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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탁덕’ 용어 수용 과정 조명
‘사체르도스’ 중국어 음역 ‘탁덕’으로 축약…조선으로 넘어오며 ‘덕 깨우치는 사람’ 의미로 정착
과거 한국교회에서 사제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던 ‘탁덕(鐸德)’은 어떻게 전래된 용어일까. 한자 표기만 보면 ‘덕을 깨우치는 사람’처럼 풀이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라틴어 ‘사체르도스(Sacerdos)’의 음역어가 중국교회에서 축약, 정착된 뒤 조선교회에 전해진 표현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발표에서는 이 같은 용어 수용 과정을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서구교회 용어를 받아들이고 해석해 온 과정을 살피는 교회 용어 수용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6월 20일 제225회 연구발표회를 열고, ‘탁덕’(鐸德)의 한국교회 수용 과정을 살폈다. 박강 신부(가브리엘·수원교구 광교1동본당 보좌)는 이날 ‘동아시아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용어 수용사 - 한중일 교회의 Sacerdos 개념 번역사를 중심으로’ 주제 발표에서 사제를 뜻하는 사체르도스가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번역, 수용됐는지 설명했다.
박 신부는 “중국교회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사체르도스를 중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해 정착시키려 많은 시도를 했다”며 “사체르도스의 음역어로 제시된 ‘살책이탁덕(撒責耳鐸德)’, ‘살책이탁덕(撒責爾鐸德)’, ‘살책아탁덕(撒責兒鐸德)’ 등의 번역어가 마침내 탁덕으로 축약돼 정착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역 서학서의 영향을 받은 조선교회도 탁덕을 사체르도스의 번역어이자 신부를 뜻하는 일반 용어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박 신부는 이어 “사체르도스의 직분상 의미를 담은 ‘사제’는 19세기 후반 불한사전에 등장한 이래 점차 음역 표현인 탁덕을 대신해 사용됐다”고 밝혔다. 교회 문헌 안에서 탁덕이 사제로 대체돼 간 과정도 짚었다. 박 신부에 따르면, 교리서와 교회 문헌에서는 1934년경부터, 성경에서는 1940년대부터, 기도서와 전례서에서는 1960년대부터 탁덕 대신 사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특히 “탁덕이 사체르도스의 음역어인 ‘살책이탁덕’, ‘살책아탁덕’의 축약으로 정립된 용어라는 사실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탁덕의 한자 표기에 이끌려 이를 ‘덕을 깨우치는 사람’으로 해석한 문헌들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발견된다”며 “이는 한국교회가 외래 교회 용어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 온 사례인 동시에, 보다 엄밀한 교회 용어 수용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방증”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이날 연구발표회에서 조은나(루치아·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박사 수료) 씨는 ‘1948~1968년 현대 한국천주교회 형성기의 평신도 운동 연구’를 주제로 한국교회 평신도 사도직 활동과 제도화를 다뤘다. [가톨릭신문, 2026년 6월 28일, 박지순 기자]
언제부터 ‘탁덕’ 대신 ‘사제’ 사용하기 시작했나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발표회에서 ‘탁덕’ 의미와 변천사 조명
과거 사제를 지칭하던 용어 중 하나인 ‘탁덕(鐸德)’의 뜻과 유래를 새롭게 조명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그간 중국 교회에서 들여온 ‘탁덕’의 의미를 한자 표기에 기대어 ‘덕을 깨우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해왔다. 그러나 탁덕은 라틴어로 ‘사제’를 뜻하는 ‘Sacerdos’의 한자 음역어 ‘살책아(이)탁덕’(撒責兒<耳>鐸德)이 축약된 말이라는 분석이 제시됐다.
박강(수원교구) 신부는 20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제225회 연구발표회에서 ‘동아시아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용어 수용사 - 한중일 교회의 Sacerdos 개념 번역사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했다.
박 신부는 17세기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역 서학서를 중심으로 ‘탁덕’이라는 용어가 형성되고 전파된 과정을 추적했다. 탁덕의 효시가 되는 ‘살책아탁덕(撒責兒鐸德)’은 1615년 바뇨니 신부의 「교요해략」에 처음 도입됐다. 이어 1629년 알레니 신부는 「미살제의」에서 새로운 음역어인 ‘살책이탁덕(撒責耳鐸德)’을 고안하는 한편, 축약어인 ‘탁덕(鐸德)’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이후 1635년 알레니 신부의 「천주강생언행기략」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살책이탁덕’의 의미를 풀이하는 말로 ‘사제(司祭)’가 등장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 표현이 한역 서학서 안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 교회에서도 20세기까지는 ‘사제’보다 ‘탁덕’이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 쓰였다. 그러다 1934년 간행된 「천주교 요리문답」을 계기로 ‘사제’가 ‘탁덕’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사제(司祭)’가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직의 근본 의미를 담고 있는 번역이므로, ‘탁덕’보다 그 본질적인 정체성을 잘 표현한다고 여겼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며 “‘탁덕’이 sacerdos의 번역어로 사용되지 않는 현대에는 교회법상 주교가 아닌 신부, 곧 presbyter를 구분해 번역할 때 ‘탁덕’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박 신부는 한국 교회가 ‘탁덕’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온 점도 주목했다. 그는 “단순히 외부 세계에서 이미 형성된 신학적 용어를 수입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해당 용어를 해석하고 교회 안에서 사용하기 위해 독자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비록 그것이 언어학적, 역사적 자료 부족으로 인한 무지나 학술적 오류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말과 글로 전달하는 과정에 담긴 의의에 주목할 때 보다 깊은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54) 한국 사목지침서 공포
성사생활에서 사회 참여까지… 성숙한 지역교회 위한 기준 제시
“주교회의는 3월 20~23일 3일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1995년 봄 정기총회를 갖고 … 한국 지역 교회법전으로 성청이 인준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를 부활대축일인 4월 16일자로 공포키로 하고, 6월 4일 성령강림대축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4월 2일자 1면)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의 쇄신
1995년은 한국교회의 사목행정 부문에서 혁신을 이룬 해입니다. 주교회의가 그해 확정한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 쇄신은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공포, 「한국 사제양성지침서」 제정, 교회 종합전산망 착수, 2천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구성, 미사통상문 개정안 확정, 농민주일 제정 등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황청이 인준하고 한국 주교회의가 총회에서 확정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는 당시 전 세계 전교지역에서 지역교회가 자국어로 만든 유일한 지역 교회법전이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번역된 보편 교회법전과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을 모두 갖춘 유일한 교회로 기록됐습니다.
주교회의는 동시에 「한국 사제양성지침서」를 승인해 사도좌에 인준을 신청했습니다. 이 지침은 한국 내 모든 대신학교 학칙과 내규에 적용될, 한국교회가 현대 세계와 교회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88년부터 8년 동안 작업해 온 「미사통상문」 개정안도 확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2000년대 복음화를 대비해 미래 사목의 발판이 될 지역교회법과 사제양성 지침, 전례서 개정 문제 등을 확정, 시행함으로써 성숙한 지역교회로서의 자치권을 더욱 공고히 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교지역 최초의 자국어 교회법전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의 제정은 20년이 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 시발점은 1974년 주교회의가 기존 ‘한국 천주교 공동 지도서’(1932년 반포)의 개정 작업에 착수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공동 지도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전의 트리엔트 공의회적 신학과 제도를 담고 있어,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공의회 이후 쇄신된 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 사목 환경에 부합하고, 1983년 공포된 새로운 보편 교회법전의 정신을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개별 교회법의 제정이 요구됐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주교회의는 산하 교회법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길고 고된 작업 끝에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입법예고 형식의 공개 시안이 배포되었고, 1992년 최종 시안과 영문 번역본이 로마에 제출됐으며, 마침내 1995년 1월 23일 사도좌 인준을 거쳐 4월 16일 공포, 6월 4일 시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정은 사실 원래 계획보다 다소간 늦게 이뤄졌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우선 교황청의 심사 과정이 길고 복잡했으며, 수정과 보완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핵심적인 이유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사목회의의 결실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200주년 사목회의를 통해 수많은 평신도와 사제들이 고백한 공동체적 식별의 성과물들을 법적인 조문 구조 안으로 담아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에서는 200주년 사목회의의 성과는 불과 일부만이 사목지침서에 수용됐다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즉,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토착화, 교회 운영의 민주화, 분단 현실 인식 같은 특징적 의제가 부분적으로만 반영됐다는 지적입니다.
내용과 역사적 의의
사목지침서는 보편 교회법의 복잡한 규정들을 압축하고, 한국의 사목 현장에서 신부들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5분 안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실무 참고서’ 역할을 하도록 고안됐습니다. 총 1752조에 달하는 방대한 보편 교회법전의 체계를 긴밀하게 구조화하여 단 256개 조항으로 집약했으며, 이 중 성사생활에 관한 규정이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만큼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유연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입니다.
총 6편 256개조의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된 사목지침서는 제1편 하느님 백성(1~32조), 제2편 전례와 성사(33~136조), 제3편 사목(137~197조), 제4편 선교와 신자 단체(198~214조), 제5편 사회(215~256조)의 순서로 돼 있습니다. 제5편 사회에서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대폭 수용했으며 제6편에서는 교회법이 준용하는 국내법 중 참고될 만한 법규를 발췌 수록했습니다.사목지침서의 역사적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라틴어에 기반을 둔 선교지 지도서 체제에서 벗어나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자치성과 법적 자기 정체성이 크게 강화됐습니다. 둘째, 전례·성사·혼인·본당 운영·교구 구조·신자 단체·사회 참여 등 사목 전반을 표준화해 전국 교회의 공통 기준을 제공했습니다. 셋째, 200주년 사목회의의 선구적 문제의식 특히 성직주의 비판, 교회 운영의 민주화, 토착화, 분단 현실에 대한 더 넓은 응답이 모두 동등한 강도로 법전 안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수렴’과 ‘선별’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물이었습니다.
미완의 쇄신
사목지침서의 본질은 ‘한국교회의 자기 조직화’에 있습니다. 이 문서는 1930년대의 라틴어 지도서를 대체해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으로서, 보편 교회법전·공의회 문헌·사목회의 의안·한국 사회 현실을 하나의 규범 체계로 묶은 것입니다.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 평가의 핵심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사목 환경 속에서 자기 언어와 사목적 감각으로 사목의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이 문서는 ‘완결된 쇄신’이 아니라 ‘절충된 쇄신’의 산물이었습니다. 1984년 사목회의가 던진 토착화, 평신도 참여, 권위주의 비판, 사회·민족 현실에 대한 더 깊은 응답은 사목지침서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제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서를 과대평가하면 쇄신의 미완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되고, 과소평가하면 전국 사목 표준화와 자치성 강화라는 실질적 성과를 놓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1995년 사목지침서의 최대 성과는 법적·사목적 공통 언어를 전국 교회에 부여한 데 있었고, 최대 한계는 그 법적 통합이 곧바로 시노드적 참여, 세대교체, 세속화 대응, 성직주의 극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95년에 하나의 법전을 가졌지만 그 법전을 복음적 가치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고쳐나가야 하는 사명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6) 정광수(바르나바) · 윤운혜(루치아) 부부
교우들이 마련해준 집 ‘신앙 사랑방’으로 내어준 부부
조선 왕조 시기 한양의 양반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과 남산 기슭의 ‘남촌’에 주로 거주했다. 북촌에는 권력을 독점한 노론 가문이, 남촌에는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소론과 남인, 그리고 무반 가문의 양반들이 주로 거주했다.
백악산과 인왕산을 뒤로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 ‘서촌’에는 왕족과 권문세가들이 주로 터를 잡았고, 궁궐과 관아에 종사하는 하급 관리들도 많이 살았다. 창덕궁 동쪽 낙산 자락 일대 ‘동촌’에는 명문가와 성균관 공노비들이 거주했다.
중간 신분인 기술직 중인과 아전, 시전 상인들은 ‘상촌’ ‘중촌’ ‘하촌’에 주로 살았다. 상촌은 인왕산 기슭 일대이며, 중촌은 종로 일대, 하촌은 동대문과 광희문 일대를 가리킨다. 용산·마포·서강 등 한강 나루 일대 ‘강대’에는 뱃사람이나 객주가 주로 살았다.
신앙생활 위해 고향 떠나 한양으로 이주
복자 정광수(바르나바, ?~1802)·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는 1799년 고향인 경기도 여주 부곡면에서 한양 벽동으로 이사했다. 벽동은 오늘날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중학동에 걸쳐 있는 동네로 벽장처럼 집들이 길게 끼어있고, 다락처럼 길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벽장골’ ‘다락골’이라고도 불렀다. 양반 정광수가 중인들이 사는 중촌 벽동으로 이사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광수의 벽동 집 양 옆에는 여주 사람 최해두와 조섭(예로니모)이, 그리고 다른 한쪽 담장을 끼고 공주 사람 김홍철이 살았다.
「자책」을 쓴 최해두는 순교자 윤현의 사위이며 순교자 최창주의 조카다. 윤현의 조카가 윤유일(바오로)이다. 정광수는 윤현의 동생 윤선의 딸 윤운혜와 혼인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가 윤운혜의 언니이고, 복자 정순매(바르바라)가 정광수의 여동생이다. 이 둘은 모두 동정녀로 순교했다. 윤현은 정광수의 벽동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안국동으로 이주했다. 조섭은 정광수를 돕고 주문모 신부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웠던 조도애의 오빠다.
정광수는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설립 초기에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제사를 거부하는 그를 나무라며 가톨릭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또 가톨릭 교우인 윤운혜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광수와 윤운혜 부부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다.
정광수 부부가 한양 벽동에 이주하게 된 것은 한양에 사는 교우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아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상본, 묵주 등을 만들어 교우들에게 나눠주거나 판매했다. 또 자신의 집에 교우들을 초대해 교리 공부와 기도 모임을 하곤 했다. 주일이면 주문모(야고보) 신부와 교우들이 정광수의 집으로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또 강완숙(골룸바)과 조시종의 집을 드나들면서 이합규, 홍문갑과 함께 예비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처럼 벽동 정광수·윤운혜 부부의 집은 미사와 성사를 거행하는 전례 공간이었고 교리교육 등 신앙 모임 장소였으며 교회 서적과 성물 제작 및 판매소였다.
전례·신앙 모임 장소 지원하며 성물 제작·보급
윤운혜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에서 살았으며 어머니 이 씨로부터 가톨릭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라고 강요할 때마다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므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남편을 따라 한양으로 온 그는 교회 일을 돕고 전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전례와 신앙 모임을 하는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홍필주(필립보)·김계완(시몬)·홍익만(안토니오)·정복혜(칸디다) 등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지극 정성껏 섬겼다. 또 남편과 함께 성화를 그리고 나무를 깎아 묵주를 만들어 보급했다. 그리고 여종 성조이(마르타), 최조이(이사벨)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윤운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돼 언니 윤점혜가 형조에 잡혀가자 곧 자기 부부도 체포될 것으로 판단,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키고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 집에 숨겨놓은 후 혼자 집을 지키다 그해 2월 체포됐다.
아내 뒤따라 남편도 꽃다운 나이에 순교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차례 형벌을 받은 윤운혜는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복혜·정인혁(타대오)·정철상(가롤로)·최필제(베드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운혜에 대한 형조의 사형 선고문에는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우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해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고 적혀 있다.
아내 윤운혜의 권유로 피신한 정광수는 포졸들의 체포망이 점차 좁혀지고 있음을 느끼고 자수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여러 차례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단 한 명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고 배교도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형조로 이송된 후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여주 관아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순교 당시 정광수의 동생 정순매가 24세였고, 윤운혜의 언니 윤점혜 또한 23세였던 것으로 보아 정광수는 20대 중후반, 윤운혜는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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