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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초여름 유럽의 상황 역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명백하게 위반하면서 라인란트를 재무장했다. 히틀러는 또한 오스트리아 합병을 준비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폰 슈슈니크에게 압력을 넣었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자신의 새 제국을 북아프리카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레옹 블룸이 새 정부 수반으로 취임했지만 우파의 반발은 프랑스가 조만간 정치적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쿠르트 슈슈니크. 1934년 8월 29일부터 1938년 3월 11일까지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지냈다.
프랑스 인민전선 연합 내각의 레옹 블룸 총리(왼쪽에서 두 번째)와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모리스 토레즈(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스페인 공화 정부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블룸 총리는 스페인의 분쟁이 더 넓게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의 경고에 따라 불간섭 정책을 택했다. 스페인 공화 정부는 서구 민주 국가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정치적 폭력과 파업이 초여름부터 가속화되었다. 6월 1일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은 모든 건설 노동자, 기계공, 승강기공들에게 파업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어 노동자 7만 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시위 참가 노동자들이 무장한 팔랑헤당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파업 참가자들은 식료품 가게를 약탈했으며, 치안유지군이 출동했다. 7월 초에 노동자총동맹은 중재안을 받아들였으나 전국노동연합은 투쟁을 계속했다.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은 팔랑헤당원들의 공격에 같은 방법으로 맞서 한 카페에서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경호원 3명을 살해했다. 정부는 마드리드 내 전국노동연합 지부들을 폐쇄하고 다비드 안토나(David Antona)와 시프리아노 메라(Cipriano Mera) 등 파업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메라는 뒷날 내전 때 가장 유능한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된다.
다비드 안토나
시프리아노 메라
6월 중순 말라가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싸움에 연루되어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 지도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한편 농촌 지역에서는 10만 명가량의 전국노동연합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6월 16일 힐 로블레스는 의회에서 2월 16일 이후 그때까지 성당 170곳이 불에 타고 살인 사건이 269건 발생했으며, 1,287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또 133건의 총파업과 216건의 지역 단위 파업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통계는 비록 힐 로블레스가 결코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는 <엘 데바테>라는 신문을 보고 계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 스페인이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칼보 소텔로는 정부의 실정(失政)을 규탄하는 일련의 고발 목록을 제시하여 로블레스의 주장을 뒷받침했고,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스페인을 혼란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비난을 쏟아내는 연설에서 실명(實名)을 거론하기에 이르자 의회 의장은 그에게 발언 취소를 요구했다. 소텔로의 의도가 스페인이 완전한 무질서에 빠졌다는 느낌을 증폭하려는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비난과 모욕의 수위를 높여 간 당시 상황은 의회 정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음을 확인해주었다.
흑색선전이 도처에 난무하다 보니 때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우파는 좌파가 수녀들이 독이 든 사탕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좌파는 우파가 성직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파 언론들은 연일 마누엘 아사냐를 케렌스키에 비유했고,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스페인 군대 장교들에게 러시아 차르군 장교들의 운명을 상기시켰다.
1936년경 스페인의 군대는 병력이 약 10만 명 규모였다. 그중 거의 4만 명이 모로코에 주둔 중인, 강건하고 효율적인 군대였다. 그에 비해 대도시에 주둔한 나머지 병력은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한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스페인에는 단 하루 전쟁을 하는 데도 충분치 않을 정도의 탄약만 있었고, 군수품 생산은 대혼란 상태에 있었으며, 장갑차, 대전차용 무기, 대공화기는 거의 전무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군복을 지급받지 못했고, 그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장교들은 자주 신병들을 무급(無給)의 가사 노동력으로 써먹곤 했다.
스페인 군대의 형편없는 군사적 효율성은 과거에도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했으며, 반란을 획책하고 있던 장교들도 아스투리아스에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맞닥뜨릴 반대편의 저항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음모의 대부분은 육군 대위 바르바 에르난데스(Barba Hernandez, 카사스비에하스 사건 때 아사냐를 고발한 사람)와 팔랑헤당원 로드리게스 타르두치(Rodriguez Tarduchy) 중령이 창설한 에스파냐 군사동맹(Union Militar Espanola, UME) 구성원들에 의해 획책되고 있었다. 에스파냐 군사동맹은 현역과 예비역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전체 장교의 10%도 대표하지 못했으나 카를로스파, 에스파냐 혁신, 국민행동 청년단, 팔랑헤당, 그리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장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로드리게스 타르두치 중령
에스파냐 군사동맹의 주요 멤버들
아사냐 정부는 음모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정부는 그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은 장군들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냄으로써 나름의 예방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어 프랑코 장군은 카나리아 제도로, 고데드 장군은 발레아레스 제도로 보냈다. 그러나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시대에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추바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라스팔마스(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모로코와, 마요르카(발레아레스 제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바르셀로나와 가까웠다. 음모의 주동자이며 코드명이 ‘지휘자(Director)'였던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 장군은 카를로스파와 이미 출정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8천 명의 레케테 의용군들의 본거지인 팜플로나에 군정지사로 파견되었다.
에밀리오 몰라. 반란의 주요 인물이며 프랑코와는 정치적 라이벌이었으나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몰라는 당시 모로코에서 벌일 반란을 위해 그곳 주둔군을 준비시키고 있었는데, 그는 반도로 돌아와 팜플로나로 가는 길에 마드리드에 들렀다. 3월 5일부터 12일 사이에 몰라는 오르가스, 고데드, 폰테(Ponte), 킨델란(Kindelan), 살리케트(Saliquet), 프랑코, 바렐라, 갈라르사(Galarza), 팡홀, 로드리게스 델 바리오(Rodriguez del Barrio) 등 다른 음모 주동자들과 차례로 만났다. 몰라는 고데드에게 자신이 “먼저 음모를 가동하고, 이어 뒤따를 봉기에 필요한 훈령과 지령문”을 작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렐라와 오르가스가 가담한 첫 번째 계획은 에스파냐 공산당 서기장 호세 디아스가 한 공개 모임에서 음모자들이 작성한 비밀 문건을 습득하여 폭로해버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알프레도 킨델란. 내전 중 프랑코 군대의 공군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나 내전 이후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다.
안드레스 살리케트. 내전 중 국민군의 중앙 군단을 지휘한다.
앙헬 갈라르자
로드리게스 델 바리오
조심성이 지나쳐서 동료들을 분노하게 만들곤 했던 근시안적이고 소심한 지휘관 몰라는 5월 25일 ‘예비훈령 1호’를 내려보냈다. 이 문건에서 몰라는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무장 병력과,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하는 비무장 단체를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물론 팔랑헤당원, 카를로스파 의용군, 그밖의 다른 우파 정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반란군의 수장은 ‘리프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호세 산후르호 장군으로 내정되었다. 그 별명은 산후르호 장군이 아브드 엘 크림을 패배시킨 1925년 알우세마스 상륙 작전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덕분이었다. 산후르호는 거구에 허풍기가 있었으며, 19세기에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싸운 카를로스파 장교의 후예였다.
산후르호 휘하에는 아프리카파로 알려진 식민지 주둔 장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비아몬데가 들어왔다. 북부 갈리시아 주의 소도시의 해군 회계주임의 아들이었던 프랑코는 해군에 결원이 생기지 않아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보병사관학교에서 성실한 생도였으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프랑코는 졸업 성적이 312명 가운데 251등이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주둔 외인군단에서 그는 빠른 진급을 거듭했다. 이 외인군단은 프랑스 외인부대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건장한 동료들과 달리 프랑코는 체형이 군인답지 않았다. 작달막한 키에, 불룩 튀어나온 배, 목소리 톤이 높아서 프랑코는 동료 장교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이 젊은 장교는 용감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거사와 관련해서는 몹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1936년 봄에 프랑코가 너무나 과묵하게 처신한 탓에 여러 동료들은 아스투리아스 혁명을 진압한 뒤로 좌파가 그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가 반란에 합류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프랑코는 분명 개방적이고 대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도 그리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지 않았고, 외인군단에서도 프랑코는 여자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열정을 보였는데, 프랑코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볼셰비키의 위협을 다룬 잡지 기사를 탐독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많이 쏟았다는 점이다.
산후르호, 몰라, 프랑코 이 세 사람은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전혀 달랐다. 그런데 이들이 매우 기이한 인물인 케이포 데 야노(Queipo de Llano) 장군을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기로 동의한 것은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야노 장군은 1930년에 왕정을 타도하려던 실패로 끝난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어서 확신에 찬 프리메이슨이나 공화주의자로 보이던 사람이었다.
케이포 데 야노. 내전 중 남부 전선의 지휘관이었으며 세비야에서 4,000명 이상을 학살했다.
한편 좌파도 군대 내부에서 동맹 세력을 찾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군대 내 비밀 단체인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Union Militar Republicana Antifascista, URMA)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특히 돌격대와 대통령 경호 부대에 인원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1935년 말에 창설되었고, 지도자는 디아스 텐데로(Diaz Tendero) 대위였다. 텐데로는 후에 마우타우센 포로수용소에서 죽는다. 이 단체 구성원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의 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도 비센테 우리베(Vicente Uribe)와 엔리케 리스테르(Enrique Lister)를 중심으로 이 단체에 침투하려고 했다. 1936년 7월 초에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 소속 200여 명의 회원들은 일명 ‘로메랄레스(Romerales) 작전’을 모의했는데, 이 작전은 모로코에 있는 쿠데타 지도자들을 납치해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7월 8일 이 계획이 외부로 새어 나가자 카사레스 키로가가 즉각 중단시켰다.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은 정부 수반을 만나 7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예정되어 있으니 이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고데드, 몰라, 팡홀, 바렐라, 프랑코, 아란다(Aranda), 알론소 베가(Alonso Vega), 야구에, 가르시아 발리뇨(Garcia Valino) 등 쿠데타 주모자들의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반란 위험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비센테 우리베. 후에 카바예로 내각에서 농업장관을 맡는다.
엔리케 리스테르. 내전이 터지고 공화군 11사단장이 된다.
안토니오 아란다. 내전 발발 당시 오비에도 기지의 지휘관이었다.
알론소 베가
가르시아 발리뇨
좌파 쪽 젊은 장교들의 정치적 개입은 반란 이전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을 촉발하게 된다. 7월 12일 팔랑헤당 소속 ‘총잡이들’이 돌격대 일원이면서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 회원으로 알려진 호세 카스티요 세리아 중위를 암살했다. 그는 암살당한 두 번째 사회주의자 장교였다. 치안대의 페르난도 콘데스 대위와 사회주의자 빅토리아노 쿠엥카를 중심으로 동료들이 복수를 다짐하고, 먼저 왕당파 모임인 ‘에스파냐혁신’의 수장인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Antonio Goicoechea)의 집으로 몰려갔다. 고이코에체아가 집에 없자 그들은 힐 로블레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로블레스는 그때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한밤중에 벨라스케스 가에 있는 칼보 소텔로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소텔로에게 옷을 갈아입고 자신들과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칼보 소텔로는 그들의 자동차에서 총으로 살해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 동쪽의 한 공동묘지 입구에 버려졌다.
호세 카스티요 세리아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
우파 지도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의 장례식. 좌우 대결이 폭력으로 분출되는 국면에서 소텔로는 1936년 7월 13일 좌파 쪽 젊은 장교들에게 암살당했고, 국민 진영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구실로 삼았다.
정부가 암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는데도 우파의 분노 표출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곧 자신들을 ‘국민 진영(Nationalista)'이라고 부르게 될 사람들은 언제나 칼보 소텔로 암살 사건이 자신들의 인내를 시험하는 마지막 한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칼보 소텔로가 마드리드에서 암살당할 무렵 루카 데 테나(Luca de Tena), 후안 데 라 시에르바(Juan de la Cierva), 루이스 볼린 같은 민간인들이 이미 런던에서 후안 마르치가 댄 돈으로 비행기 한 대를 임대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비행기느 프랑코 장군을 라스팔마스에서 태우고 카사블랑카로, 이어 테투안으로 데리고 가서 아프리카 군대와 합류시키려고 이미 이륙한 뒤였다. 게다가 몰라 장군은 7월 10일과 20일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은 지령을 이미 각지에 발송한 뒤였다. 몇 달 동안 팔랑헤당원들은 비밀리에 자신들이 무어인들에 대항한 스페인의 재정복 운동이 시작된 장소로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코바동가‘라는 암호를 전달받는 대로 거사에 참여하라는 문제를 반란군 장교들과 조율하고 있었다. 그리고 6월 29일 호세 안토니오는 감옥에서 팔랑헤당이 이번 반란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지령을 내렸다.
후안 데 라 시에르바
스페인 우파가 임대한 비행기 하빌랜드 드래건 라피데
한편 국민 진영은 반대파 수장이 제복을 입은 경찰에게 암살된 사건에서 정부가 개인적 책임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적절한 태도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선거로 선출된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칼보 소텔로의 암살이 명백하게 보여준 ‘정부의 부재’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 있었다. 또한 반란 주동자들이 이미 활동을 시작한 뒤였지만 칼보 소텔로 암살은 만일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을 수많은 사람들까지 반란 지지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반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공화 정부 지도자들은 이 두려운 진실을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 아사냐와 총리 카사세릇 키로가의 행동은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공화국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병적인 쾌감을 발작을 동반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사냐와 카사레스 키로가는 심지어 공화국에 충성을 바치는 장군들과 프리에토의 경고마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또한 팜플로나에서 몰라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카사레스 키로가에게 빨리 대비하라고 촉구했던 공산당 소속 의원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rui)의 경고를 전해듣고도 대통령은 “몰라는 공화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라고 답할 뿐이었다. 정부가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정부의 마지막 역설은 자신들을 찍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줌으로써 반란을 일으킨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용기마저 없었다는 것이다.
돌로레스 이바루리. 이바루리는 '라 파시오나리아'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페인어로 '수난의 꽃' 또는 '정열의 꽃'을 의미한다.
7월의 세 번째 주 기간 동안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었지만 일상의 삶은 평상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간계급 사람들에게 그 시기는 휴가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인생이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휴가를 떠났는가에 달려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쿠데타 성공시킨 놈들 특징 중에 하나가 왜 다 키가 작은지 ㅋㅋㅋㅋㅋㅋㅋ 나폴레옹 - 프랑코 -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