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벚꽃잎 분분히 날리던 경주에서 ‘경북상회’를 만났습니다. 꽃잎 몇 장 붙인 간판 밑으론 ‘각종 철물, 건축자재, 생활용품
일체’라고 쓰여진 버스였습니다. 덩치 우람한 관광버스에 상회라니요? 마침 신호를 받고 나란히 서있던 시간이라 올려다볼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정말
그 버스엔 울긋불긋의 관광객 대신 생활용품들이 자리 가득 앉아있었습니다. 영천장, 안강장의 천막이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천막을
들추면 장터의 소란이 그대로 전해올 듯해 양은냄비라도 사며 눈을 맞추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네 발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싣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져가리라고, 움직이는 가게라고 단정을 지었습니다.
경북상회를 만나고 난 뒤 이런 시를 썼습니다. 편년체로 기록된 보부/ 진양조로 길들여진 비애는 /긴 숨을 내쉬며/ 앞서 달아나는 삶을
쫓았다지요 /등이 짐짝을 온힘으로 받치고 /짐짝이 등을 온힘으로 끌고 가는 /첩첩, /아버지 적, 아니 할아버지 적 /그보다 훨씬 이전의
/그렁그렁한 어깨들의 적 졸시 「자손은요」 중에서
그 버스에서 보부상의 모습을 봤던 것입니다. 혈관처럼 뻗어있는 이 땅의 크고 작은 길들을 온통 헤매고 다녔을 길 위의 인생들
말입니다. 장돌뱅이, 봇짐장수라고도 하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돌팔이’라는 말도 그 어원을 살펴보면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보부상은 조선시대 전국 5일장을 다니며 행상하던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을 일컫습니다. 보부상은 보자기 보(褓)자와 짊어진다는
부(負)자가 합쳐진 것으로, 신체가 건강하고, 지름길을 많이 알며, 기억력이 좋고 셈이 밝은 사람들이 종사했다고 합니다.
정보 수집에도 능해 어떤 물건이 달리고 넘쳐나는지 파악해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에 물가를 조절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같은 역할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신분질서 속에서 천대받던 계층이었지만 190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5만 명 정도의 보부상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육룡이 나르샤’에 나왔던 백달원이 보부상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는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800여명의 보부상과 함께 군량미를 운반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실 조선 보부상단의 풍속은 그것 자체가 한국의 상인문화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독특하고 다양했습니다. 그들의 의복이나
인사법이라든지 엄격한 상도와 규율 등은 그렇지만 지금 조선보부상단이 전승했던 이 상인문화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소재로만 기록될 뿐 까맣게
잊혀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몸담았던 전통시장, 심지어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역전통시장의 축제에서까지 그들이 가꾸어 온 고유한 의식과 풍속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젠 두 발로 걸었던 시대는 가버린 듯합니다. 보부상은 거의 소멸하고 현재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 지방에서 보부상단의
존재를 발견할 뿐입니다.
2016년 부여에서 ‘보부상 꿈을 꾸다’라는 주제를 내걸고 축제를 했습니다. 또 2017년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문화 주류인
양반문화를 벗어나 장시를 통한 새로운 대중문화를 형성하고자 보부상 장마당놀이를 벌였습니다. 상업 활동 외에도 지역 및 계층의 문화 교류를 통한
사회적 연결망을 가지고 장날에 장마당의 흥과 분위기를 이끌어 장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만든 놀이입니다.
보부상하면 김주영의 소설 ‘객주’가 먼저 떠오릅니다. 소설 ‘객주’는 정의감, 의협심이 강한 보부상 천봉삼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유랑을 따라가며, 경상도 일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근대 상업자본의 형성과정을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소설입니다. 1878년부터 1885년까지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조선후기의 시대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내며 조선 민중사에서 보부상이 차지하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4년 9권으로 끝냈다가 지난 2013년 울진 죽변항에서 내륙 봉화까지 소금을 실어 나르는 길인 십이령 고개가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30여 년 만에 소설이 10권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소매 끝에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떠돌이 인생들. 왕소금 뿌려 놓은 듯한 흐뭇한 달빛 속을 걸으면 동이와 허생원의 얘기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올까요? 천봉삼의 재빠른 걸음을 따라 십이령 고개를 지나면 봉화장에 도착할까요? 이팝이 차려놓은 소박한 밥상을 앞에 두고
소설 ‘객주’를 다시 읽고 싶은 시간입니다.
기사입력: 2017/05/10 [15:29] 최종편집: ⓒ 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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