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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기존의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내세운 방편들이 도리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단계적 수행을 통하지 않고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가도록 하려는 새로운 불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 이유는 공부하는 학인들이 방편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여 알고 있으나, 방편을 떠난 깨달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과 실천수행이라는 두 가지 방편은 분별로써 헤아려 이해할 수 있으므로, 분별망상 속에 있는 범부 중생들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분별을 벗어난 것이므로 범부중생들은 전혀 알 수 없다.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의지할 수도 집착할 수도 없지만, 잘 아는 것에 대해서는 의지하고 집착하기 쉽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학인들은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과 부처님이 시키신 실천수행에만 집착하게 되는데, 도리어 이러한 집착이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이다.
선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즉심시불: 깨달음은 마음의 일이다.
2. 견성성불: 모습이 아니라 불이의 법성을 본다.
3. 직지인심: 분별을 배제하고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
4. 도불용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5. 언하돈오: 선지식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다.
이제 이 다섯 가지 특지에 대한 선사들의 언급을 모아서 보고자 한다. 대혜종고가 임제종의 계보에 속하기 때문에, 중국 선종의 실질적 창시자인 육조혜능으로부터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현까지, 이른바 선의 황금시대를 구가한 선사들의 어록에서 주로 살펴볼 것이고, 또 [대혜어록]에서도 같은 내용이 등장함을 소개할 것이다.
어리석음이든 깨달음이든 모두 마음의 일이다. 마음 스스로가 마음 스스로를 깨달으니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 스스로가 마음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면 마음은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 부처이다.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이고, 부처가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온 세계는 다만 한 개 마음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모두 자기의 마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육조 혜능[육조대사법보단경]
"그러므로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삼라만상은 마음 하나가 찍어내는 것이다. 무릇 색을 본다는 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은 저 홀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이 된다. --- 만약 이 뜻을 깨달으면 언제나 옷입고 밥 먹고 성태를 키우면서 인연 따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 마조도일[사가어록, 마조어록]
"모든 법은 오직 한 개 마음이다." -황벽희운[사가어록, 전심법요]
"그대들이 다만 지금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대들의 한 순간 마음이 삼계를 낳고, 인연 따라 나누어져 육진경계가 된다.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임제의현[사가어록, 임제어록]
"그대들은 밥통과 똥자루를 짊어지고 밖으로 달려나가며 부처를 찾고 법을 구하는데, 오히려 지금 이와 같이 치달리며 구하는 것, 이것을 그대들은 아느냐?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나 뿌리도 줄기도 없으며, 껴안아도 모아지지 않고 펴쳐도 흩어지지 않으며,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어서 신령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사람이 이것을 믿지 않으면 백년을 애쓰더라도 헛수고만 할 뿐이다." -임제의현(사가어록 임제어록)
"이른바 전한다는 법은 곧 마음법입니다. 마음법에는 전할 만한 모양이 없으니, 앞서 말한 '내가 깨닫고 그대가 깨닫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피차가 깨닫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취한다면, 전해 줄 수 있는 현묘하고 기특한 종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곧 나는 알지만 그대는 알지 못한다는 경박한 생각을 내는 일이 있어서, 아견을 키우게 될 것이니, 이들이 바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불쌍한 자입니다."-대혜종고(대혜보각선사법어)
"밖으로 모습에 집착하면 안의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모습을 벗어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육조혜능(육조대사법보단경)
"그대는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좌불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통하지 못한다."- 남악회양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한 물건도 머물러 두지 않고 또 허공이라는 모습도 없다." - 백장회해
"만약 부처를 보고 깨끗하고 바로 해탈했다는 모습을 만들고, 중생을 보고 더럽고 어둡고 삶과 죽음에 매여 있다는 모습을 만든다면, 이러한 견해를 만드는 자는 강바닥의 모래알 같은 세월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니, 모습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황벽희운
모든 모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므로, 모든 모습은 허망하다.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보면 본래 모습 없는 마음을 보는 것이니,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본다는 것은 무슨말인가?
모습을 모습을 모습으로 보면 분별하는 것이고, 모습을 모습 아니게 보면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면 둘로 나누는 것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본래 하나이다. 본래 하나인 마음을 '상'과 '성'으로 나누어 말하니, 비유하면 '상'은 물결을 보는 것이고, '성'은 물을 보는 것이지만, 물결과 물은 둘이 아니다.
"예전에 주세영이 편지로 운암진정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불법은 지극히 묘한데,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탐구해야 합니까? 자비로써 가리켜 주시옵소서.'진정 스님이 말했습니다.
'불법은 지극히 묘하여 둘이 없다. 다만 아직 묘한 곳에 이르지 못했다면 서로 길고 짧음이 있다. 진실로 묘한 곳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니, 자신의 마음이 마지막 진실이고 본래부터 깨달아 있음을 진실하게 알 것이고, 진실하게 자재할 것이고 진실하게 안락할 것이고, 진실하게 해탈할 것이고, 진실하게 깨끗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직 자기의 마음을 쓸 뿐이니, 자기 마음의 변화를 붙잡으면 바로 쓸 뿐, 옳고 그름은 묻지 마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사량하면 옳지 않게 된다." - 대혜종고
"본래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으니, 텅 비어 통하고 고요하면서 밝고 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깊으면 저절로 깨달아 들어가니 곧장 바로 이것이다. 모자람 없이 다 갖추고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록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윈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황벽희
"다만 양쪽으로 분별되는 말을 끊기만 하라. 있다는 말과 있지 않다는 말을 끊고, 없다는 말과 없지 않다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는 양쪽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숫자로 헤아리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도 아니고 만족함도 아니며, 범부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며,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며, 얽매여 있음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어떤 이름도 아니다." -백장회해
선의 가르침이든 불교의 가르침이든 어떤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선이든 불교든 다만 허망한 분별에 얽매인 중생을 그 얽매임에서 풀어 주는 방편일 뿐이다. 얽매인 마으을 풀어 주는 선의 방편을, 이해를 위하여 편의상 구분하면, 분별을 가로막고 부수어서 분별망상에 머루지 못하도록 하는 측면과 곧장 마음을 가리킴으로써 망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도록 이끄는 측면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선사들이 어떻게 말하고 사용했는지를 살펴본다.
"모든 법을 말하면서 자성에서 벗어나지 말라.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법을 묻는다면, 말을 하되 모두 짝을 이루게 하여 대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마침내 두 대법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다시는 갈 곳이 없게 하라." -육조혜능
"무릇 가르침의 말은 모두 삼구로 서로 이어져 있다. 삼구라 초선. 중선. 후선이다. 처음에는 곧바로 그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여야 하고, 다음에는 그 좋은 마음을 부수게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좋은 것이라고 한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 이름이 보살이다.'라든가, '법은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는 말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단지 일구만 말한다면, 중생을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삼구를 한꺼번에 말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부처님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 지금 비추어 보는 것이 곧 자기의 부처라는 데까지 말하면, 이것은 초선이다. 지금 비추어 보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이것은 중선이다. 머물러 있지 않다는 알음알이도 만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후선이다." -백장회해
약산유엄 선사가 처음 석두를 찾아가서는 바로 물었다.
"삼승십이분교는 제가 대략 압니다. 그런데 남방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늘 듣고는 있습니다만,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가리켜 주십시오."
석두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이렇게 하고 또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 안 된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사가어록 마조어록]
제이대 덕산이 수시하여 말했다.
"말을 해도 30방 맞아야 하고, 말을 하지 못해도 30방 맞아야한다." [천성광등록 제10권 '진주임제의현혜조선사']
*수시: 선사가 수행인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러므로 나는 방장실에서 늘 선객들에게 묻는다. '죽비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 말을 해도 안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생각을 해도 안 되고, 헤아려 보아도 안 되고, 소매를 떨치고 곧장 가 버려도 안 되고, 어떻게 하든지 하면 안 된다.'그대들이 곧 죽비를 빼앗아 버리면 나는 우선 그대들이 죽비를 빼앗도록 내버려둔다.
내가 주먹이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주먹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이 어떻게 빼앗겠느냐?
다시 그대들이 '스님 내려놓으십시오.'하고 말한다면, 나는 우선 내려놓는다. 내가 노주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노주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은 또 어떻게 빼앗겠는가? 내가 산하대지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산하대지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은 또 어떻게 빼앗겠는가?" -대혜종고[대혜보각선사보설 제16권, 부경간이 청한 보설]
*노주: 법당이나 불전의 노출된 둥근 기둥을 가리킨다.
누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백장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접니다."
"그대는 나를 아느냐?"
"분명히 압니다."
백장이 불자를 세우고 물었다.
"그대는 불자를 보느냐?"
"봅니다."
백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가어록, 백장어록]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스님께선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오등회원 제4권 '조주관음원종심선사']
조주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저는 총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죽은 먹었느냐?"
"다 먹었습니다."
"발우를 씻어라."
그 승려는 문득 깨달았다. [ 오등회원 제4권 '조주관음원종심선사']
오조가 문인들에게 각자 자신의 공부를 내보이라고 하였을 때에 신수가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 {[육조대사법보단경], [단경] 돈황본, [경덕전등록]}
신수의 이 게송에 대하여 혜능이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첫 번째 깨달음>
나는 17년 동안 공부하면서, 일찍이 자질구레한 깨달음도 있었고, 운문의 문하에서도 이해한 바가 조금 있었고, 조동의 문하에서도 이해한 바가 조금 있었지만,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뒤에 서울의 천녕사에서 노스님(원오 선사)께서 상당하여 설법하셨다.
"어떤 승려가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입니까?' 하고 묻자, 운문은 말하길 '동산이 물 위로 간다.'라고 하였다. 만약 나라면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이냐?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전각이 조금 시원하구나."
나는 이 말을 듣자 문득 앞뒤의 시간이 끊어졌다. 비유하자면 마치 한 타래 엉킨 실뭉치를 칼로써 한 번에 몽땅 잘라 버린 것과 같았다. 그 당시 온몸에 땀이 솟았다. 비록 그렇지만, 활동하는 모습은 생기지 않고 도리어 개끗이 벗어난 곳에 머물러 있었다.
[대혜보각선사서] 제 29권 '46. 향시랑 백공에 대한 답서'에서 첫 번째 깨달음에 대한 체험을 서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 역시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원오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오 선사는 다만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만, 그만하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
" 제가 아직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하신 것에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비난하신 것을 감히 범하지 않으며, 이전에 스님들에게 의지하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또렷하게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서 잠이 들락말락할 때에 벌써 주재하지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보면 꿈속에서 기뻐함이 한이 없고, 꿈에 사라이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속에서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이 몸은 오히려 멀쩡하게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 벌써 주재할 수 없으니,
하물며 죽음에 임하여 육체를 구성하는 지수화풍이 흩어지며 여러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며 바야흐로 마음이 허등지둥 바빠집니다."
원오 선사께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여러 가지 망상들이 끊어지 때, 너는 저절로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
하루는 방장실에 들어갔는데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런 경지에 이른 것도 물론 쉽지는않지만, 그대는 죽어 버리고 살아날 줄 모르니 안타깝구나.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큰 병이다. 듣지도 못했느냐?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아,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여, 죽었다가 다시 살이난다면, 그대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런 도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나는 혼자 말했다.
"나는 다만 지금 얻은 곳에 의지하여 편하게 지낼 뿐, 다시 깨닫지는 못하고 있구나."
노스님께선 다시 나를 택목료(:절을방문한 관리들이 머물며 쉬는 집)에 머물게 하시고, 자잘한 시자의 일은 시키지는 않으셨다. 매일 사대부들과 함께 서너 번 입실하였는데, 노스님께선 "있다는 구절과 없다는 구절은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입을 열자마자 노스님께선 곧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반년 동안 나는 단지 이와 같이 참하였다.
하루는 방장실에서 약석(: 저녁 밥)을 먹을 때에, 나는 젓가락을 손에 쥐고 있을 뿐 먹을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자는 황양목선(: 황양목은 회양목으로 자라는 것이 극히 느려서 1년에 손가락 한 마디 길이도 자라지 않다가, 도리어 윤년에는 한 마디 정도가 줄어든다고 한다.그래서 해탈한 자리에 머물러서 공부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을 비유)에 참여하더니 도리어 움츠러들어 버렸구나."
하루는 노스님께 물었다.
"스님께서 그때 오조산에서 오조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질문하셨던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조 스님은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노스님께서 이에 말씀하셨다.
"내가 '있다는 구절과 없다는 구절이 마치 등나무가 나뭇가지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을 때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오조께서 말씀하셨다. '말해도 말이 되지 않고, 그려도 그림이 되지 않는다.' 내가 다시 물었다. '문득 나무가 넘어져 등나무가 말라죽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오조께서 말씀하셨다. '서로 뒤따른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말자 곧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제가 알았습니다."
노스님이 말씀하셨다.
"다만 그대가 공안을 아직 뚫고 벗어나지 못했을까 봐 걱정이다."
"스님께서 한 번 공안을 말씀해 보십시오."
노스님께선 이에 연달아 몇몇 까다롭고 난해한 공안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마치 태평하여 일 없는 때에 길에 들어서 곧장 가는 것과 같이 다시는 막힘이 없었다.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속일 수 없음을 이제 비로소 알겠구나."
세 번째 깨달음
(남아있던 장벽)
앙굴마라와 임산부 공안
세존께서 앙굴마라를 시켜 바루를 들고 어떤 장자의 집으로 찾아가도록 하셨다. 그 집 부인이 마침 산고를 겪고 있었는데, 장자가 말했다.
"고오타마의 제자시여! 당신은 위대한 성자이시니 마땅히 어떤 법을 가지고 산고의 어려움을 면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앙굴마라는 말했다.
"저는 금방 입도하였으니 아직 이 법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돌아가 세존께 여쭈어 보고 다시 돌아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앙굴마라가 돌아와 부처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 앙굴마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속히 가서 이렇게 말하거라. '나는 성인의 법을 따른 이래로 아직 살생을 한 적이 없다.'"
앙굴마라는 곧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집으로 가서 그대로 말했다. 그 부인은 그 말을 듣더니 곧 산고의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담당문준 스님은 대혜 스님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앙굴마라가 '저는 금방 입도 하였으니 아직 이 법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돌아가 세존께 여쭈어 보고 다시 돌아와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앙굴마라가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어쩔 거냐?
또 부처님께서 '나는 성인의 법을 따른 이래로 아직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앙굴마라가 이 말씀을 가지고 그 장자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어쩔 거냐?"
( 여기에 김태완 선생님의 해설을 옮기면)
'비록 유구무구의 방편을 통하여 깨달아 불이중도에 들어갔지만, 오래 전부터 의문 속에 남아 있었던 하나의 공안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문득 불이중도에 들어오지만, 불이중도에 익숙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혜가 [능엄경]에 나오는 구절인 "'이'라면 문득 깨닫고 깨달음과 더불어 사라지지만, '사'는 문득 제거되지 않고 차례차례 사라진다."를 인용하여 말했듯이, 한 번의 깨달음으로 문득 본래면목이 드러나지만, 본래면목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 온갖 인연에서 세밀하고도 밝게 본래면목을 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공안과 담당의 방편은 대혜에게 여전히 명쾌하게 풀리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뒷날 호구에서 [화엄경]을 보다가 보살이 제7지에 올라 무생법인을 깨달은 곳에 이르자 이런 말이 있었다.
"...이 보살도 마찬가지로 부동지에 머물면 모든 공용(: 몸, 입, 뜻으로 하는 행위.유위행)하는 행위를 버리고 공용 없는 법을 얻어 신구의 삼업을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모두 쉬어지고 보행(: 과보로 이루어지는 행위)에 머문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큰 강물 속에 떨어져서 그 강을 건너기 위해 큰 용맹을 내고 큰 방편을 베풀었는데, 이 큰 용맹과 베푼 방편 덕분에 곧 꿈에서 깨어나지만, 깨어난 뒤에는 행한 일이 모두 쉬어지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중생이 사류(:사폭류, 폭류는 홍수가 나무, 가옥 따위를 떠내려보내는 것처럼 선을 떠내려 보낸다는 뜻에서 번뇌를 가리킨다.) 속에 떨어져 있음을 보고는 구해 내기 위해 큰 용맹을 내고 큰 정진을 일으키는데, 용맹과 정진 덕분에 이 부동지에 도달하고, 이 곳에 도달한 뒤에는 모든 공용이 모조리 쉬어지고, 이행(:번뇌장과 소지장의 둘이 나타나 행해지는 것)과 상행(신,구,의, 삼업의 모습을 가진 행위)이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이 보살에게는 보살의 마음도, 부처의 마음도, 깨달음의 마음도, 열반의 마음도 오히려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세간의 마음이 나타나겠느냐?
대혜가 말했다.
"여기에 이르자 문득 장애가 사라지고, 담당 스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셨던 방편이 문득 앞에 드러났으니, 비로소 참된 선지식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던 것이다. 참된 금강권이란 바로 장식임이 밝혀져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1. 깨달아야 한다.
"'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다. 만약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수행한다면, 이것은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유마힐소설경, 불사의품 제6]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벗어나 다시 무엇을 일러 법이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그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다만 직접 증험하고 직접 깨달아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증험하고 깨달은 사람이라면, 털끌 하나만 집어 들어도 온 세계가 일시에 분명해진다. [대혜보각선사보설 제17권 12. 전계의가 청한 보설]
"암두가 말했습니다. '뒷날 큰 가르침을 펼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하나 자기의 가슴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어야 비로소 대장부가 하는 일인 것이다.' 암두의 이 말은 설봉의 근기를 밝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도를 배우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본보기가 될 만합니다. … 이 일은 총명하고 영리함에 좌우되지도 않고 또한 둔하고 배운 것 없음에 좌우되지도 않스비다. 진실을 말하자면, 다만 단번에 확 깨닫는 것을 표준으로 삼을 뿐입니다. 이 소식을 얻기만 하면, 말을 할 때마다 참됨을 떠나 서 있는 곳이 없고, 서 있는 곳이 참됩니다. 이른바 가슴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을 뿐이고, 말을 하여 기특함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2권.22 증기의에게 보임]
"솜씨를 내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우지끈 꺾어지고 뚝 끊어져야, 비로소 생사에 맞설 수 있습니다. 솜씨를 자랑하여서야 어떻게 끝날 기약이 있겠습니까?"[대혜보각선사보설 제14권 3. 황덕용이 청한 보설]
2. 깨달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대들이 진실하게 공부하려고 한다면, 다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문득 이 한생각이 부서지게 되면, 부처님도 그대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대혜보각선사보설 제13권 1.설봉에서 보리회 만들 때의 보설]
" 이 일을 반드시 끝내고자 한다면, 마땅히 지금까지의 총명함, 도리를 말함, 문자언어로 기억해 둠, 심의식 안에서 두루 헤아림 등을 다른 세계로 날려 버리고,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놓아두지 말고 깨끗이 쓸어버린 뒤에, 심의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십시오. 만약 한 걸음 나아간다면, 곧 선재동자가 보현의 털구멍 세계 속에서 한 걸음 나아가 말할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의 세계와 티끌처럼 많은 세계를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2권 18. 묘심거사에게 보임]
"피할 수 없는 곳을 딱 마주치면,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점검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회피할 수 없을 때에 다시 마음으로 헤아리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으니, 이해가 날카로울 필요도 없고 이해가 무딜 필요도 없습니다. 날카롭고 무딘 일과도 전혀 상관이 없고, 고요하고 시끄러운 일과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회피할 수 없을 바로 그때에 문득 가로막고 있던 장애가 사라져 버리며,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을 것입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대혜보각선사서 제26권 18. 진소경 계임에 대한 답서]
"만약 마음을 쏟을 수도 없고 더듬어 찾을 수도 없어서 심의식(:헤아려 생각한다는 뜻)이 전혀 가지 않아서 마치 흙, 나무, 기와조각, 돌멩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때에 공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바로 자신이 목숨을 버릴 곳입니다. 부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대혜보각선사서 제29권 41.왕교수 대수에 대한 답서]
3. 깨달으면 어떤가?
"어떤 때에는 한 줄기 풀을 집어서 장육금신(:일장 육척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의 신장, 불법을 가리킨다)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장육금신을 가지고 다시 한 줄기 풀을 만드는 묘용이 있습니다. 건립하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고, 쓸어버리는 것도 나에게 있고, 도리를 말하는 것도 나에게 있고, 도리를 말하지 않는 것도 나에게 있으니, 내가 법왕이 되어서 법에서 자재합니다. 말을 하면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으나, 말을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자재하게 디면, 어디에 가든 스스로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대혜보각선사법어 제19권 2. 동봉거사에게 보임]
"제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 셋이 있으니, 첫째는 일을 함에는 막히거나 순조롭거나에 상관없이 인연을 따라 응하되 마음속에 남겨 두지 않음이요, 둘째는 오래되어서 두터운 습기를 버리거나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가볍고 작아짐이요, 셋째는 옛사람의 공안이 전에는 막막하였는데 요사이 다시 살펴보니 이것이 본래 어두운 것이 아니었습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5권 10. 이참정 한로가 묻는 편지]
"인연 따라 비워 가서 뜻대로 자유롭습니까?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행동거지에서 잡다하고 피곤한 번뇌에 굴복하지는 않습니까? 잠과 깸의 양쪽에서 한결같을 수 있습니까? 이전처럼 생활하는 곳에서 원래의 모습을 바꾸지는 않았습니까? 생사심을 이어 가지는 않습니까?"[대혜보각선사법어 제25권11. 이참정 한로에 대한 답서]
4. 잘못된 깨달음을 피하라
① 견해를 내면 시비분별에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곧 나는 알지만 그대는 알지 못한다는 경박한 생각을 내는 일이 있어서 아견을 키우게 될 것이니, 이들이 바로 여래께서 말슴하신 불쌍한 자입니다.
② 버리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라.
비록 그러하지만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생각하여 분별하는 곳, 일상생활에서 인연에 응하는 곳을 결코 내버려서는 안 됩니다. 문득 눈이 열리면 전부 자기 집 속의 일입니다.
③ 편안한 곳에 빠져 있지 말라.
반드시 물 위에 떠있는 조롱박처럼 빙글빙글 자유자재하여 구속받지 않고, 깨끗함에도 들어가고 더러움에도 들어가면서 가로막히지도 않고 빠져들지도 않아야, 비로소 납승의 문하에 조금 가까울 몫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울지 않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듯이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④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
양좌주는 강철 덩어리로 이루어지고 무쇠를 녹여 부어 만들어진 사람이었기에, 온통 딱 들어맞아서 곧 불교의 방편설이라는 현묘한 소굴에서 벗어나 즉시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고, 깨달을 만한 법도 없고 도리를 깨닫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⑤ 따로 얻을 것은 없다.
다시 특별한 도리가 있습니까? 만약 다시 다른 것이 있다면, 도리어 일찍이 풀려 버리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다만 부처될 줄만 알면 그만이지, 부처가 말할 줄 모를까 봐 근심하지는 마십시오.
⑥ 일부러 하는 일이 아니다.
만약 일부러 한다면, 남에게 줄 진실한 법이 있게 될 것입니다. 공이 대법에 밝기를 바라고 시시각가 막힘이 없기를 바란다면, 단지 예전처럼 하시되 남에게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오래 지나면 저절로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⑦ 생각함도 아니고 잊어버림도 아니다.
생각하면 생각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닐 것이고, 잊어버리면 깜깜하고 멍청한 것에 빠지게 됩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면, 선이 선이 아니요, 악이 악이 아닙니다. 만약 이와 같이 깨닫는다면, 생사의 마귀가 어느 곳에서 찾아내겠습니까?
"저는 원래 한 글자도 쓴 적이 없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것과, 밤에는 어둡고 낮에는 밝은 것과, 안과 밖과 중간과 동서남북이 원래 털끝만큼도 바뀌거나 많아지거나 적어진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선종에서는 언구가 없고, 남에게 줄 한 법도 없습니다.
이미 남에게 줄 한 법도 없다면, 지금 쓰고 있는 글은 무슨 말입니까?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것과, 안과 밖과 중간은 또 무엇입니까? 동서남북이 일찍이 털끝만큼도 바뀐 적이 없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떽끼!
있음도 있을 수 없고, 없음도 있을 수 없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움도 있을 수 없고, 안과 밖과 중간도 있을 수 없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있을 수 없고, 털끝 하나도 있을 수 없고, 순원도 있을 수 없고, 저도 있을 수 없고, 있을 수 없음도 있을 수 없으니, 있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있습니다."
"이 도리는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멀다 하여도 자기 눈 속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눈을 열면 바로 말하고 입을 다물어도 이미 스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계합하려 한다면, 벌써 십만 팔천 리나 어긋나 버립니다. 그대가 쓸 마음이 진실로 없는 곳, 여기가 수월한 곳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절로 길은 묻지 않고, 참된 달을 보았으면 저절ㄹ 손가락은 보지 않습니다. 정명(:유마힐)이 말했습니다. '뜻에 의지하지 않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궁극적 진리를 분명하게 말한 경전)에 의지하고 불료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유마힐소설경, 법공양품 제13] 부처님께서는 다만 말에 의지하여 뜻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뜻에 의지하여 말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선가의 천차만별한 여러 말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0권 진여도인에게 보임]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이니, 모든 불교의 말씀은 깨달음을 가르치는 방편의 말씀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본래 있는 진여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건강이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병이 치유되면 스스로 건강해지는 것과 같다. 중생에게는 분별망상이라는 병이 있는데 부처님이 처방하시 방편이라는 약을 써서 분별망상의 병을 치료하면 중생은 본래 중생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록에 있는 모든 조사들과 선사들의 가르침이 전부 방편이다. 물론 지금의 이 말도 방편이다. 모든 말씀이 방편이니, 어떤 말도 진실은 아니다.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은 잊듯이, 깨달으면 말씀은 잊어버린다. 모든 말씀은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이 질문들 가운데 "깨어 있는 때와 잠잘 때에 한결 같은가?"라는 오매일여라는 말은 대혜르 참된 깨달음으로 이끈 방편이었다. 담당이 말하기를 "내가 방장 속에서 너에게 말할 때에는 곧 선이 있다가도 방장을 나오자마자 곧 없어져 버리고, 깨어서 생각할 때에는 곧 선이 있다가도 잠이 들자마자 곧 없어져 버린다."고 하였는데, 대혜는 여기에서 벽에 부딪힌 것이다. 선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혜를 이처럼 극복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담당의 방편이었다.
깨어있을 때와 잠잘 때에 한결같다는 말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세 무리가 있다.
한 무리는 한결같다고 할 만한 무엇이 있어서 깨어 있을 때에도 그것이 변함없고 또렷이 의식되고 있으며, 잠잘 때에도 변함없이 또렷이 의식이 되어서 결코 끊어지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 순간도 의식을 놓지 않는 것으로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라고 하면서 이런 것을 일러 오매일여라고 한다. 이들은 방편을 진실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며, 단상이변에서 상변쪽으로 치우친 외도들이다.
다른 한 무리는 늘 정신을 바짝 차려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주인공 노릇하는 것을 공부로 삼아, 깨어 있을 때에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처럼 잠자면서도 역시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주인공 노릇하면서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곧 마음공부라고 여기고, 경계를 물리쳐야 할 삿된 망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 아공법공을 모르고 주인공이라는 '상'을 만들어 집착하니 '아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한 무리는 말하기를, 우리의 마음은 허공과 같고 의식은 햇빛과 같은데 해가 떠올라 햇빛이 허공 속에 빛나 삼라만상을 밝게 비출때에도 허공은 밝은 적이 없고, 해가 져서 삼라만상이 어둠 속에 묻혀도 허공은 어두운 적이 없는 것처럼, 깨어 있을 때에 의식이 밝아도 마음은 밝은 적ㅇ 없고 잠잘 때에 의식이 어두워도 마음은 어두운 적이 없이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을축년에 이르러 노화상께서 도량에서 괘패(: 행지의 내용, 배역명, 전달 사항 등을 쓴 패를 거는 것)를 할 때에 다시 곁에서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게 되었는데, 천녕으로 가는 도중에 저에게 질문하셨습니다.
"하루 중 떠들썩할 때에 주인공이 되느냐?"
제가 답했습니다.
"주인공이 됩니다."
화상이 다시 물었습니다.
"잘 때에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주인공이 됩니다."
제가 답했습니다.
화상이 다시 물었습니다.
"잠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을 때에 주인공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이르자 곧장 대답할 말이 없었고, 펼칠 도리가 없었습니다.
화상께서 다시 부탁하였습니다.
"오늘 이후로 너는 불교를 배우지도 말고 법을 배우지도 말고 옛날과 오늘을 따져 보지도 말아라.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되,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라. 내가 한잠자면 주인공은 결국 어디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있는가?"
나는 스스로 맹서하였습니다.
'일생을 내버리고 한낱 바보가 되더라도 반드시 이 하나를 명백히 보고야 말 것이다.'
5년이 지나 하루는 암자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 바로 이 일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함께 자던 도우가 밀어낸 목침이 땅에 떨어져 소리를 냈는데, 갑자기 의심 덩어리가 부서지면서 마치 그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하였습니다.[고봉화상선요, 통앙산노화상의사서에서]
부처님은 큰 자비와 간절한 노파심으로 모든 법계를 전부 안립해 놓은 바다 속의 티끌 속으로 두루 들어가,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몽자재법문을 가지고 세계가 늘어서 있는 바다 속의 티끌 수만큼 많은 중생이 삿된 선정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일깨워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곳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것을 또한 거꾸로 된 중생들에게 두루 보여 주어, 눈앞에 실제로 있는 경계를 안립된 바다로 여겨서 꿈과 꿈아님이 모두 환상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꿈이 곧 실제이고 모든 실제가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인에게는 꿈이 없다는 뜻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대혜보가선사서, 제29권46. 향시랑 백공에 대한 답서]
"한결같이 눈을 감고는 죽은 사람처럼 앉아서 '고요히 앉는다(정좌)'느니 '마음을 본다(관심)'느니 '묵묵히 비춘다(묵조)'느니 , 하고 말하며서 다시 이러한 삿된 견해로써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기를 '하루 고요하게 지내면 곧 하루 공부를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들 모두가 귀신 집안의 살림살이인 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대혜보각선산법어 제20권6, 진여도인에게 보임]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적음과 많음, 얻음과 잃음,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한꺼번에 묶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많음도 아니고 적음도 아니며 고요함도 아니고 시끄러움도 아니며 얻음도 아니고 잃음도 아닌 바로 그곳에서 '무엇인가'하고 잠시 자신에게 일깨워 보십시오."[대혜보각선사서 제27권 23. 유통판 언충에 대한 답서]
이들에게 육조나 마조나 백장 등 기라성 같은 여러 선지식들이 한마디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달은 이야기를 해 주면, 이들은 말하기를 그러한 선지식들은 전생에 수행한 공덕으로 그렇게 쉽사리 깨닫는 것이니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이처럼 스스로 하근기로 여기면서 깨달음을 얻겠다고 공부를 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커다란 병이라는 말도 듣지 못했는가? 잘못된 수행을 익히면 종이에 기름이 밴 것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다는 옛 선지식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할 것이다.
깨달으면 깨달음이라 할 무엇도 없고, 어떤 도리도 없고, 얻는 지식도 없고, 할 말도 없다. 깨달으면 저절로 모든 장애가 사라져서 어디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이 자유롭다. 깨달으면 저절로 모든 경우에 깨달음이 실현되어 깨달음과 깨달음 아님의 차별이 없다.[김태완]
만약 안락한 곳을 아직 얻지 못했다면, 한결같이 지견을 찾고 이해하여 알려고 할 것이지만, 이러한 잡다한 독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밀가루에 기름이 밴 것처럼 영원히 빼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빼낼 수 있다 하더라도, 역시 처리하는데 힘이 들 것이다. 이 일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과 같아서 원래 장애가 없는데, 도리어 이러한 사소한 독에 가로막히는 까닭에 법에 자재하지 못한 것이다.[대혜보각선사보설 제17권 10, 예시자 단칠이 청한 보설]
요즘의 불법은 애처롭게도 마는 강하고 법은 약하다, 선객들은 모두들 하나씩의 두피선(:많이 보고 듣고 기억한 선어록과 불교 경서를 바탕으로 고칙공안을 생각으로 헤아리고 해석하는 것)을 가지고, 이르는 곳마다 마치 풀밭에서 풀 알아내기 시합을 하는 것 같으니, 나귀해가 되어야쉴 것인가? [대혜보각선사보설 제13권2,정광대사가 청한 보설]
사량분별이 도를 가로막는 것이 분명함을 참으로 알아야 합니다.[대헤보각선사서 제27궈 27, 장제형 양숙에 대한 답서]
"요즘 총림에서는 삿된 법이 마구 일어나 중생의 눈을 어둡게 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옛 스님이 도에 들어간 인연을 각 문파별로 분류하고는 말하기를 '이들 몇몇 칙은 도안 인연이고, 이들 몇몇 칙은 소리와 색을 벗어난 인연이고, 이들 몇몇 칙은 정식을 벗어난 인연이다.'하고 하면서 빠짐없이 차례차례 고칙을 따라가며 따지고 헤아려서 값을 매겨 말합니다.
비록 이러한 병통을 알아차린 자가 있어도 곧장 모든 것을 옆으로 밀쳐놓고 차려져 있는 죽과 밥을 게걸스레 먹고서, 검은 산 아래의 귀신굴 속에 앉아서 묵묵히 늘 비춘다고 하고, 또 완전히 죽은 사람과 같다고 하고, 또 부모가 낳기 이전의 일이라 하고, 또 공겁이전의 일이라 하고, 또 위음나반의 소식이라고 합니다.
앉고 또 앉아서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혔는데도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고, 공부가 차츰차츰 순수하게 익어 간다고 하고, 다시 수많은 쓸데없는 말들과 수다스러운 말들을 하나하나 도리를 지어 값을 따져서 한 번 전해주고는 그것을 종지라고 부르나, 마음속은 여전히 새까맣게 어둡습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19권 2.동봉거사에게 보임]
" 편지에 말씀하시길, '초보자가 잠시 고요히 앉으니 공부가 저절로 좋아진다.'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감히 고요하다는 견해를 망령되이 짓지 않는다.'라고 하시니, 이는 부처님의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사람도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처럼 참으로 스스로 어려운 장애를 만드는 일일 뿐입니다.
만약 생사심이 부서지지 않으면, 일상 24시간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어둡고 어리석어서 마치 혼이 흩어지지 않은 시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다시 무슨 부질없는 공부를 하여 고요함을 이해하고 시끄러움을 이햏겠습니까?......우리 선종에서는 초보자냐 오래 공부한 사람이냐를 따지지 않으며, 또한 고참이나 선배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만약 참된 고요함을 바란다면 반드시 생사심이 부서져야 합니다."[대혜보각선사서 제26권 14. 부추밀 계신에 대한 답서]
"보지 못하였습니까? 운문대사가 말했습니다. '빛이 뚫고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병이 있다. 모든 곳에서 밝지 못하여 앞에 사물이 있는 것이 그 하나요, 모든 법이 공임을 뚫고 벗어나고도 은은한 듯하고 마치 한 개 사물이 있는 듯하다면 역시 빛이 뚫고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또 법신에도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법신에 도달하여도 법에 집착하여 잊지 못하고 자기라는 견해가 여전히 있어서 법신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 하나요, 비록 법신을 뚫고 벗어나더라도 놓아주면 옳지 않으니 무슨 냄새가 있는가 하고 자세히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 이것도 병이다.'[오등회원 제15권 '소주운문산광봉원문언선사'에 상당법어]
바로 이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밥을 배불리 먹을 때에 다시 남에게 자기가 배가 부른지 아닌지를 물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대혜보각선사서 제29권 50. 엄교수 자경에 대한 답서]
설사 깨달음의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을 얻었다거나 해탈을 얻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하여 얻은 무엇이 있는 것 같다면, 여전히 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자기가 있고 법이 있다면, 아직 분별 속에 있다. 설사 자기가 사라진 것 같고 법이 사라진 것 같아도 여전히 사라진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분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육체와 마음과 망상의 흔적이 허망한 것처럼, 공과 해탈과 깨달음의 흔적도 역시 허망하다. 뚜렷하든 희미하든 명백하든 그윽하든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분별이요, 망상일 뿐인 것이다.
"삿된 견해 가운데에서도 좀 나은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자기라고 이해하고, 드러난 그대로의 경계를 심지법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대혜보각선사선 제29권 44. 이랑중 사표에 대한 답서]
보고, 듣고 , 느끼고, 아는 것을 자기라고 이해하고, 현량 즉 분별 없이 앞에 드러나 있는 경계를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삿되다. 현량이란 분별함을 떠나서 바깥 4경계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인데, 맑은 거울이 어떤 모습이든 그대로 비치듯이 꽃은 꽃으로 보고, 노래는 노래로 듣고, 냄새는 냄새로 맡고, 매운 것은 매운 대로 맛복, 굳은 것은 굳은 대로 느껴서, 조금도 분별하고 미루어 구하는 생각이 없는 것을 현량이라 한다.
이렇게 분별 없이 드러나 있는 세계를 바로 자기 마음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역시 분별과 이해 속의 일이고 참된 깨달음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혜의 말을 보자.
"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한다. '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다. 만약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면,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일 뿐, 법을 찾는 것이 아니다.'[유마힐소설경, 불사의품 제6에 나오는 구절]
강서의 마조는 처음에는 좌선을 좋아하였습니다. 뒤에 남악회양 스님은 그가 좌선하는 곳에세 벽돌을 갈았습니다. 마조가 선정에서 빠져나와 물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시렵니까?"
회양이 답했습니다.
"거울을 만들려 하네."
마조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는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곳, 비로소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여 경의를 표하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회양은 마조에게 때가 온 것을 알고서 비로소 그에게 말했습니다.
"비유하면 우마차가 있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을 배우는가?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은 아니다.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 취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 그대가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만약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도리에 통달하지 못한다."
마조는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닫고는, 이윽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무상삼매에 합치하겠습니까?"
회양이 말했스비다.
"그대가 마음의 법문을 뱅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를 말해 주는 것은 비유하면 저 하늘이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대는 인연을 만난 까닭에 그 도를 볼 것이다."
마조가 다시 물었습니다.
"도는 색깔이나 모습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법을 보는 마음의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다. 무상삼매도 그러한 것이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이루어지거나 부서지는 것입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써 도를 보려 한다면 잘못이다."
앞서 "방편으로 이끈다."고 말했는데, 이 일화가 바로 우리 종문 가운데서 첫 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는 이것에 의지하여 공부하기 바랍니다.
옛날 대주 스님이 처음 마조를 찾아뵈었을 때, 마조가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오는가?"
대주가 말했습니다.
"월주의 대운사에서 옵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여기와서 무슨 일을 하려 하는가?"
대주가 말했습니다.
"불법을 찾아 왔습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이리저리 내달려서 어쩌겠는가? 나의 여기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찾는가?"
대주가 이에 절을 하고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저 혜해 자신의 보물창고입니까?"
마조가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또 부족함이 없으며, 자재하게 사용하는데, 왜 밖에서 구하겠는가?"
대주는 말을 듣고 자기의 본마음은 알아차려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경전전등록 제6권 '월주대주혜해선사' 및 사가어록,마조록에 나오는 내용]
이미 이러한 믿음을 갖추고서 이 한 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모름지기 결정적인 뜻을 세우고, 경계를 대하고 인연을 만남에 순조롭거나 거스를 경우에도 물샐틈없이 지키면서 주인 노릇하며 여러 가지 삿된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빚쟁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걱정되고 두렵지만, 천 번을 생각하고 만 번을 생각해도 돌려줄 길이 없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만약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아갈 몫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반은 나아가고 반은 물러나며,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면, 집이 두 세채뿐인 시골의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내만도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이나 깨달음이 장애가 되질 않고, 오로지 어리석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자의 껍질을 쓰고서 여우의 울음을 우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법을 가려 볼 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종종 이런 무리들에게 속으니, 잘 살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잘 생각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사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게 만드는 세 번째 본보기입니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의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내지 않으면, 백겁의 세월 동안 천 번을 윤회하며 업을 따라 과보를 받으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쉴 때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세차게 심혈을 기울일 수 있다면, 단번에 깨끗이 뽑아 내 버리고 곧 중생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엣 스님이 말했습니다.
"세속에는 사람을 가로막는 마음이 없고, 부처님과 조사에게는 사람을 속이는 뜻이 없다. 다만 요즈음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이 사람을 가로막지 않는다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의 말씀이 비록 사람을 속이지는 않지만, 다만 이 도를 배우는 자가 방편을 잘못 알고서 한 마디 말과 한 구절 속에서 현을 찾고, 묘함을 찾고 잃음을 찾는 까닭에 뚫고 지나가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먼 사람이 햇빛이나 달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눈먼 자신의 허물이지 해와 달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이 도를 배움에 문자의 모습을 떠나고 분별의 모습을 떠나고 언어의 모습을 떠난 네 번째 본보기입니다.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습니다.
"없다."
다만 이 태어나도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의심을 "없다."는 글자 위에 옮겨 온다면, 뒤얽힌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끊고자 하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곳에서 맞붙어 버티다가 때가 되어 갑자기 단번에 확 깨달으면, 곧 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의 삶과 죽음을 끊고, 마음의 선하지 못함을 멈춘다."는 것이 마음의 무성한 번뇌망상을 잘라 내고, 마음의 더러움과 혼탁함을 씻어 내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이 본바탕은 본래 더러움이 없고, 더럽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분별이 생기지 않아 텅비고 밝고 스스로 비추는 것이 곧 이 조그마한 도리입니다. 이것이 종사가 배우는 자로 하여금 삿됨을 버리고 바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다섯 번째 본보기입니다.
도는 있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닿는 곳마다 모두 참되어서, 참됨을 떠나 발 디딜 곳이 없고 발 디는 곳이 곧 참입니다. 이 까닭에 방거사가 말했습니다.
"일상생활에 다른 것은 없고
오직 나 스스로 내키는 대로 어울린다.
하나하나의 일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곳곳에서 어긋남이 없다.
붉은색과 보라색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는가?
언덕과 산에는 한 점의 티끌 먼지도 없네.
신통과 묘용이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로다.
참으로 인연에 응하는 곳에서, 안배하지 않고, 조작하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분별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막힘없이 트여서 바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유위에 머물지도 않고, 무위에 떨어지지도 않고 세간이니 출세간이니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일상생활의 행위 속에서 본래면목에 어둡지 않는 여섯 번째 본보기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힘들지 않음을 느낄 때가 곧 이 도를 배움에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는 곳에서 무한히 힘들지 않으며, 힘들지 않은 곳에서 다시 무한한 힘을 얻습니다. 이 도리는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힘들지 않은 것과 힘을 얻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그 차가움과 따스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덕산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텅 비면서도 신령스럽고 텅 비면서도 묘하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그 근본과 말단을 말한다면,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이것이 이 도를 배우는 중요한 길인 일곱 번째 본보기입니다.
위와 같은 일곱 가지 본보기가 부처에 머무는 병과 법에 머무는 병과 중생에 머무는 병을 한꺼번에 다 말했으나 다시 여덟 번째 본보기가 있으니..일전어(: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말을 자유자재하게 사용하여 선지를 가리키는 말)를 말합니다.
"큰 깨달음을 그대가 얻지 못한다면, 잡다한 세속을 그대 자신이 떠맡을 것이다."
죽비자화
"그러므로 나는 방장실에서 늘 선객들에게 묻는다. '죽비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 말을 해도 안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생각을 해도 안 되고, 헤아려 보아도 안 되고, 소매를 떨치고 곧장 가 버려도 안 되고, 어떻게 하든지 안 된다.'
그대들이 죽비를 빼앗아 버리면, 나는 우선 그대들이 죽비를 빼앗도록 내버려둔다. 내가 주먹이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주먹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이 또 어떻게 빼앗겠느냐? 다시 그대들이 '스님 내려놓으십시오.' 하고 말한다면, 나는 우선 내려놓는다.
내가 노주(: 법당이나 불전의 노출된 둥근 기둥)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노주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은 또 어떻게 빼앗겠는가? 내가 산하대지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산하대지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고 하면, 그대들이 또 어떻게 빼앗겠는가?
그대들을 보살이라고 부르면 좋아하고 그대들을 도적놈이라고 부르면 싫어하지만, 그대들은 여전히 다만 이전의 그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말했다.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아 버려야,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죽은 뒤에 다시 소생한다면, 그대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경덕전등록 제20권 '소주영광원진선사'의 상당 법어중] 여기게 이르러야 비로소 나의 죽비이야기에 계합할 것이다.
간시궐화
한 승려가 운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운문이 말했습니다.
'똥닦는 막대기다.'
다시 그가 도리로 이해할까 봐 염려하여, 먼저 그에게 말했다.
'도가 똥오줌에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도가 지푸라기에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되도, 도가 기와 조각이나 자갈에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색에 마주쳐서 마음을 밝히고 물건에 의지하여 이치를 드러낸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곳곳이 진실이고, 티끌 하나하나가 모두 본래의 사람이라는 등으로 말해도 안 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어떻게도 할 수가 없자 있는 힘을 다 써 보았지만, 결국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내지는 못했다.
"죽비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침묵해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의논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석가 노인네와 달마대사에게 비록 코가 있다고 하더라도, 즉시 숨쉴 곳이 없다.
잘 알겠느냐? 귀함을 만나면 천해지고, 천함을 만나면 귀해진다. 만약 귀하고 천한 곳에 도달한다면, 다시 짚신을 사 신고 행각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말한다.
'마음을 가짐으로써 찾을 수도 없고, 마음을 없앰으로써 찾을 수도 없고, 언어로써 만들 수도 없고, 침묵으로써 통할 수도 없다.'
비록 이와 같지만 마치 하늘이 두루 뒤덮고 있고 땅이 두루 받치고 있듯이, 완전히 놓으면 완전히 거두어들이고, 완전히 죽으면 완전히 살아난다."
"일시에 그의 살림살이를 몽땅 빼앗아 버리고, 도리어 그에게 다시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여 그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만들자,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죽을 곳을 찾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대부로서 이 도를 배우는 자는 평소 총명하고 영리함에 지배받다가 흔히 옛사람의 말씀 속에서 도리를 만들고 말로써 분명하게 밝히려고 하니, 말라버린 뼈다귀에서는 결코 즙을 찾을 수 없음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또 만일 선지식의 꾸중을 듣는다면, 기꺼이 언설(言設)을 떠나고 문자(文字)를 떠나지만, 다시 언설 없는 곳, 검은 산 아래의 귀신굴 속에 앉아 꼼짝 않으면서 마음이 향하는 곳에 막힘이 없기를 바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1) 대혜가 제시한 화두들
"태어나도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의심을 아직 잊지 않았다면, 삶과 죽음이 뒤얽힐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두얽힌 곳에서 한 개 화두를 살펴보십시오.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없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허물이 있습니까?' '수미산'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은 때에는 어떻습니까? '내려놓아라.'
여기에서 의문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다만 여기에 참(參)하고 있을 뿐, 다시 스스로 가지와 잎을 만들지는 마십시오. 만약 저를 믿으신다면, 다만 이렇게 참할 뿐, 따로 사람에게 가르쳐 줄 불법은 없습니다."
"이 어둡고 우둔함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단지 살펴보기만[간(看)] 하십시오. 단지 여기에서 살펴보기만[간(看)] 하셔야지, 깨달아 초월할 것을 구하면 안 됩니다. 살펴보고 또 살펴보고[간래간거(看來看去)하다가 문득 크게 웃을 것입니다. 이 밖에 말할 것은 없습니다."
(김태완) 이렇게 대혜가 권한 화두를 보면, 구자무불성화뿐만 아니라, '정전백수자', '즉심시불' , '수미산', '방하착' '마삼근'등 익히 알려진 각종 화두들뿐만 아니라 '임제는 무슨 까닭에 승려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고함을 내질렀는가?'라든지, '태어날 때에는 어디서 오고 죽을 때에는 어디로 가는가?' 라든가 '어둡고 우둔함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와 같이 각자 개별적으로 궁금한 사항도 화두로 삼아 살펴보라고 권하고 있다.
(2) 화두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간화선에서 화두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에 대한 대혜의 언급을 살펴본다.
"의심이 아주 부서지지 않았다면, 다만 옛사람이 도에 들어간 이야길[화두]를 보십시오. 나날이 수많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을 화두 위에 옮겨 놓으신다면, 망상은 일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습니다.
'없다.'
다만 이 한 글자 '무(無)'가 곧 삶과 죽음의 길목을 끊는 칼입니다.
허망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다만 이 한 개 무자[無字]를 끄집어내어 말하십시오. 말하고 또 말하고 하다가 갑자기 소식이 끊어지면,
곧 집으로 들어가 편안히 앉는 곳입니다. 이 외에 따로 기이하고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화두는 사량하는 정식이 활동하지 않게 한다.
② 화두는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물리치는 무기이다.
③ 화두는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아무것도 들러붙을 수 없다.
④ 화두는 감정이나 생각을 고요하게 만든다.
⑤ 화두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⑥ 화두는 시끄럽게 뒤얽힌 마음을 사라지게 한다.
⑦ 화두는 혼침과 도거를 가라앉힌다.
⑧ 화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심을 끊어 버리는 칼이다.
⑨ 화두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총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⑩ 화두는 오래된 습기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
"다만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자신에게 일깨워 주십시오. 일깨워 주는 것이 익숙해져서, 입으로 따질 수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마음속이 안절부절못하여 마치 무쇠로 만든 말뚝을 물어뜯듯이 맛이 없을 때에 절대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이러한 때가 되면 좋은 소식입니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조주가 말하길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무(無)' 한 글자를 당신이 가진 모든 솜씨를 다하여 짜 맞추어 보고 헤아려 보십시오. 사량하고 헤아리고 짜 마출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가슴속이 답답하고 마음이 괴로워함을 느낄 때가 바로 좋은 때이니, 제8식이 거의 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음을 느낄 때에는 놓아 버리려고 하지 마시고, 단지 이 무자(無字)에서 일깨우십시오. 일깨우고 또 일깨우면, 낯선 곳이 저절로 익숙해지고 익숙한 곳은 저절로 낯설어질 것입니다."
"곧장 쓸 마음이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을 때에 공(공)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도리어 좋은 곳이니, 문득 쥐가 소의 뿔 속으로 들어가 바로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김태완) 대혜가 깨달음을 체험하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은 분지일하(噴地一下), 분지일발(噴地一發), 화지일하(화地一下), 화지일성(화地一聲), 폭지일성(爆地一聲)등이다. '분'은 '뿜다' '뿜어 내다'는 뜻이고, 화는 '놀라서 별안간 소리를 내지르다는 뜻으로 돌(咄)과 같고, 폭은 '폭발하다' '터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분지일하는 '확 뿜어 내듯이 단번에 내려놓다', 분지일발은 '확 뿜어 내듯이 단번에 쏘다', 화지일하는 '앗 소리지듯이 단번에 내려놓다', 화지일성은 ''앗 하고 고함치듯이 단번에 소리 지르다', 폭지일성은 '펑 하고 터지듯이 단번에 소리 지르다'는 정도의 뜻이 된다. 이 모두는 깨달음이 별안간 문득 단번에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쥐가 덫인 줄 알고서는 쇠뿔 속으로 들어가지 않듯이, 우리 마음이 스스로 알고서 일부러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하고 갑갑한 의단 속에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부러 억지로 한다면 조작이 되므로 깨달음을 일으키는 공덕이 없다. 쥐가 덫 속에 있는 달콤한 고깃조각의 냄새를 맡고서 자기도 모르게 덫 속으로 들어가 덫에 갇히듯이, 우리 마음도 화두를 믿고 화두를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의단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참으로 의단 속에 갇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에 대한 믿음과 화두를 가르치는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1) 간화하기 전에
" 이 일을 해내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경을 보거나 예불을 하거나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과 같은 일들은 멈추어야 한다. 마음을 쉬고 참구(參究)하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의도적으로(將心) 눌러 막지 않아야 한다."
"이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평소에 머물렀던 것과 경전ㅇ르 보는 일에 머물렀던 것과 어록을 보고 기억한 것과 종사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들을 일시에 다른 세계로 싹 쓸어버리고, 도리어 덕산은 무슨 까닭에 승려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몽둥이를 휘둘렀는지, 도 임제는 무슨 까닭에 승려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고함을 내질렀는지를 차분하고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언제나 마치 백만 관의 돈을 빚진 사람이 갚을 길이 없어서 가슴속의 번민을 회피하지 못하여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좋으니 나쁘니 하는 길이 즉시 끊어집니다."
(2) 언제 어디에서 간화하는가?
① 외면적 측면
"낮 세 때 밤 세 때, 쉼 없이 부지런히 일할 때, 차 마시고 밥 먹을 때에, 기쁠 때나 성날 때, 깨끗한 곳이나 더러운 곳, 처자식들과 함께 있는 곳, 손님을 접대하는 곳, 관청의 일을 처리하는 곳, 집안의 시집장가가는 일을 처리하는 곳, 이들이 모두 (끝내지 못한 일 하나를 자신에게)일깨워 주고 말해 주는 공부를 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② 내면적 측면
" 잡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다만 화두를 끄집어내어 말하십시오."
"세간의 잡다한 일들에 생각을 빼앗길 때마다 애써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는 곳에서 화두만 살살 놀리십시오. 그러면 무한한 힘을 덜게 될 것이며 또한 무한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어떻게간화하는가?
① 간화 관련 용어의 의미
화두를 목적어로 삼는 용어들은 간(看)· 제시(提시)·거(擧)·거각(擧覺)·여지시애(與之廝崖)·애장거(崖將去)·참(參)‥제철(提掇)·처포(처捕)·사량(思量)등이다. 이들의 사용 빈도수를 보면 [대혜보각선사어록]에 30회 이상 등장하는 간(看)과 20회 이상 등장하는 제시(제시)가 가장 빈번히 등장하고, 거가 10여 회, 거각(거각)은 제시와 더불어 6회 정도, 여지시애와 애장거와 참이 5회정도로 등장하며, 기타는 5회 이하로 등장한다.
㉮간(看): 잘 살펴보다, 자세히 살펴보다, 차분하게 살펴보다.
㉯제시(提시): '말하다'뜻인 제(제)와 '일깨우다'는 뜻인 시(시)가 합하여, '말하여 일깨우다' '말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 순간순간 끊임없이 남몰래 느긋이 화두를 거론하여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다.
㉰거(擧): 말하다. (옛 이야기를) 말해 주다. (말을)끄집어내다. (예화를 들어) 말하다. -라고 말하다. 거론(거론)하다.
㉱거각(擧覺): 제시와 더불어 사용되어 제시와 뜻이 같다. '말하다'뜻인 거와 일깨우다 뜻인 각이 합하여, '말하여 일깨우다' '말하여 주위를 환기시키다'라는 뜻. 순간순간 화두를 자신에게 말하여 자신에게 일깨워 주다.
㉲여지시애(與之廝崖): -와 서로 버티다. -와 서로 지탱하다. -화 서로 겨루어서 순순히 끌려가지 않다. 화두와 맞붙어 버틴다.
㉴애장거(崖將去):지속적으로 버티어 나아가다. 물러나지 않고 지탱하여 나아가다. 여지시애와 같음. 화두를 잊지 않고 순간순간 화두어 맞붙어 버티고 있다.
㉵참(參):(간화에) '참여하다' '동참하다'라는 뜻인데, 화두를 잘 살펴보는 것은 곧 화두의 진면목을 궁구하는 것이므로, 참구하다'로 번역함이 적당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놓지 말고 참구한다.
(4) 간화하면 어떻게 되는가?
"살펴보고 또 살펴보다가 잡을 곳도 없고 맛도 없어서 마음속이 갑갑하게 느낄 때, 힘을 내기에 딱 좋으니 절대로 다른 것을 따라가지는 마십시오."
"살펴보고 도 살펴보고 하다가 크게 웃을 것입니다."
"도리어 쓸어버릴 수 없는 곳에서 있는지 없는지, 같은지 다른지를 살펴보시면, 문득 생각과 상념이 끊어질 것이니, 바로 이런 때에는 저절로 남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가슴속이 갑갑하고 마음이 괴로워함을 느낄 때가 바로 좋은 때이니, 제팔식(第八識)이 거의 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음을 느낄 때에는 놓아 버리려고 하지 마시고, 단지 바로 이 무자(無字) 스스로를 일깨우십시오. 일깨우고 또 일깨우면 낯선 곳이 저절로 익숙해지고 익숙한 곳은 저절로 낯설어질 것입니다."
(1)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
"순간순간 화두를 자신에게 일깨워 주되, 빠른 효과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지극한 이치를 캐려 한다면 깨달음을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먹고 일부러 깨달음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마음먹고 일부러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마음이 도리어 도를 보는 눈을 가로막아 버려 급하게 하려 할수록 더욱 늦어집니다."
(2)헤아리거나 해석하지 말라
"이 한 글자는 수많은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물리치는 무기(武器)입니다. 이 무(無) 한 글자는 유(有)니 무(無)니 하고 이해해서도 안 되고, 도리(道理)로서 이해해서도 안 되고, 생각으로 사량하고 헤아려서도 안 됩니다."
(3) 입을 열어 말하는 곳에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말라
"무엇보다도 조심할 것은 말을 꺼내는 곳에서 바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태완) 결국 거기처회(擧起妻會) 혹은 개구처승당(開口處承當)의 뜻은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행위에 이미 본래마음이 구족되어 있다거나,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행위가 바로 본래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라거나,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모두 본래마음 아님이 없다거나 하는 어떤 도리(道理)로 이해하여, 입을 열기만 하면 벌써 다 알았다고 하는 것이고 말을 꺼내기만 하면 이미 원만구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기처회(擧起妻會)와 개구처승당(開口處承當)이 잘못인 이유는 우선 입을 열고 말을 꺼낸다는 하나의 차별경계에서 법을 보기 때문이고, 또 어떤 도리를 세워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경계에서 법을 보는 것도 분별하여 헤아린 것이고, 도리를 세워 이해한 것도 분별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4) 말로써 설명하거나 문자를 인용하여 증명하려 하지 말라
"문자를 찾고 과거의 사례를 끌어와 증명하거나 제멋대로 추측하고 헤아려서 주석하고 해설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렇게 주석하고 해설한 것이 분명하며 설명에 귀결점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귀신집의 살림살이일 뿐입니다."
(5) 일 없는 곳에서 빠져 있지 말라
"다만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기만 할 뿐이어야 하고, 왼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도 옳지 않습니다. ……일 없는 방 안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6) 화두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의문을 일으키지 말라
"천 가지 만 가지의 의문이 다만 하나의 의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 위에서 의문이 부서지면 천 가지 만 가지 의문이 일시에 부서집니다. 화두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우선 바로 그 화두에서 화두와 서로 맞붙어 버티고 계십시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다른 문자 위에서 의문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문을 일으키거나, 옛사람의 공안 위에서 의문을 일으키거나, 매일 경계를 상대하는 피곤함 속에서 의문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모두 삿된 마구니의 권속들입니다."
(7) 애쓰거나 힘쓰지 말라
(8) 욕심을 내어 급하게 깨달음을 찾지 말라
(9) 번개처럼 번쩍 스치는 곳에서 이해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기만 할 뿐이어야 하고, 왼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도 옳지 않습니다.…… 또 부싯돌 불꽃이 튀고 번갯불이 치는 곳에서 알아차려서도 안 됩니다."
(10)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는 곳에 빠져 있지 말라
(11)구습(舊習)이 일어나더라도 억지로 눌러 막지 말라
(12) 지나간 일을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당장 확실하게 공부해 나아갈 뿐, 지나간 일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하고 두려워하면 공부에 장애가 될 뿐입니다."
(13) 관대(管帶)와 망회(忘懷)를 피하라
(14) 텅 비고 고요한 곳에 떨어져 있지 말라
(15)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곧장 쓸 마음이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을 때에, 공(공)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도리어 좋은 곳이니, 문득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 바로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16) 말할 때는 있고 침묵할 때는 없다고 하지 말라
"말할 때에는 있다가도 말하지 않을 때에는 없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① 간화를 수행 방식으로 오해하기 쉽다
대혜는 간화선에서 간화(간화)라는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 행하라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수행의 방식을 가르친 것이다. 육조문하에서 대혜 이전까지의 선은 언제나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직지인심이었고 어떤 수행의 방식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대혜의 간화선이 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간화하는 행위라는 수행 방식이 되지는 말아야 하고, 간화하는 행위 자체가 사량분별을 끊어 버리고 곧장 불이법문으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② 관건을 오해하기 쉽다
간화선의 관건은 화두를 살펴봄으로써 사량분별을 가로막아 부수어 버리는 것인데도 이것을 모르고, 도리어 화두를 얼마나 잘 붙잡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간화선의 요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약이 건강의 원인이라면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약을 복용하여야 할 것이지만, 병이 나으면 약은 필요 없는 것이다. 화두는 붙잡고 의지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량분별을 부수는 무기일 뿐이다. 화두를 얼마나 잘 붙자고 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사량분별을 얼마나 잘 부수고 막아 주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③ 기심관대(起心管帶)하기 쉽다
일부러 마음을 내어 지니고 있는 기심관대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죽여 마음을 잊는 고심망회와 더불어 삿된 길이요, 잘못된 공부이다. 화두와 맞붙어 버티라고 하는 여지시애나 애장거라는 말도 역시 관대로 오해할 수 있는 말이다.
④ 깨달음을 기다리기 쉽다
대혜는 간화를 하면서 화두가 부서지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화두를 살펴보기만 하고 개달음을 기대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⑤ 화두를 헤아리거나 해석하기 쉽다
고금의 많은 사람들이 화두와 간화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헤아리고 해석하고 이야기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단지 화두와 공안을 헤아리고 따지고 해석하는 것을 공부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⑥ 화두를 선정(禪定)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좌선하면서 화두를 선정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간화선을 마치 오조홍인 선사가 가르친 일자관(一字觀) 같은 관법으로 오해한 것이다.
⑦ 간화선은 대혜종고가 고안한 방편이다
상권 제2장에서 보았다시피 대혜 자신은 간화선을 통하여 공부한 것도 아니고, 간화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다. 간화선은 전적으로 대혜가 공부인들, 주로 출가하지 않은 세속의 공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고안하여 만들어 가르친 방편이다. 이렇게 간화선이 대혜의 공부와 깨달ㅇ음이라는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대혜가 고안하여 만든 것이라는 점이 간화선이 가진 큰 단점이다. 헤아려서 고안한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에 바탕이 두는 쪽이 진실로 효과적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⑧ 대혜의 선은 본래 직지인심의 선이다
상권 '제3장 대혜의 가르침'에서 보았다시피, 대혜가 방장실에서 매일 백여 명의 납자들을 불러들여 지도할 때에는 공안이나 화두를 이용하여 그의 견해를 물어보면서 그 낙처를 추궁하기도 하고 개개인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여 그 문제에서 바져나오도록 유도하기도 하는 식으로 지도하였고, 오로지 홀로 화두를 살펴보는 간화선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미광선인은 "그대는 또 여기 와서 선을 말하는구나!" 라는 대혜의 질책을 듣고 문득 깨달았고, 묘도도인은 대혜가 다른 스님에게"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소리르 문 밖에서 듣고서 문득 깨달았다. 이참정은 "애초에 풀이 길고 짧은 줄 알았는데, 풀을 태우고 보니 원래 땅이 울퉁불퉁하구나."라는 대혜의 말을 듣고서 깨달았다. 이러한 인연들을 본다면 대혜도 근본적으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직접적인 지도를 행하면서도, 또한 평소 생활 속에서 행하는 하나의 공부 방편으로 간화선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무문혜개의 공부와 깨달음
무문혜개(1183-1260)는 남송대 임제종 양기파의 선승이다. 오조법연-개복도녕-월암선과-노납조등-월림사관-무문혜개로서 대혜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으로서 대혜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대혜와 마찬가지로 오조법연의 문하이다. [오등전서] 제53권 '융흥부황룡 무문혜개선사'에 행장과 설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공부와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만수로 월미을 찾아가자 월림은 혜개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살펴보게하였다. 6년이 지났으나 들어간 곳이 전혀 없자, 혜개는 뜻을 일으켜 스스로 맹서하여 말했다. '만약 잠에 빠진다면,나의 몸을 불태우겠다.' 매번 피곤해질 때에는 복도를 걸어서 돌아다녔고, 잠이 오면 머리를 기둥에 박았다. 어느 날 재(齋)를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서 깨달았다."
대혜의 간화선과 무엇이 다른가?
무문이 말하는 간화선은, 무자(無字)화두를 거(擧)하고 제시하면서 참구하면 마음의 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문득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인데, 전체 줄거리는 대혜가 말한 간화선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몇 가지 눈에 띄는 차이점을 지적한다.
1. 간화(看話) 말을 사용하지 않고 화두를 참(參)하라고 하였다.
2,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로서 의문을 매우 강조하였다. 온몸이 의단, 즉 의문의 덩어리가 되라고 하는 것은 곧 온 마음이 의문의 덩어리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혜는 의문의 대하여 그렇게 강조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대혜는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에 대한 의문 혹은 화두에 대한 의문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 크게 강조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문에 비하여 의문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아니다.
3. 무문은 "죽을 힘을 다하여 '무!'를 말하라."[거(擧)]고 하였는데, 화두를 말할 때에 죽을 힘을 다하라는 말이 [대혜어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혜의 간화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화두를 자신에게 말해 주고 일깨워 줌으로써 마음의 앞에 화두라는 장벽을 세우게 되고, 그럼으로써 마음을 깨달음이 이러아는 쇠뿔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반면에 무문의 간화선은 의문 덩어리라는 장벽을 마음 앞에 세움으로써 마음이 쇠뿔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힘이 대혜에게는 화두를 제시하고 간(看)하는 것에 있지만, 무문에게는 화두로 말미암아 일어난 의문의 덩어리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대혜의 간화선과 무문의 간화선이다.
(1)고봉원묘의 공부와 깨달음
고봉원묘(1238-1295)는 남송 말에서 원대(元代)의 임제종 양기파 선승이다. 법계보는 원오극근- 호구소륭-응암담화-밀암함걸-파암조선-무준사범-설암조흠-고봉원묘이니, 대혜보다는 많이 후배이지만 같은 원오극근의 문중이다.
처음 선을 배울 때에 단교 화상이 고봉에게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을 때에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살펴보게 시켰으나, 생각이 둘로 갈라지고 마음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여 일 년이 넘도록 허송세월하였다.
설암 화상을 찾아가니 무자(無字)를 살펴보라고 시키고는, 매일 조실로 오게 하여 "누가 너와 함께 이 송장을 끌고 왔는가?"라고 묻고는 답변을 하기도 전에 때려서 내쫓았다.
설암과 작별한 뒤 다시 단교 화상이 있는 경산으로 돌아가 승당에 들어갔다. 어느 날 밤에 꿈속에서 단교 화상이 말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말이 갑자기 기억났는데, 이로부터 의정이 문득 일어나 한 덩어리가 되어서 곧장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지도 않았고 먹고 자는 일도 잊어버렸다.
6일째 되는 날 삼탑각 위로 올라가 머리를 들어 문득 오조법연 화상의 진찬을 읽다가 마지막 두 구절인 "백년 삼만 육천 날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라는 구절을 보는데, 갑자기 설암 화상이 다그쳤던 "누가 너와 함께 이 송장을 끌고 왔는가?"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곧장 죽었다가 다시살아난 것과 같았고 백이십근이나 나가는 짐을 내려놓은 듯하였다.
(1)고봉원묘의 공부와 깨달음②
그 뒤 실중에서 설암 화상에게 여러 번 단련을 받아 공안도 밝혔고 남에게 속지도 않게 되었으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면 마음속에 흐릿한 것이 있음을 느꼈고, 또 일상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마치 남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다시 설암 화상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게 되었는데, 천녕으로 가는 도중에 설암화상이 물었다. "하루 중 떠들썩할 때에 주인공이 되느냐?" "주인공이 됩니다." 화상이 다시 물었다. "잠잘 때에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주인공이 됩니다." 화상이 다시 물었다. "잠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을 때에 주인공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이르자 고봉은 대답할 말이 없었고, 펼칠 도리가 없었다.
설암 화상이 다시 부탁하였다. "오늘이후로 너는 불교를 배우지도 말고 법을 배우지도 말고 옛날과 오늘을 따져 보지도 말아라.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되,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라. 내가 한잠 자면 주인공은 결국 어디에 자리르 잡고 편안히 있는가?"
5년이 지나 어느 날 고봉은 암자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 바로 이 일을 의심하였다. 그때 문득 함께 자던 도우(道友)가 밀어낸 목침이 땅에 떨어져 소리를 냈는데, 갑자기 의심 덩어리가 부서지면서 마치 그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하였다. 이전에 의심했던 부처님과 조사의 난해한 공안과 고금의 여러 가지 인연들을 상기해 보니, 흡사 사주에서 대성을 보는 것과 같았고, 멀리 나온 나그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원래 다만 옛날 그 사람이어서 옛날의 행동거지를 고치지 않았다. 이로부터 나라가 안정되고 천하가 태평하여서 한 순간 아무 하는 일이 없는데도 온 세계가 거꾸러졌다.
(2) 고봉원묘의 간화선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곧장 안팎이 한 조각이 되어 온종일 털끌만큼의 틈도 없게 하여 가슴에 생선뼈가 박혀서 마치 독약에 중독된 듯하고, 다시 금강권을 반드시 뚫으려 하고 율극봉을 반드시 삼키려 하여 다만 일생의 솜씨를 다하여 분개(憤慨)해 나아가면, 저절로 깨달을 곳이 있을 것이다.
곧장 본에 따라 고양이를 그려라. 그리고 또 그려서 뿔에 맺힌 나선형 무늬처럼 뱅글뱅글 도는 곳, 심식의 길이 끊어지는 곳, 사람과 법을 모두 잊는 곳에 이르게 되면, 붓끝에서 갑자기 살아 있는 고양이가 뛰어 나올 것이다. 앗! 원래 모든 대지가 선불장(選佛場)이고 모든 대지가 자기 자신이었구나.
3) 대혜의 간화선과 무엇이 다른가?
고봉이 처음에 설암에게서 받은 무자화두에 대하여는 억지로 간화를 하였으나 언제나 혼침과 산란에 떨어져서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는 저절로 의정(疑情)이 되고 의단(疑團)이 되어서 따로 간화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화두가 저절로 의문의 덩어리가 되어서 일부러 화두를 말하지 않고 살펴보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부의 열쇠임을 강조한 것이 고봉의 간화선이 대혜종고의 간화선과 다른 점이다. 의단을 강조한 점에서 고봉의 간화선은 무문혜개의 간화선과 일맥상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깨달음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인데, 이점에 관해서는 대혜종고와 고봉원묘와 무문혜개가 모두 별 차이 없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노력도 할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혀서 시체처럼 어떤 힘도 쓸 수 없을 때에 문득 폭발이 일어나듯이 중생심이 죽어 버리고 불심이 살아나는 깨달음이 발생한다고 하는것이 육조 문하 돈오선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대혜에게는 화두는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가로막아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고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죽이는 칼이다. 반면에 무문과 고봉에게 화두는 의문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다. 다만 이처럼 깨달음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몰고가는 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대혜는 화두를 가지고 마음의 길을 가로막아서 마음을 쇠뿔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고, 고봉은 화두가 일으킨 의문에 의하여 마음은 저절로 쇠뿔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점이 대혜와 고봉의 차이다
몽산의 간화선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몽산이 어떻게 공부하여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오등전서]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본다.
"처음 승천고섬형을 찾아가니 섬형은 조주무자(趙州無字)화두를 살펴보라고 시켰다. 하루는 섬형이 몽산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죽어서 어디를 가느냐?' 몽산은 어쩔 줄 몰라서 분발하여 참구하였는데, 수좌가 승당으로 들어와 향합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활짝 트이며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앞길이 막혔다가, 밟아서 뒤집으니 물결이 곧 물이로구나. 중생을 벗어난 조주의 면목이, 다만 이와 같도다.'
뒤에 퇴경허주의 권유로 환산응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환산응 선사가 물었다. '밝은 빛이 온 세계를 고요히 비춘다고 하니, 이것은 장졸수재의 말이지?' 몽산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환산응이 '악!'하고 힘차게 소리쳤다. 이에 몽산은 즉시 의문이 풀려 개운해졌다.
어떤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없다." 꿈틀거리고 움직이며 영혼을 가진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조주는 어찌하여 없다고 말했느냐? 결국 이 무자(無字)는 어느 곳으로 귀결되느냐?
오조법연 화상이 시중하였다. "석가와 미륵도 오히려 그들의 하인이다. 그는 누구냐?"
마땅히 본래부터 참구하던 공안에 의문이 있어야 한다. 큰 의문 뒤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천 가지 의문과 만 가지 의문이 모두 한 개 의문일 뿐이니, 본래 참구하던 곳에서 처리하여 해결해야 한다. 만약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큰 병이다.
모든 인연을 싹 내버리고 하루 24시간 행위하는 곳에서 오로지 화두만을 말하여[제(提)]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회광자간(廻光自看)]
좌선하는 가운데 힘을 얻기가 가장 쉬우니, 처음 앉을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체는 단정하게 하여라. 등은 굽히지 말고, 머리는 곧게 세우고, 눈거풀을 움직이지 않고, 눈은 평소처럼 뜨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해질 것이다. 고요해진 연휴에 정(定)에 들면 , 정(定)속에서 도리어 화두가 앞에 나타나도록 하고, 정을 탐내어 화두를 잊지는 않도록 하라. 화두를 잊으면, 공에 떨어져 도리어 정으로 말미암아 헤매게 될 것이니, 이러면 안 된다. 정속에서 힘을 얻기가 쉬우나, 맑게 개어서 어둡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화두가 또렷하면 어느덧 경계가 저절로 깨끗해질 것이다.
[몽산법어]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모두 질문의 형태이다. 화두가 묻는 질문의 답을 찾아서 의문을 가지고 화두를 자신에게 일깨우고 살펴보는 것이 몽산의 간화선이다.
깨달음에 가까운 상황을 몽산은 어떻게 말할까 몽산의 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저절로 앞에 나타나 이어진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화두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고 꿈속에서도 화두를 기억한다.
●힘쓰지 않아도 끊임없고 빈틈없이 화두가 이어져 한 조각이 된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곧 깨달음이 있고, 깨끗함이 지극하면 마음이 빛이 통달할 것이다.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는 세 개의 마디인 3정절(程節)이 있다. 첫째 정절은 기운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으며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은 때이고, 둘째 정절은 마치 맑은 가을 들판의 물과 같고, 오래된 묘 속의 향로와 같이 고요하면서도 맑게 깨어 있으면서[적적성성(寂寂惺惺)] 마음이 어디로도 가지 않고 다만 화두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번뇌가 사라 지려 하고 마음의 빛이 드러나려 하는 때이고, 셋째 정절은 움직일 때에나 가만히 있을 때에나 한결 같고[동정일여(動靜一如)],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맑아서[오매성성(寤寐惺惺)], 화두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 마치 물을 투과한 달빛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도 활발하게 드러나 건드려도 흩어지지 않고 쓸어버려도 잃지 않을 때인데, 이때가 깨달음에 가까운 때이다.
몽산의 선이 가진 특성
몽산의 선이 가진 특성을 몇 가지 언급하고, 여기에 대한 필자의 사견을 말해본다.
(1) 좌선하여 화두를 제시한다.
좌선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북종선이나 묵조선의 가르침과 같다. 육조 문하의 남종선에서는 좌선을 권장하지 않았고, 대혜 역시 좌선을 시끄럽게 온갖 세간의 일에 끄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이 공부로 돌로도록 하는 하나의 일시적인 방편으로만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좌선을 하면서 화두를 제시하라는 몽산의 가르침은 남종선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도 어긋나고, 대혜의 간화선과도 어긋난다.
(2) 정력(正力)에 의지하여 공부의 힘을 얻는다.
선정의 힘에 의지하여 공부한다느는 것은 [경전전등록] [오등회원] [오등전서]등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선종의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르침으로서, 몽산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 문하와 후대의 임제종에서는 선정의 힘을 빌려서 공부하라는 말이 전혀 없다.
(3) 동정(動靜)에서 몽중(夢中)에서 화두가 저절로 현전(現前)해야 공부에 진전이 있다.
이러한 몽산의 주장 역시 선종의 역사에서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주장이다. [몽산법어]이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문헌을 찾아보면, 고려 태고보우(1301~1382)의 [태고화상어록]과 명 감산덕청(1546~1623)의 [감산노인모유집]이 있다.
"움직이고 고요함에 한결같고, 말하고 침묵함에 한결같아서, 화두가 늘 앞에 나타나면, 마치 급히 흐르는 물결 위의 달빛과 같아서 건드려도 흩어지지 않고 뿌리쳐도 사라지지 않고 쓸어 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같으면, 크게 깨달을 때가 멀지 않았다."- [태고화상어록]
(4) 몽중에서 화두가 현전하고 오매에서 성성적적함이 유지되면 깨달음이 가깝다.
"안양에 왕생할 원을 내면 염불의 바른 수행을 하여라. 그러나 염불은 반드시 생사심이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먼저 밖의 인연을 끊고 다만 일념(一念)을 내어 아미타불 한 구절을 목숨으로 삼아 생각생각 잊지 않고 마음마음에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하루24시 가운데,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몸을 굽히거나 젖히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꼬 한가하고 바쁘고 하는 모든 때에 어리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아서 전혀 다른 인연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써서 오래오래 순수하게 익으면 꿈속에서도 잊지 않을 것이니,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에나 한결같으면 공부가 면밀하여 한 조각이 된다. 이때가 힘을 얻는 때이니 만약 일념이 한 마음에 이르러 흩어지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질 때에 정토의 경계가 앞에 나타날 것이다." -[감산노인몽유집]
태고보우는 원 석옥청공(1272~1352)의 법을 이었다고 하지만, 석옥청공의 어록인 [복원석옥공선사어록]에 이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태고보우의 이런 주장은 [몽산법어]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감산덕청 역시 몽산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매일여를 말하고 있는 감산덕청의 글은 정토법문의 염불수행을 가르치는 글이다. 즉 몽산의 가르침이 정토종의 염불수행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공부는 노서교관재(老鼠咬棺材), 즉 쥐가 관을 쏠듯이 하는 것이다.
대혜는 노서입우각변견도단(老鼠入牛角便見倒單)이라 하여 쥐가 쇠뿔속으로 들어가 곧장 꼼짝도 못하는 것이 곧 간화(看話)하여 도달하는 곳이고, 여기에서 문득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몽산은 대혜의 이 구절을 노서교관재라고 변형하여 쥐가 관의 널빤지를 이빨로 쏠 듯이 오로지 무자만을 제시하라고 하였다. 대혜가 노서(老鼠)로 비유한 구절과 몽산이 노서(老鼠) 로 비유한 구절의 차이가 바로 대혜의 선과 몽산의 선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공부해야 할 바로 그때에 다만 조주무자를 육조의 본래무일물과 더불어 참구하라. 화두를 제기하기 전에 먼저 몸과 마음의 안팎을 모두 놓아 버려라. 놓고 또 놓아서 놓을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이 무자에 결국 무슨 냄새가 있는지를 철저히 살펴보아라.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있자마자 곧장 한 번 자세히 보고, 자세히 볼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살펴보아라. 이와 같이 안신입명(安身立命)은 화두에 의지하여 정해지니, 깊이 찌르고 아프게 찌러서 한 순간도 옮기지 말고 마치 쥐가 관(관)을 쏠 듯이[노서교관재(老鼠咬棺材)]하면, 저절로 뚫고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이다." [감산노인몽유집]
정토종의 염불과 임제종의 간화선이 결합한 수행 형태를 염불선 혹은 염불화두법이라고 하는데, 감산덕청에 앞서 몽산덕이가 염불화두법을 가르쳤다는 자료가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의 끝에 필사되어 있는 [몽산화상염불화두법]등 두개로서 1605년에 간행된 것이다. 이 가운데 [몽산화상염불화두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무아미타불을 하루 24시간 행동하는 가운데 혀를 움직이지 말고 마음으로 어둡지 않게 염하되,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염자시수(念者是誰)] 하고 순간순간 점검하면서[시시점검(時時點檢)] 돌이켜 보고 스스로 살펴보아라[반조자간(返照自看)]. 이 몸은 헛되이 가탁(假託)한 것이니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인데, 아득히 문드러지고 부서질 때에는 염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가는가[염자귀하처(念者歸何處)]? 이렇게 공부하여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면 저절로 색신(색신)을 벗어나지 않은 때에 곧 서방정토(서방정토)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볼 것이다. 부디 거듭 정신을 가다듬고 용맹한 마음을 내어 끊임이 없게 하면{물령간단(勿令間斷)], 저절로 고향집에 도달할 때가 있을 것이니, 소홀히 하지 말아라."
몽산이 염불화두법이라고 가르친 이 내용을 보면 [몽산법어]에 나오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와 "염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가는가?"는 [몽산법어]에서 몽산이 제시한 질문 형태의 화두와 같으며, 순간순간 끊임이 없게 마음을 돌려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 역시 [몽산법어]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이로써 본다면 [몽산법어]에서 몽산이 가르친 간화선은 몽산의 염불화두법과 같은 종류의 수행법에 속한다. 이처럼 몽산의 간화선은 간화선에다 정토의 수행법을 도입한 것이며, 북종의 좌선선정의 수행법도 함께 혼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몽산법어]의 간화선은 대혜가 가르친 간화선이 아니며, 또한 좌선수행을 배척하고 불이법의 견성만을 말하는 육조 문하의 남종돈교법문과 임제종의 종지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몽산법어]를 [대혜서장]과 같이 간화선의 지침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