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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김기림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표정
김기림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표정
오봉옥
1. 들어가며
김기림은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그보다 훌륭한 시인은 이 나라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뛰어난 비평가를 이 나라의 시문학사에서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송욱, 「한국모더니즘 비판」, 『시학평전』, 일조각, 178~179
라거나 “이론적인 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에 비추어 시는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김재홍, 『시와 진실』, 이우출판사, 1984, 99쪽
라고 하여 시인으로서보다는 비평가로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 그의 시라는 것도 외국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기에 바빴지 깊이 있는 작품을 생산해내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김기림이 지향하고자 하였던 모더니즘이 자신의 시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김기림의 시에 드러난 모더니즘의 표정에서 우리가 읽을 수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태양의 풍속』
김기림의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표정으로 들 수 있는 첫 번 째 현상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 새로운 시에 대한 신념과 열망이다. <시론>이라는 작품을 보면 “-여러분-/ 여기는 발달된 활자의 최후의 층계올시다/ 단어의 시체를 짊어지고/ 일본 종이의/ 표백한 얼골 우에/ 꺼꾸러져/ 헐떡이는 활자-// 탁류- 탁류- 탁류-/ 「센티멘탈리즘」의 홍수/ 크다란 어린애 하나가/ 화강 챗죽을 휘둘른다.// 위선자와/ 느렁쟁이- 「어저께」의 시들이여/ 잘 있거라/ 우리들은 어린 아히니/ 「심볼리즘」의/ 장황한 형용사의 줄늘임에서/ 예술의 손을 이끌자// (이건 일즉이 본 일 업는 훌륭한 생물이다)/ 그들은 시의 다리(脚)에서/ 생명의 불을 뿜는다/ 시는 탄다 백도로-/ 빗나는 「푸라티나」의 광선의 불길이다”라고 하여 전 시대의 상징주의와 감상주의의 시와 결별하고 새로운 문학형식과 내용을 창조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작태도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가 과감하게 탈출하고자 하는 센티멘탈리즘의 영역 안에는 ‘단어의 시체’ ‘해골의 무리’ ‘낙태한 태아’ ‘위선자와 느렁쟁이’가 즐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감상의 찌꺼기를 버리고자 하는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김기림이 버리고자 한 감상의 찌꺼기는 자아중심적인 내면적인 감성, 신비적인 감성 등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감성을 낡은 감성이라고 부정하고 새로운 감성 즉 밝고 명랑하고 건강한 감성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그가 맞이하는 시대적 속성을 ‘생명력과 생동감이 넘치는 움직임이 있는 그 자체’로 파악한 것과 괘를 같이 하는 일이었다. 시집 『태양의 풍속』을 보면 이미지즘 계열의 짧은 시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들을 보면 시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갖는 감각적인 인상을 대부분의 경우 밝고 명랑한 정조로 채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에는 일관된 두 개의 원형이미지가 있는데 밤과 낮, 어둠과 밝음이 그것이다. 그가 지양하는 것은 어둠이요, 그가 지향하는 것은 밝음이다. 어둠의 이미지는 시대적으로 전대라 할 수 있고, 밝음의 이미지는 근대라 할 수 있다. 시사적으로는 어둠의 이미지가 낭만주의, 밝음의 이미지가 모더니즘이 된다.
순아.
지난밤 나는 어둠속에서 남몰래
휴지와 같이 꾸겨진 나의 일년을 살그머니 펴보았다.
나의 가슴의 무덤속에서 자는
죽지가 부러진 희망의 시체의 찬등을 어루만지며
일어나보라고 속삭여보았다.
- <분수> 중에서
부끄럼많은 보석장사아가씨
어둠속에서 숨어서야
루비 싸파이어 에메랄드…
그의 보석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집니다
- <밤항구> 전문
어둠 속에는 ‘휴지와 같이 꾸겨진 나의 일년’이 있고, ‘죽지가 부러진 희망의 시체의 찬등’이 있다. 화자는 지금 ‘지난밤’ 속에서 ‘휴지와 같이 꾸겨진’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있고, 그런 세월이 버려야 할 ‘휴지’와 같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는 ‘죽지가 부러진’ ‘시체의 찬등을 어루만지며’ 절망하고 있고, 다시금 ‘일어나보라고 속삭이고’ 있다. 자신에게 불어넣는 이 ‘희망’의 실체가 우리를 더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이 어둠의 이미지로 드러난 것은 지난 세월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 낡은 이미지이다. 밤의 세계라고 해서 모두 어둠의 이미지,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밤항구>는 아름다운 밤의 이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밤항구’는 마치 ‘루비나 사파이어’처럼 빛을 발한다. 멀리서 보면 밤항구의 찬란한 한 폭의 이미지는 ‘보석바구니’처럼 느껴지게도 한다.
김기림의 많은 시들은 어둠의 이미지와 함께 태양의 이미지로 원형심상을 이루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태양의 세계이다. 어둠의 세계는 전쟁과 도살이 있는 죽음의 세계이고 태양의 세계는 자유와 희망이 있는 살림의 세계이다.
태양아
다만한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야 나는두루미의 목통을비러오마.
나의마음의문어진터를 닦고 나는 그우에 너를위한 작은 궁전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속에와서 살어라. 나는 너를 나의어머니 나의고향 나의 사
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쫒아서 이어둠을
깨물어죽이련다.
- <태양의 풍속> 중에서
이 시에는 태양의 원형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태양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두루미의 목통’이라도 빌려오고자 한다. 두루미는 작은 일에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새이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목을 길게 늘이고 있는 새, 한번 퍼덕이면 만리를 간다는 새이다. 지상의 짐들을 털어버리고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이미지를 간직한 새이다. 그런 신령스러운 새의 ‘목통’을 빌려오고자 하는 마음은 ‘너’에 대한 간절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고, ‘너’를 향한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어머니’이자 ‘고향’이자 ‘사랑’이자 ‘희망’이다. 그런 점에서 ‘너’는 자유와 해방이고, 꿈이자 내일이며, 나아갈 길이자 생명이다. ‘어둠’ 속에는 ‘마음의 무너진 터’만 있을 뿐이다. 어차피 무너져야 할 낡은 시대의 잔재만 남아있을 뿐이다. ‘너’를 만나고자 하는 의지, 간절함, 절박함이 베어있는 극적인 표현이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둠을 깨물어 죽이는 너의 풍속이 사납다, 라는 점이다. 이것은 ‘어둠’의 실체가 그만큼 질기다는 것을 반증하고, ‘너’의 실체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내가 찾아야 할 ‘희망’이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김기림의 시는 어둠과 태양의 이미지와 함께 바다의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한다. 『바다와 나비』,『기상도』라는 시집은 바다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며 『태양의 풍속』에서만 해도 여러 작품이 바다의 이미지를 체현하고 있다. 김기림에게 바다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시대와 관계된다.
오월의 바다와 같이 빛나는 창이
아침해에게 웃음을 보내며
무한히 깊은 회화를 두사람은 바꾸고 있다.
하눌은 얼굴에서 어둠을 씻고
지중해를 굽어본다. 푸른 밑없는 거울…
(중 략)
태평양횡단의기선 「엠프레쓰 ․ 어브 ․ 에이샤」호가
금방 커다란희망과같은 깃발을 흔들며 부두를 떠났다.
바로 午前八시삼십분…
- <출발> 중에서
여기에서 ‘바다’는 ‘오전’, ‘아침해’, ‘하눌’, ‘깃발’과 관계되어 있다. 이 시에서 어둡고 우울한 정조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밝고 건강한 정조만이 넘칠 뿐 ‘낡은 감성’으로 이루어진 정조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 ‘오전’은 새롭고 싱싱한 것, 신선하고 활발한 것, 대담하고 명랑한 것이다. 그는 이미 「오전의 시론」에서 오후처럼 빛바랜 시가 아니라 오전처럼 힘차고 건강한 시를 써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가 볼 때 이전의 시들은 어둡고, 답답하고, 낡고, 곤혹스럽고 피곤으로 가득했기에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출발’은 ‘오전’이어야 하고, ‘아침해’가 덩실 떠오르는 순간이어야 하고,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곳이라야 한다. 그에게 ‘출발’은 ‘바다’여야 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바다여야만 한다. 거기에 ‘커다란 희망’이 있고, ‘지중해를 굽어보는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김기림의 시에는 도시문명을 예찬한 작품이 많이 있다. 모더니스트로서의 김기림에게 도시문명은 외면할레야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그는 도시문명에 의식적으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근대화라 믿었고, 근대화란 의심할 바 없이 서구문명의 신속한 도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도시문명을 예찬만 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현대시의 과제로 자본주의 사회의 퇴폐적 양상, 즉 도시문명의 비판에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도시문명이 가져올 긍정적 선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모더니티가 생활자체의 변화를 통해 이전보다 나은 삶, 자기완성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시간의 궤도우를 미끄러저달리는 차라리
방만한운명이다. 나는…
나의발바닥밑의
태양의 느림을 비웃는 두칼날…
나는얼음판우에서
전혀奔放한 한速度의 騎士다
- <스케이팅> 중에서
속도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근대적 삶에 대한 묘한 긴장이다.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팅’을 타고 있는 ‘나’는 속도의 쾌감을 느끼면서 ‘태양의 느림을 비웃기도’ 하지만 ‘얼음판’ 위를 달리기 때문에 동시에 위기감도 느껴야 한다. 그 위기감은 시적 자아의 운명이 ‘방만’하다고 느끼고, ‘분방’하다고 느끼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얼음판’ 위에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지만 일정한 속도가 붙은 뒤에는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속도의 시대에 ‘시간의 궤도’ 위를 달리는 ‘나’는 근대적 자아이다. 근대적 자아의 삶은 ‘분방’하고 ‘방만’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열을 수반한다. 거기엔 역동성과 함께 퇴폐성이 있다.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팅’을 타고 있는 ‘나’를 보며 묘한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거기에서 기인한다.
3. 나오며
근대의 자각과 관련되어 있는 대표적인 문학 양식이 모더니즘 문학이라고 한다면, 김기림은 그것에 대해 거의 최초로 이론적으로 자각한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다.
김기림은 기계문명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 그 감각을 살리고자 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으로 향락적이며 퇴폐적 요소를 들고 그것을 척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자연발생적인 작법을 배제하고 주지적 태도로 시를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연발생적인 주정토로로서의 문학은 주관적 감상에 치우친 나머지 애상, 비탄, 울분, 절망, 단념 등 필요 이상의 과장과 표정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시작품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했으며, 주지주의적 시세계를 형성할 때만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문명을 반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한 그가 기계문명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기계문명의 부정적인 면을 바라보면서 인간성 회복, 새로운 휴머니즘을 주장하게 된다. 그가 지성과 인간성을 종합할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풍자였다. 풍자를 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동원해야 하고,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냉철하게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에 두고 쓴 것이 『기상도』이다.
이와 같이 김기림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풍경에는 도시문명의 예찬과 함께 비판이 들어가 있다. 모더니티가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자기 비판을 포함한 것이라면 이런 도시문명의 예찬과 비판의 이중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