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이겨도 이긴 거 같지 않다고 한 동기가 있었는데, 근거가 일본은 전후 복구가 빨라서 국력이 증가했다는 거랑 전장이 된 조선의 피해가 컸다는 거였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임란 관련 글이나 영상을 보면 조선이 일본에 역습을 가서 아주 박살을 내놨어야 했다거나 일본에 피해보상을 받은 게 맞냐는 등으로 임진왜란은 일본이 이긴 게 아니냐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분들이 있어서 도요토미가 전쟁을 일으킨 목적부터 찾아봤습니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일으킬 때 조선을 시작으로 명나라도 정복한 뒤에 인도까지 정벌하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최소한 조선은 확실하게 정복했어야 하는데, 조선을 멸망시키지도 못했고 심유경과의 강화협상 때 요구했던 조선의 영토 절반도 얻질 못하고 왜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물자와 포로를 약탈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결과였고 실제 목적은 조선과 명의 정복이었죠. 게다가 종전 이후에 도요토미 정권은 2년을 못 넘기고 무너집니다.
반면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게 우선 순위였고, 그 뒤에 역습을 할지는 선택사항이었는데 도쿠가와는 도요토미를 반면교사로 삼아 내치에 전념하기로 결정했기에 조선에 사과도 하고 포로도 반환했습니다. 조선에서도 도쿠가와를 완전히 믿진 않았지만 전후 복구도 중요했기에 받아줬고요. 명나라는 이후 후금의 발흥과 내부 문제 때문에 일본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침략 목적을 실패한 채 철수했고 정권이 교체된 시점에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가 이긴 게 맞습니다. 사이다패스적 감성을 버리고 보면 일본이 먼저 굽히고 들어왔는데 굳이 보복전을 걸 필요는 없었던 거죠.
승패 여부 외에도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 바로 망하지 않은 걸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새 왕조가 서야 했다느니, 새 사상을 골라야 했다느니 하는 건데 우선 새 왕조는 전쟁통에 전주 이씨 왕실이 몰살당하지 않은 시점에서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몰살당하거나 선조나 세자(광해군)이 둘 다 잡혔다면 그 시점에서 조선은 이미 패망했을 거니까요.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후계구도 계산이 복잡해졌고 선조의 권위도 전쟁 이전보다는 못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종전 시점에서 제2의 이성계가 될 만한 인물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200년은 된 조선인데 다른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이 당시 기준으로도 없기도 했고, 굳이 찾자면 의병장과 이순신을 박대했다는 건데, 후한의 사례를 보면 의병과 군벌은 한끗 차이에초반에 전사한 의병장이나 곽재우처럼 관직을 바로바로 버리는 경우가 아니면 진작에 정규군에 편입된 뒤였습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억까당한 건 선조의 잘못이 맞지만 그게 왕조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이순신의 성격상 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왜군이 물러갔으니 푸대접을 받긴 했겠지만, 벨리사리우스란 비슷한 사례를 생각해 보면 낙향 후 조용히 여생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고 결정적으로 이순신은 노량에서 전사했기에 그런 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상 면에서도 17세기에 왕조나 정권이 교체된 중국과 일본을 보면, 청나라와 에도 막부 모두 성리학을 관학으로 지정했습니다. 한중일 삼국에서 양명학이, 조선은 실학/청나라는 고증학/일본은 난학(네덜란드)과 국학(신토교+유교)이었으나 엄연히 관학은 성리학이었습니다. 임란 시점에 이미 동아시아에 전파된 지 1천년이 넘은 불교(일본에선 현세는 신토교/내세는 불교가 맡는다는 인식이 강함. 에도 시대에 기독교에 대응하려고 불교를 밀어줌)를 빼고 굳이 찾자면 천주교 정도인데 천주교는 조/청/일 삼국에서 모두 박해받았고 19세기에 유입된 개신교를 포함해도 기독교가 비주류가 아닌 곳은 한국밖에 없죠. 그러니 조선을 대체할 새 왕조가 섰다 해도 신왕조는 익숙한 성리학을 채택했지 다른 학문이나 종교는 고려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가 동진하던 18세기까지 갈 거 없이, 임진왜란 때 이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있었으니 새 왕조가 세워졌다면 정통성 확보 및 조선 부흥세력 제거뿐만 아니라 청의 위협도 대처해야 하는데, 임란에서 살아남은 조선이 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청에 굴복한 걸 고려하면 신왕조가 조선보다 반드시 잘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못 할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임진왜란 이후에 대한 불만 자체는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건 지나치게 현대의 관점 내지 개인이나 집단의 편견이 아닌지 언제나 의심해 봐야 합니다. 역사는 오락 내지 사이다 감성으로만은 볼 수 없고, 그 당시의 관점에서도 해석해 보면서 지금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도 중요하니까요.
첫댓글 제가 예전에 대학교수님한테 들은 소리입니다.
임란후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신 세력도 신 사상등도 없는데 세운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동의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얘기한 게 그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조선이 맘에 안 드셔서 하신 말이겠지만 바꾼다고 끝이 아니니까요.
@견환 왕조의 교체를 보면 그 세력을 뒷받침할 기반(고려는 패서지역 호족들.조선은 군부나 정도전같은 일부 지식인들)라든가 사상,가치관등이 필요한데(조선의 성리학등과 같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해당되는게 아무것도 없는데다 이후에도 생기지를 않았는데 무슨 신왕조 건국...
제가 예전에 여기다 교수님한테 말듣고 역게에 글쓴게 생각나네요.
남아있을겁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외부 충격 없이는 이미 수 세기에 걸쳐왔듯 그냥 순환론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죠. 조선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옆동네 중국도 서구와의 접촉이 아니었다면 신해혁명 대신에 그냥 또 역성혁명이나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며, 일본도 새 막부만 세워지고 끝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차라리 그나마 조선이 유지가 되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으니 피해 복구에만 전념하면서 후기에 들어 자생적으로 시장경제가 형성되어가기 시작하는 현상이라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선의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시기는 선조의 임진왜란이 아니라 인조의 병자호란 이후 입니다. 선조- 광해군 시기의 조선은 초중기의 모습을 많이 복원을 하였고 또한 전통적이 복구에 많은 힘을 쓴 시기며 노비들을 많이 면천해 백성들의 수를 늘리고 황폐화된 경제를 많이 복원을 시킨 시기입니다. 다만 광해군의 말기 실정으로 인해 민심이반과 조정은 분란하고 당시의 유교이념이 효를 정면으로 부정했기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인데 당시의 반정공신들의 권세로 인조의 왕권은 처음부터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며 주전론의 대두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있겠죠. 물론 광해군이라고 해서 조청전쟁이 없을 순 없겠죠. 다만 허무하게 청나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 가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후 조선의 소중화의 사상으로 유교적 이념을 맹목화 하지도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임란후 조선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명나라는 민란과 청의 북경의 입성을 일본은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의 한판 승부인 세기하라 전투가 일어난 시기로 삼국다 자의든 타의든 정권교체나 이념의 교체가 일어나 시기입니다. 그리고 당시 15~17세긴 소빙기헤 해당 해 잦은 흉작과 전염병 창궐로 삼국이 다 고통을 받았든 시기 입니다. 조선후기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의 모습은 호란후 현종 숙종의 두번의 대기근이 큰 목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추가 설명 감사드립니다.
인조의 외치 실패 때문에 구관이 명관이란 인식에 따라 광해군이 나았다고 보는 분들이 계시지만, 호란 자체는 인조의 인사관리 능력 부족과 별개로 청나라의 의지에 따라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라 광해군 시절부터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광해군이 말년에 말씀대로 궁전 토목공사 및 신하들 관리 실패 때문에 인심을 잃었다는 점인데(임해군과 인목대비의 경우 본인들 행실부터 문제라서 광해군도 명분은 있음. 영창대군은 존재 자체가 광해 입장에선 위협이 됨), 아시다시피 인조의 조선이 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실전에서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청의 전략에 말려들고 말았죠.
갠적으론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어도 조선이 청을 상대로 잘 싸울 수 있을지부터 확신이 서질 않네요. 광해군이 옥좌를 지키려면 인조반정이 능양군의 난으로 끝났거나, 일어나지 않도록 광해군이 관리했어야 하는데 거기서부터는 광해군이 반정 여부를 떠나 호란 이전에 죽었다 칠 경우 왕이 됐을 세자 이지의 능력부터 if라 예상이 안 되네요.
@견환 광해군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이념이 수구화 되는 것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현대 조선시대의 인식은 헌종-숙종 이후의 모습입니다. 조선후기를 가르는 사건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병자호란이고 이로 인한 이념적 보수화가 만들어낸 것이죠. 전 그것을 지적 하고 싶었지 광해군의 if 놀이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大明宮 동의합니다. 호란 패배 이후에 조선이 이념적으로 경직된 게 구한말까지 이어졌으니 말씀대로 그 부분이 중요합니다. 제가 놓친 걸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