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6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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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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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p-gfZ4jhE (이승룡 이냐시오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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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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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2)희망의 복음>
예수님 시대 당시 공공연한 대 죄인이자 죄인들의 우두머리였던 자캐오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던 자캐오 앞에 예수님께서 멈춰 서셨습니다. 자캐오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자캐오는 자꾸 나무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의 시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무 위에 있는 자캐오에게 향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캐오의 내면은 수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입니다. 이 양반이 왜 하필 내 앞에 서는 거지? 오늘 이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창피당하는 것 아닐까?
당시 제가 자캐오 앞에 섰더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등쳐먹던 왕 거머리 같던 사람, 얼마나 흉악하고 지독했던지 ‘명성’이 자자했던 갈 데 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보고 ‘한 성격’ 하는 제가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합니다. “어이, 나무 뒤에 있는 너! 그렇게 거기 숨으면 내가 모를 줄 알고! 빨리 안 기어 내려와? 너 도대체 언제까지 인생 그렇게 살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삥 뜯어먹으며 살건데?”
예수님께서 저처럼 이런 식으로 나갔더라면 자캐오의 회개는 영영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지적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다정다감한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듯이, 절친한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듯이 부드럽게 자캐오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이, 자캐오!” 아니면 그가 듣기 싫어하는 별명, “어이, 숏다리!”라고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자신의 걱정과 두려움과, 오랜 냉담함을 일거에 깨트리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순식간에 마음이 눈녹 듯이 녹아내렸습니다.
하느님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한 인간의 죄와 오랜 사슬과 갖은 억압과 완고함을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상담심리의 대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사람, 다정한 친구 한명이 필요했습니다. 별명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욕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자캐오야, 그간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며 살아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느냐? 자캐오야, 그간 이 세상의 왕따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주겠다.”
오늘 복음은 정녕 희망의 복음입니다. 자캐오 못지않게 숱한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희망과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주는 기쁨의 복음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를 부르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우리임에도 또 다시 부르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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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nXUbWNCO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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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은 굳이 돈 욕심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램보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윌은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윌이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지만 숀이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하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의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의 마음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려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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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9,1-10 :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받은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였다(콜로 3,5)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인 자캐오는 어떻게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까? 그는 자기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써 곧바로 하늘 나라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기로 하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자캐오는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 나라의 입구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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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자캐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는 부자였지만, 즉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할 ‘낙타’였지만(루카 18,25),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바늘귀’로 들어간 사람이고, ‘잃은 양’이었지만(루카 15,4),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되찾은 양’이 된 사람이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새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변화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고(루카 9,9), 결국 만났지만(루카 23,8), 새롭게 변화되기는커녕 더 나쁜 상태로 떨어졌습니다.(루카 23,11) 그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자캐오가 애썼다는 말은, 그의 마음속에 간절한 갈망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라는 말은, 그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기득권층 사람인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또 영적으로는 소외계층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것은 그의 처지와 열등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키가 작은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상징적인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은, 그가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군중’과 자캐오 자신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난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는 군중은 여기서는 ‘자칭 의인들’이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자캐오의 모습에서 5장의 중풍병자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루카 5,17-19) (이 이야기에서도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간 것은 아마도 병자 자신이 그렇게라도 해 주기를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잃은 양’ 자신도 목자에게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목자를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5-10)
자캐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자캐오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전부터 잘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즉 그의 처지와 상황도, 그리고 그의 마음속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4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도, 또 주님을 믿기 전에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난 일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속에 ‘부르심’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쓴 일은 ‘응답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시자 그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맏아들인 일과 자기의 재산을 모두 내놓은 일은 ‘응답’을 본격적으로 실천한 일입니다.
“왜 전 재산을 내놓지 않고 ‘재산의 반’만 내놓았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기 위해서 ‘재산의 반’을 남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는 말씀은, 자캐오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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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6년 전의 기억입니다. 당시 저는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 담담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사목국에는 사제가 10명 있었습니다. 젊고, 열정이 많은 사제들이 모였으니 활기가 넘쳤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에 때로는 의견의 충돌도 있었지만 그렇게 다름은 우리의 안목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습니다. 가끔씩 연수를 가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정을 기획하였습니다. 양평에 있는 한화콘도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다들 양평으로 왔는데 한 신부님이 늦게 왔습니다. 신부님은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로 착각했습니다. 차 안에서 묵주기도를 했고, 음악도 듣고 기쁘게 출발했지만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양평을 용인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약서도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닉스 한인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신부님과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은 ‘아시아 마트’를 내비에서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내비에서 아시아 마트를 찍었고,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맞는다고 하면서 내비가 알려주는 데로 갔습니다. 30분을 달려갔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피닉스에 아시아 마트는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렌데일’에 있고, 다른 하나는 ‘메사’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메사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가야 했는데 그렌데일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갔습니다. 결국 식당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짐을 풀고 편하게 먹으니 더 좋았습니다. 17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말을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명품은 기능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명품이어야 하고, 마무리도 명품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90세의 노인 엘아자르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엘아자르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엘아자르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어겨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결한 음식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엘아자르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엘아자르의 인품과 덕망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비록 본인은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엘아자르가 이교 음식을 먹은 것으로 알고 따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교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평판이 문제였습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길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세리였던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릇된 길을 돌아서 올바른 길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입니다. 회개한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셋째는 ‘순명’입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청했던 마리아의 삶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청했던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던 엘아자르의 삶입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걸어갔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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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자캐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 복음[루카 19:1-10]은 예리고의 세관장 자캐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 당시 "예리고"하면 지역적으로 볼 때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서 종려나무 숲이 크게 우거져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삼 향나무 숲의 향기는 대단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요르단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대추야자 열매와 발삼 향기의 산지였기에 세금을 가장 많이 징수하는 지방이었다.
당시 세리라 하면 성서에서도 자주 나오듯이 그들은 탐욕과 사리사욕으로 가득 찬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례 죄인 취급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금이 가장 많이 징수되는 지방의 세리의 장까지 올라간 자캐오이었으니, 그 지방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죄인시했는 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복음에서 보면, 그는 돈 많은 세리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마음의 안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직을 택했고 그 길로 부자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상종을 안 해주는 요즘 말하면 왕따,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며 사귀신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던 것이다. 즉, 그는 예수를 원했고, 그분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실지 보고 싶었기에 키가 작은 그로써는 돌 무화과 나무 위까지 올라가 예수를 보려고 애썼다. 이렇게 예수를 보려고 애를 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자캐오는 예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놀랍고도 새로운 친구를 발견하게 된 것이며, 그러한 새로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생활의 결단을 내리는 즉, 단순한 말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변화, 삶의 결단을 내렸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그리고 남을 속였다면, 그 액수의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어느 믿음의 모임에서였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의 간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간증의 청을 받았는데도 응하지 않고, 거절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방금 간증한 여인들 중의 네 사람이 나의 돈을 가져가고서 안 갚고 있습니다. 지금 내 처지는 끼니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간증이란 그 생활의 성실성이 따르지 않으면 전연 무가치한 것이다.
그런데 자캐오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하시는 진정한 복음의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 예수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그분을 만나 무슨 신앙고백을 하며, 어떻게 모시고자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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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자캐오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참으로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불운과 약점의 아이콘입니다. 세속적으로야 세관장이었기에 재산도 제법 모았겠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유다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탁에서 그 옆에 앉는 것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키가 작아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자 하는 회개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는 감히 그 고귀한 분께 그런 갈증을 느낄 자격이 있는지조차도 자신이 없지만, 입고 있던 비단옷과 고급 신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체면 다 구겨 가면서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 순간의 만남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묵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청원이 바로 그에게는 구원이요, 새로운 생명이며, 하늘 나라의 시작입니다.
처음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보고, 인정을 받은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고 지탱해 준 재산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을 용서하시고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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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하용달 안드레아 신부님]
<자캐오를 통한 구원의 현재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리고의 세관장인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는 예화입니다. 이 예화 이전에 루가복음 18, 9-14절에 바리사이와 세관원의 예화가 먼저 나옵니다.
이 예화에서 하느님은 바리사이를 제쳐두고 세관원을 의인으로 여기셨다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사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라며 겸손한 사람의 지위가 종말에는 뒤바뀐다고 역설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로서 예수님 당시 그 수가 육천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바리사이파는 기원전 167년에 시작된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 가담한 경건자들(하시딤) 가운데서 묵시문학적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도 중히 여겨 거기에 내포된 율법 규정을, 특히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자기네처럼 살지 않는 동포들과 이방인들을 천민이라 하여 멸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고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천민들과 어울려 지내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의 비위를 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이런 천민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신 때문에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마태 11,19 ; 루카 7,34)
세관원은 관세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인데, 세관원은 으레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리고 경건하지 못한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관세는 지방세로서 갈릴래아에서는 그 지방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차료만 받고 일정한 기간 동안 관세 징수권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임차대 계약에 따라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이 곧 "세관원"인 것입니다. 세관원은 흔히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만 아니라 터무니 없이 관세를 많이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직책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교를 올바르게 믿으려면 세관원직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리고에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강 건너 베레아 지방 간의 교역을 감시하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그 세관의 세관장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자캐오를 불러 그의 집에 묵으시는 파격적 처신에 대해 사람들은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고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회개'와 '자선'을 남달리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묵으시자 자캐오는 회개를 결단하여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로 작심합니다.
특히 자캐오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남을 속여 먹은 것"이라는 즉 직역하면 "남을 등쳐 먹은 것"을 고백합니다. 자캐오는 동포들을 등쳐먹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회개합니다.
유다인들은 회개를 일컬어 "되돌아가다"라고 합니다. 사실 회개란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방향전환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죽은 몸이요 하느님께 되돌아간 몸은 다시 사는 몸입니다. 죄는 죽음을 초래하는 중병이요 회개는 새 삶을 잉태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감동적인 회개의 고백과 자선에의 결연한 의지를 보시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활동하시는 동안 구원을 이룩하셨다고 보았기 때문에 구원의 현재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즉 루카 복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늘" "이 날" "때" "찾아온 때"에 구원이 이룩되었다며 구원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리고의 시민들이 예수님의 파격적인 처신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자캐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만큼 구원의 혜택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반기시며 바리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의 이 기쁨에 마땅히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되찾은 부인의 비유" 및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등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세관장 자캐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구원의 현재성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정치인의 비자금 사건 등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하겠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부끄럽게도 부정과 부패의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우러난 회개와 자기 성찰 없이 남의 눈에 끼어 있는 들보만 갖고 비난하는 불행한 행태는 보통 사람인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정자들의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행태 앞에 "이 땅에 희망이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부정과 부패를 국민 앞에 고백하고, 부정과 부패로 치부한 재산을 국민 앞에 내어 놓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그들은 자캐오처럼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부정과 불의의 유혹 앞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세관원처럼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삶을 지향한다면 우리 곁에 함께 있는 부정과 불의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아온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생전에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 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평생을 자신을 내어 놓은 봉사의 삶을 사신 수녀님은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나와 당신, 그리고 여러분이 함께 가난을 나누면 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 모두 자족(自足)의 삶을 살면서 이웃의 가난과 불행을 나의 가난과 나의 불행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구원에 은혜로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부산의 어느 중소기업 회장께서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수 백억원의 전 재산을 지역사회 인재 양성을 위해 부산대학교에 기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지난 번 태풍으로 인해 당신 집의 대문이 부서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대문을 보수하는 비용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근검절약하며 모은 전 재산을 아낌없이 지역 사회에 기부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의 아름다운 기부를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이란 어떤 삶이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될 수가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특히 집단 이기주의에 찌든 현대 사회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다시금 우리에게 '회개'와 '자선'의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해줍니다. 내가 더 가지기 위해 공동체의 공동선을 희생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형제적 사랑으로 부족한 이웃과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겸손한 마음과 자세를 유지할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넉넉하고 보다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등진 몸과 마음을 되돌려 하느님을 향해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자족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과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눌 때, 구원의 식탁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작은 도구로 사용되어질, 하느님 손에 맡겨진 몽당연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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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벌어집니다. 아니, 나무 위에 걸린 죄인에게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십자가 아래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곳에서, 마치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알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로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나무에 달리는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캐오는 ‘일어서서’(부활하여!) 말합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그리하여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하면, 우리 집에도 구원이 내릴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곧 “얼른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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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주님!
당신은 저를 훤히 아십니다.
교만과 탐욕의 나무 위에 올라 허영과 가식으로 몸을 가리고
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릇된 저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받는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이 가련함도 훤히 아십니다.
바득바득 기어 올라간 교만과 허영에서
얼른 내려와 당신 발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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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예수님과 자캐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세관장이고 부자였던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앞질러 달려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캐오를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
그 구원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회개'를 합니다. 이렇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드러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19,8)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때문에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양심의 가책'과 동족 사람들로부터의 '소외'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캐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한계로 인해 지금 '기뻐 즐거워하지 못하는 삶',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도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없는 나의 결정적인 한계는 무엇인가?
성령의 힘과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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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걸음 또 한 걸음>
루카 19,1-10 (예수님과 자캐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더디더라도 쉼 없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 안으로
그분 들어오시어
단박에 품으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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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많이 읽습니다. 특히 하루에 350페이지를 읽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이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로는 책을 아주 급하게 읽게 됩니다. 이렇게 급하게 빨리 읽다 보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에 다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읽는 데에만 몰두해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이해하려면 잠깐 책을 덮고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책과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성급하게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도 성급하게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 위해서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나의 입장만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이해하는 시간이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8,25 참조) 그런데 부자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은 부자냐 가난이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자캐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만 애썼습니다.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로라하는 부자가 채신머리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면서 자캐오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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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명절 때가 되면 가게 앞에 또 마트에 가도 많은 과일 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커다란 과일 상자에는 과일 몇 개만 달랑 들어있는 것입니다. 과대포장이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상자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과일이기 때문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커다란 상자에 드문드문 담는다는 것입니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사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적당한 틈이 있어야 상처를 받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인간관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당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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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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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참으로(truely)’ 만난 사람들>
-엘아자르, 자캐오, 제르투르다, 나-
‘참’ “참으로’ 제가 자주 사용하는 참 좋은 우리말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은 초기 사막 수도승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참으로 살 때 참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지 못하기에 참으로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살지 못하기에 참으로 기쁨도 감사도 평화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주님이든 사람이든 참으로 진짜 만나지 못하기에 여전히 외롭고 공허하고 목마른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살아도 참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 많듯이 아무리 오래 만나도 참으로 만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평생 살아가는 부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 뒤따릅니다. 주님이든 사람이든 참으로 만날 때 참나를 알게되고 감동과 변화, 순수를 체험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을 연대기순으로 배치하며 나눕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남으로 참으로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첫째, ‘엘아자르’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 하권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 영웅이자 순교자인 성인 엘아자르입니다. 초지일관, 시종일관 살다가 하느님을 위해 영예롭게 순교한 엘아자르의 생애가 참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기에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참 나를 살 수 있었고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변절로 참 자기를 잃고 살아도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 아닌 죽은 삶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자발적 순교의 죽음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엘라자르는 참된 순교자의 모범입니다. 참 사랑에서 참 삶이요 참 순교의 죽음임을, 참으로 죽기 위해 참으로 사랑하며 참으로 사는 것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유언입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90세 노년에 까지 한결같은 삶을 산 성인들을 참 드물 것입니다.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습니다. 후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런 보고 배울 죽음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자캐오’입니다.
어제 주님을 참으로 만나 눈이 열린 눈 먼 사람에 이어 참으로 주님을 만나 마음의 눈이 열린 자캐오의 등장입니다. 앞서 복음의 재산이 많아 주님을 따르는 추종을 거부하고 슬프게 떠난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자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앞서 추종을 거부하고 떠난 부자는 실은 주님을 만났으나 참으로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관상 세관장이자 죄인이자 부자인 자캐오는 내적으로 주님을 갈망했던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편견을 넘어 이런 자캐오의 진면목을 보신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서 자기를 보는 자캐오의 순수한 갈망과 믿음을 한 눈에 알아보셨고 위를 쳐다 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예수님과의 결정적 참 만남의 구원입니다. 즉시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는 회개의 실천을 통해 그가 참으로 주님을 만났음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눔으로 회개의 진정성과 더불어 부자의 구원도 가능함을 입증한 성인 자캐오입니다.
앞서 많은 재산에 슬프게 떠난 부자와는 정반대의 반응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난 자캐오의 감동과 회개의 결행에 이어 예수님 역시 감동으로 화답합니다. 순수와 순수, 감동과 감동의 참 만남에 참 삶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자캐오에 대한 감격에 벅찬 구원선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구원이요 참 삶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셋째, ‘제르투르다’ 성녀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들은 헬프타의 성 마리아 시토회 수녀원의 수녀인 제르투르다 성녀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교회로부터 정식적인 시성식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아 공경을 받았고, 167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모든 교회가 기념일을 지내도록 지시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중세의 신비가, 제르투르다 성녀는 특히 예수 발현 체험을 통해 심오한 내적상태로 들어간 후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적 신랑으로 보고 최초로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실천합니다.
1288년 제르투르다는 합병증을 앓아 병상에 눞게 되고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1302년 11월16일 만46세 나이에, “아! 신랑께서 오신다.” 부르짖으며 선종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녀는 연옥 영혼들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꼈으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촉구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과 온 세상 교회에 있는 죄인들과 내 집안과 내 가정 안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서 드리는 모든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의 가장 값진 피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아멘.”
넷째, ‘나’입니다.
결국 강론의 초점은 오늘 지금 여기 ‘나’로 집중됩니다. 강론을 쓰고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저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 하나하나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해야 하고, 주님을 참으로 만나야 하고, 참으로 회개해야 하고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이 만나도 주님을 참으로 만나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살지 못하면 여전히 공허하고 외롭고 목마른 삶이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나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회개하며 참으로 살 때 성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참으로 만나 참 사랑의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 파스카의 새날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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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카 19,3-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유한 세리 자케오입니다.
군중보다 키가 작은 탓에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자 자케오는 예수님께서 가실 방향을 미리 앞질러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오르지요. 한 도시의 세관장이 연배로 보나 지위로 보나 쉽게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 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케오는 세상적으로도 참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과 이권을 향해 성실하게 달렸겠지요.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보물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성공을 향해 열심히만 달리면 된다고 여기는 어리석고 눈먼 열정가들의 전형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달립니다. 물질이 아닌 사람, 그것도 하느님의 사람을 보려고 달린 일이 과연 그의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이제야 자케오는 물질이 아닌 의미, 육적인 일이 아닌 영적인 일을 향하기 시작한 겁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시고, 친히 그의 집에 머무르시니 자케오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키시지도 요구하시지도 않은 일을 자청해 선언합니다. 자기 삶을 돌이켜서 허물을 기워갚고자 이웃에게 나눔과 보상을 약속하는 겁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 것을 향해 뛰느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해치며 살던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달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발견해 그분과 머무르자 가난한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엽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열심히 살았던 그가 이제야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마음이 가는 방향과 결을 같이하게 된 것이지요. 구원입니다!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 하권은 유다 민족의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의 순교를 다룹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이교 제사 책임자들은 "하는 척만 해도 살려 주겠다"고 그를 회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을 받는 원로 스승인 그의 변절이 이교 문화 수용에 엄청난 기폭제가 될 터였지요. 하지만 그는 잔인한 고문에도 물러서지 않고 고결한 의지를 발휘해 고통을 용감히 견디어 냅니다.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영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찰나의 안위 때문에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거래 불가한 가치이기 때문이지요. 위선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정향하며 살아온 엘아자르는 길을 돌이켜 위선으로 퇴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구원의 방향을 찾은 자케오가 다시는 죄악의 진창으로 되돌아갈 이유도 없는 겁니다.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으니 멈춤 없이 후퇴 없이 그저 충실히 나아갈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얼굴을 보고자 몸과 마음과 영혼이 힘껏 달려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필요하다면 체면일랑 잊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도 좋습니다. 영혼이 사랑하는 주님을 꼭 붙들고 결코 돌아서지 않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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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vHg-2BxQ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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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 6)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이 여정이 멀다.
고운
단풍잎이
먼저 아래로
내려앉는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다.
내려와야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
내려와야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할 수
있다.
부여잡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게된다.
버리지 않고서는
내려올 수 없다.
내려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이다.
내려오니
가야할 길이
보인다.
언제나
회개의 마지막은
예수님께 기쁘게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는
자캐오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오늘의 길을
되찾아준다.
내려와야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져 내려
오셔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이시다.
자캐오 드디어
예수님께로
내려와
내려오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얼른
기쁘게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온 거기에
기쁜 회개가 있고
기쁜 오늘이 있다.
삶의 해답은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변화이다.
단풍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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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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