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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삼상6:10-18)
2026, 4/26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삼상6:10-18절 말씀으로“신앙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지금 세계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흔히 우파라 불리는 한 축과 반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공산 사회주의, 좌파, PC주의, 페미니즘, 이슬람이 중심이 된 세력과 치열한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이란과의 전쟁도 그렇고, 우리나라 좌우 대립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볼 때 이 대립은 반기독교가 이길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트럼프의 몸부림도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데, 성경을 아는 사람은 짐작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인은 이런 흐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권을 말살하는 독재와 PC주의, 페미니즘, 이슬람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깨어 기도하며 세상을 분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내 뜻과 상관없이 사명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10절)
둘째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명을 다하는 것이 충성의 본질입니다.(12절)
셋째로, 벧세메스로 간 두 암소는 봉사의 본질을 알려줍니다.(14절)
사랑하는 여러분!!!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견디지 못해 법궤를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속건 제물을 드린 다음, 법궤를 수레에 실어 유다 땅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돌아온 법궤를 영접하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는데,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인들이 바친 속건 제물을 재언급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했다는 것과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실재 있었던 사건이란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았고, 또 젖도 떼지 않은 두 마리의 암소가 벧세메스까지 안전하게 법궤를 운반한 것은 미천한 짐승도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따라가면서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본질을 지켜야 함을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내 뜻과 상관없이 사명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10절)
본문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아멘.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내려진 것인지 우연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여 법궤를 실어 보내면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7절)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9절)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에게 내려진 이 재앙이 하나님임을 알면서도 테스트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새기를 낳아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두 암소에게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로 보냈는데, 저들은 젖 먹는 새끼를 떼놓고 수레를 메게 하면 분명 소가 새끼 때문에 목적지로 가지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두 암소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대로 곧장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소들은 정말 최악의 조건에서도 자기들의 사명을 잘 감당했는데, 보십시오. 오늘 이 두 암소는 새끼를 낳고 몸도 추스르지도 못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왔습니다. 짐승도 본능적으로 자기 새끼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젖이 불면 새끼를 찾는데도 끌려 나와서 법궤를 싣고 묵묵히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이 두 마리의 암소가 비록 미물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주께서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 자존심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고 아픔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십자가는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은, 만약 지지 않으면 주님께 합당치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마10:38).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내가 져야 할 십자가, 내가 감당할 사명은 반드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질 수도 있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내가 인정하고, 내가 원할 때만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고, 지기 싫어도 져야 할 때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십자가는 두 암소가 끌고 갔던 수레와 같습니다. 자기의 능력과 의지, 승낙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메야 하고 져야 하는 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보십시오. 가뭄에서 형제들을 구원하고, 장차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았던 요셉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으로 끌려가 십자가를 졌습니다.
모세도 거의 강제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십자가를 졌고,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평생을 그 모진 고통 감내하며 복음 전파라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구레네 시몬도 너무 맞아 도저히 질 수 없던 주님 대신 강제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십자가는 내가 원할 때만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아도 강제로 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원치 않아도 그게 주의 일이라면, 주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주님이 주신 십자가라면 억지로라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9: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1세기 당시에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는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갔는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각오하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런 일은 날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본성을 누를 수 있고, 세상의 일락을 누리고 즐기려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주님의 몸 된 전인 교회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피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주는 직분조차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있는데, 직분 안 준다고 시험 드는 것은 오히려 양반입니다
오늘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암소가 동물의 본성까지 억누르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내 생각과 다르고, 내게 이익이 안 되며, 손해가 나더라도 그게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미물인 소도 주의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데, 우리가 안 한다면 소보다 못한 자가 되나요? 오늘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 이 암소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시고 십자가를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명을 다하는 것이 충성의 본질입니다.(12절)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아멘.
사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암소가 새끼 때문에 벧세메스로 곧장 가는 게 아니라, 못 가길 원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두 소는 울고 보채고 날뛰지 않고 곧장 그대로 올라갔는데, 사실 이 소가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멍에를 전혀 메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처음 메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오늘 암소는 그걸 극복했습니다. 둘째는 끌어야 할 수레 역시 길이 나지 않은 새것이었기에 아픔이 더 컸을 거고, 또 멍에를 메 본 적이 없는 두 소가 연습도 없이 보폭을 맞추어 함께 수레를 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젖 먹이 새끼를 두고 왔다는 것인데, 어미가 새끼를 떼놓는 건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짐승의 본성을 알고 그걸 이용한 것인데, 그럼에도 벧세메스에 도착할 때까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주의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마음으로 감당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두 마리의 암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주신 사명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의 기본 원리입니다.
여러분!!! 주의 일은 쉽고, 즐겁고, 폼나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믿음의 선배들도 하나 같이 악조건 속에서 사역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주님부터가 사역을 하실 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조건에서 일하셨습니까?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겠습니까?(마8:20)
사도바울도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모세고 그랬고, 요셉도 그랬고,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예레미야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 신약의 주님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 신자들 다 그렇게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최소한의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대다수 사역자들은 최선을 다해 충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충성(忠誠)은‘마음의 중심을 잡고 정성을 다하는 것’그러니까 간신들처럼 자기 이익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사명 감당하는 것이 바로 충성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우들이 끝까지 충성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그래서 일을 맡기면 겁부터 내거나, 중간에 사역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역자는 바로 그런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충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며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계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충성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생활 하는 과정에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방해가 얼마나 강합니까? 그럼에도 복음이 더욱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오히려 확장되었던 것은 그런 중에서도 성도들의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비록 힘들어도 충성을 다해서 주님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께 잘했다 칭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뒤돌아보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불평불만, 원망도 안 되고, 부정적 생각도 지우며, 내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어도 끝까지 지고 가셔야 합니다. 고전4: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을 하되 죽기까지 충성입니다(계2:10) 이런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벧세메스로 간 두 암소는 봉사의 본질을 알려줍니다.(14절)
본문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아멘.
젖 나는 두 암소가 하나님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일단의 선지자 무리가 법궤를 싣고 온 수레를 패고, 그 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는데, 인간적으로 이 소들이 넘 안 됐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마지막 육신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지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딨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젖먹이 새끼를 두고, 멍에의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하나님의 궤를 운반해 온 두 암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두 소에게 여물도 많이 주고, 빨리 새끼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정 많은 인간의 생각일 텐데 놀랍게도 벧세메스 사람들은 두 암소를 잡아 번제로 하나님께 회생 제물로 바쳐버립니다.
인간적으로 좀 지나친 처사고,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벧세메스 사람들의 무자비함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들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봉사와 희생의 숭고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와 헌신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해 주었고, 물질도 좀 드렸으니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작은 것 드리고도 신앙생활 잘한다고 복 받을거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조금 심고 많이 거두려고 하는 것과, 주의 일을 하고 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우쭐해지는 것도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눅17: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도 바로 그 이유로 죽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승리자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가 아닙니다.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도 하나님이시지 이 두 암소가 아닙니다. 이 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그들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 암소처럼 하나님만을 위해 달려가는 것, 이것이 봉사와 헌신의 본질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이 원리와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안녕하신지요? 날마다 나를 죽이지 못하고, 조금만 일해도 생색을 내며, 우쭐해한다면 이 소만도 못한 것이고, 또 온전한 봉사와 헌신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계산하지 않는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것도 그 이유를 알아야 하고, 봉사와 헌신에서도 그 이유를 알아야 하며, 항상 나를 죽이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내가 높아지고 영광을 얻는 것은 금물입니다. 오늘 두 암소가 죽어서 제물이 되었듯이 우리 또한 날마다 죽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받쳐짐으로 진정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받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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