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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올랐으니 파천황(破天荒)의 공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방 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 그의 ‘곤륜산이 동으로 뻗어 다섯 산이 푸르고, 성수해(星宿海)가 북으로 흘러 한 물이 누르다.[崑崙東走五山碧 星宿北流一水黃]’라는 시구에 대하여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은 ‘이 시구는 바로 하나의 여지지(輿地誌)이다.’라고 말했다. 학사(學士) 박인범(朴仁範)과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도 시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동방의 문헌이 중국에 통한 것은 이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 참정의 ‘문 앞의 손님 배 돛대에는 큰 물결이 일고, 대나무 밑의 승려 바둑판에는 백 일이 한가롭구나.[門前客棹洪波急 竹下僧棊白日閒]’라는 시는 매우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는 충선왕(忠宣王)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는 왕을 따라 원나라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사학사(四學士)와 교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목을 넓혀 정대하고 고명한 학문을 쌓았고, 또 왕명을 받들고 서촉(西蜀)으로 사신을 갔고 왕을 따라 회계(會稽)에 갔다. 이렇게 만여 리를 왕래한 그는 중국의 절경과 풍토를 남김없이 가슴속에 담았으며 웅장하고 기이한 기상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뒤에 그 견문들을 거두어 가지고 동국으로 돌아오니, 우리나라의 학문하는 선비들은 그를 태산처럼 숭앙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비들이 비루한 습성을 버리고 약간 고아한 데로 돌아간 것은 모두 익재 선생의 교화로 인해서이다.
-주) 사학사(四學士) : 당시 한족(漢族) 출신의 일류 문인이었던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의 네 학사를 말한다.
일찍이 생각건대, 서경(西京)의 고금제영(古今題詠) 중에는 다만 두 절창(絶唱)이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길게 휘파람 불며 돌 계단에 기대어 있으니,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저절로 흐른다.[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와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 물이 어느 때에 다하겠는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을 보태노라.[大洞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라는 두 시뿐이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결국 그 영향을 계승하는 자가 없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은 비단 이학(理學)뿐 아니라 절의는 한 세상에 으뜸이고, 문장 또한 호방(豪放)하고 기준(奇雋)하였다. ‘매창엔 봄빛이 일찍 오고, 판옥엔 빗소리 크게 나네.[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 같은 시구는 곧 선생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맑고 풍부하니, 이목은(李牧隱)이 평소 칭찬하기를 ‘붓을 대면 마치 구름과 연기가 피어오르듯 한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김공은 일찍이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갔는데, 그 자문(咨文)의 ‘말 50필’을 잘못 ‘5000필’로 써 넣었다. 이 때문에 고황제(高皇帝)가 김공을 대리위(大理衛)에 유배시켰다. 그러자 김공은 ‘사생이 운명에 매였거늘 그것을 어찌하리요, 동쪽으로 부상을 바라보니 길이 아득하여라.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이를 것인가, 도화관 밖에 풀만 더부룩하게 우거졌구나.[死生由命奈何天 東望扶桑路渺然 良馬五千何日到 桃花關外草芊芊]’라는 시를 읊었다. 무창(武昌)을 지날 때 김공은 또 ‘대별산은 푸르고 해는 벌써 졌다[大別山靑日已斜]’라는 시구를 읊었다.”라고 하였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처음에 세자에 책봉되어 영락(永樂) 5년(1407, 태종7)에 명나라의 서울에 가니, 문황제(文皇帝)는 양녕대군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어진 왕자라고 칭찬하며 친히 칠언시를 지어 주었다. 세종(世宗)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민심이 세종에게로 돌아갔다. 양녕대군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거짓 미친 체하여 도망감으로써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러자 한때 양녕대군을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에게 비유하였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부터 문장을 잘 하였으나 글을 모르는 사람처럼 거짓 행동하였으므로 태종조차도 그것을 몰랐다. 양녕대군은 승려의 시권(詩卷)에 쓰기를,
-주) 태백(泰伯)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로서 아버지가 둘째 아우인 계력(季歷)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뜻을 알아차리고 그 첫째 아우인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단발문신(短髮文身)을 하여 미치광이로 위장함으로써 결국 왕위를 계력에게 양보하였다.
-주) 우중(虞仲) : 주나라 태왕의 둘째 아들로서 그 아우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한 중옹(仲雍)의 딴 이름이다.
안개로는 아침에 밥을 삼고 / 山霞朝作飯
달로는 밤에 등불을 삼는다 / 蘿月夜爲燈
오직 외로운 암자 아래에 있는 것 / 獨有孤菴下
탑 한 층만 우뚝 솟아 있을 뿐 / 惟存塔一層
하였는데, 비록 대문장가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낫게 짓지는 못할 것이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은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에게 무함을 당하여 두 아들과 함께 해를 입었다. 중종(中宗) 때 일품을 추증하고 정려문(㫌閭門)을 세워 주었다. 공자(公子)는 비단 이학(理學)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시도 잘 지었다. 그는 비온 뒤 저물녘에 들판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주) 이심원(李深源) :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ㆍ묵재(默齋)ㆍ태평진일(太平眞逸)인데, 평성군(枰城君) 이위(李徫)의 아들이자 효령대군의 증손이다.
봄비 흠뻑 내리고 살구꽃 쇠잔하였는데 / 一犁春雨杏花殘
곳곳에서 사람들 논을 갈고 있구나 / 處處人耕白水間
아득한 바닷가에 홀로 서서 / 獨立蒼茫江海上
시름 견딜 수 없어 삼신산을 바라보노라 / 不勝惆悵望三山
명양정(鳴陽正) 이현손(李賢孫)은 예의로 몸을 단속하여 속태를 벗은 사람인데, 그의 추일(秋日) 시는 다음과 같다.
하얀 이슬에 동산의 숲은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세찬 바람에 초목이 쇠잔해 간다 / 高風草木衰
술을 끊은 채 죽엽주를 멀리하고 / 覆杯疎竹葉
우물물을 길어다가 상지차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석양에 기러기는 변방을 가로질러 가고 / 落日雁橫塞
가을바람 스치는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한다 / 秋窓蟲吐絲
가난하고 병든 이 사람 그 누가 불쌍해하려나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楚人詞)를 읊노라 / 長咏楚人詞
-주) 초인사(楚人詞) :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가리킨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길이 청산을 대하니 시를 지을 필요 없다[長對靑山不賦詩]’라는 시구와 ‘맑은 진기를 얻어 수양을 하니, 일신이 바로 요순 적 사람이러라.[待得初淸眞氣養 一身還是一唐虞]’라는 시구는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청송 군수(靑松郡守)를 요구했다가 되지 않고 단산 군수(丹山郡守)에 제수되자 시를 짓기를, “푸른 소나무와 흰 학은 원래 분수에 없는 것이고, 푸른 물과 붉은 산은 정말 인연이 있는 것이다.[靑松白鶴元無分 碧水丹山儘有緣]” 하였고, 연광정(練光亭) 시에는 “공중의 밝은 달은 사다리 놓고 딸 수 있네.[空中明月近堪梯]”라는 시구가 있다.
《성수시화》에는 “세종 때에 인재가 쏟아져 한때 문장거공(文章鉅公)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오직 서사가(徐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시가 용용(舂容)하고 부려(富麗)하였다. 그의 ‘노는 벌들은 정처 없이 날아다니고, 한가한 오리들은 서로 의지하고 잔다.[遊蜂飛不定 閒鴨睡相依]’ 같은 시구는 대단히 아름답다.” 하였다.
김춘택(金春澤)의 《북헌잡지(北軒雜志)》에는 “옛말에 ‘시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했다. 그러나 재상의 시구는 한사(寒士)와 아주 다르다. 정임당(鄭林塘 정유길(鄭惟吉))은 몸소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북로(北路)의 전망처(戰亡處)에 제사를 지냈는데, 정임당은 ‘성조에서는 백골도 성은을 입게 되니, 해마다 향화가 새문에 내려진다. 제사를 파하고 단에 오르니 뇌우가 그치고, 흰 구름 바다처럼 모여들어 앞 마을에 가득하다.[聖朝枯骨亦沾恩 香火年年降塞門 祭罷上壇雷雨定 白雲如海滿前村]’라는 시를 지었으니, 뜻은 매우 처량하나 말은 문득 부려하다.” 하였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재주와 학식이 있었으므로 성종(成宗)은 그를 몹시 애지중지하였다. 언젠가 성종은 손순효를 접견하고 그 자리에서 술을 하사하였다. 손순효가 술이 잔뜩 취했을 때 성종이 ‘경은 시를 지을 수 있겠소?’ 하고 물으니, 그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성종이 한(漢)나라의 건국 공신인 장량(張良)으로 글제를 내고 운자를 불러 주자 손순효는 즉시 ‘진시황 죽이려던 기특한 꾀 박랑사(博浪沙)에서 이루지 못하고, 칼을 짚고 돌아와서 패공을 도왔네. 젓가락을 빌려서 계책을 아뢰자 한나라의 왕업이 이루어졌고, 제후를 봉할 때에는 제나라의 봉작을 사양하였네. 평생의 지략은 황석공(黃石公)의 비법을 전했고, 말로의 여생은 적송자(赤松子)에게 맡겼네.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결국 비참하게 죽음 당한 것 한탄스러우니, 공을 이루고 나서 용퇴하는 것이 바로 영웅이로다.[奇謀不遂浪沙中 杖劍歸來相沛公 借箸已能成漢業 分茅却自讓齊封 平生智略傳黃石 末路心期付赤松 堪恨韓彭竟葅醢 功成勇退是英雄]’라는 시를 짓자 성종은 크게 기뻐하고 한 궁녀에게 명하여 비파를 타며 그 시를 노래하게 하였다. 손순효가 취해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자 성종은 남색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벗어서 손순효를 덮어 주었는데, 이러한 임금과 신하의 거룩한 만남은 천고에 없는 일이었다.” 하였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악적(樂籍)에 올라 있는 상림춘(上林春)이란 기생은 거문고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신삼괴(申三魁 신종호(申從濩))는 그 기생에게 ‘제오교 머리에 수양버들 늘어져 있으니, 석양에 갠 날씨 더욱 맑고 화창하도다. 열두 폭 주렴 늘어진 곳에 사람은 옥과 같은데, 궁중의 사신은 말이 가는 대로 따라와 들렀노라.[第五橋頭楊柳斜 晩來風日轉淸和 緗簾十二人如玉 靑鎖詞臣信馬過]’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상림춘이 늙은 뒤에 신공은 화사(畫師) 이상좌(李上佐)에게 이 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한 다음 여러 문사들에게 두루 제시(題詩)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정임당(鄭林塘)과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는 모두 답시를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성수시화》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신륵사(神勒寺) 시의 ‘산사에 종소리 울리니 여룡이 춤을 추고, 산곡에 바람이 이니 철봉이 날개를 치네.[上方鐘動驪龍舞 萬竅風生鐵鳳翔]’ 같은 시구는 침울(沈鬱)하고 엄중(嚴重)하니, 이는 바로 우주를 버틸 만한 시구이다. 《오산설림》에서 점필재의 시를 으뜸이라고 높이 칭한 것은 실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매번 ‘바람은 나대의 일산을 흔들고, 빗방울은 불천의 꽃에 떨어진다.[風飄羅代蓋 雨蹴佛天花]’라는 시구를 욀 때마다 그 심원한 뜻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의 시는 중종(中宗) 때에 와서 크게 이루어지고 또 선조(宣祖) 때에 와서 크게 갖추어졌다. 이용재(李容齋 이행(李荇))가 창시를 하였고, 박눌재(朴訥齋 박상(朴祥))ㆍ신낙봉(申駱峯 신광한(申光漢))ㆍ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ㆍ박읍취헌(朴挹翠軒 박은(朴誾))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천고에 이름을 떨칠 만하였으며,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ㆍ황지천(黃芝川 황정욱(黃廷彧))이 대를 이어서 배출되었다.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과 백옥봉(白玉峯 백광훈(白光勳))은 당시(唐詩)를 본받았는데, 이손곡(李蓀谷 이달(李達))이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최간이(崔簡易 최립(崔岦))의 시는 험경(險勁)하고 교건(矯健)하여 스스로 문호를 열었다. 또한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는 늦게 태어났지만 이용재와 어깨를 겨룰 만하다. 여러 대가로 말하면 마땅히 서사가정(徐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을 제일인자로 추대해야 하고,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와 성허백당(成虛白堂 성현(成俔))이 그다음이다. 이분들을 당나라에 비하면 사가정 등의 여러 공들은 초당(初唐)의 사걸(四傑)과 맞먹고, 중종과 선조 때의 여러 명가들은 성당(盛唐)의 개원(開元), 천보(天寶) 때의 여러 시인들과 같다. 노소재는 선조 초에 가장 걸출하였다. 그 침울(沈鬱)하고 노건(老健)하고 망탕(莽宕)하고 비장(悲壯)한 시풍은 깊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풍격을 얻었으니, 아무나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최간이는 풍격의 웅호(雄豪)함과 바탕의 심후(深厚)함은 노소재에 버금가나 참획(鑱畫)하고 교건(矯健)함은 더러 앞선다. 그 가운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구절의 성향(聲響)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는 소리처럼 울렸으니, 후인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 사걸(四傑) : 곧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을 가리킨다
《성수시화》에서는 “조선의 시는 의당 이용재를 제일로 삼아야 한다. 그의 시풍은 대체로 침후(沈厚)하고 화평(和平)하고 담아(淡雅)하고 순숙(純熟)하다. 특히 오언 고시(五言古詩)는 두보(杜甫)와 진자앙(陳子昻)을 넘나들어 고고(高古)하고 간중(簡重)하다.”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의 《호곡시화(壺谷詩話)》에는 “국초 이래로 문체(文體)는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숭상하였는데, 박읍취헌은 갑자기 황산곡(黃山谷)을 배우니 제류(儕流)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하였다.
내가 읍취헌의 복령사(福靈寺) 시를 보니, “봄철의 흐린 날 비 오려고 하니 새들 지저귀고, 고목은 무정한데 바람은 스스로 애절한 소리 낸다.[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는 구절이 가장 깜짝 놀라게 한 말이었는데, 황산곡과 진자앙을 겸해서 배운 것이었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세상에서 칭하는 삼당(三唐)이란 분들이다. 당조(唐調)는 김충암(金冲菴 김정(金淨))의 강남(江南) 시로부터 시작되었는바,
강남에서 희미한 꿈꾸고 나니 낮은 길기도 한데 / 江南殘夢晝厭厭
시름은 봄꽃을 따라 날마다 더해간다 / 愁逐年芳日日添
꾀꼬리랑 제비는 오지 않고 봄은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
낙화와 이슬비가 거듭 친 주렴에 내리노라 / 落花微雨下重簾
라는 내용의 시는 가장 득의(得意)한 작품이다. 삼당 중에서 이손곡이 최고죽과 백옥봉보다 뛰어났는데, 그의 시에, “병든 나그네의 외로운 배엔 밝은 달빛이 실려 있고, 늙은 중의 깊은 사원엔 떨어진 꽃이 많이 쌓여 있다.[病客孤舟明月在 老僧深院落花多]”라고 하였다.
김득신(金得臣)의 《종남총지(終南叢志)》에,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강물 소리 거세고 달은 외롭게 달려 있다[江聲忽厲月孤懸]’는 시구를 남겼는데, 어떤 사람들은 ‘달이 외롭게 달려 있다’는 말과 ‘강물 소리가 거세다’라는 말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의심을 하였다. 그런데 허균(許筠)만은 ‘이 노인의 이 시가 의당 압권(壓卷)이 되겠다.’ 하였으니, 허균의 식견으로서 어찌 이해하는 바가 없었겠는가. 내가 언젠가 황강(黃江)에서 잘 때 밤에 여울 소리를 듣고는 문을 열고 보았더니 지는 달이 외롭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호음 노인이 경치를 그리고 시구를 연마하기를 사실과 가깝게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호곡시화》에, “이아계(李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시는 지나치게 연미(軟媚)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죽은 양 귀비가 꽃 아래에 누워 있는 것’으로 기롱을 한다. 그의 ‘비 가득 실은 배 급히 서둘러 돌아가는데, 마을들의 어귀에는 팥꽃이 어우러졌네.[白雨滿船歸棹急 數村門掩荳花秋]’라고 한 시구는 참으로 그림 속에 시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다.” 하였다.
권응삼(權應三)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박사암(朴思菴 박순(朴淳))이 백운동(白雲洞)에 있는 조씨(曺氏)의 초당(草堂)에서 자면서 ‘취해서 선가에서 자고는 깬 뒤에 의심하니, 흰 구름 낀 골짝에 달은 져가는 그때러라. 홀연히 수풀 밖을 혼자서 나가니, 돌길에 끄는 지팡이 소리 자는 새가 알아보네.[醉睡仙家覺後疑 白雲平壑月沈時 翛然獨出脩林外 石逕笻音宿鳥知]’라는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은 자는 새가 선생을 알아보았다고 말한다. 《오산설림》에는 ‘박사암의 청수고절(淸修苦節)은 아무나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에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서 종사관(從事官)에 피선되었는데, 선조는 권석주의 글을 들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최간이(崔簡易)가 권석주에게 시를 주기를, “듣자니 지존께서 글을 들이도록 요구했다 하니, 몸이 직접 한림(翰林)에 이른 것보다 훨씬 낫다.[見說至尊徵稿入 全勝身到鳳凰池]” 하였다.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의 가곡(歌曲)에 ‘장진주(將進酒)’라는 것이 있는데 곡조가 매우 비완(悲惋)하다. 권석주가 공의 묘소를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공산에 낙엽은 휘날리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 空山落木雨瀟瀟
상국의 풍류가 여기에 고요히 잠들어 계시는구려 / 相國風流此寂寥
한 잔 다시 드리기 어려운 일 서글퍼 하오니 / 惆悵一杯難更進
지난해의 가곡이 바로 오늘날의 가곡이옵니다 / 昔年歌曲卽今朝
하였다. 지금 악부(樂府)에서 이 시까지 아울러 노래하고 있는데, 천고의 절창이다.
한림(翰林) 진화(陳澕)는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진화의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은 너울너울 드리웠는데 / 小梅零落柳僛垂
한가히 아지랑이 밟노라니 걸음이 더디구나 / 閒踏晴嵐步步遲
어점에는 문 닫히고 사람의 말소리 적은데 / 漁店閉門人語少
강에 내리는 봄비는 실처럼 드리우누나 / 一江春雨碧絲絲
라는 시는 청경(淸警)하여 읊을 만하다. 이 문순의
홑적삼 차림으로 대자리 깔고 시원한 난간에 누웠는데 / 輕衫小簟臥風欞
꾀꼴꾀꼴 우는 꾀꼬리 두세 소리에 꿈이 깨었노라 / 夢覺啼鶯三兩聲
우거진 잎에 가려진 꽃은 봄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데 / 密葉翳花春後在
얇은 구름을 뚫은 해는 비 내리는 가운데 밝구나 / 薄雲漏日雨中明
라는 시는 읽으면 정신이 상쾌하다. 이상과 같은 말들은 《성수시화》 속에 보인다.
남호곡(南壺谷)은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시는 물결이 잔잔하게 펼쳐진 것과 같고, 신상촌(申象村 신흠(申欽))의 시는 오색 비단을 짜놓은 것과 같다.” 하였다. 김백곡(金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에게, “자네의 시는 옛사람 중에 어떤 사람에게 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니, 정동명은 웃으면서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는 감히 당할 수 없지만, 고적(高適)이나 잠삼(岑參) 같은 무리들과는 혹 어깨를 겨룰 수 있겠지.” 하였다. 차창주(車滄州 차운로(車雲輅))는 “권석주의 ‘공산에 낙엽은 휘날리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空山落木雨瀟瀟]’라는 시구와 이동악(李東岳 이안눌(李安訥))의 ‘강가에서 누가 미인사를 부르는가[江頭誰唱美人詞]’라는 시구는 다 절창이다. 권석주의 첫째 구는 마치 옹문자(雍門子)가 타는 거문고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어오는 것과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하고, 이동악의 끝구는 마치 적벽강(赤壁江)에서 부는 퉁소 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실낱처럼 이어지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무한한 의미를 머금고 있다.” 하였다.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은 자신 있게 “종이를 만리장성에 붙여 놓고 나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붓을 휘두르라고 한다면, 성이 다할 때가 있을지언정 나의 시는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종남총지》에, “허균이 봉명 사신으로 연경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한 성관(星官)이 ‘청구(靑邱)의 분야(分野)에 규성(奎星)이 빛을 잃었으니, 문인(文人)이 죽겠다.’고 말하였으므로, 허균은 자신이 죽어서 그에 해당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차오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은 그만 깜짝 놀라 실망하고 말았다.” 하였다.
차천로는 사관(四館)의 교관(敎官)으로서 과거 보는 사람을 위하여 대신 글을 지어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자 곤장을 맞고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북병사(北兵使)가 하직 인사를 할 때에 선조는 “차천로가 비록 죄를 짓고 귀양은 갔지만 나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노니, 그를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그러자 북병사는 지성껏 대접하였다. 차천로가 그 후대를 괴상히 여기고 이유를 물으므로, 북병사가 사실대로 알려 주니 차천로는 감격하여 울었다. 성왕(聖王)이 인재를 아끼는 것이 아, 지극하도다.
-주) 차천로는 …… 유배되었다 : 차천로는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 주어 장원 급제시킨 일이 있었는데, 발각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시를 논하는 자가 “이지봉(李芝峯 이수광(李睟光))은 당시(唐詩)의 풍격을 본받아서 한담(閒淡)하고 온아(溫雅)하지만 모자라는 것은 기운이다. 그러나 ‘창문에 보슬비 소리 들리니 날이 새기 어렵고, 성이 차가운 강 베고 있으니 지대가 가을되기 쉽다.[窓聞小雨天難曉 城枕寒江地易秋]’는 시구 같은 것은 사람들이 쉽사리 평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의 문장(文章)을 살펴보니 시와 문을 겸비한 분은 이동주(李東洲 이민구(李敏求))인데, 정현(鄭礥)의 부용당(芙蓉堂) 시와 권협(權鞈)의 송경남루(松京南樓) 시가 나란히 이름을 날릴 만하다.
《호곡시화》에, “이오봉(李五峯 이호민(李好閔))은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울렸는데, 만년에는 재주가 다했다는 탄식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착잡한데 강물에 임하였고, 조정의 책략은 암담한데 석양을 대하였네.[天心錯莫臨江水 廟算凄涼對夕暉]’라는 등의 시어는 한때 제우(儕友)들이 감히 바라지 못했다 한다.” 하였다.
선조 때 진사(進士) 성여학(成汝學)은 호가 쌍천(雙泉)인데, 젊을 때부터 시를 공부하였으나 연로하도록 낮은 벼슬 하나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의 시 중에 ‘흐린 날씨는 잠을 방해하고, 가을빛은 시를 물들이려 한다.[雨意偏侵夢 秋光欲染詩]’라고 한 경구(警句)는 매우 아름답다.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는 규원(閨媛) 중에 제일이니, 중국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서 그의 문집을 사 갔다. 홍경신(洪慶臣)과 허적(許樀)은 모두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두세 편 외에는 모두 다른 사람의 작품이다. 백옥루 상량문(白玉樓上樑文)도 허균이 찬한 것이다.” 하였는데, 가소로운 일이다. 《학산초담(鶴山樵談)》에는 “자씨(姊氏)가 평일 꿈속에서 ‘푸른 바다는 구슬 빛 바다를 침범하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를 의지한다. 부용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가을 달빛 차갑다.[碧海侵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라는 시를 지었는데, 자씨가 세상을 뜰 적 향년이 27세였으니 ‘삼구(三九)’라는 숫자가 딱 맞은 셈이다. 그러니 명의 길고 짧은 것이 정해진 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조(宣祖朝) 이후로는 명나라의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을 모방하는 학문이 성행하였다. 사람마다 답습하고 집집마다 본받아서 다시는 각각 일가의 말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로부터 시도(詩道)가 쇠해져 갔다.
《호곡시화》에는 “김백곡(金柏谷 김득신(金得臣))의 호행 절구(湖行絶句)에 ‘나귀 등에서 졸다가 눈을 뜨고 보니, 저문 구름 쇠잔한 눈 이 어떤 산인고.[驢背睡餘開眼見 暮雲殘雪是何山]’라는 시구는 어운(語韻)이 매우 아름다운데, 《기아(箕雅)》 속에 들지 못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바다를 기울여 구슬을 걸러 내되 결국은 명월주(明月珠)를 빠뜨렸다.’는 격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종남총지》에는 “옛날 문장가들은 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글을 잘 쓰게 되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괴애(金乖厓 김수온(金守溫))는 문 닫고 들어앉아서 열심히 글만 읽다가 마루를 내려가서 낙엽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철이 되었음을 알았다.’ 한다. 나는 어릴 때 노둔하여 글 읽기를 남보다 갑절이나 하였다. 백이전(伯夷傳)을 가장 좋아하여 1억 1만 3000번을 읽었고 마침내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하였다. 지난 경술년(1670, 현종11)에는 팔도에 크게 흉년이 들고 이듬해에는 크게 전염병이 유행하여 장안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희롱하기를, ‘금년에 죽은 사람 숫자가 그대의 글 읽은 숫자와 비교하면 어떤 것이 많을까?’ 하였다.” 하였다.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이 ‘시를 평론한 절구[論詩絶句]’에서,
얕은 구름 끼고 가랑비 내리는 소고사 / 淡雲微雨小姑祠
국화는 빼어나고 난초는 쇠잔한 팔월이라네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 사신의 위 시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니와 / 記得朝鮮使臣語
참으로 동쪽 나라 사람들 시가를 알고 있네 / 果然東國解聲詩
라고 읊었는데, 이것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를 두고 말한 것이다.
임하필기 제33권 /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