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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넷째날
눈을 뜨자마자 창문의 커텐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런데 파란 하늘을 기대한 나에게 대련시의 하늘은 누런색으로 다가온다. 황사로구나. 남쪽으로 내려오며 황사 지대로 진입한 것인가? 호텔 바깥으로 나오니 정문을 지키는 호텔 여직원은 황사가 있는 바깥을 계속 지켜야 하는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우리가 대련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안의사가 재판받고 사형을 당하신 여순 감옥을 가고자 함이다. 차는 대련 시내를 지나 요동반도 끝자락에 있는 여순감옥으로 향한다. 요동반도라면 과거 고구려가 지배하던 우리의 영토가 아니었나? 요동성, 안시성, 비사성, 백암성... 고구려가 요동지방에 두었던 성들이 하나, 둘 생각난다. 비사성이 대련시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는데, 일정상 들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은 빼앗긴 땅, 요동반도를 차로 달리며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공상에 잠겨본다. 만약 이성계가 위하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서 성공하였더라면...
차에서 내려 여순감옥을 마주 하면서 잠시 옷깃을 여민다. 여순감옥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제 열사 기념관에서처럼 이곳에도 중국 학생들이 단체로 줄을 지어 가고 있다. 수치스러운 역사, 아픈 역사도 결코 잊지 않으려는 중국인의 자세는 높이 평가해야겠다. 안의사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사형 집행장으로 들어간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숙연해진다. 사형대에는 안의사의 사진이 놓여있고, 그 위로는 올가미가 걸려있다. 우리는 준비해간 화환을 놓고 묵념을 올린다. 102년 전 안의사는 바로 저 의자에 앉았다가, 덜컹 하며 의자가 밑으로 빠지면서 저 올가미에 목이 조이며 매달리셨겠구나.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시고...
안의사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움이 치밀어 오르며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인간이면 누군들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으랴. 그러나 안의사께서 죽기 5분 전 어머님께서 정성들여 만들어 주신 하얀 한복을 입고 앉아 계시던 모습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셨던 것이라 죽음을 앞두고도 안의사의 모습은 평온해보였다. 그렇기에 더 비통함이 차오른다. “안중근 대한의병 참모중장이시여! 당신은 그렇게 저 자리서 목숨을 빼앗기셨건만, 후손인 저희들은 아직도 당신의 유해를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장군이시여! 언젠가는 꼭 당신의 유해를 찾아, 효창원의 당신의 묘소 빈 관에 꼭 당신을 모시겠나이다.”
사형장을 나온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감옥을 돌아본다. 좁은 감방 안에는 똥통도 놓여있다. 백범일지에 보면 서대문 형무소의 좁은 감방에 수용자가 너무 많아 겹겹이 겹쳐 눕고, 그래도 공간이 모자라 힘이 센 사람이 벽에 등을 대고 겹겹이 겹쳐 있는 사람들을 밀어 또 공간을 만들어 사람이 눕는다고 나오던데, 여기 여순감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의사가 구금되어 있던 감방은 다른 감방과는 달리 책, 걸상도 있고 필기구도 놓여있다. 안의사의 저격 사건은 이미 세계의 이목을 끌어 일제도 안의사를 일반 감방에 두지 못하였나보다. 잠시 안을 들여다본다. 바로 저 책상 위에서 안의사는 안응칠 역사를 쓰셨고, 동양평화론을 집필중이셨겠구나. 안의사는 동양평화론을 마저 집필할 수 있게 사형 연기를 요청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안내원을 따라 간 곳은 또 다른 사형장이다. 안의사가 사형당한 곳은 초기의 사형장이고, 지금 보는 곳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항일열사들을 사형하던 곳이다. 설명을 보니 1942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여기서 700명이 넘는 열사들이 사형당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심지어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한 8. 15. 다음날에도 4명의 열사를 사형하였다. 당시 교도소장은 분명 천황의 항복 선언을 알았을 것임에도 사형을 집행하였다니... 이건 명백한 살인이다. 사형장에는 올가미와 사형의자 외에도 무슨 오래된 둥그런 통 같은 것을 전시해놓았다. 사형수가 죽으면 이 둥그런 통에 우겨 넣어 감옥 뒤 야산에 묻었단다. 이 통도 그렇게 묻힌 통을 발굴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데, 자세히 보니 뼈도 그대로 있다. 으~으~~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새로 지은 건물로 들어가니 입구에는 한글로는 ‘여순감옥에서의 국제지사들’, 한자로는 ‘國際戰士 在 旅順’ 이라고 되어 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이회영, 신채호, 최흥식, 유상근 이렇게 5분의 독립투사들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이분들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그런데 생뚱맞게 국제지사들은 무엇인가? 중국의 제지로 국적 불명의 모호한 ‘국제지사’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여기서 또 중국의 옹졸함을 본다.
이 전시관은 한국에서 자금을 지원하여 지은 것인데, 이번 여행 일정을 짜고 안내를 하는 세종여행사 한상준 사장이 이 전시관을 세우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알고 보았더니 한사장님은 아버님이 독립투사였고 자신은 그 자녀로 광복회 회원으로 있다. 나는 사장님에게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고 얘기하면서 한국인들이 이곳에 많이 와보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한다. 그런데 한사장은 좀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련에 오는 한국인들이 골프 치러 가고 다른 데 관광하러는 많이 가도 이곳은 도통 오지 않는다고 한다. 광복회 회원으로서 그런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감이 높아진 목소리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이회영, 신채호 선생은 워낙 유명하니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최흥식, 유상근 열사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해보자. 최흥식, 유상근 두 분 열사는 1932년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의 파견을 받고 대련에 잠입하였었다. 당시 국제연맹 조사단원이 대련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 조사단원을 마중나오기로 되어 있는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착하여 그 준비를 하던 중 비밀이 탄로나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곳에 수감되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또 다른 애국단원 윤봉길 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멋지게 성공하여 대한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 그런데 무기수로 복역중이던 두 분 열사는 광복 전날 살해되었다. “이런 죽일 놈들! 사형수도 아니고 무기수를 자기들 항복 전날 죽인단 말인가?” 나는 두 분 사진 밑에 붙인 설명을 보며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저절로 주먹이 불끈 쥐인다.
감옥을 나가기 전 우리는 여순감옥 박물관 부관장님 방에서 잠시 왕진인 부관장과 환담을 나눈다. 안중근 숭모회나 안중근 기념관측에서 이미 여러 차례 이곳을 다녀갔기에 부관장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왕진인 부관장은 젊어서부터 이곳 여순감옥에서 근무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세련된 관리티는 나지 않고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 같다. 여순감옥을 나온 우리는 동도정이라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대련법원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여순감옥 뒤 야산을 향한다. 야산에는 ‘旅順監獄 舊址 墓地’라는 표석이 서있다. 우리가 이곳에 들른 이유는 이 야산 어딘가에 안의사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몇 차례 발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나는 유골을 발굴해도 어떻게 안의사 유골임을 알 수 있을까 궁금해 물어보았다. 박교수는 일단 안의사는 다른 사형수와 달리 둥근 통이 아닌 일반 관에 입관되어 묻혔다는 것이고, 또 안의사 후손들의 디엔에이(DNA)를 채취해놓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안의사는 이 야산 어디쯤에 계신 것일까? 여기서 또 일본놈들에게 욕이 나온다. 녀석들은 안의사가 묻힌 곳이 알려지면 그곳이 독립운동의 성소(聖所)가 될까봐 비밀리에 매장한 것이다. 그래도 워낙 기록을 꼼꼼히 남기는 놈들이기에 안의사 매장 기록이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최근에 이 당시 일본 정부 문서가 비밀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는데, 누군가가 그 산더미 같은 문서에서 꼭 안의사에 대한 매장기록을 찾아주길 바란다.
이제 여순의 옛 일본 법원 구내로 들어가려는데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간판은 ‘旅順口 區人民醫院’이다. 옛 법원은 이 병원 마당으로 들어가니 서양식 석조건물로 남아있고, 건물 간판에는 ‘旅順 日本 關東法院 舊址’라고 되어 있다. 러시아가 먼저 여순을 조차하고 있을 때 만든 건물인가 하였더니 1906년 일제가 아예 관동도독부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란다. 건물 위에는 공평을 상징하는 천칭 조각을 양쪽으로 두었다. 글쎄... 천칭만 저렇게 세워놓으면 뭐하노? 실제 재판에서 공평했어야지... 안내문에도 이곳 사법제도나 기구는 계속 변하였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서, 그것은 재판이 전혀 공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the balance under butcher's knife was never just). 실제로 일제는 1908. 10. ‘관동주 재판령’을 공포하면서 사법제도의 집행에서 더욱 더 민족 차별을 두었다.
안에 들어가니 당시의 법정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웃기는 것은 검찰관과 통역관, 법원서기가 재판장과 같이 나란히 법대에 앉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법대에는 오직 재판관만이 앉을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자리 배치만 놓고 보더라도 이곳에서의 재판이 얼마나 불공평하게 진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겠다. 실제로 안의사에 대해서도 재판을 하였다지만 이미 판결 선고 전에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가 이곳 법원장에게 안의사를 극형에 처하라고 지시해놓은 상태로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보았다. 당시 안의사는 방청석에서 바라보아 맨 왼쪽에 앉으셨고, 그 옆으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열사가 앉았었다.
사실 우리는 안의사만 알지 솔직히 그 때 같이 재판받은 나머지 3분 열사에 대해선 잘 모른다. 우덕순 열사는 이 이전에도 1908년 안의사가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할 때도 같이 하였었는데,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조도선은 이등박문 암살 당시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역 전역인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계획했었다. 이등박문을 태운 열차가 채가구를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거사에 착수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열차가 채가구역에 섰고, 이등박문이 채가구역에 내렸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유동하는 당시 18살로 중국과 러시아 국경도시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약사를 하던 유경집의 아들이다. 당시 안의사는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이 집에 머물며 통역을 구하였는데, 유경집이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유동하는 통역뿐만 아니라 하얼빈에 와서 안의사 일행이 사돈인 김성백의 집에 유숙하도록 주선도 하였다. 유동하는 1918년 조선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하여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살해되었다. 눈을 감고 102년 전의 이 법정으로 날아간다. 안의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감상에 젖어있는데, 30대로 보이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온다. 대련의 장욱도 중국 변호사인데, 안의사가 받은 재판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중국 변호사가 안의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강연까지 해주니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목적지인 여순박물관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여순항을 지나는데, 언뜻 건물들 사이로 항구에 정박해 있는 군함이 보인다. 그렇지. 이곳이 군항이지. 예전 같으면 이 근처는 지나가지도 못하였을 텐데, 그래도 중국이 개방화가 많이 되긴 되었구나. 안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얘기했었지. 여순을 영세중립지역으로 만들고 공동출자에 의한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며, 평화군을 양성하자고... 지금 유럽연합(EU)에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을 벌써 그 당시에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은 구속되면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안의사가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순박물관은 중국 전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건물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원래 러시아의 육군장교 구락부 건물이던 것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것이라 한다. 박물관 입구 현판에 ‘旅順博物館’이라고 쓴 글씨는 중국 현대시인 궈뭐뤄(郭沫若)의 글씨다. 중국 현대사를 배울 때에 이름을 들은 곽말약 시인의 글씨를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갑구나. 일본의 항복이 좀 더 늦어졌다면 여순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많은 문화재는 우리나라 것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일본은 중국 각지에서 수집한 문화재를 이곳으로 가져와 한국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처 반출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 미수에 그친 것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 예전에 처음으로 국립박물관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국립박물관에는 당연히 우리나라 문화재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중앙아시아의 많은 문화재를 보고 깜짝 놀랐었지. 이 중앙아시아 문화재들은 일제가 우리나라까지 반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일본까지 가져가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관람객들의 눈길을 제일 많이 끄는 것은 미이라다. 어느 시대에 어떻게 하여 이렇게 미이라가 되었을까? 여순박물관에 대해 아쉬운 것은 설명이 중국어로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외국 관광객들을 위해서 최소한 영어 설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는 러일 전쟁 기념탑이 서 있는 203고지. 고지 높이 203m가 그대로 고지의 이름이 되었는데, 여기서 러일전쟁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은 1904. 2. 8. 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 해군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때 기습 공격에 재미를 붙여 2차 대전 때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인가? 일본은 여순항을 봉쇄하고 여순으로 오는 철도를 파괴한 후 러시아군을 공격하지만 전쟁은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 이 때 교착 상태에 빠진 전황을 일거에 뒤집기 위하여 203고지를 공격한다. 일본 군부는 203고지에서는 여순항이 바로 내려다보이기에 여기만 점령하면 전황을 단숨에 돌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러시아군 전사자 5,000여명, 일본군 전사자 만명이 훨씬 넘는 치열한 전투였다. 일본군 노기 마레스케 사령관의 아들 노기 야스스케도 이때 전사하였다. 결국 12. 5. 일본은 203고지를 점령하고 여순항을 향하여 이틀 동안 포탄을 퍼붓고, 결국 함대를 모두 잃은 러시아는 1905. 1. 2. 백기를 든다.
고지 위에 오르니 탄환 모양의 기념탑이 서 있고 당시 사용하던 대포도 전시되어 있다. 기념탑은 당시 전투하고 남은 탄피를 모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런 기념탑까지 있기에 이곳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기념탑 옆에는 ‘銘記歷史 勿忘國耻’라고 쓰여 있다. 자기네 땅에서 자기들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국군들이 들어와 싸운 수치를 잊지 말자는 것인가? 그런 거라면 우리가 더 수치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영토에서도 두 나라가 싸웠고, 또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결국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 대련항이 내려다보여야 하는데 대련항은 뿌연 황사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내려올 때는 다른 길로 내려오는데 노기 야스스케가 전사한 곳이라는 표석이 있다. 노기 장군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일본 국내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장군의 두 아들도 여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비난은 칭송으로 바뀐다. 더군다나 7년 후 명치 천황의 장례식날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을 하니, 이제 노기는 군신으로까지 추앙받으며 노기를 받드는 신사까지 생겼다.
심지어는 남산 리라초등학교 옆의 사회복지법인 남산원도 과거 노기신사가 있던 곳이다. 이 얘기를 듣고 얼마 전에 들른 남산원 마당 한켠에는 당시 노기 신사에서 쓰이던 석물(石物)을 돌탁자와 이를 둘러싼 기다란 돌의자로 쓰고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신사 들어갈 때 손을 씻던 수조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수조 옆면에는 봉납(奉納)이나 일본인 이름 등이 새겨져 있었다. 남산에는 조선 신궁만 있는 줄 알았는데, 노기 신사 외에도 몇 개의 신사가 더 있었다고 하니, 일본은 남산을 자기들 성역지로 만들려고 했나보다. 이를 위해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도 인왕산 기슭으로 쫒아 보낸 것이고...
203고지를 떠나는데 아까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벚꽃들이 여기 저기 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이곳에 벚꽃이 많았던 것인가, 일본이 심어놓은 것인가? 이렇게 벚꽃이 많으니 벚꽃 축제도 연다. 우리나라의 군항 진해에서도 일제가 심어놓은 벚꽃을 갖고 진해군항제를 여는데, 여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203고지에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여순역으로 가기 위하여 바닷가 저지대로 내려오는데, 바닷가에 축구공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선수들의 조각상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보며 가이드는 안정환 선수가 한때 이곳 다렌스더(大連實德) 축구팀에서 뛰었었다고 한다. 그랬었구나. 바닷가에 저렇게 큰 축구 조각상을 둘 정도이니, 이곳 축구 열기도 대단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순역에 도착하였다. 역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러시아풍이다 생각하였더니 1900년 러시아가 지은 것으로 대련시에서는 이를 중점 보호건축으로 지정해놓았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본다. 개찰구 바깥으로 철도가 보인다. 1909년 그 때에도 안의사는 기차에서 내려 이리로 나오셨겠지. 그리고 대기해놓은 마차로 아까 간 여순감옥으로 호송되었을 것이고... 안의사를 생각하자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과연 우리는 지금 안의사가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차는 다시 대련 시내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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