라는 시조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지만, 떳떳이 남 앞에서 이별의 울음 한 번 제대로 낼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회한으로 남아, 사리로 굳어진 아픔이 탑 속에 녹아 있다. 독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이은상이 쓴 양장시조(兩章時調)다. 돌아가신 어머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크나큰 진리를 외친 것인가?
이와 같이 짧은 시를 말하려면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쿠는 5 7 5의 17음으로 된 정형시로, 일본인이면 누구나 지으리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장르다. 대표적인 하이쿠 작가로 알려져 있는 바쇼 외 3인의 작품 하나씩을 보자.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 항아리 얼면서 금가는 소리 -바쇼-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부손-
우리 개를 묻은 뜰 한 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 이싸 -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것을 모르다니 –바쇼 -
열일곱 음절의 시에 긴 말로도 나타낼 수 없는 오묘함을 응축시키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짧고 아름다운 시가 찾아보면 많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의 호수란 작품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시다. 눈 감으면 호수뿐만 아니라 태평양도 볼 수 있다.
말을 아끼라는 것은 변함없는 금언이지만, 한 줄의 시처럼 짧은 말 속에 긴 뜻을 담을 일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봐
질서 공부
끝!
윤삼현의 겨울새․26이다. 그럼 박두순 작가의 평을 들어보자
“철새들의 춤, 그 장관의 군무에도 질서가 있다는 걸 어린이들은 본다. 어린이 시선이 어른보다 낫다. 고니, 기러기, 두루미, 백조 등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겨울새들의 춤이 없다면 겨울 하늘이 얼마나 쓸쓸할까. 그들은 리더를 따라 약속처럼 줄지어 하늘 길을 난다. 일사불란한 질서. ‘질서 공부/ 끝!’ 이다.
요즘 겨울새들도 우리 땅을 내려다보며 이 나라 질서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질서 공부 좀 해.’라고 할지 모른다. 우리는 신호등 잘 지켜 길 건너고 운전한 일을 이제 자랑스레 여겨도 좋을 것이다. 딱 넉 줄의 시가 전하는 메시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풀꽃 3 -
나태주의 풀꽃이란 시다. 이 시에 대해 배철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 시는 비록 한 시인이 썼지만, 그것은 영혼의 언어요 황금의 언어다. 오늘부터는 이러한 시를 마음으로 읽고 느끼면서 읽자. 많은 이의 미음이 메마르지 않고 풍요로워지도록,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풀꽃’처럼 소외당하고 외면 받아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없도록 내 주변을 둘러보자.”
그리고 짤막한 풀꽃3을 읽고, 내용 그대로 기죽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 자기의 꽃을 피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대가
여인인줄만 알고 살았는데
꽃이었구나. 눈부신 꽃이었구나
이수동의 ‘눈부신 날’이다. 그대가 평범한 한 사람의 평범한 여인에 지나지 않은 모습으로만 여기고 대해 왔는데, 어느 날 보니 그녀는 향기를 내뿜는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이고, 한량없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여 눈조차 떨 수 없는 신비한 꽃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 ‘그대’를 발견한 작가는 정말 행복하다.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날이 살이 썩어간다는 뜻입니다
안도현의 ‘그립다는 것’이라는 시다. 이 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립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만큼 처절하게 아플 때 써야 할 말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아픈 것도 보통 아파서는 안 된다. 살이 썩어갈 때만이 써야 되는 것이다. 그런 그리움은 말 그대로 보물의 다른 이름이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면
방바닥에 걸레가 있다.
안도현의 ‘너와 나’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은 별빛을 닮아 행복한 사람이다. 먼먼 하늘의 그 별을 열망하는 사람은 항상 손에 걸레를 드는 사람이다. 그 걸레로 마루도 닦고, 자신의 마음도 닦고, 남의 아픔도 닦는다. 그러고 그는 별이 된다.
별을 쳐다보면
가고 싶다
어두워야 빛나는
그 별에
셋방을 하나 얻고 싶다
역시 안도현의 ‘별’이다. 별은 밝을 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별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별은 그저 달세를 주고 셋방살이 하는 곳이다. 그럴 때 가슴에 있는 참별을 만난다.
단풍잎 한 마리
단풍잎 두 마리
어, 가을이 움직이다.
유강희의 세 줄짜리 동시 ‘금붕어’다. 색깔 고운 금붕어를 단풍잎으로 바꾸었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을 어항 속에 옮겨 놓았다. 유강희는 세 줄짜리 단시 100편을 모아 손바닥 동시집을 발간했는데, ‘금붕어’는 거기 실린 한 작품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두 줄로 된 시다. 이 시를 읽은 사람은 제 각기 생각을 정리할 것이다. 어떤 이는 섬처럼 단절된 인간관계의 회복을 꿈꿀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무리에서 탈출하고 싶은 하나의 고독선언이라 해석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읽는 이의 자유로운 영역이다. 이른바 시가 갖는 애매성(ambiguity)이다.
위에서 잠깐 본 일본의 하이쿠는 이제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자기들의 언어로 하이쿠를 쓰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고 인터넷 서점에 올라 있는 하이쿠 서적만 해도 수천 권이 넘는다고 한다.
하이쿠는 한 줄의 운문으로 계절과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의 실존에 가장 가까운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인 바쇼와 이싸의 작품은 미국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뉴욕 타임스지는 한 해 동안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교통과 계절을 주제로 한 하이쿠를 공모해 신문에 싣기도 한다. 하이쿠는 그토록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유럽에서도 스스로 하이쿠 시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생기고 영문 하이쿠 시집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우리도 그간 짤막한 시 작품을 많이 쌓았고 또 날마다 그 높이를 더해가고 있다. 숫자도 숫자려니와 그 내용 또한 점점 알차고 빛을 더해가고 있다. 이처럼 우리 단시의 재산도 이제 쌓일 만큼 쌓였다. 그만큼 단시에 대한 역량이 커졌다.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담을 줄 아는 재주를 쌓았다.
우리는 일찍이 시조라는 정형의 짧은 시를 가지고,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기녀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를 뽐내었다. 지금 시조는 지난날의 기운을 점차 잃어가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향수했던 그 전통을 바탕 삼아 새로운 단시를 출산시켜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감각에 맞게 짤막한 시를 만들어야 한다. 이웃 나라의 하이쿠보다 더 멋진 단시를 만들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위대한 국민시를 만들어 누구라도 읊고 즐기는 새 문화 마당을 만들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