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선생고택<안채.사랑채> (金正喜先生古宅<안채.사랑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용궁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김정희묘 (金正喜墓.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묘이다.
일찍이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2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추사고택 주련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
봄바람처럼 큰 아량(雅量)은 만물(万物)을 용납(容納)하고.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文章)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대아(大雅):시경(詩經)의 편명(篇名).ㆍ*추수(秋水):장자(莊子).ㆍ외편(外篇)의 편명(篇名).
容
갓을 쓴 선비가 바짝 처진 눈초리에 방끗 웃고 있는 두둥실한 얼굴 용(容)자
웃으면 복이와요~^^
첫댓글 탐방 후 정리에 만은 도움이 되는 자료,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