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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심(不動心)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이 어떤 일이나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동요되는 일이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不 : 아닐 불(一/3)
動 : 움직일 동(力/9)
心 : 마음 심(心/0)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일러 부동심(不動心)이라 한다. 마음이 어떤 일이나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동요되는 일이 없는 것을 뜻한다.
공자는 부동심을 갖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 돌이켜보아 옳지 못하면 비록 천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양보를 한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옳으면 비록 천 만 명일지라도 밀고 나간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을 하는 곳에 참다운 용기가 생기고 이러한 용기가 부동심의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이다.
공손추(公孫丑) 상 제2장에 부동심(不動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는 나이 서른에 자립하여 10년이 지난 마흔에는 외부의 어떠한 유혹에도 현혹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립(而立), 불혹(不惑)은 각기 나이 서른과 마흔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공자가 말한 불혹의 상태를 맹자는 부동심이라고 했다. 외부의 물질적, 정신적인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맹자(孟子)의 제자 중에 공손추(公孫丑)가 있는데 가끔 엉뚱한 질문을 잘 했다. 그는 스승의 인격이 훌륭한 것쯤이야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외부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 않을까 궁금하여 불쑥 이렇게 물었다."만약 선생님께서 제(齊)나라의 재상이 되어 도(道)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 마음이 움직이지(動心) 않으실까요?" 그러나 맹자(孟子)의 대답은 단호했다. "천만에, 내 나이 이미 마흔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없네(不動心)."
맹자(孟子)에 의하면 부동심(不動心)의 비결은 용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용기라고 하면 대체로 물리적인, 곧 완력(腕力)에서 비롯되는 용기로 이해한다. 사실 그와 같은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다. 위(衛)나라의 맹분(孟賁)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을 만큼 용력(勇力)이 뛰어났으며 제(齊)나라의 용사 북궁유(北宮黝)는 송곳으로 눈을 찔러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 뿐인가. 맹시사(孟施舍)같은 이는 적과 싸울 때면 상대의 힘은 요량하지 않고 생사를 무릅쓰고 대적한다.
그러나 맹자는 말한다. 부동심(不動心)에서 용기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외부적, 물리적인 용기가 아니라 내부적, 도덕적인 용기다. 다시 말해 혈기의 용기보다는 도덕의 용기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것을 배격하고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뜻한다.
그 용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기(氣)를 잘 닦아야 하는데 맹자는 그것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그것은 행동하는 데 있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비도덕적인 것을 배격하고 도의(道義)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는 것이다.
결국 맹자가 말한 부동심(不動心)은 내면적인 수양을 통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름으로써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이 마흔에 그런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범인들은 어떤가. 유혹의 바다에 떠 있는 동심(動心)의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탄 것은 아닌지. 아직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고자(告子)의 부동심과 맹자(孟子)의 부동심의 차이.
고자(告子)는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의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도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남의 말을 듣고 잘 이해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말을 한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내 마음 속에서 잘 헤아려 보아야 하지만,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다고 한다면, 내 마음 속에서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므로, 애당초 헤아려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며, 또 내 마음 속에서 이해되지 않을 경우에는 더 이상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해되지 아니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이해하려고 고심할 때 번민이 생기므로, 고자(告子)의 입장에서처럼 남의 말을 듣고서 이해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번민하지 않으며, 내 마음에서 납득되지 않더라도 몸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동요되는 일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인간의 존재는 마음과 몸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샘의 밑바닥에는 샘물로 솟아오르는 지하수가 있듯이 마음의 저 밑바닥에는 마음으로 솟아오르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성(性)이란 마음(心) 과 삶(生)의 결합체인 글자의 모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살려는 마음 혹은 살려는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 지하수가 샘으로 솟아난 것이 샘물이듯이 이 성(性)이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 정(情)이다. 그리고 정(情)이 밖으로 나타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한편 몸은 물질로 구성되는데, 물질들의 합성체인 이 몸의 삶을, 호흡하고 심장이 뛰며 소화를 시키는 등의 작용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유지해가는 작용력을 기(氣)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음과 몸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본질은 결국 성(性)으로 귀결되므로, 인간의 삶은 성(性)을 터득하여 성(性)에 따라서 살 때 가장 본질적이고 고귀한 것이 된다.
이에서 보면, 귀로 아는 것, 마음으로 아는 것, 몸으로 아는 것이라고 하는 앎의 세 단계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귀로 알고 마음으로 안 다음에 도달되는 가장 근본적인 앎을 성(性)을 아는 것인데, 몸으로 아는 것은 성(性)을 알고 실천하는 결과 저절로 도달하게 되는 결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을 이해하여야 하고, 다음에 그 말로 표현하려 했던 마음의 세계를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는 그 마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성(性)을 아는 데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지만 몸으로 아는 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으로 아는 단계는 성(性)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터득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마음에서 납득되지 아니하면 기(氣)에서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가하지만, 말에서 납득되지 아니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아니한는 말은 불가(不可)하다"고 하는 것이다.
성(性)을 살려는 의지라는 의미에서 지(志)로 표현(表現)하면, 지(志)는 몸이라는 컴퓨터에 기(氣)를 입력시키는 존재이므로, 기(氣)의 장수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氣)는 몸에 가득 차 있으면서 몸의 삶을 유기적으로 유지해가는 기능으로 볼 수 있으므로 , 지(志)가 가장 본질적인 것이고 기(氣)가 그 다음의 차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이 본질적이고 고귀하게 영위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지(志)를 잘 간직하여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지만, 기(氣)가 입력된 대로 원활하게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 그 자체도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몸의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기(氣)이고 그 기(氣)를 작용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지(志)이므로 지(志)와 기(氣)는 장수와 병사의 관계와 같다. 장수가 우수하면 병사를 잘 거느릴 수 있고 병사가 충실하면 장수를 강(剛)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志)와 기(氣)는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
몸이 넘어지거나 달리는 것은 기(氣)의 작용이지만 마음이 또한 그로 말미암아 동요됨으로써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지(志)는 가장 근원자인 성(性)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동요되는 일이 없다. 다만 지(志)가 외부로 나타나 구체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요소가 되는 정(情)은 현실적 상황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달리는 등의 황급한 상황에서는 동요된다.
따라서 맹자는 지(志)를 동요시킨다고 하지 않고, 심(心)을 동요시킨다고 하였다. 심(心)에는 정(情)은 물론이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지각하는 등의 마음의 기능이 모두 포함된다.
다음은 평상심(平常心)에 관한 옛사람들의 문답을 보자.
조주(趙州)가 남전(南泉)에게 "무엇이 도(道)입니까?"라고 물었다. 남전(南泉)이 대답하기를 "평상심이 곧바로 도(道)이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평상심(平常心)이라는 것을 우리가 상당히 곡해(曲解)하고 있다. 흔히 일상적인 것을 평상적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평균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평상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고 어떤 문제에서나 일관되는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한다. 일상적이지만 부동(不動)한 것, 춤추지 않는 것, 동요가 없는 부동심(不動心), 이것을 바로 평상심이라고 한다.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그러한 잠잠한 마음의 상태, 이걸 평상심(平常心)이라 한다. 이를 달리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평상심(平常心)이란 것은, 일상적인 감정에 출렁거리고 잡다한 사념들이 들끓고 있는 상태, 상황에 따라 부침(浮沈)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기쁜 상황을 만났다고 마음이 들뜨거나 슬픈 상황에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 때로는 마음이 이리 끌렸다가 때로는 저리 끌려다니고 하는 것들은 평상심(平常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왜 평상심(平常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세상에 귀를 막고 초연하게 살라고 하는 이야기일까? 아무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살라는 이야기일까? 그게 아니다. 평상심(平常心)에서 세상을 사는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능히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돌파력이 평상심(平常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척건곤(一擲乾坤)의 비상한 결단과 지혜가 평상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도 곧잘 평상심을 이야기한다. 평상심을 놓치는 순간, 수가 안 보이고 실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계산이 앞서고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하면 바둑의 순리를 무시하는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바둑을 이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기고 싶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둑의 순리에 따라 두는 사람이 이긴다. 그러니 바둑을 이치에 맞게 두자면 결국 평상심을 지켜야 한다.
우리 인생경영도 그럴 것이다.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사의 순리에 맞아 들어갈 때 성공하는 것이지 순리를 거역한다면 성공은 없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고 해서 마음도 다급해지면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시절이 비상하다고 해서 마음이 비상해지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평상심에서만 세상사의 순리가 보인다. 그러니까 평상심을 지킨다는 것이 곧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평상심(平常心)을 시험한 이런 일화가 있다. 공보라는 사람이 백운수단이라는 스님을 찾아갔다. 그때 백운수단은 공보에게 "소가 순하더냐?"고 물었다. 공보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백운수단은 단박에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그 같은 호통에도 공보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대꾸를 했다. 그러자 백운수단이 "그놈의 소가 순하기도 순하다"고 크게 칭찬을 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우리의 소는 얼마나 순할까? 파도는 사나운데 우리의 소는 얼마나 순할까?
부동심(不動心)의 경지
부동심은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핵심적 과제
부동심(不動心)이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내적 외적요인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고 굳건한 심정상태를 말한다. 우리 인생살이의 편안함도 흔들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행복과 성공도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라야 내 뜻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동심(不動心)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바램이자 덕목(德目)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동심(不動心)이란 갖고자 한다고 해서 금방 가져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현대사회에서는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등장과 함께 많은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인간의 내적인 감각적 충동과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치관의 혼돈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상처를 받아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과거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의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는 정신적인 빈곤에 갈등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의 갈등에서 해방되고, 보다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부동심(不動心)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사회생활 속의 다양한 인간관계속에서 사랑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 신뢰감와 불신감, 정직과 기만 등의 양극단(兩極端)을 교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갈등 속에서 늘 긴장하며 전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 속에서 벗어나 절대적 자유의 경지인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맹자(孟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부동심은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자, 철학과 종교의 과제였다
부동심(不動心)에 대해서는 맹자(孟子)와 더불어 서양(西洋)에서는 고대 헬레니즘시대에 에피크로스(Epikouros) 학파와 함께 헬레니즘(Hellenism) 철학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던 스토아(Stoicism) 학파에서는 "인간의 감정(感情)은 선악(善惡)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빼앗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주적 인과관계와 자연 법칙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개개인의 이성은 보편적인 이성과 하나가 된다"라고 한다.
즉 올바른 삶이란 이성(理性)에 따르는 삶이라 보았고, 인간적인 욕망과 충동은 이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금욕주의(禁慾主義)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성(理性)을 중시하면서 감정과 충동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를 주장하면서 폭넓은 인간애와 정의를 추구를 역설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고대부터 동(東) 서양(西洋) 모두가 올바른 삶을 위해서 이성(理性)에 의한 부동심(不動心)을 강조하였고, 이것이 종교에 영향을 끼쳐 그 종교가 말한 진리에 대한 부동심(不動心)으로 외물(外物)로부터 비롯돤 정념(情念)을 극복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또한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과 과제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를 추구함에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동심(不動心)은 철학과 종교의 핵심적 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부동심을 기르는 방법이 지언(知言)과 호연지기라 말한다
동양(東洋)에서는 맹자(孟子) 공손축(公孫丑) 장(章)에서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을 막고 나아가 세상의 평안를 위해 사람들은 인(仁)과 의(義)를 근원으로 하여 각자가 수기지학(修己之學)을 통해 학문을 통해 마음을 닦아서 인간적인 욕구와 욕심을 버리고 부동심(不動心)을 가지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그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기 위한 방법으로 지언知言과 호연지기(浩然之氣) 등 두 가지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먼저, 지언(知言)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파악하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부동심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말이나 주장으로 인한 본인의 마음이 흔들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대응 방법으로 남의 말의 파악해야함을 제시하였다.
맹자(孟子)는 제자(弟子) 공손축(公孫丑)의 물음에 답하면서 "지언(知言)이란? (상대방의)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상대방의) 방탕한 말에 그 빠져 있는 바를 알며, (상대방의) 부정한 말에 그 괴리된 바를 알며, (상대방의) 도피하는 말에(논리가) 그 궁窮한 바를 알 수 있으니,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다스림에 해(害)를 끼치고, 그 다스림에 드러나 일에 해害를 끼치나니,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셔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편벽되고, 방탕하고, 부정하고, 도피하는 네 가지는 마음의 잘못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올바른 이치에 비추어 볼 때 가려짐이 없어져야 비로소 말이 공평하고 올바르며, 많은 사람들과 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중국(中國)의 송(宋)나라 때 철학자인 정이천(程伊川)선생은 이 구절에 대해서 "마음의 도를 통달한 뒤라야 능히 시비를 분별할 수 있으니, 마치 저울대를 잡고 경중輕重을 비교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지언(知言)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맹자(孟子)가 부동심(不動心)의 한 방법으로 '남의 말 파악하기(知言)'를 거론한 이유는 맹자(孟子) 자신이 편파적인 말, 근거 없는 말, 사특한 말, 궁한 말 등을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파악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타인과 일상적인 대화(對話)에서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편파적이고 근거 없는 말을 자행(自行)할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 상대방이 직시(直視)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완곡히 지적해줄 수 있다면 상대방을 쉽게 설득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 자신도 상대방의 편파적이고 근거없는 말 때문에 내 마음이 감정에 흔들리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주역(周易) 계사(繫辭) 편에서 "장차 배반할 자(者)는 그 말이 부끄럽고, 중심(中心)이 의심스러운 자(者)는 그 말이 산만하고, 길吉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선(善)을 모함하는 사람은 말이 왔다 갔다 하고, 그 지킴을 잃은 자(者)는 그 말이 굽힌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일상적인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상대방의 편파적인 말, 근거 없는 말, 사특한 말, 궁한 말을 통해서 그 마음의 저변에 있는 옹색한 마음이나 각종의 마음에 상처, 열등감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올곧은 기개를 말한다. 즉 호연지기를 길러서 도덕적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흔들리는 주요한 원인은 타인의 말에 현혹되고, 자신의 기개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때 기 혹은 기운이란 단순한 육체적 기운이 아니라 의(義)와 도(道)라는 방향성을 가진 기운으로서 '올바름'을 지키고 있다는 떳떳함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올바름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의(義)가 쌓여서 생기는 것(集義)"라고 하였다. 즉 올바름에 대한 내면의 지향성이 지속적으로 발현됨으로써, 그 자체로 세력을 형성하여 몸 밖으로 뻗어나가는 기운이 바로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호연지기를 통해서 도덕적인 올곧은 기개를 기르고,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의지한다면 능히 부동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도 지언(知言)을 통해 타인(他人)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모두 맹자의 이 두 가지 노력한다면 실수를 적게 하면서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도달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불혹(不惑) 그리고 부동심(不動心)
공손추(公孫丑)는 제(齊)나라 귀족출신으로 맹자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다. 그는 춘추시대를 살면서 제나라로 하여금 패권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던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인 맹자야말로 시대의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관중이나 안영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 재상이 되신다면 관중이나 안영 못지않은 업적을 이루시겠지요?"
명석한 논리와 탁월한 경륜을 지닌 스승이 제나라 재상직을 맡으면 제나라가 관중이 환공을 도와 천하를 제패하고 안영이 또 그 뒤를 이어 경공을 잘 보좌했던 것처럼 제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맹자의 수제자였기 때문에 남달리 스승에 대한 기대가 컸고 막돼가는 제나라 정치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높은 기대가 담긴 언급이지만 맹자의 대답은 의외로 싸늘하다. "자네는 영락없는 제나라 사람일세 그려. 기껏 안다는 게 겨우 관중과 안영뿐이란 말인가?"
제나라는 노나라의 수준을 못 따라오는 나라였다. 전국시대로 접어든 후 제나라는 칠웅(七雄) 중에 속하는 강국으로 남아 있었고 노나라는 나라이름 조차 사라진 형편이지만 학문과 예악에 있어 노나라는 탁월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도 일찍이 "제나라가 한번 변해야 노나라가 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제일변지어노)"고 말한 일이 있다. 제나라 사람들은 관중의 전설적인 업적에만 심취할 뿐 주나라 역사의 교훈이기도 한 국가의 흥망성세와 그 원인에 대한 깊은 인식은 갖지 못하고 있었다.
맹자가 설명을 계속한다. "어떤 사람이 증서(曾西)에게 물었다네. '당신은 관중에 견줄 만큼 훌륭한 인물이군요.' 그러자 증서는 자기를 겨우 관중 같은 사람에게 비교하느냐고 매우 기분나빠한 일이 있지. 관중이 40년 넘게 재상 자리에 앉아 환공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지만 이루어 놓은게 무엇인가? 증서마저도 관중을 우습게 여기는데 자네는 내가 관중 수준의 인물이기를 바란단 말인가?"
증서(曾西)는 증자(曾子)의 손자이지만 맹자가 보기에는 학문 수준이 맹자 자신에게 뒤진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증서마저도 관중을 하찮게 여기는 형편인데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다니 매우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맹자의 관심사는 왕도정치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선한 정사를 베풀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을 뿐 패권을 장악하여 천하에 군림하는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데 있지 않았다. 공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맹자도 관중을 결코 높이 평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관중과 안영이 있어 빛나는 제나라의 역사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공손추는 스승인 맹자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잘못 이해했나 싶어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한다. "관중은 임금을 패자로 만들었고 안영은 임금의 명성을 크게 높인 신하인데도 본받을 만 하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맹자는 더 이상 관중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제나라가 왕정을 펴기에 아주 좋은 때야. 손바닥 뒤집기에 비유할 만큼 쉬운 일이지(猶反手 유반수)."
공손추는 더욱 궁금한 생각이 들어 묻는다. "거의 백년을 살았던 문왕(文王)도 천하통일의 위업을 당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인 무왕과 주공 대에 이르러서야 성취했는데 왕업을 그렇게 쉽게 여기시니 그럼 문왕은 대수롭지도 않은 분이었나요?"
문왕은 주나라의 역사에서 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전지전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그 문왕도 당대에 이룰 수 없었던 왕업을 감히 손바닥 뒤집기에 비유한 맹자의 말을 공손추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왕이 살았던 시대와 이후 7백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제나라가 처한 시대상황의 차이를 그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은(殷)나라의 주(紂)왕은 포악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면서도 그의 권력이 워낙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문왕이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왕(紂王)의 7대조인 고종으로부터 계속 성군이라 이를 만한 왕들이 선정을 베풀어 왔기 때문에 그 후광이 주왕을 감싸고 있었고 주왕 자신도 포악하기는 하지만 매우 영리하고 힘도 장사인 두려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미자(微子) 기자(箕子) 왕자비간(比干) 같은 충신들이 왕을 충심으로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한 자의 땅도 주왕의 소유가 아닌 곳이 없었고(尺地莫非其有 척지막비기유), 한 사람의 백성도 그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을 만큼(一民莫非其臣 일민막비기신) 주왕의 세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협소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의 제후에 불과했던 문왕으로서는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제나라가 이미 천자에 버금가는 넓은 땅을 소유하였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연이어 사방 국경에까지 들릴 만큼(鷄鳴狗吠相聞而達乎四方 계명구폐상문이달호사방) 대규모 인구를 가진 강대한 나라가 되어있다. 백성들을 불러 모으려 애쓰지 않고 영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미 왕도를 행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정(仁政) 즉 왕도정치를 베풀기만 하면 엄청난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인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승세를 탈 수 있어야 성공하고(不如乘勢 불여승세), 농기구도 농사철을 기다려야 비로소 요긴하게 쓰이는 법이다(不如待時 불여대시)."
오랜 세월 동안 임금다운 임금이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들의 삶이 초췌한 지금이야말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맛 따지거나 더운물 찬물 가리지 않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제후들 중에 누구든지 마음을 바꾸어 어진 정사를 펴기만 하면 단박에 왕(천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은주 삼대의 역사와 문왕 이후 7백년의 세월이 지난 전국시대의 상황을 꿰뚫어보는 맹자의 형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맹자는 '거꾸로 매달아 놓은 사람을 풀어주는 일(解倒懸 해도현)'에 비유하였다. 거꾸로 매달려 고통스러운 것만큼이나 백성들의 삶이 신산한 형편이니 묶은 밧줄을 끊어서 바로 서게 하면 그 후련함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야 했던 문왕의 수고에 비하면 지금은 그 절반의 노력만 가지고도 왕정의 공적을 배로 성취할 수 있는 절호의 시대상황이라는 말이다.
공손추는 왕도와 패업을 논하기 전에 우선 맹자가 재상이 돼서 제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기만 하면 왕업을 성취하든 패업을 이루든 이상하게 여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 소신을 흔들림 없이 펴실 수 있겠습니까?" 공손추는 제나라의 여러 상황을 보건대 성공적으로 정사를 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맹자는 자신의 나이가 마흔(四十)임을 강조하면서 부동심(不動心)을 언급한다. 인생에서 40세는 중요한 나이다. 공자도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지 않았던가. '맹자'에서 부동심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일이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세상만사의 시초이고 단초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반드시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기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서 떳떳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가짐(守己 수기)에서 나온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맹자는 증자를 들고 있다.
증자는 일찍이 "스스로 돌이켜보아 곧지 못하면 비록 미천한 사람마저도 두렵게 할 수 없지만(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자반이불축 수갈관박 오불췌언), 내가 바르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라도 떳떳이 상대할 수 있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자반이축 수천만인 오왕의)"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일이 있다. 유심론은 성선설과 존심양성 호연지기 등의 개념을 포괄하는 맹자의 중심 철학이며 평생의 신념이기도 하다.
맹자집주(孟子集註)
공손추상(公孫丑上)
부동심장(不動心章): 호연장(浩然章)
아사십부동심(我四十不動心)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공손추가 물어 말하기를: "선생님 제나라의 경(卿)이나 상(相)을 맡아, 거기에서 도를 행할 수 있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도나 왕도를 행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마음을 움직일까요 아닐까요?
○ 此承上章, 又設問孟子, 若得位而行道, 則雖由此而成霸王之業, 亦不足怪. 任大責重如此, 亦有所恐懼疑惑而動其心乎?
이것은 윗장을 이어, 또 가설하여 맹자에게 물었으니, 만약 자리를 얻어서 도를 행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서 패왕의 업을 이루더라도, 또한 괴이하게 여기기에 부족하다. 임무가 크고 책임이 중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두려워하고 의혹하는 것이 있어 그 마음을 움직이시겠습니까?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맹자가 말하기를: "아니다. 나는 사십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四十强仕, 君子道明德立之時. 孔子四十而不惑, 亦不動心之謂.
사십은 강하여 벼슬할 때이니, 군자의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서는 시기다. 공자가 사십에 미혹하지 않음이, 또한 부동심을 말한다.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선생님이 맹분을 넘어섬이 멀군요."
夫子過孟賁遠矣: '過'는 '넘어서다'는 뜻으로 '過人'은 '남을 넘어서다, 남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다. '遠'은 '멀다'는 뜻으로 '過'와 연결해서 직역하면 '넘어선 것이 멀다, 뛰어난 것이 멀다'지만, '훨씬 뛰어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으니, 고자도 나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 孟賁, 勇士. ○ 告子, 名不害. 孟賁血氣之勇, 丑蓋借之以贊孟子不動心之難. 孟子言告子未爲知道, 乃能先我不動心, 則此亦未足爲難也.
맹분(孟賁)은, 용사다. 고자(告子)는, 이름이 불해다. 맹분의 혈기지용을, 공손추가 아마도 그것을 빌려 그것으로 맹자의 부동심이 어려움을 칭찬했다. 맹자는 말하기를 고자가 도를 알지 못하는데도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또한 어려운 것이 되기 부족하다.
曰: 不動心有道乎?
말하기를: "부동심(不動心)에 방법이 있나요?"
程子曰: 心有主, 則能不動矣.
정자가 말하기를: "마음에 주인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曰: 有.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 思以一豪挫於人, 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 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 必反之.
말하기를: "있다. 북궁유가 용기를 기른것이, 피부를(膚) 찔려도 흔들리지 않고, 눈을 피하지 않고, 남에게 한 터럭의(조금) 꺽임으로도, 마치 시장과 조정에서 그를 매질한 것처럼 생각했다.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에게도 (꺽임을) 받지 않고, 또한 만승의 임금에게도 받지 않았다. 만승의 임금 찌르기를, 마치 칡베로 만든 옷 입은 평범한 사람 찌르 듯이 보고. 제후에게 조심성이 없어서. 나쁜 소리가 오면, 반드시 그것을 갚아주었다."
○ 北宮姓, 黝名. 膚撓, 肌膚被刺而撓屈也. 目逃, 目被刺而轉睛逃避也. 挫, 猶辱也. 褐, 毛布. 寬博, 寬大之衣, 賤者之服也.
북궁(北宮)은 성이고(姓), 유(黝)는 이름이다. 부요(膚撓)는, 살가죽이 찔림을 당해 흔들리고 굽음이다. 목도(目逃)는, 눈이 찔림을 당해 눈동자를 굴려 피함이다. 좌(挫)는, 치욕을 당함과 같다. 갈(褐)은, 모포다. 관박(寬博)은, 넓고 큰 옷이고, 비천한 사람의 옷이다.
不受者, 不受其挫也. 刺, 殺也. 嚴, 畏憚也. 言無可畏憚之諸侯也. 黝蓋刺客之流, 以必勝爲主, 而不動心者也.
불수자(不受者)는, 그 치욕을 받지 않음이다. 자(刺)는, 찔러 죽임이다. 엄(嚴)은, 두렵고 꺼림이다. 두려워하고 꺼릴 만한 제후가 없다는 말이다. 유가(黝)가 아마도 자객의 부류로, 반드시 이김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움직이 않은(不動心) 사람이다.
孟施舍之所養勇也, 曰: 視不勝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맹시사가(孟施舍之) 용맹을 기른 것은, 말하자면: '이기지 못함을 보되 이길 것으로 여김과 같다. 적을 헤아리고 나서 나아가고, 이길 것을 생각하고 나서 싸우면, 이것이 삼군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舍)가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없을 수 있을 뿐이다.’
○ 孟, 姓. 施, 發語聲. 舍, 名也. 會, 合戰也. 舍自言其戰雖不勝, 亦無所懼. 若量敵慮勝而後進戰, 則是無勇而畏三軍矣. 舍蓋力戰之士, 以無懼爲主, 而不動心者也.
맹(孟)은, 성이고. 시(施)는, 발어성이다. 사(舍)는, 이름이다. 회(會)는, 모여 싸움이다. 사(舍)가 그 싸움이 비록 이길 수 없어도,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했다. 만약 적을 헤아리고 승리를 생각하고 나서야 나아가 싸운다면 이것은 용기가 없고 삼군을 두려워함이다. 사가(舍) 아마도 힘써 싸우는 용사이니, 두려움이 없음으로 주를 삼고 마음이 움직이 않는(不動心) 사람이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動(움직일 동)은 ❶형성문자로 动(동)은 통자(通字), 动(동)은 간자(簡字), 㣫(동)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重(중;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움직이거나 할 때의 반응, 무게, 동)이 합(合)하여 움직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動자는 '움직이다'나 '옮기다', '흔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動자는 重(무거울 중)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重자는 보따리를 매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무겁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무거운 보따리를 맨 사람을 그린 重자에 力자가 결합한 動자는 보따리를 옮기기 위해 힘을 쓴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動(동)은 (1)움직임 (2)변함 등의 뜻으로 ①움직이다 ②옮기다 ③흔들리다 ④동요하다 ⑤떨리다 ⑥느끼다 ⑦감응하다 ⑧일하다 ⑨변하다 ⑩일어나다 ⑪시작하다 ⑫나오다 ⑬나타나다 ⑭어지럽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할 위(爲), 옮길 이(移), 다닐 행(行)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그칠 지(止), 고요할 정(靜)이다. 용례로는 전쟁이나 반란 등으로 사회가 질서없이 소란해지는 일을 동란(動亂), 원동기에 의해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변형이나 발생시킨 것을 동력(動力),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동작(動作), 마음의 움직임을 동향(動向), 움직이는 듯함 또는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동감(動感), 마음이 움직임을 동심(動心), 흔들려 움직임을 동요(動搖), 움직이는 일과 멈추는 일을 동지(動止), 움직이는 상태를 동태(動態), 생물계를 식물과 함께 둘로 구분한 생물의 하나를 동물(動物), 움직이고 있는 모양을 동적(動的), 심장에서 혈액을 몸의 각 부분에 원심적으로 보내는 혈관을 동맥(動脈),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를 동사(動詞), 사람의 움직이는 상황을 동정(動靜), 하늘을 움직이게 하고 땅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세상을 놀라게 함을 이르는 말을 동천경지(動天驚地), 무엇을 하려고만 하면 남에게 비난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동첩득방(動輒得謗), 곤란한 지경에 빠져서 꼼짝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동탄부득(動彈不得), 가볍고 망령되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도리나 사정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말을 경거망동(輕擧妄動),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몸을 사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복지부동(伏地不動), 하늘을 치켜들고 땅을 움직인다는 뜻으로 큰 소리로 온 세상을 뒤흔듦 또는 천지를 뒤흔들 만하게 큰 세력을 떨침을 이르는 말을 흔천동지(掀天動地), 확고하여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을 확고부동(確固不動),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게을러서 조금도 일을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십지부동(十指不動)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