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역사11월15일
♧1984년 11월 15일 사상최초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서 개최
남북한 당국자간의 경제회담이 1984년 11월 15일을
시작으로 1985년까지 5차에 걸쳐 개최됐다.
1984년 10월 10일 우리 정부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인
신병현의 서한을 통해 남북한간에 경제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신뢰관계와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경제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한측에 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정무원 부총리 김환은
1984년 10월 16일자 서한을 통해 우리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로인해 1984년 11월 15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쌍방 정부당국의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하는
각 7명의 대표단이 마주앉는 첫 경제회담이 열리게 됐다
🌺오늘의역사11월15일🌺
🍂09년 원각사 발족(근대 극의 효시)
🍂10년 전 중추원 의관 장태수가 합방되자 단식 24일 만에 순국함(1841∼).
🍂18년 신한청년 당원 여운형,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과 회견.
🍂26년 정우회 선언 발표.
🍂26년 이상협 , 일간지 '중외일보' 창간.
🍂33년 중국 낙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
🍂35년 평남 기독교계 학교 교장, 도내의 중등 학교 교장회의에서 신사 참배 거부
🍂50년 중공·북괴군, 총 반격을 개시
🍂54년 38선 이북 수복지구, 군 관할서 행정부로 행정권 이양식 거행
🍂74년 유엔군사령부,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고
남방 1km까지 콘크리트 구조물을 구축했다고 발표
🍂84년 사상 처음으로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에서 개최
🍂84년 재일교포 바둑기사 조치훈, 오다케 9단을 4승 3패로 물리치고 명인위 5연패
🍂85년 북한적십자, 제10차 남북적 본회담 12월3일로 연기 하자고 제의.
16일 한적, 수락
🍂85년 호남선 복선화 공사, 이리~정주 간 완공
🍂87년 경남 함안군 구마고속도로 하행선서 승용차와 고속버스가 충돌
🍂8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 선언-예루살렘(수도) - 이스라엘 분노
🍂88년 전두환 전 대통령 처남이창석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
🍂88년 동요작가 윤극영 옹 별세
🍂89년 경제기획원, '88년 소득분배 조사결과'에서 가구당
연간소득(명목) 886만3000원으로 밝혀
🍂89년 남북고위당국자 회담을 위한 제4차 예비회담 개최(판문점),
본회담의 명칭.의제등 합의 못봐
🍂89년 제8회 아시아 육상선수권 대회 남자 높이뛰기 에서 조현욱 선수가 금메달 차지
🍂89년 정부, 경기부양 대책 발표. 대출금리 1% 인하, 연리 8% 설비금융 8000억원 공급
🍂90년 방한 중인 헝가리 곤츠 대통령은 청와대로 노대우 대통령을 예방, 정상회담.
🍂90년 제27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결승전(인도 자카르타) 남북한이 대결, 승부차기로 4대 3 남한 승리.
🍂92년 이희도 명동 상업은행 지점장 자살-수신고 위해 사금고 운용 실패
🍂92년 전북 정읍군 호남 고속도로서 승용차 등 차량 20대 연쇄 충돌
🍂93년 보사부, 여성 500명 이상 고용업체의 탁아소 시설을 의무화 하는등 영유아보호법을 개정키로
🍂96년 북한 중앙통신, 현재 동결상태에 있는 핵개발 계획을 재개하겠다고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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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제1땅굴 내부
▶1974년11월15일.. 북한 제1땅굴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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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15일 오늘
09년 원각사 발족(근대 극의 효시)
남양주 견성암 불화, 19세기 후반 서울과 경기지역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불화 3점으로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불교 문화재 가치 인정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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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5일 오늘
88년 전두환 전 대통령 처남이창석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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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5일 오늘
90년 방한 중인 헝가리 곤츠 대통령은
청와대로 노대우 대통령을 예방,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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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1월15일 단발령 공포1891년`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11월 15일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공포했다.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태자와 함께 먼저 머리를 자르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단발하도록 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이를 청천벽력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조선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1894),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그리고 1896년의 아관파천까지 비참지경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단발령 강요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했고,
또 일본을 본따 만든 제도라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반일의식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으로 촉발된 반일 분위기는 전국 각지의 의병운동으로 전개됐고,
을미사변과 함께 의병운동의 결정적 기폭제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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